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강
길 위의 영성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우리의 인터넷 라이브 강의 ‘기독교가 뭐꼬’는 6개월 동안의 대장정이었습니다. 참 대단해요. 저도 기특하고요. 중간에 몇 번 어쩔 수 없이 빠진 적이 있기는 하지만, 한 번도 소홀히 하지 않고 지금까지 쭉 왔습니다. 이게 쉬운 게 아니었는데요. 어쨌든 잘 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입니다. 대충 정리하고 질문할 것 있으면 정리하고 특별한 것 없으면 빨리 끝나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원래 주일 저녁에는 질문과 대답 중심으로 진행하려고 했는데 예상 외로 질문들이 많지 않았어요. 초중반까지 조금 뜸하게 나오다가 그 뒤로는 질문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질문이 뚝 끊겼거든요. 그래서 주일 저녁에도 제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진행한 것 같아요. 이게 장단점이 다 있습니다. 수업이라는 게 말이죠. 세미나도 있고 일반적인 강의도 있고 질문 응답 방식도 있는데, 질문하고 대답하는 게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더라고요. 정확한 질문을 하면 좋은데 그러지 못할 때도 있고요. 그리고 질문이 학생들의 눈높이에 따라서 들쑥날쑥 하거든요. 그러나 질문이 좋으면 수업의 완성도가 높아진다는 점에서는 좋죠. 어쨌든 질문이 많지 않아서 제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오늘도 중간에 질문이 있으면 하세요. 마지막 시간이니까 ‘기독교가 뭐꼬?’ 라는 제목을 총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앙은 구도다
6개월 동안의 강의를 통해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많이 넓어졌나요? 아니면 질문할 것만 많아졌나요? 사람마다 다르겠죠. 강의에 귀를 잘 기울였다면 어떤 쪽으로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해 감은 잡았을 겁니다. 제가 기독교의 내용을 나름대로 전달하기는 했지만, 내용이나 정보 전달보다는 질문하는 방식으로 말했다고 보면 좋아요. 제가 몇 번 지적했다고 보는데, 이미 완성된 혹은 완료된 대답을 찾지 말고 오히려 그 대답을 향해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제 서울 오프에서도 강의하면서 말한 것 같은데요. 기독교 교리는 일종의 정보입니다. 이걸 배우면 잊어버리라고 했어요. 그 말에는 양면성이 있는데요. 정말 기독교 교리를 완전히 잊어버려야 할까요? 알기는 알아야 하죠.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고 참 인간이라는 그 교리가 담고 있는 내용들을 놓치면 되겠어요?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서의 전반적인 흐름들을 우리가 몰라서 되겠습니까? 성만찬이나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몰라서는 안 되죠. 기독교 교리를 잊어버리라는 것은 그런 걸 몰라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거기에 묶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 교리라는 것은 일종의 문이거든요. 삼위일체라는 문, 칭의론이라는 문이 있는데, 그 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거기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는 거죠. 하나님을 만난다고 말할 수 있어요.
하나님을 만난다고 표현했지만, 직접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만난다고 표현한 거예요. 어떤 언어든 그게 기독교 용어라도 절대적인 진리를 그대로 전달하지는 못합니다. 제가 말을 하다가 쭉 쭉 나가지 못하고 혼란스러워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내가 하는 말이 충분하게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자꾸 머리에 남기 때문에 말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이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광의가 아니라 협의의 개념에서는 말이 되거든요. 성서에도 하나님을 만난 것 같은 경험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실체를 만난 것은 아니죠. 여러분이 성서를 읽을 때 그것을 분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될 겁니다. 성서는 사실 언어가 아니라 오히려 시나 문학적인 언어라서 그래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사실은 다른 영적인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 안의 지도자들이나 일반 신자들에게 혼선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 훈련들을 우리가 꾸준하게 해나가야 하는데, 그런 훈련 없이 성서를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경험하는 사실 언어와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사실 언어와 상징 언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데요. 상징이라고 해서 불확실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걸 구분하지 않으면 성서는 참 이상한 책으로 보일 수밖에 없죠. 저는 지난 6개월 동안 여러분에게 정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정답에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는데요. 길 위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게 오늘 제 강의의 내용입니다. 길이라는 메타포를 느낄 수 있나요? 이게 무엇인지를 개념적으로 딱 끊어서 말할 수는 없어요. 과정일 수도 있고 힘일 수도 있고, 어떤 변화일 수도 있어요. 그 어떤 것으로도 확정해서 말할 수 없는 어떤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바로 그렇잖아요.
