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존재와 하나님
하나님을 해명해야 할 신학자들이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는 비록 존재가 곧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존재 개념이 하나님을 해명해 나가는 그 길에 적합한 토대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이 이미 교부시대부터 주변의 철학과 진지한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신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기초는 또 다른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에 이제 20세기에 들어서서 신학의 철학적 성격은 거의 상실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서양 형이상학을 향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제시하고 있는 하이데거 철학은 기독교 신학으로 하여금 잃었던 사유의 길에 새로운 지평에서 제시해준다. 지난 몇 주간에 걸쳐서 존재 질문의 새로운 지평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검토해보았다. 이제 하인리히 오트는 이런 질문을 신학적 사유와 좀더 밀접하게 연관시키기 위해서 하이데거 철학의 세부항목을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것은 곧 사유, 언어, 세계이다. 이 세 항목은 신학이 하나님을 언급해야할 경우에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주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이데거의 이런 사유를 통해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항목은 결국 ‘존재’ 문제로 집결된다는 점에서 오늘은 다시 한 번 존재 개념을 정리하면서 그것에 근거한 하나님 사유에 대해서 검토하기로 하자.
존재개념을 이해하는 길
우리가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을 따라잡기 어려운 이유는 모든 인문학 공부가 그렇듯이 ‘개념’의 세계가 실증적으로 포착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예컨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랑’은 이미 완전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사랑은 그 사랑의 깊이를 들여다보는 사람에 의해서 우리에게 새롭게 나타날 뿐이다. 그 어느 누구도 사랑을 실증적으로 확증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규범 안에 가두어두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오히려 사랑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사람일 것이다. 하이데거 이전에도 ‘존재’에 대해서 많은 철학자들이 언급했지만 하이데거는 그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에 대해서 질문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질문을 통해서 이 존재의 새로운 깊이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존재 질문을 몇 가지 도식으로 규범화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그가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의 다른 측면을, 또는 존재의 시원적 측면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존재의 모습이 몽땅 드러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주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존재에 대한 질문이 망각된 이 현실을 직시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질문의 세계로 들어가도록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존재 망각의 흔적, 또는 존재 망각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서 하인리히 오트는 네 항목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세 항목만 검토하겠다.
“있다”라는 잠정적 개념으로부터
하이데거의 ‘존재’는 그 이전에 많은 철학자들이 이 세상의 모든 개별적인 것들과 대별되는 ‘보편’으로 규정했던 것들, 예컨대 최고 존재자, 세계의 원리, 근원적 근거, 아르케, 제일원인과는 전혀 다르다. 즉 그 존재는 존재자와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존재자의 보편과도 다르다. 그 보편이 아무리 절대적인 세계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존재자일 뿐이지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최고 존재자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은 아무리 신앙적 열정으로 무장되었다고 하더라도 형이상학적 논리에 불과하지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존재와는 같을 수 없다. 즉 하나님이 ‘그 무엇’(etwas)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가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을 따라가기 힘든 이유이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늘 ‘어떤 것’을 앞에 놓는 작업인데, 존재 개념은 그 어떤 것과 연관된 게 아니라는 점에서 자칫 표상의 모순에 빠질 수 있다. 오트의 설명을 들어보자.
