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강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4925 추천 수 0 2012.06.19 23:03:42

제42강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잘 지냈습니까? 시간이 참 빠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살아 있는지 아닌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세계 속에 우리가 들어와 있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디에서도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하는 확실성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바쁘게 살아갈수록 그런 경우가 많거든요. 요즘 제가 이런 저런 일들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더 그런 것 같아요. 삶이 떠 있지 않고 안정되어 있어야 하는데요.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그 미묘하고 예민한 계기 속으로 들어가야 하거든요. 우리가 숨을 쉬거나 물을 마시거나 걷거나 향기를 맡거나 누구와 대화를 하는 순간순간이 삶이잖아요. 그런 것들을 실질적으로 깊이 느끼면서 살아야 하는데 많은 경우에는 그걸 다 놓칩니다. 그 대신 우리가 목표로 하는 어떤 일을 이루는 것에만 몰두하게 되죠. 열심히 살아도 결국은 헛수고일 뿐인데, 그래도 우리는 자꾸 그 쪽으로만 나갑니다. 일반적인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목회 생활도 그래요.

 

생명과 밀착하기

그건 그렇고요. 오늘이 주일인데 여러분은 교회에 가서 생명의 깊이를 경험하셨나요? 교회 생활이라는 게 정신이 없잖아요. 저의 옛날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면 그렇거든요. 저도 중고등학교 때부터 열심히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평생을 교회에서만 살았다고도 볼 수 있죠. 계속 그 안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았어요. 주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뺑뺑이 돌듯이 교회 행사에 매달렸죠. 예배와 성가대 연습, 각종 회의와 기도회, 그런 것들의 반복이더라고요. 그러다 보면 기도 모임도 행사를 위한 수단으로 떨어질 수 있고, 예배 자체도 우리가 목표로 한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고 말죠. 그렇게 열심히 하고 나면 허전합니다. 남는 게 없어요. 남는 거라고 해봐야 통계 숫자죠. 몇 달이 지나니까 몇 명이 늘었다는 식입니다. 우리의 영성과 신앙은 정말 삶과 밀착된 것인데, 그런 것들은 다 놓치고 말죠. 이런 것들은 영적으로 성찰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클래식 음악과 밀착된 시간들을 많이 가지면서 노력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시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안도현 선생의 이야기를 몇 가지 전해드렸는데요. 집중적인 훈련 없이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제가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지금은 좀 그나마 나아요. 나이도 좀 들고 신앙의 훈련이 쌓여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제가 교회 일이나 다른 일을 할 때 제가 목표로 하거나 계획했던 일들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내려놔요. 그래도 어떤 순간에는 내가 일에 휩싸여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 시간들이 지나가면 정말 소비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늘 생명과 밀착해서 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죠. 생명과의 밀착! 연애할 때 남자와 여자가 상대방에게 밀착하듯이 생명과의 밀착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바로 그거예요. 이런 말을 하면 좀 낯설게 느낄지도 모르겠네요. 생명과의 밀착은 신앙보다는 예술이나 철학에 더 가까운 게 아니냐고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만큼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것도 없고, 기독교 신앙만큼 인문학적인 세계 이해가 필요한 것도 없어요. 생명과의 밀착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죠?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6개월 정도 이 강의를 들었다면, 정용섭 목사의 세계관, 신앙관, 철학관, 신학관 등이 대충 이해되었을 겁니다. 제가 나름대로의 색깔을 갖고 일관성 있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어떤 주제를 말하더라도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떤 결론에 도달할 건지를 이제 좀 알았을 거예요. 사실 6개월 정도 공부했으면 제게서는 더 들을 게 없습니다. 생명과의 밀착! 이 생명이 바로 성령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신앙 훈련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여러 각도로 보는 거 말이죠. 또 비슷한 각도라도 다시 해보고요.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서는 스케일(scale)을 계속 연습해야 하거든요. 다른 악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그리고 반음 올려서 계속 올라가고 또 반대로 내려오고 하는 일종의 테크닉인데요. 그런 스케일 연습을 계속해야 합니다. 연주자 정도의 높은 단계에 올라가도 그건 해요. 여러분은 세계적인 연주자라면 아무 때나 나와도 연주를 잘 할 거라고 생각하죠? 그건 착각입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연습을 더 해요. 이상하죠? 그런 사람들은 예민한 예술의 세계로 들어가니까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계속 연습을 하는 거예요. 물론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겠죠. 여러분도 그런 글들을 많이 읽었을 텐데요. 연주하기 직전 30분 동안에 뭘 하느냐는 질문 같은 거요. 그런데 그 시간에 옆 사람과 잡담을 하다가 갑자기 나가서 연주를 하기는 힘듭니다. 집중을 해야죠. 첼리스트들도 연주하기 마지막 전까지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을 해요. 그런 훈련들은 고수가 되어도 계속 합니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이게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도 신자들이 놓치고 있거든요. 여러분, 영성을 상투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영, 생명, 성령, 하나님, 창조, 종말, 이런 것들은 정말 전체 세계를 말하는 것들이에요. 그런데 이 영성을 완전히 싸구려 상품처럼, 어떤 도구처럼 생각을 해요. 그러다 보니 조금 신앙의 연조가 된다 싶으면 훈련을 안 하는 거죠. 연습을 하지 않습니다.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건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술이든 기독교 신앙이든 끝이 없어요. 그런 세계는 자기가 들어가는 것만큼 세밀한 변화들을 포착할 수 있어요.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대충해 놓고는 청중들이 박수를 치면 우쭐해하는데,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대개의 경우 우리 기독교 신앙이 그래요. 이걸 극복하려는 사람들, 예를 들면 토마스 머튼이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혹은 루이스 같은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합니다. 일반 평신도들도 이런 영적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긴장감에 영적인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바로 목사여야 합니다. 그게 지도자거든요. 그렇게 하려면 우선 목사 자신이 영의 미묘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이올린 연주자가 그 소리와 음악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서 남이 이해하든 못하든 자유로울 뿐 아니라 창조적으로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구도자적인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 것처럼 교회 지도자들도 그래야 해요. 그게 영적으로 살아있다고 하는 겁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겠죠? 여러분도 경험할 겁니다. 이게 없으면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져요. 신앙의 매너리즘, 이게 정말 죽는 길입니다. 이게 한국교회에 어느 정도로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지 잘 알 거예요. 옆으로 흘렀는데요.