제가 어제 서울 오프 모임에서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2천 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2천 년 전에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쓴 바울 편지의 한 토막을 읽을 때, 일단 2천이라는 시간에 밀착해 보라고 했어요. 그게 우리에게는 숫자일 뿐, 실질적으로 와 닿지는 않거든요. 2천 년이 흘렀고 지금의 내가 있는 겁니다. 지금의 나, 독자가 읽고 있죠.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있어요. 그러다 2천 년이 또 흘러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40세기죠. 이 40세기가 오는 것은 분명합니다. 2천 년 전에 바울의 편지를 받아 보았던 그 사람들도 2천 년 뒤에 후손들이 살아가리라는 걸 어렴풋이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나 이 세계가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겠죠. 앞으로 2천 년이 또 흐를 겁니다. 이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역사의 준엄성을 놓치지 말자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은 바로 이 역사의 준엄성을 말합니다. 역사의 하나님이죠. 역사의 문제는 학문적으로도 많이 이야기가 되었고, 선생들이나 신비주의자들도 그런 이해를 많이 하는데요. 참 신비한 겁니다.
한 학기 동안 강의를 들으면서 여러분은 더 혼란스러워졌을지도 몰라요. 저는 그게 좋은 징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목사님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준비가 된 목사님들은 훨씬 더 영적으로 자유롭고 풍요롭게 성서를 해석해내고 신자들과 함께 그러한 영적인 삶을 누릴 수 있거든요. 그러나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목사는 단순히 종교 기술자가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영성은 끝이겠죠. 목사는 종교 기술자가 아니라 종교 과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자주 구별해서 쓰는 용어인데요. technician이 아니라 scientist가 되는 겁니다. 새로 길을 가는 거예요. 영적인 길을 가지 않으면 과학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서 해석의 중요성
우리가 기독교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렇게 결정적인 공부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앞으로 질문해야 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아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좋은 공부였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쪽에 있든지 오늘은 마지막 강의인데요. 전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했는가, 또 앞으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실제로 질문해보겠어요.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뭘까요?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예수는 우리의 구원이라는 말일 겁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그런 말이 가장 기초적인 우리 신앙에 대한 진술이고, 명제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예수는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말인데, 저는 이 말을 구체적으로 요한복음 14장 6절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 혹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주석하는 것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이 구절이 놓고 예수님의 말씀, 혹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세요. 요한복음 14장부터 몇 장에 걸쳐서 독특한 문학 양식이 나오거든요.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인데, ‘나는 이다’라는 뜻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문장이 예수님께서 직접 말한 걸까요? 아니면 초기 기독교인들의 고백일까요? 이 문제는 덮어 두죠.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초기 기독교의 고백일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진술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더라도 크게 잘못은 아닙니다. 이런 설명을 여러분은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건 말이 안 된다, 예수님의 말씀이면 말씀이고 아니면 아니지,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건 뭔가라고 말이죠. 그러나 그렇지가 않아요. 구원 사건이라고 하는 예수 사건에서 어떤 실증적인 사건들이 벌어지긴 했습니다. 그 사건들이 팩트(fact)로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팩트들은 사실 다 알 수가 없거든요. 그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누가 기록해 놓은 것도 아니고요. 혹 기록해 놓았다고 해도 그게 온전한 팩트가 될까요? 제가 강의하는 이런 내용들이 별도로 강의안에 남아 있다고 해서 실제로 그것이 팩트가 되겠느냐는 거죠. 물론 내가 강의를 했다고 하는 단순한 것은 팩트로 남겠지만 그 내용들이 정말 더 팩트가 될 수 있을까요? 내 생각을 더 정확하게 전달했을까요? 그렇게 보면 정말 팩트가 아니거든요. 실증적인 팩트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역사가 진행되면서 해석됩니다. 이 동영상 강의를 놓고 다시 이야기하면, 이걸 가지고 누가 다시 정용섭 목사가 마지막 수업시간에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그걸 하게 된 이유는 이런 저런 여건 때문이었다고 연구할 수 있을 거예요. 그건 제가 처한 삶의 자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해석할 수 있는 거죠. 만약 오늘 제가 이 강의를 하기 전에 기분 나쁜 말을 들었다면 이 강의가 더 혼란스러웠을 거고, 제가 누군가에게 칭찬을 들었다면 잘난 척하면서 강의를 했겠죠. 그러니까 이런 사실들이 팩트를 해석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겁니다. 그런 과정이 역사죠.