그런데 이 신비스런 것 덕분에 존재자가 존재자로 되어 있으면서도 그것 자체는 아무런 존재자도 아니라면 그것은 어디서 ‘파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존재자 가운데서는 아무데서도 존재를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존재’에 대하여 말하게 되는가? 아마도 이렇게 확정해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존재자에 대하여 말할 때 ‘있다’라는 조동사를 쓰지 않고는 할 수 없다는 데서 접근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유와 언사의 불가피한 도구이다. 우리는 그 동사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강제성 밑에 서 있다. 그것은 우리 사유의 기본적 소여성이다.(146)
그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있다’라는 단어를 조동사로 이해함으로써 존재 개념에 접근한다는 하이데거의 생각은 무엇일까? 앞에서 우리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앞 대목을 읽으면서 독일어 문장에는 ‘sein’이 거의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예컨대 “하늘은 푸르다”라는 뜻의 독일어 문장 “Der Himmel ist blau”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그저 “푸르다”라고 표현하지만 그들은 “푸르게 있다”라고 표현한다. 물론 모든 문장에 이 sein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내면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늘 ‘있다’가 따라다닌다고 보아야 한다. 참고적으로 독일어와 마찬가지로 영어의 be 동사도 역시 ‘이다’와 ‘있다’는 두 가지의 의미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어떤 사태와 사물의 상태를 표현할 때 ‘이다’는 곧 그렇게 ‘있다’는 뜻을 내표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있다’의 방식으로 모든 것을 사유한다는 사실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다기보다는 숙명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런 숙명적인 길은 바로 존재에 의한 것이다. 즉 무엇이 있다는 사유는 그 사유가 있기 전에 그렇게 사유하게 만드는 힘인 존재에 의해서 그렇게 숙명적으로 된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사유는, 즉 현실적이고 진정한 사유는 자유롭고 공허한 사유가능(Denken-Können)에서 생기지 않고 도리어 언제나 이미 채워져 있는 사유가능(Denken-Müssen)에서 생긴다.”(147). 사유는 인간의 주관적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주어지는 어떤 것이다. 그렇게 주어지는 그 존재 역운의 요구에 자신을 열어놓고 존재의 음성을 듣고 깨달 수 있을 때 사유하는 인간인 현존재는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의하면 “인간의 참된 자유는 인간의 무역운적 독립성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요구에 대한 사유의 그러한 응대에 있다.”(147).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인간의 사유가 존재자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즉 인간이 사유한다는 것과 존재자가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인간이 사유하거나 사유하지 않거나 존재자는 늘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마당에 왜 존재자에 대한 사유가 존재 역운에 응대라는 것인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가 존재자를 사유한다고 해서 그 존재자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존재자와 사유하는 나는 신비로운 관계에 들어간다. 여기 나무가 있다고 하자. 나는 그 나무라는 존재자를 사유한다. 내가 나무의 모습을 어떻게 인식하든지 그 나무는 나의 사유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게만 본다면 사유와 존재자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는 내가 나무를 사유함으로써 그 나무의 사상(事象)을 내면적으로 파악한다.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신비인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자가 사유된다는 사실도 역시 깊은 신비이다. 소나 양에게는 나무가 사유되는 게 아니라 감촉될 뿐이다. 그러나 현존재인 인간은 사유를 통해서 그 나무의 내면으로 개입하게 된다. 시인들과 예술가들에게, 그리고 식물학자들에게 그 나무는 존재한다는 사실의 깊은 층을 열어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사유에 의해서만 나무는 존재하는 것인데, 이 사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이렇게 신비한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역운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이데거의 이런 존재 개념은 바로 기독교 신학의 계시론과 상응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곧 ‘자기 계시’이며, 이 자기 계시가 선행적으로 발생할 때만 우리가 인식할 수 있다는 칼 바르트의 계시론에 따르더라도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유의 역운성은 계시와 인식의 변증법적 구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명제는 존재가 사유한다는 하이데거의 명제와 맞아 떨어진다. 기독교의 성서론은 인간이 주관적으로 어떤 사태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기초한다는 말이다.