다시 돌아가죠. 이런 살아 있는 영성, 생명의 에너지, 설렘, 어떤 놀라운 경험들, 어떤 충격, 내가 존재하고 내가 무로 사라지는 경계선,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는 경험들, 거기에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이는 경험들, 이런 게 이제 자연주의적인 영성이기도 하지만 기독교 영성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이런 게 살아 있어야 흔히 이야기하듯 기쁨, 자유, 평화가 가능합니다. 그런 상태를 샬롬이라고 해요. 에이레네 혹은 샬롬은 내가 생산해 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서 영적으로 예민한 단계에 들어가 있을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거 잘 몰라도 인생이 그냥 즐겁고 재미있다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요. 그러나 그게 정말 생명의 주관자인 성령이 우리 영과의 소통을 통해서 나오는 내면의 기쁨인지, 아니면 어떤 데 취해서 흥분하고 있는 건지 잘 살펴야 합니다. 기쁨과 흥분은 다르거든요. 흥분하면 기쁜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기쁜 것과 흥분은 다르죠.

설교시간에 청중들을 웃기려고 애를 쓰는 설교자들이 계십니다. 성품과 인격은 괜찮은데 너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시네요. 성품과 기독교 신앙을 바로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이 괜찮아도 근본을 모르면 왜곡된 길을 갈 수 밖에 없어요. 청중들을 재미있게 만드는 데는 노련한데 기독교 복음을 아는 데는 미숙한 거지요. 그런 분들에게는 복음이 희화화됩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이든 세상일이든 밋밋하니까 흥분된 메시지에 혹합니다. 그런 걸로는 참된 기쁨이 가능하지 않은데도 말이죠. 참된 기쁨이 없으면 우리는 사이비 기쁨인 흥분에 빠지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근본적으로 이런 것들을 극복하고 조금 느리더라도, 화끈하지 못하더라도 성령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희열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정도를 가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이게 안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굉장히 산만하게 운영되고 있어요. 로마가톨릭과는 반대로 말이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뭐부터 고쳐야할지 감조차 잡기 힘들어요. 일단은 기독교의 모든 신앙생활을 좀 조용히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조용하다는 표현이 정확할지 모르겠네요. 너무 설치는 것 같다는 거예요. 너무 의욕이 많아요. 세계 선교부터 교회당 짓는 일, 태신자 전도 프로그램 등등,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신앙생활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거든요. 이런 신앙생활이 한국교회 안에 거의 구조화되고 있죠. 그러니까 일반 신자들은 이게 옳은지 그른지도 모릅니다. 이게 참 비극이죠. 구조가 그렇게 흘러가니까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고요.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본인들은 집어낼 능력이 없어요. 교회의 일을 좀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복음서에서 말했잖아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여기서 말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종교적인 짐입니다. 이게 그 당시 일반 민중들을 힘들게 했어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율법이죠.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율법들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민중들은 그걸 지킬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더 힘든 거죠. 지킬 수 없는 것들을 지키라고 하니까 불안하기도 하고요. 불안해도 그게 절대적인 이념이니까 거부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런 상태로 유대교가 계속 내려오고 있었거든요. 또 여기서 말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바로 업적, 자기 의 등을 가리키는 겁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는 그런 수고와 짐이 필요한 게 아니라 다만 한 가지, 메타노이아, 즉 회심이 필요한 거예요. 회심에 대해서는 여러 번 말했으니까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지금 한국교회 교인들이 수고를 너무 많이 합니다. 이걸 다 신앙이라고 하는데 이건 신앙이 아니라 자기 성취, 자기 업적, 자기 의, 종교적 만족감 같아요.

