제39강 기독교 윤리의 실제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4101 추천 수 0 2012.06.18 22:18:40

제 39강

기독교 윤리의 실제

 

안녕하세요. 6월12일입니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를 마감할 시간인데, 외국에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각각 다르겠죠. 지구가 공처럼 동그랗다는 게 참 신기합니다. 동그란데 중력이 있어서 각자가 똑바로 서 있다고 하는데요. 사실은 거꾸로 서 있다고 볼 수 있죠. 지금 우리는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그 방식대로 세계를 이해하고 생명을 경험합니다. 중력이 작용하는 지구라는 범주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경험하고 삽니다. 이 범주를 넘어서면 전혀 다른 세계일 테니까, 다른 세계에서는 이 범주가 통하지 않겠죠.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현상학도 그걸 말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들이 어떤 통로를 통해서 들어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죠. 예를 들면 빨간 안경을 쓰면 이 세계가 빨갛게 보이듯이 우리가 인식하는 방식이 그렇게 정확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이 둥근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이고 한계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근거, 하나님 나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기독교 윤리의 토대와 근거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 윤리의 근거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했는데, 이것에 대해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기독교 윤리학의 근거라고 했습니다. 주로 판넨베르크의 책 『신학과 하나님 나라』에 나온 ‘하나님 나라와 윤리학’ 대목으로 설명했는데요. 지난 강의를 들었든지 혹은 듣지 않았든지 간에 제가 적어놓은 이 두 단어에서 뭔가 감이 잡힌다면, 그런 사람들은 이미 신학의 세계에 들어왔다고 볼 수 있어요. 하나님 나라와 윤리학의 관계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기억해 보세요. 듣지 않았다면 그냥 생각해 보세요. 이게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는 윤리 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 신앙의 베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설교비평을 하면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기독교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 교회론도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하부구조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종말론적인 지평이다, 라는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한 소상하고 심층적인, 포괄적이고 함축적인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가 잘 잡히지 않아요. 뜬 구름 잡는 식으로 죽어서 하늘 어디에 가는 것쯤으로 생각하거나,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쪽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여호와 증인들의 지상낙원처럼 아주 세속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없거든요.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도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해 있으면서 다시 말해 이미 우리에게 선취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아직 기다려야 할 하나님의 전체적인 통치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표현들이 낯설죠? 그런 표현이 익숙한 것 같고 실질적인 느낌이나 생각으로 들어오고 리얼하게 잡힌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상당히 많은 신학적 훈련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자꾸 실증적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강의를 하면서 강의의 본 내용보다는 그걸 이해시키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어쩌면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너무 구체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거든요. 실증적인 것, 구체적인 것,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예를 들면 몰상식하지 않고 좀 세련된 신앙인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마음의 평화가 있고 위로를 받으며 내 삶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해요. 그러나 그런 것들은 중심이 아니라 부수적인 겁니다. 그것은 괴테나 휠더린의 시를 읽고 나니까 내 마음에 평화가 임했고 내가 위로를 받았다는 것과 비슷해요. 시를 읽고 마음이 평화로워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시를 읽는 목적은 그게 아니잖아요? 시를 읽는 이유는 시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거죠. 그리고 그 시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겁니다. 그 시를 읽고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어요. 기독교 신앙도 바로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령과의 소통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의 색깔이 아니에요. 그런데 습관적인 신앙에서는 자꾸 어떤 틀을 요구하거든요. 기독교 신앙의 아무런 형식이나 기준도 없이 무조건 자유롭다고 하는 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더 밑으로 들어가는 작업이에요. 영성이 심화되는 거죠. 어느 정도 들어가서 이 정도 되면 신앙의 틀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나님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표현이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기독교 신앙이 실증적인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관념적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요. 관념적이라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게 아닙니다. 영은 바람처럼 아주 자유롭게 우리에게 옵니다. 그건 어떤 힘이에요. 어떤 세계라고 할 수 있죠. 호리존트, 즉 지평입니다. 어떤 거룩한 두려움이죠. 모세가 호렙 산에서 신발을 벗어야 했던 그 경험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누구라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대신 어떤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실증적인 단계를 일단 벗어나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군것질을 하던 그 단계에서 벗어나 성숙하게 부모와 인간의 삶에 대해서 대화를 해야 정상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잖아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정말 중요한데 아버지와 혈연으로서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하잖아요. 혈연은 기본이구요. 그래야 성숙한 거죠.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관념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관념적이라는 것은 내가 그려낼 수 없는, 나의 범주 안에 속박시킬 수 없는 자유로운 생명의 힘입니다.