‘무(無)’ 개념으로부터
우리가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다른 길은 ‘무’ 개념에 있다. 사실 존재라는 말 자체가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데, 여기서 그것이 없다는 사태가 개입된다는 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존재론의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동양사상을 약간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어렵지 않게 따라잡을 수 있다. 머리 갈 것도 없이 노장의 도(道)는 이러한 있음과 없음을 뛰어넘는 인식 구조이다. 오히려 없음을 통해서 있음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노장 사상에도 무 개념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한다. 불교의 ‘공(空)’ 개념 역시 무엇이 단순히 비어있다는 게 아니라 모든 존재자까지 포함한, 즉 유와 무의 경계를 뛰어넘는 인식의 세계를 뜻한다. 空則色, 色則空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인 인간의 존재가 ‘무(無) 속에 걸쳐 있음’(Hineingehaltensein ins Nichts)이라고 하며, 인간이 ‘무의 간수자’라고 정의한다. 이 세상에서 인간만 이 무의 세계를 파악할 줄 알고, 이런 무를 파악하고 인식함으로써 존재자를 사유한다. 인간만이 “존재자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인식하고 그 존재자를 드러내는데,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곧 무의 세계이다. 예컨대 우리 앞에 책상이 하나 있다고 하자. 우리가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그것이 없는 상태를 내다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세계가 모두 책상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책상이 없는 상태를 인식할 수 없다면 우리는 책상을 사유할 수 없다. 현존재인 인간은 존재자의 무를 통해서 그 존재자의 존재가 드러나게 하는 존재자이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무를 존재와 밀접하게 결합시켰다. “존재자의 존재 속에서 무의 무화가 일어난다.” 무는 곧 ‘존재의 너울’이다. 이런 점에서 무는 근본적으로 존재 자체이다. 인간은 무를 통해서 존재자 앞에서 놀라움과 낯설음을 경험한다. “모든 존재자 가운데서 인간만이 존재의 음성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존재자가 있다는 모든 기적 중의 기적을 경험한다.”(Was ist Metaphysik?, 42).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가 근본적으로 유신론이라고 하는데, 이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다. 특히 하이데거의 무와 존재 개념에 의하면 이런 유신론적 하나님 이해는 하나님을 많은 존재자 중의 하나로 전락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자칫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존재자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절대적인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존재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오히려 그 하나님은 있음과 없음의 경계 안으로 범주화할 수 없는 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신론이 기독교 신학에 맞는 개념이라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라는 그런 존재론을 극복해야만 성서의 하나님에 상응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하늘나라에 갔을 때 상급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희화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근본을 이렇게 희화화하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인간의 욕망에 토대를 두고 활성화하려는 의도 때문이거나 아니면 존재의 심층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유되지 않은 것’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우리가 앞에서 한번 확인했듯이 하이데거 철학은 어떤 새로운 철학 사조를 만들어냈다기보다는 기존의 형이상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배후의 질문 속으로 들어가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가 새로운 철학적 용어를 풍부하게 만들어낸 것 같지만 사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미 과거의 철학자들이 다룬 것들이다. 하이데거는 다만 그런 용어와 주제를 좀더 근원적인 데서, 즉 시원적인 차원에서 질문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의 철학을 보는 사람에 따라서 전혀 새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원적인 차원에서 질문한다는 말은 과거의 철학에 의해서 사유되지 않은 부분을 사유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사유되지 않은 것은 단순히 무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유의 전제라 할 수 있다. 이 사유되지 않은 것은 “사유의 위탁이고 사유하는 자에게 사유하도록 부과된 사상(事象)이다. 이 위탁으로부터 사유가 일어난다. 사유될 때는 언제나 그 무엇이 사유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그 까닭은 사상, 즉 요구로서의 위탁이 사유에 대하여 항상 초월적이고 항상 대립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152).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에게 어떤 사유가 사유된 것 속에서, 그 도달된 공식들 속에서 고갈되어 버리게 되면 그것이 다시는 본원적인 사유가 되지 못한다.
사유되지 않은 것을 사유해야 하는 이유는 이런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역운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현존재인 인간이 아무리 많은 존재자를 사유하고 그것의 보편 원리를 파악해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모든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의 사유는 그것이 진행되는 동안 훨씬 많은 사유되지 못한 부분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이 말은 곧 존재자에 대한 인간의 사유는 사유되지 않은 것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존재는 사유된 것이 아니라 사유되지 않은 것이다. “사유되지 않은 것이 사유를 발생사건이 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존재가 바로 그 사유해야 할 사상의 드러냄의 사건에서 성립된다.”(152).