일단 교회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좀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개의 성도들이 거의 일주일 내내 교회에 가서 살아요. 주일은 거의 아침부터 밤까지 있어야 하고요. 이게 신앙생활인가요? 주일은 말 그대로 쉼이어야 하는데, 신앙생활을 정말 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정말 쉼, 안식이거든요.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최소한 일주일에 하루 만은 외국인들과 노예들 그리고 짐승들까지도 쉬게 해야 한다는 일종의 노동 해방 선언입니다. 이게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은 많은 신자들과 목사들에게 하나의 짐으로 다가오고 있어요. 어때요? 한번 솔직하게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 보세요. 내 신앙생활이 정말 자유, 쉼, 안식, 평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렬한 설렘의 희망들로 가득한가요? 교회 일이 짐이 되고 있을 겁니다. 이건 어딘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왜 문제인지도 사람들은 모르죠. 왜냐하면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봉사하고 충성해야 한다고 세뇌 당하듯이 들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불쌍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목사들도 불쌍해요. 목사 자신도 그런 구조 속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태되어 생존할 수가 없으니까요. 중국 속담처럼 호랑이 등에 타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내려오고 싶은데 내려올 수가 없어요. 이런 한국교회의 목회 구조 속에서 어느 목사가 속도를 늦추어 목회할 수 있겠어요. 서로 경쟁하는 악순환 속에서 목사도 힘들죠. 그 속에서 신자들도 힘들고요. 여름성경학교의 형태는 어떻게 보세요? 과하지 않은 수준에서 방학 동안 학생들에게 집중적인 신앙 경험, 생명 경험, 친구들과의 인간적인 연대성 등을 교육시키는 계기로 삼는다면 여름 성경 학교도 좋은 것 같아요. 그러나 행사 위주로 흘러서 여름에 하는 몇 가지 행사에 주일학교 교육비의 대부분이 들어가는 형국이라면 좀 고려해봐야겠죠.

 

기독론적 생명이해

생명과의 밀착을 설명하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생명의 영이 성령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볼 수 없어요. 기도를 많이 하면 뜨거워진다고, 그런 걸 자꾸 성령 체험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종교에도 그런 현상은 흔합니다. 대나무 하나만 붙들고 계속 흔들어 보세요. 거기에 집중하면 엑스터시를 경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러한 무의식, 심리적 감정, 열광적인 상태와 성령을 일치시키지 말라는 거예요. 성령은 생명의 문제에요. 그러니까 성령을 경험한다는 것은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잊지 마세요. 우리는 생명의 깊이를 먹고 사는 문제로만 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성령이 활동하는 생명의 깊이라는 것이 말자체로만 설명되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 전체와 연관됩니다. 이런 것들을 통전적으로 묶어서 생각하는 능력은 신학적 훈련으로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너무 단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외골수로 나가게 되고 신앙이 성숙해지지 못하는 것 같아요.