어거스틴의 기도문을 한 편 읽겠습니다. 이 기도가 참 좋아서 여러분에게도 읽어 드리려고 해요.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정말 교부 신학의 대가입니다. 어떤 사람들, 예를 들면 대개의 여성신학자들이나 예수 세미나 쪽에 있는 사람들은 어거스틴이나 바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특히 어거스틴을 싫어하죠. 『원복』(분도출판사)이라는 책을 쓴 자연신학자 매튜 폭스도 어거스틴을 싫어합니다. 어거스틴이 원죄론을 말할 뿐 아니라 여성을 비하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어거스틴에게 그런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폄하하는 자세는 건강하지 못하다고 봐요. 어떤 사람이든 역사적인 한계 속에 있기 마련이니까요. 어거스틴이라고 모든 것을 다 바르게 해석할 수 있었겠어요? 천육백 년 전의 사람인데요. 자기가 속한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장 바람직하게 해명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역사적인 책임을 아주 독보적이고 탁월하게 감당했다면, 우리는 그를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거스틴의 교리에 대해서도 찬반이 있을 수 있지만 저는 대체로 찬성하는 쪽이에요. 그가 “주님은 항상 창조하시고 양육하며 완성하십니다”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기도했습니다.(46쪽)

 

오 주님, 주님은 높고 선하며 전지전능하시며

지극히 자비로우시면서도 의로우시며

지극히 은밀히 존재하면서도 가장 가까이 계시며

지극히 아름다우시면서도 가장 강하시며

항상 계시되 어디에 의존해 있지 않으며

스스로는 변하지 않되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며

새롭게 되거나 옛것으로 돌아가지 않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교만한 자를 노쇠하게 하시니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항상 일하시되 안식하시고

항상 거두되 부족함이 없으며

항상 받들어 주고 채워주고 보호해 주십니다.

주님은 항상 창조하고 양육하며 완성하십니다.

주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시나 찾으시며

사랑하되 욕심으로 불타지 않으며

질투하나 괴로워하지 않고

뉘우치나 슬퍼하지 않으며

노하되 안정하십니다.

주님은 하시는 일은 바꾸되

뜻과 계획은 바꾸시지 않으며

무엇을 찾으실 때는

아주 잃어버리신 것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결코 궁핍하지 않음에도

무엇을 얻을 때 기뻐하시며

욕심이 없으나 이득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필요 이상 바쳐

주님을 우리에게 빚진 자로 만들려 하나

사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주님의 것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빚진 것이 하나도 없으나

마치 빚진 것처럼 우리에게 갚아주십니다.

아멘.

 