사유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것, 또는 앞서 다른 사람에 의해서 사유된 것의 심화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사유되지 않은 것에 대한 사유야말로 시원적인 사유이며, 따라서 그것이 곧 존재라는 하이데거의 진술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이 진술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빙산을 비유로 들어보자. 우리는 단지 수면 위에 드러난 빙산의 일각을 보고 그것을 분석하는 데 모든 생각을 쏟는다. 그 모양, 그 성질, 그것의 영향, 그 빙산의 일각 위에 휴식을 취하는 물개나 펭귄의 서식 형태를 연구하는 것으로 우리가 빙산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빙산은 해류의 흐름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해류가 표면과 심층이 다를 경우에 빙산은 심층의 해류를 따르기 때문이다. 수면 아랫부분의 빙산을 사유되지 않은 것이라고 본다면, 그리고 그 빙산의 크기가 거의 무한에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면 지난날 사유된 빙산의 일각만을 통해서는 결코 빙산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일전에 어떤 학생이 자연과학과 신학(철학)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한 적이 있다. 오늘의 세계를 거의 완벽하게 해명하고 규정하고 있는 자연과학의 기술 앞에서 신학적 사유라는 게 거의 무의미하다는 주장이었다. 이 문제는 이미 하이데거에 의해서 명확하게 규명된 바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사유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존재 개념을 파악할 수 있다는 논리에 의한 것이다. 자연과학은 자칫 ‘사유된 것’ 속에, 즉 그런 사유를 통해서 도달된 공식 곳에 고갈될 수 있다. 예컨대 뉴턴의 역학이 이 세계를 규정하는 공식으로 절대화하면 결국 우리는 존재의 세계를 놓치고 만다. 현대의 유전자 공학이 인간의 생명을 완벽하게 해명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본원적인 사유를 모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그럴 가능성도 없지만 인간의 유전자 지도가 완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생명의 실체가 완전히 규명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사유되지 않은 부분, 해명이 가능하지 않은 부분이 거의 자동적으로 떠밀려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런 유전자 공학이 증명하고 있는 것들은 단지 존재자들이지 존재 자체는 아니다. 존재는 오히려 그런 유전자 공학이 실증적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신비의 방식으로 현존재의 사유와 만나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묻는 질문
기독교 신학이 하이데거의 사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의 존재 개념이 긍정적이든지 부정적이든지 기독교 하나님 개념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이 다루어야 여러 주제는 바로 이 하나님 개념으로 집중되고 이 개념에 의해서 확장된다. 교회론에 관한 언급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하나님 개념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런 논의는 거의 공허하거나 방향 상실로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요즘 한국 교회와 신학의 현실은 이 하나님이라는 주제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단지 교회 실천의 문제만 전면에 등장한 형국이다. 페터 아이혀는 이 하나님에 대한 질문의 중요성을 이렇게 피력한 바 있다.