성서가 기록되고 경전으로 정해진 게 4세기 후반이니까 그때까지 계속해서 이런 해석이 진행된 겁니다. 물론 해석이야 계속된 건 아니죠. 성서가 완성된 하나의 작품으로 결정된 뒤에는 다른 것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 전까지는 상당히 많은 것들이 편집되어 빠지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했어요. 수십 년 동안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뒤에 일어난 해석이 사건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사건의 온전한 실제적 의미나 현실성이 확보될 수 있는 거예요. 다시 동영상 강의를 예로 들자면, 나중에 누군가 저를 잘 아는 사람이 해석을 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강의에서 제가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까지 넣어서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면 제 강의가 살아나는 거예요. 그게 해석이고 사건입니다. 『전태일 평전』(돌베개)을 쓰신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직접 전태일 옆에 있었던 사람보다 더 잘 썼다고 하더군요.
요한복음 14장 6절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에서 나온 진술이라고 해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대변해 주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읽어도 크게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다고 무조건 교리문답식으로만 성서를 읽게 되면 거기에 포함된 많은 역사적 해석들이 다 실종된다는 거예요. 기독교 신앙이 없어지는 겁니다. 형해화 되는 거죠.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설교를 들어보면 알잖아요. 뼈만 남아 있죠. 들을 게 없어요. 저도 비슷합니다만. 그래서 그거 자체로는 굉장히 지루하고 상투적이니까, 그 대신 사람들을 자극하는 거죠.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청중들의 정서, 심리, 의지, 욕망 등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이 도구화 되고 있어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요한복음 14장 6절에 이르게 된 그 과정을 우리가 충실히 따라갈 수 있다면, 이것이 정말 살아 있는 사건으로 우리에게 와 닿을 수 있는 거죠. 요한복음 14장 6절 자체가 그래요. 따라서 성서는 기본적으로 해석입니다.
어제 서울 오프 모임에서 제가 앞서 강의를 하고 뒤에 이길용 박사 님이 신화의 의미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습니다. 재미있었어요. 신화가 뭐냐는 거죠. 그것은 고대인들의 아주 명백한 세계관이라는 겁니다. 이길용 박사가 세계관이라는 말을 직접 썼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저는 그렇게 받아들였어요. 19세기와 20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과학이 그들의 세계인 것처럼 신화는 고대인들의 자연과학인 겁니다. 그게 바로 해석이거든요. 왜 인간이 죽어야 하는지, 왜 씨를 뿌리고 거둬들이는지, 성서적 표상을 빌리면 형제가 왜 살해를 하는지, 왜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서는 악을 극복하지 못하는지, 이런 많은 문제들에 대한 고대인들의 해석이 신화로 표출된 거죠. 이길용 박사의 말로는 그 근원을 3만 년 전부터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바벨론으로 넘어오게 되면 3천 년 정도 되나요? 꾸준하게 내려온 거죠. 신화는 세계관입니다. 세계를 해석한 거예요. 성서에도 그런 게 많이 들어있어요. 성서의 고유한 세계관입니다.