어거스틴은 영성이든 신학이든 참 뛰어났어요. 저렇게 짧은 글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최선으로 설명하고 있잖아요. 보세요. 하나님이 그려지죠? 손에 잡히는 건 아니지만, 이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보일 겁니다. 은밀하게 존재하나 가까이 계신다는 표현을 보세요. 은밀하다는 표현은 은폐를 말합니다. 우리가 모르게 있지만 항상 호흡하며 가까이 계신다는 하나님 경험인 거죠. 우리도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런 강의나 교회 생활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계기가 될 수 있겠지만,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의 글을 계속해서 읽고 때에 따라서는 그런 사람들과 접촉해야 하는 거예요. 바둑을 잘 두려면 고수하고 둬야 하잖아요. 1단 정도 되는 사람이 8급 수준의 사람과 바둑을 둬봐야 실력이 늘지 않아요. 물론 자기 혼자 도 닦듯이 하면 좀 늘지도 모르지만, 수의 차이 때문에 안 됩니다. 제가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님 나라가 딱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만큼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윤리학과 하나님 나라는 지난번에 한 번 했지만 듣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복습하는 차원에서 말할게요. 기독교 윤리학의 근거가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윤리적 행위들이 잠정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들은 다 잠정적이에요. 지금 촛불 시위가 한창입니다. 저도 6월 10일에 대구 한일극장 앞에서 촛불 시위에 참가하고 왔는데요. 저는 그것이 절대적이고 그 시위의 모든 진행들이 마음에 들어서 참여하는 게 아닙니다. 이 시간 대한민국이라는 자리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침입해 있을 텐데, 우리가 처한 시간적 이슈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참여해야 한다는 뜻으로 간 거예요. 그런데 그 쇠고기를 우리가 수입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윤리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국민의 힘으로 쇠고기 문제를 재협상하게 되고 뭘 이룬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용감한 것, 의로운 것이 모두 잠정적이라고 전제해야 해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런 것들이 다 완전하지 못한 윤리적인 행태이니까요. 윤리는 현재 우리의 행위에 대한 가치적 판단이라고 했는데, 그런 우리의 윤리가 늘 잠정적이라면 윤리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냐고 물을 겁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에서 잠정적이나마 우리의 현재 삶들이 그 희망에 상응할 수 있도록 대처하는 삶의 태도들을 기독교 윤리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까 우리의 윤리적 노력들은 어느 상태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복지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사회, 민주화가 제대로 정착되어 거의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한 사회라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는 완전한 윤리의 성취라고 말하지 않아요.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가 결코 만족할 수 없으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와야 한다는 것을 늘 전제하면서 기독교인의 행위를 성찰하며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지난번에 대충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몇 가지 윤리의 주제들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성이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성(sexuality) 문제입니다. 기독교인에게 가장 예민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은 여러분이 어느 정도는 이 문제에 있어서 방향을 잡고 있기 때문에 자세하게 다룰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신학적인 상식 수준에서 어떤 관점들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아까 제가 지구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우리는 지금 이 지구 안에서 살고 있어요. 그 안에서 세계를 경험하고 있죠. 성이라는 것도 지구에서 경험하는 현상입니다. 지구 바깥으로 나가면 그런 현상이 없어요. UFO인가요? 미확인비행물체라고 하죠. 그 UFO가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을까요? 불가능한 건 세상에 없으니까 가능할 수도 있겠죠.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기본적으로 없습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가 가능하니까요. 이런 걸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여서 비신앙적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주 실제적으로 UFO가 우리에게 등장할 수도 있겠죠. 만약에 외계인이 지구에 왔다면 이 인간 세계를 어떻게 볼까요? 참 신기하게 볼 거예요. 여러 가지 면에서요. 외계인들이 지구에 온다면 인간과 침팬지를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학자들이 이야기하더군요. 그게 우리 입장에서는 실감이 나질 않죠. 우리가 볼 때는 침팬지는 우리 인간과는 전혀 다르니까요. 그런데 외계인이 볼 때는 다르지 않다는 거예요. 물론 그게 사실인지는 외계인들이 지구에 와봐야 증명이 되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외계인들이 와서 인간의 성생활을 봤을 때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어쩌면 외계에서는 인간의 성생활이 아닌 방식으로 후손을 번식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가능성이 많죠. 그들이 볼 때는 그게 좀 이상할 겁니다. 왜 호모사피엔스라는 인간 종은 저런 방식으로 후손을 번식하는가, 저런 것에서 즐거움을 느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우리는 전혀 그런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거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거예요. 그냥 들어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세계에 던져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삶에 대해 실제로 보지를 못합니다. 물고기는 물을 의식하지 못해요. 물과 하나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어항 바깥에 있는 우리는 구분이 되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방식은 사실 실체가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깥에 있어야 그게 보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죽어야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된다는 거죠. 성 문제도 그런 것 같아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좀 신기하잖아요.

이 지구에 생명체들은 대체로 암수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물론 암수가 자기 몸 안에 동시에 들어있는 저급한 생명체도 있다고 해요. 그러나 전반적으로 암수로 나뉘어 있어요. 그런데 꼭 이래야만 하는 걸까요? 꼭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유전공학이나 복제 같은 것들이 발달하게 되면, 성 생활에 관계없이 후손을 번식하게 될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성기능은 점점 떨어질 겁니다. 성기능의 발달은 후손 번식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요? 제가 너무 진화론적으로만 보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진화론이나 창조론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제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이 우리가 사는 방식에서 절대적인 건 아니라는 거예요.