내가 신학의 주제를 완전히 잘못 다룬 것이 아니라면, 초보자들이 신학연구에서 추구하는 내용을 내가 완전히 놓친 것이 아니라면 신학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단 하나의 물음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물음이다. 이것은 보다 높은 지식에 대한 지적 전문가들의 이론적 호기심만을 충족시키는 물음도 아니고, 질서 있는 교회의 보장된 체제에서 사회현실에서의 피난처를 구하는 저 도피자들의 거짓된 물음도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현재의 모든 물음들 가운데서도 일차적이고 최종적인 물음,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무력한 통치를 말하는 구약 및 신약의 복음과 오늘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 선포가 제기하는 물음이다.(페터 아이혀, 박재순 역, 신학의 길잡이, 머리말)
다시 우리가 확인하는 바이지만 하이데거는 자기의 존재 개념이 기독교 하나님과 동일할지 모른다는 주장에 대해서 한사코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거부했다고 해서 그의 존재 개념이 기독교 하나님 개념과 전적으로 다르거나 더 나아가서,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보듯이 하이데거의 철학이 무신론적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하나님 개념의 관계는 아직도 확연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단정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해명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이 대목의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다면, 하이데거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사유한 것이 아니라 서양 형이상학의 사유에 대해서 사유했을 뿐이다. 물론 서양 형이상학이 기독교 신학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비록 하이데거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직간접적인 관련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연관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사태만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자리를 비워둔 하이데거의 철학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 한계를 포착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 문제를 훨씬 시원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초월자는 초감관적 존재자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자의 제1원인이라는 의미에서 최고 존재자로서 통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제1원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세계내존재’라는 이름 속에 나타나는 ‘세계’는 결코 천상적인 것과 구별되는 지상적인 존재자를 의미하지도 않고 ‘영적인 것’과 구별해서 ‘세상적’인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저 세계내존재라는 규정 속에 나타나는 ‘세계’는 도대체 어떤 존재자를 의미하지도 않고 존재자의 어떤 영역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세계는 존재의 공개성(公開性)을 의미한다. <중략> 그러니까 인간의 본질을 실존론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는 아직 ‘하나님의 존재’나 혹은 그의 ‘비존재’에 대하여, 그리고 신들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에 대하여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들이 존재의 진리에 대한 인간본질의 연관으로부터 인간의 본질을 해의(解義)하는 것을 무신론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급한 짓일 뿐만 아니라 이미 그 진행과정에서 길을 잘못 든 것이다.“(Brief über den Humanismus, 100f.)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려는 중심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순수한 세계성의 철학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세계내존재’ 개념을 유무신론 논쟁으로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세계내존재 개념을 통해서 현존재의 실존론적 사태를 설명하려는 것이지 인간의 실존을 실증적으로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공간을 비워 놓는다.”(156). 이미 파악된 어떤 철학적 체계에 하나님을 논증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비워놓을 뿐이다. 이제 하이데거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빈 공간에 적합한 개념이 무엇인지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인리히 오트는 유비(analogia) 개념을 통해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기독교 하나님 존재를 설명하려고 한다. 비록 하이데거가 하나님의 존재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신학은 어떤 방식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해명해야만 한다. 물론 기독교 신학도 하나님을 직접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유비로만 가능할 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한 스콜라 신학의 ‘존재유비’와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의 ‘신앙유비’를 중심으로 잠시 살펴보자.
존재유비(analogia entis)
우리가 잘 알다시피 칼 바르트는 존재유비 개념을 가리켜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첫 번째 허위라고 비난했다. 만약에 최고로 선하고, 최고로 가치가 있고, 최고로 영원한 대상이 곧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런 존재자는 아무리 절대적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의 하나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최상의 상위개념으로서의 존재개념은 사유 속에서 처분가능하게 된 현실적인 것의 자명성의 표장(標章)이다.”(160). 기독교인들이 천국을 최고의 복지가 보장된 장소쯤으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배고픔이 없고, 병도 없고, 갈등이 없는 표상은 그것이 아무리 극단화했다고 하더라도 역시 이 세상에서 실현가능한, 또는 처분 가능한 조건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바르트에게 하나님은 ‘절대타자’(totaliter aliter)이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유비로서 해명될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만약 하이데거의 존재개념이 이러한 범주에 들어있다고 한다면 이미 바르트가 그 한계를 지적했듯이 우리는 그에게서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말하는 존재 개념을 진작 극복하고 있다. 오트가 말하고 있는 대로 바르트가 스콜라 신학의 존재유비를 향한 비판작업은 이미 하이데거가 서양의 형이상학에 가한 비판작업을 통해서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오트에 의하면 바르트의 존재유비 비판은 하이데거의 존재개념에 유효하지 않다.