제가 설교비평을 하면서 가끔 어떤 분들의 설교에서 성서의 신화적 언어들을 사실적 언어들로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할 때가 있었거든요. 그러한 저의 지적들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제가 성서의 권위를 허물어뜨린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기독교사상> 7월호에 총신대학교의 설교학 교수인 류응렬 교수님이 제 설교비평집 3권, 『설교의 절망과 희망』에 대한 서평이라고 할까, 그런 걸 썼어요. 이분이 지난 12월에도 한국설교학회에서 발제한 논제를 실었는데, 그것도 저의 설교비평에 대한 일종의 비평이었어요. 류응렬 교수님은 저의 설교비평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좋게 평가를 했어요. 제가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가 자꾸 다른 이야기를 길게 하네요. 간단히 줄이겠습니다. 이분이 하는 말은 설교비평이 다 좋은데 어느 선에서 동의하지 못할 부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성경관이라고요. 총신이니까 어떤 말을 할지는 알 겁니다. 성서를 신화로 보는 성서관으로 인해서 한국의 기독교 신앙을 허물어뜨릴 위험성이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런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신화는 나름의 세계관이니까 성서 안에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서 그거 때문에 겁먹을 필요는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신화를 보면 미숙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제가 성서에 있는 신화, 기적 등이 그 당시에는 일상적인 경험이었다고 말한 것처럼, 정말 그렇습니다. 지금 어린아이들에게는 세계가 주술적이잖아요. 그렇게 전달됩니다. 신화의 세계 속에 살았던 고대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들에게는 그것이 진리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자연과학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고대인들의 세계관에 비해서 엄청나게 진리에 가깝다고 말한다면 그건 또 착각이죠. 뭐가 착각이냐고요? 과학은 정말 엄밀하고 정확한 학문이지만 신화는 불확실할 뿐 아니라 상상으로 꾸민 이야기일 수 있는데, 그 차이가 얼마나 크냐고 할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 이야기를 계속 할 필요는 없는데요. 지금 자연과학도 역사가 흐르게 되면 언젠가 우리가 지금 신화를 보듯이 그렇게 바라보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세계, 여러분의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을 너무 철석같이 믿지 마세요. 이게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최선이죠. 자연과학이 말하는 진화론이 맞으면 맞는 거고요. 지금 우리로서는 그게 최선입니다. 그러나 최선이기는 하되 절대적이거나 궁극적인 건 아니에요. 이게 기독교적인 용어로 종말론적 시각에서 보면 어떤 세계관입니다. 역사관이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같은 요한계시록의 묵시문학적인 세계 등을 우리가 유치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이 신화적인 세계관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내다보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이나 희망들은 정말 살아 있기 때문이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고, 하늘이 종잇장처럼 말리고, 용이 어디에서 나오고, 꼭 SF영화처럼 표현되고 있지만,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지금 자기들이 경험하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상대적인지를 꿰뚫어 본 거예요. 영적으로 볼 때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는 모르죠.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떤 건지요. 2천 년 전의 사람들도 2천 년 후에는 비행기를 타고 컴퓨터를 하고 미국과 영국과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대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도 그건 마술 같은 일이었을 거예요. 지금 저는 과학의 발전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관점들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걸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방식은 앞으로 만 년이 지나면 사라질지도 몰라요. 우리의 후손들이 지금의 우리처럼 생겼을지, 아니면 남자와 여자의 차이도 없는 어떤 종으로 변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거죠. 그럴 가능성도 높습니다. 더 이상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아기를 낳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 우리의 후손들이 번식할 수 있다고 한다면, 굳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날카롭게 대비될 필요가 없거든요. 그럼 점점 줄어들겠죠. 좀 이상한 말처럼 들려요? 어쨌든 그 먼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본다면, 우리가 지금 5천 년 전에 사람들을 생각하듯이 그렇게 판단할 겁니다.
재미있습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만 놓고도 몇 시간의 강의가 가능하겠죠. 이것을 해석하기 위한 전 준비만 얘기해도 얼마나 할 말이 많겠어요. 이 본문에 직접 들어가면 할 말이 더 많겠죠. 여기에 신학생들이 있다면 꼭 명심하세요. 해석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요. 텍스트는 죽어 있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사건이고, 거기에는 다층적으로 끝없이 뭔가가 담겨 있기 때문에 들어가는 만큼 보입니다. 한 층 더 들어가면 더 보이고 더 들어가면 더 보이고요. 이런 능력을 갖게 되면 설교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준비가 되지 않으면, 겉으로 드러난 날 것을 그냥 신자들에게 억지로 먹이는 거죠. 소화가 안 되는 데도 억지로 먹여요. 해석을 하지 않으니까 소화가 안 될 수밖에 없잖아요. 신자들이 앉아 있기는 하지만, 머리로는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들을 거예요. 자기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자책을 하겠죠. 이런 신앙이 반복되면 영성이 풍요로워질 수 없어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죽는 거예요.