성의 문제에 있어서 저의 입장은 성 현실주의(sex realism)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의 문제는 호불호, 혹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요. 아예 성적 욕망이 없을 수도 있고요. 또는 동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류에서 벗어난 생활 방식에 대해 불온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동성애 문제는 잠시 놔두고요. 하여튼 우리는 성 현실주의에 서야 합니다. 제가 예민한 주제를 설명하려니까 자꾸 말이 꼬이는데요. 설명이 어설퍼도 이해해 주세요. 이러한 성 현실의 문제를 추상화시켜서, 혹은 이념화시켜서 재단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성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경향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성을 혐오의 대상으로 가르치지는 않아요. 혐오까지는 아니더라도 성 엄숙주의의 경향은 많은 것 같습니다. 성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않고, 어떤 틀에서 벗어나면 완전히 거부하는 태도를 엄숙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정확한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대충 알아들으세요. 성을 즐기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는 성 도구주의, 혹은 성 절대주의와는 달리, 성 엄숙주의는 성을 출산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 두 가지 모두 잘못입니다. 성이 현대 사회 속에서 도구가 되는 현상이 극에 달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죠.

제가 성서를 도구화 하지 말라는 말을 종종했는데, 그것은 바로 성서 텍스트를 상대화 하지 말라는 것과 서로 통하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성서 텍스트의 존재론적 세계를 뚫고 들어가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서 텍스트가 우리를 끌고 가야지 우리가 성서 텍스트를 이용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죠. 성도 오늘날 얼마나 극단적으로 도구화가 되었습니까? 성만이 우리의 모든 삶을 끌어가는 동력인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요? 아마도 여기에는 프로이트의 책임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은 리비도라는 성적 본능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하고, 아들은 어머니를 좋아하고 아버지를 성적인 경쟁자로 생각한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을 말하죠. 프로이트의 말은 여러분도 다 알고 있을 텐데, 과연 그런지 아닌지는 말하기가 어렵지만, 일리는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그런 실험을 많이 한다면서요. 만원 버스나 혹은 제한된 공간 안에 남자들만 혹은 여자들만 모아 놓을 때와, 남녀를 섞어 놓을 때, 그들이 느끼는 공간의 느낌이 다르다고 합니다. 같은 성끼리만 모여 있으면 너무 좁다고 느끼는데, 이성이 섞여있으면 널찍하게 느낀다고 해요. 제 경험으로도 맞는 것 같아요. 제가 테니스를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치러 가는데요. 남자 회원들도 많지만 여자 회원들도 삼분의 일 정도 돼요. 남자끼리만 칠 때도 있고 혼합복식을 칠 때도 있어요. 테니스를 칠 때는 실력이 비슷해야 재미있는데, 실력이 좀 모자라도 혼합복식을 하면 훨씬 재미있습니다. 그게 왜 그럴까요?

그러나 사람이 늘 성적인 것에만 몰두하고 사는 건 아니거든요.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의 삶을 끌어가는 힘도 많습니다. 예술도 그렇고 종교나 스포츠도 그렇죠. 우리가 어떤 것에 집중하지 못할 때 후손 번식에 대한 본능에 자극받으면서 리비도적인 경향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우리가 완전히 그런 식으로만 행동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또 그 반대로 전혀 성적인 취향이 없는 것처럼 엄숙한 포즈를 취한다고 한다면 그건 인간 삶의 현실을 놓치고 있는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덕적 엄숙주의