신앙유비(analogia fidei)
‘전적 타자’인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은 그가 자기를 계시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아무런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로는 아무리 유비적으로 접근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모든 유비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원칙적으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계시의 해명과 인식이라는 차원에서는 여전히 유비가 필요하다. 이미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한 바 있다. 바르트는 이런 최소한의 유비를 가리켜 ‘신앙유비’라고 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을 인식하는 능력이 인간의 선천적 소질이 아니라 신앙의 행위 속에서 은혜롭게 하나님에 의해서 작용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존재유비와 신앙유비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소위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설명하고,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내와 악의 존재 근거를 설명하는 게 곧 존재유비이며 동시에 신앙유비라 할 수 없을까? 물론 보기에 따라서 ‘유비’라는 것을 존재와 신앙의 차원으로 구별하는 게 단지 신학적 수사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바르트는 여기서 인간의 주관주의적 인식능력에 하나님의 존재 근거를 설정하는 위험을 뚫어본 것이다. 신앙유비는 이런 인간의 주관주의적 인식구도를 최소화하고 하나님의 계시에 있는 주도권을 강화하는 개념이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함으로써만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우리는 존재유비가 아니라 신앙유비, 또는 관계유비라는 칼 바르트의 관점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의 신학이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을 부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하이데거의 존재가 단지 존재자라고 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존재자들의 상위개념에 속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당연히 하이데거의 철학은 바르트가 비난했던 존재유비 이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는 절대적인, 보편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존재자의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유비라는 비난이 해당되지 않는다. 물론 하이데거의 사유에 근거해서 신앙유비 개념이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철저하게 의존해 있던 형이상학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은 채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는 뜻이다.
성서의 하나님
성서의 하나님 진술이 엄청나게 많은 갈래와 층이 있지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만약 성서에서 무신론의 흔적을 찾아내려는 사람이 있다면 우주에서 지구와 같은 행성을 찾아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성서가 하나님의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어떻게’의 관점에서 보면 일치된 대답을 찾아낼 수 없다. 창조자로, 아브라함의 삶에 개입하는 분으로, 출애굽의 주도자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려내신 이로 진술된다. 때로는 무소불위의 능력으로, 때로는 미세한 음성으로, 때로는 공동체 안의 사랑으로, 때로는 무죄한 자의 고통과 함께 하는 자로 진술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최초로 구체화한 구절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출 3:14; Ich bin, der ich bin.)에 있다. 도대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했기에 이런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해냈을까? 다른 번역을 보면 “나는 앞으로 있게 될 바로 그런 자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사실 이런 진술이 매우 신기해보일지 모르지만 모든 신구약성서에 직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하나님 개념이다. 성서는 하나님을 절대 구체화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인식 범주 안에 포착되거나 형상화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 인식, 희망과는 상관없이 스스로의 존재근거와 존재목적을 갖고 있는 분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은 무엇인가와 연관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지만 야훼 하나님은 존재자와 상관없이, 즉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분이다. 그래서 십계명은 하나님을 표상하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렇듯 성서의 자존자 개념은 하나님의 초월적 절대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런 상위개념도 없다는 것과 그분의 주권은 어떠한 상위개념도 거절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은 그냥 그분 자신이다. 그분은 그분 그대로 계시고 신비스럽고 영화로우시고 접근불가능하고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분이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송영은 “있다”는 단어를 매개로이루어진다.(163).
이러한 성서의 하나님 이해가 헬라 철학에 의해서 형이상학과 연결되었다. 이 형이상학은 하이데거가 밝히고 있듯이 존재망각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최고 존재자의 자리에 설정하는 시도이기 때문에 이런 형이상학과 결합된 신학은 형이상학이 걸어온 그 길을 그대로 걸어온 셈이다. 물론 이 길은 존재망각을 뜻한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해체가 결국 형이상학에 기대어 하나님의 존재를 해명하려던 신학 해체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사도 바울의 진술을 인용하면서 신학의 형이상학적 시도를 비판하고 있다.