길, 진리, 생명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는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길이라고 합니다. 길은 헬라어로 ‘호도스’(ὁδὸς)이고, 루터역에 나오는 독일어로 ‘벡’(Weg)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진리입니다. 헬라어로 ‘알레테이아’라고 하고, 독일어로는 ‘진실한, 참된’이라는 뜻의 ‘바아’(Wahr)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어미 ‘하이트’(heit)를 붙여서 ‘바아하이트’(Wahrheit)입니다. 세 번째는 생명인데요. 헬라어로 ‘조에’, 독일어로는 레벤(Leben)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생각했어요.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다룬다면 각각 한 시간씩 하더라도 모자랄 겁니다. 이건 자기가 할 능력만 있다면 끝없이 할 수 있는 주제예요. 일종의 화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어떤 완료된 대답이 아니라 대답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 했는데요. 그 맥락 속으로 여러분이 빨리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참고로 한마디 한다면 이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잘 믿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지 마세요. 그것은 설명을 충실하게 듣지 못했거나, 혹은 이해도 안 되는 말을 억지로 믿으라고 강요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완료된 대답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그쪽으로 향해 가는 중간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안한 겁니다. 불안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아직 종착역에 도착하지 못하고 도상에 존재하고 있는 거니까요. 하나님과도 직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신이 지나치면 광신입니다. 광신에 떨어져 있으면서 믿음이 좋다고 말한다면 부끄러운 일이죠. 기독교 신앙은 불안하지만 그 불안을 안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말은 회의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길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더 해야 할까요? 작은 제목만 말해도 여러분이 알 수 있을 텐데요. 예수님은 어디로 향하는 길일까요?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겠죠. 내가 있고 여기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이 있어요. 이 길 자체가 예수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간다는 거죠. 도표로 그리자면 그래요. 그러나 이런 도표는 정확한 게 아닙니다. 이 길 자체가 하나님인 거예요. 예수는 삼위일체 차원에서 곧 하나님이거든요.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이른다는 것은 이런 말이죠. 궁극적인 진리, 온전한 실체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현재의 우리를 전제하고 그 과정에 필요한 것을 말하기 위해 예수님을 통해 이른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길 자체가 예수님이자 하나님이고, 그 자체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지금 길을 가고 있는데요. 『천로 역정』에 보면 기독교인이 장망성을 떠나서 우여곡절 끝에 천성문에 이르잖아요. 여러분, 이것을 정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이 길 자체가 하나님이거든요. 이 말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닌데요. 제가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 하여튼 그런 정도로 이해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을 일종의 길로 표현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통과한 뒤에 어디에 가서 영원무궁토록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는 없어요. 지금 우리가 가는 과정 자체가, 길 자체가 하나님인 거죠. 그렇다면 죽은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게 아니냐, 기독교 신앙에 내세에 대한 것은 없냐구요? 미안합니다. 그런 건 제가 잘 몰라요. 우리는 자꾸만 시간을 그렇게 나누어 생각하고 그런 방식으로 생명을 경험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이 전체가 모두 하나님의 사건이 되어 있습니다. 창조부터 종말까지의 비밀을 우리는 사실 몰라요. 새로운 생명, 우리는 이것을 종말이라고 하는데, 종말이 단절이기도 하지만 연속이기도 하거든요.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지금의 모습대로 살 것 같아요? 그건 아니겠죠. 지금 여기에는 좀 아름다운 사람, 약간 못생긴 사람, 건강한 사람, 건강하지 못한 사람, 세련된 사람, 무식한 사람 등이 구별되지만, 어떤 궁극적인 세계, 하나님의 나라라는 곳은 전혀 그렇지 않겠죠. 지금 우리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전혀 통하지 않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과정이 종말에 이루어질 궁극적 세계에 어떻게 포함되는지 사실은 잘 모릅니다.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메타포는 그것이 가리키는 ‘다른 무엇’ 아닌가요? 일종의 은유니까요. 예수가 ‘빛’이라고 할 때 빛 자체가 예수는 아니잖아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길이라고 할 때 길 자체가 예수님은 아니라는 거죠. 그러나 메타포로서의 길은 분명합니다. 빛이라고 할 때도 메타포로서는 분명한 거죠. 그것은 어떤 궁극적인 것을 실질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인데, 유비로는 힘드니까 풍유나 은유의 방식으로 하는 거예요.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요. 