이번 주간에 나온 <한겨레 21>에 대전대 권 아무개 교수가 간통죄에 대해 칼럼을 썼더군요. 최근에 어떤 여자배우가 간통죄 위헌 소송을 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누군지 잘 기억은 안 나는데요. 이 교수는 간통죄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이게 여성들을 위해서도 오히려 낫다고 말이죠. 여러 가지 논란들은 여러분이 더 잘 알 테니까 더 이상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 법이 유지가 되고 있는데요. 간통죄로 아내나 남편을 고소하려면 이혼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혼까지 하면서 상대방을 간통죄로 집어넣어야 한다는 게 제가 보기엔 좀 우스운 것 같아요. 자기가 신뢰했던 남편이나 아내가 자기를 배신했으니, 그 배신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옆에 있다면 순간적으로는 때려죽이고 싶다는 생각도 들 거예요.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면 상대방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두 사람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게 낫지, 상대방과 이혼하고 감옥에 쳐 넣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건 좀 시대착오적인 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나 경우에 따라 실수를 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반복적이고 습관적이라면 같이 살 수 없겠죠. 여기에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발적으로 저지른 불륜을 알게 되었다면, 처음엔 정말 화가 나겠죠. 하지만 기다려 보세요.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성 현실주의자로 삶의 모습들을 보세요. 그러면 그것을 없다고 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노예가 되지도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되는 거죠. 내버려두라는 것은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라는 겁니다. 그 안에 사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 이해가 보충되어야 해요. 청교도적인 엄숙주의나 단순한 도덕주의는 인간 자체를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합니다. 대형교회의 대중적인 목사님들에게서 그런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옆으로 나가는 말이지만 큰 교회 이름이 나왔으니 한마디 하고 지나가죠. 요즘 한국교회가 욕을 많이 얻어먹고 있어요. 요즘만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는데요. 정말 한국교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전체적으로 심각합니다. 저는 그런 문제를 반복해서 거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제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이고, 또 아무리 한국교회가 엉망진창이라고 하더라도 한국교회는 우리의 영적 어머니이기 때문이죠. 어머니가 바람이 났다고 해도 팽개치지 않고 설득해서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자식의 심정이랄까요? 그래서 안티기독교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서 정말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런 태도는 건전한 비판이 아니라 헐뜯기 위한 거니까요. 겉으로는 타당한 비판이라고 하는데 보면 그 진심이 뭔지 알 수 있잖아요. 하여튼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가 참 많습니다. 신학교가 교단정치에 꽉 묶여있고 이사들이 신학교수들을 쥐락펴락하고요. 교수들이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합니다. 신학교에 들어오는 학생들의 정원이 너무 많아서 목사들이 인플레이션이잖아요? 그러면 정원을 줄여야 하는데, 줄이지 못해요. 구조적인 문제죠. 한국교회의 빈익빈부익부의 문제는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겁니다. 보편성과 단일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되거든요. 그것 말고도 한두 가지가 아니죠.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대형교회의 몇몇 목사님들만이라도 아주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대안을 제시해줘야 하는데,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그런 분이 하나도 없네요. 작은 교회에 있는 목사님들은 가끔 이런 문제들에 대해 말을 해요. 그러나 그런 분들은 힘이 없으니까 아무리 말을 해도 대중성을 확보할 수 없거든요.

도덕적 엄숙주의에 빠져 있는 목사님들이 청소년들에게 포르노 사이트나 그런 잡지를 왜 보냐고 야단치면, 정서적으로 예민한 아이들의 심리는 굉장히 불안하게 됩니다. 신앙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못 되지요. 실제로 해결되지도 않아요. 그런 걸 내버려두자는 뜻이 아닙니다. 청소년들이 그런 선정적인 동영상에 접하지 못하도록 어른들이 조치를 취하는 것은 필요하죠. 그러나 그렇게 해도 결국 그 젊은이들은 이런 저런 방식을 통해서 접하게 되거든요. 그걸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어요. 그런데 그걸 죄라는 식으로 말하게 되면 기독교 청소년들은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생활하게 될 거예요. 그보다는 오히려 내버려두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우리 후손들이 언제까지 남녀의 성관계를 통해서 후손을 번식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그런 것이 즐거움이 되지 않을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방식이 아닐 거예요. 성적 쾌락이라는 것이 늘 기쁜 것은 아니니까요. 한 순간이니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성적 쾌락과는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어요. 성서에 그런 말이 있죠. 부활 때는 장가도 안 가고 시집도 안 간다고요. 또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라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고도 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관념적인 세계로 설명해요. 여기까지 성 문제를 이야기했군요. 여기서 성매매도 좀 말해야 하는데, 그만 두겠습니다. 그런 것들은 여러분이 들은풍월이 많으니까요. 여기서의 답은 성 현실주의입니다. 우리가 성에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성을 잘 컨트롤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면서 살아가자고 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후손 번식하도록 준 통로로 성을 생각하자고 했습니다.