우리의 삶은 정말 생명과 밀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구체적으로 뭐냐는 거죠. 생명과의 밀착은 성령, 생명의 깊이에서 활동하는 영과의 교제이고, 또 우리가 성령을 체험한다는 것은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는 걸 말합니다. 제 설명이 여러분들에게 관념적으로 들립니까? 혹은 어떤 깨달음이 있어요? 실제적으로 느끼고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생명을 기독론적으로 이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의 생명 이해를 넓혀가야 하죠. 이건 기독교에서 많이 이야기하는 거니까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 다음에 창조자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을 이해해야 해요. 이렇게 삼위일체론적인 차원에서 생명의 깊이를 배우고 느끼고 거기서 하나가 되는 삶들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게 없으면 우리는 하루를 살았다 하더라도 허송세월을 하는 겁니다. 제가 오늘 강의해야 할 것은 안 하고 계속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게 정말 중요해요. 어떻게 하면 내가 매순간 생명과 밀착되어 살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에요.

오늘 제가 강의를 충분하게 못할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이야기를 할 게 있어서요. 두 가지입니다. 오늘 제가 두 가지 일로 좀 놀랬습니다. 어떤 걸 먼저 말할까요? 설교집 이야기를 했으니 그거 먼저 말해야겠네요. 오늘 저녁에 어떤 목사님이 전화를 해서 새로 나온 제 설교집과 설교비평 책을 신청하더군요. 평소에 다비아에 들어와서 글을 많이 읽는데 아이디가 없어서 신청을 못했기 때문에 전화로 한다고요. 몇 년 전에도 그분과 한 번 통화한 기억이 있어요. 그분이 아주 좋은 뜻으로 말을 하면서 주일마다 제 설교를 듣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목사님은 제 설교를 들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이게 무슨 말인가, 제가 그 순간 약간 띵했습니다. 자기가 좋아서 설교도 읽고 글도 읽는다는 분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니, 약간 충격이었어요. 그 때 두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하나는 제가 쓰는 글이나 설교의 논지는 분명한데 전달 방식이 그 목사님께 익숙한 방식이 아니어서 너무 낯선 나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다른 하나는 그 목사님이 기독교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라고 해서 기독교를 다 아는 게 아니거든요. 이분은 굉장히 솔직한 분 같아요. 그분이 제 설교와 글이 나쁘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거든요. 계속 관심을 갖고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데,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거죠. 그 말을 듣고 목사라도 기독교의 근본을 잘 모를 수 있는데 일반 평신도들이야 오죽하겠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다른 충격은 오늘 샘터교회에 몇 몇 분들이 방문을 했습니다. 아주 좋은 분들이었는데요. 대화를 해보면 알 수 있으니까요. 그분들을 통해서 들은 교회 형편이 정말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교회가 조폭 같더라고요. 조폭보다는 교주 같더라고요. 목사가 자기 마음대로 하더군요. 강단에서 누가 헌금을 몇 천만 원 드렸고 어떻게 해서 우리 교회가 헌금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한다는 거예요. 이번 주 헌금 목표액이 7천만 원이면 7천만 원, 1억이면 1억을 달성했다는 이야기를 강단에서 서슴없이 한답니다. 교회 강단에서 어떻게 이런 말들이 쏟아질 수 있는지, 정말 큰 위기라고 생각했어요. 그 교회가 아주 큰 교회거든요. 어렴풋이 교회마다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직접 당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좀 충격적이었습니다.

 

근본주의

오늘 저는 한국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지난 목요일에 잠간 공부한 대목이기도 한데요. 한국교회의 특징인 근본주의가 도대체 뭐냐는 거죠. 제가 앞 시간에 쭉 이야기한 많은 문제들이나, 좀 전에 말한 그런 일들도 어떻게 보면 다 근본주의와 연관될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의 특징은 성서무오설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임스 바가 말한 특징 중의 하나인데요. 성경이 문자적으로 하나의 오류도 없다고 믿는 거예요. 그래서 근본주의적인 사람들은 신앙적인 논의를 할 때 항상 성서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다고 하면서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그게 있다는 식으로만 말하는 거죠. 여호와의 증인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요. 이 근본주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문자 그 자체를 진리처럼 말합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경우에 생기는 왜곡 현상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우리나라에는 성서를 토대로 한 사이비나 이단이 많다는 거예요. 성서가 해석되지 않고 문자적으로 인용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이용될 수 있어서 사이비들이 많이 출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교자의 카리스마(은사)가 허물어집니다. 설교가 성서에 있는 이야기를 해석 없이 그대로 전하는 것에 불과하게 되니까, 그걸 전달하는 기술만 중요해지는 거죠. 그래서 예화를 감동적인 것으로 든다거나 치장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해집니다. 설교자에게는 고유한 카리스마가 필요한데요. 카리스마라고 해서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은사를 말하는 겁니다. 카리스마의 원리가 배타적이잖아요. 서로 월권하지 않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고유한 카리스마가 필요한데, 이런 걸 다 놓치고 말았어요. 웬만큼 교회 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은 목사가 본문과 제목만 말해도 설교 내용이 뭔지 감 잡을 수 있을 정도가 된 거죠. 이런 것들이 다 성서무오설의 문자주의가 만들어낸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한국교회에 현대 신학과 역사비평에 대한 부정적인 기류가 팽배하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다 그래요. 현대 신학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신학 무용론에 빠져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 기독교 신앙이 영적이라기보다 하나의 기술이 되어 버린 거죠. 목회도 일종의 테크놀로지가 된 거예요. 일반 평신도들도 늘 그런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신앙을 그 언저리에서만 생각합니다. 성서를 많이 읽기도 하고, 교회에서 회장도 하고 장로도 하고, 신앙에 대한 노하우도 많이 알고 있기는 한데, 그런 사람들이 별로 영적이지를 못합니다. 영적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뭐죠? 대답해보세요. 인문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생명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가 생명 지향적이지 못하잖아요. 오래 교회 생활한 사람에게서 생명이 풍부해진다는 느낌을 받습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굉장히 자기중심적이에요. 교회에 오래 다닐수록 더 해요. 신앙이 우리의 생명을 파괴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종교에 양면성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을 살리는 길로도 가지만, 사람을 죽이는 길로도 갑니다. 이건 분명해요.