우리가 어떤 곳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좀 버리고 과정 자체 그 전체가 하나님의 통치고 하나님이고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하면 좋겠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너무 허무하다, 나중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예수님도 만나고 죽었던 가족들도 만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때를 기다리면서 이 어려운 시련을 견뎌내는 건데, 무슨 말이냐고 할 거예요. 그렇게 믿어도 됩니다. 그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요. 그렇게 어디에서 끝나서 어디로 쏘옥 들어가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다스린다고 보는 게 옳다는 거죠.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다 끝난 게 아닙니다. 사실 이걸 딱 끊어서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요. 이렇게 저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하나님의 구원 통치
다시 본줄기로 돌아와서, 두 번째는 진리입니다. 과정 속에서 우리가 진리를 경험할 수 있어요. 하이데거가 이 문제를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진리는 탈(脫)은폐라고요. 은폐된 게 드러나는 거예요. 이 말은 곧 여전히 은폐가 남아 있다는 뜻이죠. 완전하게 모든 은폐가 드러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종말에나 가능해요. 이건 예수님의 말씀과 직접 연관되는 게 아닌데, 제가 왜 하이데거 이야기를 했을까요? 참고적으로 드린 말씀이에요. 보통 우리는 예수님이 진리라고 할 때 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제가 이런 얘기를 한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옳은 이야기예요. 문제는 진리라고 할 때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거죠. 예수님이 진리라고 할 때도 단순하게 하나님의 아들인데 성육신했다는 등등의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적 용어로 딱딱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에게서 탈 은폐되는 것들이 있을 때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탈 은폐되지 않으면 도그마가 돼요. 도그마! 이것은 변할 수 없는 명령으로 딱 고착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진리라고 하지 않아요. 말 그대로 도그마가 되는 거죠.
세 번째는 생명입니다. 이것이 길과 진리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생각해봐야겠죠. 결국은 길과 진리는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아까 제가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 혹은 구원이라고 하면서, 이 명제가 핵심이라고 말했는데요. 이 말은 곧 예수가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구원은 생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생명만 일단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지금 살고 있기는 하죠. 그런데 이것이 참된 생명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잘 모릅니다. 지금은 우리가 살다가 죽어요. 이게 무상한 겁니다. 늘 그대로 유지되는 게 아니니까요. 무상하고 잠정적이죠.
저도 어느 사이에 나이가 많이 들었어요. 우리 다비아 홈페이지가 그대로 있다면, 제가 한 여든이 되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 있을 때 옛날에 이런 강의를 했다고 회상하면서 무슨 느낌이 들까요? ‘그때 오십대 중반이었지만 그래도 젊었지, 재미있었지.’라고 회상할 겁니다. 세월은 너무 빠르거든요. 아주 순식간에 와요.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걸 참된 생명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어요. 그러나 아까 제가 길이라고 할 때 과정이 중요하다고 했는데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삶이 무상하지만, 그래도 이것이 무상하지 않는 생명에 참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지금 과정 중에 있으니까요. 길을 가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짧은 순간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먼 훗날에 알게 되겠죠. 그러나 사실 먼 훗날이라는 말도 정확한 용어는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옛날 지금 나중과 같은 시간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시간은 여기서의 시간이죠.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고 시간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고 하니까요. 영원이라면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거죠.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면 오늘 우리가 살았던 삶, 지지고 볶고 했던 삶을 과거의 경험으로 우리가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게 아니겠죠. 그 세계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개념이 통용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지금 우리는 이 지구에서, 중력이 일정하게 작용하고 있는 모양으로 생명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만이 절대적인 생명이 아니니까 나중에 영원한 생명에서 과거가 똑바로 기억나지 않을까, 그러면 얼마나 허무할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기들이 바깥으로 나왔을 때 전혀 다른 세상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아까 제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십시오. 