 

금욕과 쾌락

기독교 전통은 일반적으로 조금 금욕적인 면이 강하죠. 때에 따라서 금욕이 필요하기는 한데, 억지로 금욕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사실 참는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고요. 아까 성 문제도 이야기했지만, 그게 참아서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다른 방식으로 해결을 해야죠. 쾌락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독교인들은 약간 거부감을 느낍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인가 중학교 때인가 에피쿠로스학파가 쾌락주의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본능적인 쾌락만 추구하는 것은 나쁘다는 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 지향성은 인간 존재의 중심부를 향해 심층적으로 접근하는 철학입니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나를 파기하면서까지 획득해야 할 탐심이 아니라, 불교적인 의미에서의 해탈, 혹은 번뇌가 없는 정신적 평정인 아타락시아(ataraxia)에 가까워요. 우리 모두가 아타락시아를 향해서 나가고 있다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장은 제가 보기에 정당합니다.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을 때도 쾌락이 있죠. 배움도 쾌락일 거고요.

쾌락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시티 오브 엔젤스’(City of Angels)라는 영화가 생각나네요. 참 매력적인 영화예요. 여주인공은 맥라이언이었는데, 지금은 좀 늙었겠지만 아주 미모가 출중했죠. 지성미와 청순미가 결합된 멋진 배우인데요. 이 영화에서는 여의사로 나옵니다. 천사인 세스 역할을 맡은 니콜라스 케이지도 연기를 잘하죠. 가끔 깡패로도 나오는데 아무리 깡패로 나와도 깊이가 있더군요. 눈빛 연기를 잘해요. 처음에 천사 세스가 인간 메기에게 사과 맛이 어떠냐고 물어봤을 때, 메기가 달콤하고 새콤하다고 대답하죠. 그러자 세스가 그런 교과서 같은 대답이 아니라 실제로 그 맛을 아냐고 물으면서 서로 가까워지거든요. 그렇게 천사 세스에 의해서 여의사 메기가 삶의 기쁨을 발견하게 되자, 세스가 인간이 되어 둘이 함께 여행도 가고 하는데요. 마지막 장면이 이렇습니다. 세스와 함께 한적한 숲속의 별장에서 몸과 마음을 나누다가 메기가 새로운 삶을 경험해요. 그러고는 메기가 새로운 인생의 환희에 충만해서 자전거를 타고 숲속 길을 내려오다가 큰 트럭에 부딪쳐 죽게 됩니다. 초능력을 잃고 인간이 된 세스 천사는 혼자 남게 된 거죠. 그래도 세스는 인간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해요. 파도 소리, 커피 향, 사랑하는 여인의 입술 등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의 기쁨들이 있고, 숨 쉬는 것도, 어린아이들의 살 냄새도, 심지어는 퀴퀴한 거름 냄새도 황홀하기 때문이죠. 이게 다 쾌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걸 무시하면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할 수 있겠어요? 천상병의 시 ‘귀천’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

 

저는 지금도 삶을 노는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이렇게 삶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너그러울 뿐 아니라 자기의 한계도 인정하며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청빈과 소유

전통적으로 볼 때 기독교 윤리에서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청빈입니다. 심지어 자학으로 비약되기도 합니다. 무소유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거와 비슷한 문제이기 때문에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자발적인 청빈도 필요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소유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소유 지향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소유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어요.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통장이나 지갑에 있는 걸 다 나눠주고 살아야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거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살아갈 준비를 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한두 마디로 말할 것은 아닌데 시간관계 상 더 이상 길게 말할 수가 없네요.

어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청빈의 길을 가기도 하는데, 아름다운 겁니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처럼이요. 무역업자의 큰아들로 태어나 그 길을 포기하고 탁발 수도승으로 평생을 살면서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창설한 그의 삶은 정말 아름답죠. 마더 테레사도 그렇고요. 성철 스님도 돌아가셨을 때 장삼 두 벌과 바루 하나만 남겼다고 해요. 잃을 것이 없으면 행복한 거죠. 우리의 평생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도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아까울 것 없이 살아봅시다. 그렇게 하려면 결국 자기 가족과도 멀어져야겠죠. 하나하나 떼어 놓는 방식, 준비를 하든 안하든 결국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런 준비를 하는 게 어쩌면 청빈 지향적인 삶이 아닌가 해요. 어디서 어디까지라고 제 잣대로 말할 수는 없고요. 여러분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겁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궁극적 사건이 올 때 우리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부활하고 종말에 다시 이 땅에 와서 이 세계 진리와 거짓을 심판할 예수 그리스도, 그분밖에는 우리를 지킬 자가 없다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가능한 대로 살아 있는 동안 미련을 끊는 게 좋아요. 그렇다고 구체적인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에요.