 

성서 원리주의

근본주의를 다른 말로 하면 뭘까요? 어떤 분이 ‘원리주의’라고 문자를 올려주셨네요. 고맙습니다. 원리는 곧 기술의 차원입니다. 제가 신학은 공부한 다음에 다 잊어 버려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을 겁니다. 신학은 원리가 아니기 때문이죠. 신학이라는 그 통로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신학적 틀을 넘어서 활동하는 하나님과 성령의 통치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영적인 태도를, 즉 영적인 감수성들을 배우는 겁니다. 음악 공부도 마찬가지잖아요.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그것을 통해 음악에 대한 태도를 배우는 거 아니겠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틀 속에 가두고 원리에 머무는 차원이 아니라, 정말 자유로운 영에게 내 삶을 온전히 맡기는 신앙의 단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 한 말도 중요한데요. 나를 맡긴다고 하는 것 말이에요. 나를 생명의 영인 성령에게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창조와 종말의 영에게 온전히 맡기려면 그분이 누구인지 그분의 통치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지 않겠어요? 억지로 하면 자꾸 힘이 들어가요. 교회 생활도 열심히 해보세요. 그 열심이 자기 확신으로 떨어집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데, 아까 이런저런 걸 말했으니까 길게 하지는 않을게요. 예민하게 살펴보세요. 수영을 잘 하려면 물에게 자기를 맡겨야 하듯이 우리를 성령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아요. 본성적으로 자기를 의지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자기가 중요한 거죠. 하나님 나라라고 해도 결국 나 중심으로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하루 빨리 자기 집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 집중은 나르시시즘(자기연민)입니다. 성서적 용어로 말한다면 자기 의(義)가 되고요. 자기 의, 자기 집중, 자기 연민, 우리는 그런데 빠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이상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보기에 고상한 사람들이 있죠? 그런 사람일수록 뚫고 들어가면 자기연민이 강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걸 완전히 내려놓게 되면 어린아이처럼, 깃털처럼 자기 존재 자체가 아주 가벼워질 수 있을 텐데요. 현실적으로는 그게 완전하게는 안 될 겁니다. 그건 포기하는 게 좋겠고요.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집중이 왜 문제일까요? 왜 이것이 죄일까요? 누가 말해보세요. 한 학기가 다 끝나가니까 질문 좀 해보겠습니다. 왜 성서는 이걸 죄라고 말하나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왜 그럴까요? 전부 훌륭한 대답들을 해줬는데요. 이런 것들이 생명을 질식시키고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집중의 방식으로 생명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성서는 더 심층으로 들어가서 보고 있어요. 이 방식으로는 결코 인간이 생명을 완성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럴수록 생명에서 멀어진다고요. 이 생명은 곧 하나님이거든요. 하나님의 나라예요. 그러니까 자기 집중을 하고 있는 한, 자기 연민 속에 빠져 있는 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들어올 수 있겠어요?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생명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이 관계를 제가 많이 설명해야 하는데, 그만할게요. 대충 알고 있을 테니까요.