그냥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근본적인 사유의 틀 자체가 바꾸는 거예요. 그것을 요한이나 묵시문학가들은 새로운 에온으로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세계로 말이죠. 이런 것들이 그렇게 불확실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이건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제대로 꿰뚫어 본 데서 나온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이었고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의 세계관이 오늘의 자연과학에 비해서 조금 부족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서 전혀 불안하게 느낄 필요 없어요. 그 당시로서는 그것이 최대한으로 정확한 세계 이해였고 종말론적인 관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에서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 우리는 잘 몰라요. 현재 이렇게 무상하게 지나가는 생명만 그림자처럼 한 자락 붙들고 살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의 이 삶이, 오늘날 지구에서의 이 삶이 심판을 받는다고 하죠. 우리가 판단을 받는다는 것은 성서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의 과정에서 궁극적 생명에 맞지 않는 것들이 다 제거된다는 뜻이에요. 가라지는 불살라버리고 알곡만 들어가니까요. 그러니 지금 우리의 삶에서 가라지 같은 것들은 가능한 적게 생산하고 알곡들을 많이 생산하며 살아야겠죠. 그게 생명 지향성입니다. 생명 지향적으로 살면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심판의 순간에 우리의 많은 생명들이 거기에 속하게 될 겁니다. 생명 지향적 삶이 아주 소수고, 가라지와 같은 것들이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판단을 받을 거고요. 그렇다면 지금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생명 지향적인 삶일까요? 이런 근본적인 문제가 우리에게 또 남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오늘 여기에서 우리가 구원에 참여하는 것일까요? 그런 것들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풍부하게 또 다층적으로 이해하고 공부하며, 그러한 생명 운동에 우리가 참여하는 태도, 혹은 그런 삶의 능력을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은 바로 생명의 영이니까요. 제가 하는 이야기들이 자꾸 돌기도 하고 반복되기도 할 겁니다. 사실은 기독교 진리가 하나니까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걸 때에 따라 조금 다르게 설명할 뿐이죠.
마지막 수업은 다른 때보다 조금 빨리 마쳐야 하는데, 시간을 많이 끌었네요. 지난 시간에 구원의 세 가지 지평을 말했고, 또 한국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추구해야 할 몇 가지 문제들도 말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생태학도 필요하고 구체적인 정의평화 운동도 필요하죠. 그런데 근본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에게 일어났던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들어가는 거죠. 이게 생명의 근거이고, 생명의 알짬이고, 생명의 엑기스입니다.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2008년 1월부터 6월까지 우리가 어떤 인연으로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각자 다르게 살다가 6개월 동안 같이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면 섭리이고, 인연이라면 인연이라고 할 수 있죠.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정국이 어수선하죠. 이럴 때일수록 중심을 꽉 잡고 이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각자 주어진 여건 안에서 선한 투쟁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기회가 되면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계시록 1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하면서 그의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고 기록돼 있는데요. 문자적으로 읽으면 일반인들이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경험을 한 것 같은데요. 요한의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네요. 순수 이성에 의존한 종교적 깨우침인 거 같지는 않고요. 실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경험이 있었던 같은데, 요한 개인에게서 그런 분별력(판단력)이 가능했다면 왜 천사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천사를 끌어들여야만 좀 더 믿을만했기 때문일까요? 실제로 자기의 외부 세계에서 온 어떤 존재가 그에게 어떤 실상을 보여준 것일까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걸 어떻게 한 두마디로 대답할 수 있겠어요.
비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셰익스피어 작품을 보면
요정이 가끔 등장합니다.
요정의 등장이 아니면
해명이 불가능한 일들이
우리의 삶에 흔하게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성서가 천사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리는 경우입니다.
천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해명될 수 없는 어떤 계시 사건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천사'라는 말은 그냥 지나가는 게 좋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하시고, 자기의 뜻을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중세 화가 아무개(?)의 그림에 천사가 많이 등장하지요?
책은 언제 만나 볼 수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