한마디 또 하고 지나가야겠네요. 한국교회가 부동산에 관심이 많죠. 겉으로는 하나님 일이라고 하는데요. 과도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의 부동산 집착은 하나님 나라 앞에서 교회 건물도 다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당을 짓는 게 다 잘못이라는 건 아니에요. 어느 정도가 있는 거잖아요? 자기가 살만한 집을 마련해서 사는 것과 소유 지향적으로 너무 과도하게 소유에 집착함으로써 어떤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다릅니다. 사실은 그걸 구분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제가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것 같은데, 방향이 그렇다는 거예요.

 

유기론적 생명 윤리

결국 기독교 윤리는 생명 윤리입니다. 생명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여러분에게 생각나는 게 있어야 합니다. 뭐가 생각납니까? 하나님의 나라예요. 또 종말도 생각나야 하고요. 왜 생명을 말하는데 종말이 생각나야 합니까? 누가 한 번 대답해보세요. ‘죽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제가 생각했던 답은 아니네요. ‘완성되는 과정이니까.’ 그 정도만 해도 되겠습니다. 죽음, 완성이 다 연결되니까요. 결국 기독교 윤리는 종말론적 윤리가 되는 겁니다. 너무 멀다, 너무 거시적이다, 지금 당장 옆 사람과 싸워야 하나 마나, 돈을 어떻게 할까, 이런 게 문제인데, 거기에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들어올 수 있냐고요? 그런 질문은 또 다른 문제에요. 이것은 신학적으로 전체적인 방향을 말하는 겁니다.

종말에 근거한 생명 윤리는 유기적입니다. 하나의 개체 실존은 독립되어 있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어떻게 유기적인 관계 안으로 들어가느냐가 핵심이죠. 유기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세요. 세월이 좀 흘렀다고 합시다. 몇 십 년도 좋고, 몇 백 년도 좋아요. 몇 백 년 후에 어떤 젊은 부부가 장애인 아기를 출산했습니다. 얼마나 불행하겠어요. 그런데 그 때는 과학이 발달해서 그 이유가 뭔지 발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가 비싼 돈을 내고 자기 아이가 장애아로 태어난 이유를 추적해 나가게 되었죠. 그런데 그 결과를 보니까, 그 아이의 고조할아버지가 상당한 기간 동안 큰 공장을 하면서 유해식품을 팔았는데, 그걸 사람들이 사먹었고, 그게 몸에 축적되어서 몇 세대 내려가자 결국 자기 손자손녀에게서 장애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우리의 삶은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가 서로 얽혀있다는 거죠. 인터넷이 네트워크라면서요. 저와 미국을 쭉 연관시켜 보면 너무 멀어서 잘 모르지만 어쨌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진화론적으로 그건 분명하고요. 우리가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관계를 맺는가가 바로 내 아들 딸 손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연관이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기독교 기업가라고 한다면 지금 당장 내가 돈 벌어서 잘 먹고 잘사는 것만 생각할 게 아니라 전체 인류와 우리 후손의 차원에서 자기의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유기론적 생명 윤리라는 게 이해되나요?

오늘 강의를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종이 과연 윤리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의문스럽습니다. 인간을 제외하고 이 지구상의 어떤 동물도 생태계의 메커니즘을 끊어내면서까지 자기 종족을 늘리거나 생산하고 소비하지 않습니다. 호랑이가 토끼의 씨를 말리지도 않고, 올빼미가 쥐의 씨를 말리지도 않지요. 가물치나 메기가 강물을 오염시키지 않고, 뱀장어가 갯벌을 개간하지 않습니다. 인간만 취미생활로 다른 생명체를 죽이고 생산을 위해서 생태계의 숨을 끊어버립니다. 다람쥐, 메뚜기, 거미, 여우를 비롯해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우리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은 하나입니다. 인간만 이 땅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그 어떤 것도 배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윤리도 이런 바탕에 놓여 있습니다. 윤리는 다른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인간다움을 살려내는 일인 동시에 모든 생명체의 생명다움을 유기적으로 일궈내는 작업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은 이 일에 신앙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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