여러분, 우리가 자꾸 죄를 얘기하는데요. 죄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이런 관계를 잘 이해해야만 성서가 해석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매일 뭘 잘못했다는 식으로 죄를 말한다면 착각하는 겁니다. 그건 사람을 살리는 길이 아니에요.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잘못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겁니다. 무책임하게 사는 게 합리화될 수 있나요? 이런 것들이 다 생명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거죠. 여기에 한 마디 더 보충하면 하나님을 우리가 아직 완전하게 모르듯이, 그 중간에 있듯이, 종말이 되어야 하나님이 확연하게 실체를 드러내듯이, 생명도 아직 우리가 다 모르거든요. 종말에 가서 생명이 완성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생명은 잠정적이고 유한해요. 그렇다면 우리의 지금 생명, 우리의 삶이 무의미한 걸까요? 그건 아니죠.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지금 우리에게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완성된 생명이 우리에게 올 때를 기다리며 사는 겁니다. 우리는 그 전체 역사를 통해서 생명을 완성한 하나님 나라에 우리를 완전히 맡겨야 합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우리가 생명을 완성할 도리가 없어요. 그러나 이게 잘 안 됩니다. 자기 집중과 자기 연민과 자기 의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요. 그게 죄예요.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리면 그게 원죄인 거죠. 숙명적으로 우리는 거기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죄는 실질적으로 극복되지 않습니다. 그냥 죄가 없다고 인정을 받는 거예요. 그게 칭의론이죠. 기독교 신앙이 굉장히 세밀하지 않습니까? 심층적이에요. 그렇게 못 느끼세요?

칭의론만 해도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칭의론이 독립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것들이 다 연관되거든요. 바울과 어거스틴과 루터,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이런 영성적인 신학의 위인들이 왜 칭의론을 이야기했는가 하면 많은 신학적 사유들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우리가 충분하게 이해하고 따라가야만 이걸 중심으로 해서 다른 문제들까지 설명할 수 있는 거예요. 기독교 신학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아주 현실적이고 심층적이고 궁극적입니다. 우리가 근본주의 신앙에 딱 묶여 있어서 신학적 훈련을 전혀 하지 못하고 성서를 역사적으로 전혀 비판할 줄 모르니까, 성서에 신화가 있다고 한 마디 하면 신학자들도 나서서 성서를 신화로 생각한다고 트집을 잡는 겁니다. 조금 당혹스럽죠.

 

신앙적 배타성

비록 이 근본주의자들이 비현실적이고 탈사회적인 현상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소박하게 개인적인 신앙 안에 머물러 있다면 그런 대로 괜찮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근본주의자들은 배타적이에요. 굉장히 독선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이게 한국교회 교파들이 백 수십 개로 갈라지게 된 근본 이유죠.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갈라질 수밖에 없죠. 이걸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장로교가 백 몇 개로 갈라지지 않았습니까? 특별히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쪽에서 더 많이 갈라지거든요. 다 근본주의고 보수주의 쪽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제가 완전히 매도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 안에 있는 대다수의 신자들은 건전하고 괜찮습니다. 조금만 가르치면 성서의 놀라운 세계에 눈을 뜰 수 있고, 정말 생명 지향적으로 나가면서 우리에게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 종말론적인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토대는 되어 있는데 뭔가 한 꺼풀 가려져 있어요. 성경을 바르게 지키겠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대한성서공회가 있는데도 대한성경공회를 또 조직하는 일도 일어납니다. 보수적인 교단들이 모여서 대한성서공회가 자유주의적이니까 성서를 성경으로 바꾸고(이게 그렇게도 중요한 건지) 자기들끼리 성경을 또 번역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조금 차이가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해 나가야 하는데, 자꾸만 찢어발깁니다. 성서마저도 나누고, 성서공회마저도 나누고 있는 이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할까요? 21세기에 개신교회가 비전이 있을까요? 이미 20세기말부터 한국교회가 위축되고 있는데, 가속도가 붙을 것 같습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조폭 같은 목사가 교주처럼 행세하면서 말도 안 되는 말을 막 지껄일 수 있는 풍토가 된다고 하면,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교회에 붙어 있을 수 있겠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다음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처음 말한 그 얘기를 정리해야겠군요. 생명 지향적이란 말은 곧 생명과 밀착하자는 뜻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죠? 그래야만 우리의 70, 80년 삶이 의미가 있고요. 그게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우리의 마땅한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 삶이 기쁘고 즐겁고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여러분, 그렇게 사십시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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