신학은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미련한 것으로 만들지 않았는가?”(고전 1:20)라고 기록한 것을 숙고하면서 결정할 일이다. 그런데 세상의 지혜는 1장22절에 의하면 헬라인이 추구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래적 철학을 명확하게 추구된 것이라고 부른다. 기독교 신학은 다시 한 번 사도의 말씀을,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미련한 것으로서의 철학을 진지하게 논할 결심을 할 것인가?(Was ist Metaphysik?, 18).
위에서 하이데거의 주장은 명확하다. 이미 사도바울이 헬라인들의 형이상학을 미련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신학이 좀더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미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존재론이 존재를 망각했다고 지적하듯이 신학이 형이상학에 기울어진 채 진술하는 하나님이라면 그는 결국 존재유비에 의한 존재자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신학의 철학과의 대화를 철저하게 포기하고 하나님의 계시에 집중하라고 말하는 것일까? 지난 신학의 역사가 형이상학에 의한 길이라는 말은 결국 이제 형이상학이 해체되었다는 그의 진단에 의해서 신학도 해체되었다는 말일까? 교부들을 중심으로 초기 기독교가 헬라 철학의 형이상학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이다. 그 뒤로도 꾸준하게 그런 성격을 유지했으며,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스콜라 신학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통 신학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물론 우리 개신교회는 이런 스콜라 신학을 맹렬하게 비난한 마틴 루터의 개혁신학에 의해서 존재론으로부터 신앙과 은총론으로 신학의 중심축을 옮기긴 했지만 그 뒤로 여전히 형이상학과의 연결을 도모했다. 칸트, 헤겔, 쉴라이에르마허의 철학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인식론적 토대가 되었다.
신학이 형이상학에 치우침으로써 ‘자존자’로서의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최고 존재자로서의 하나님을 언급한다는 것은 물론 신학의 토대를 위협하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학이 철저하게 철학과 담을 쌓고 단순히 성서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하이데거도 칼 바르트가 주장하는 일종의 말씀 실증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하이데거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바르트와 브룬너 사이에 벌어진 ‘자연신학’ 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인간의 주관적 인식 능력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철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철학적 사유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훨씬 심층적으로 해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 자체보다는 그 형이상학이 걸어온 존재망각을 문제 삼는 것이며, 철학적 사유 자체보다는 주관주의적 사유를 문제 삼는 것이다.
형이상학과 주관주의의 극복에까지 이르는 ‘사유의 사유’라는 하이데거의 사유소지점(思惟素地點)은 철학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계시다.”라는 성서의 진술이 가능하도록 물러나는 길이 열리게 된 셈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다.” 그분은 성서가 말하는 뜻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형이상학의 존재이해라는 의미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칼 바르트가 존재유비를 거절하는 관련성에서 명백하게 보았던 사태라 할 수 있다(165).
우리는 여기서 성서의 하나님 개념이 나가야 할 길과 철학적 신학이 나가야 할 길 사이에 놓여 있는 매우 미묘한 긴장관계를 포착해야만 한다. 만약 바르트가 지적했으며, 하이데거가 비난했던 그런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하나님 존재의 토대로 삼는다고 한다면 신학은 결국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원적 사유의 세계에 돌입하지 못하겠지만 철저하게 계시론에 근거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적 인식 능력을 심화하는 구도를 잃지만 않는다면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을 비롯하여 오늘의 물리학과 모든 인문학적 사유는 기독교 신학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계를 드러내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입장에 근거해서 판단한다면 기독교 신학은 철학과 거리를 두고 오히려 신비주의적 방향을 잡아나가는 게 현명할 것이다.
6강까지의 글들 잘읽었습니다.
평소에 목사님 설교와 글들에 대한 많은 부분이 해소되었고,
제 신앙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 해소되었습니다. ㅎㅎ ^^
과거에 도덕경을 감명깊게 읽었던 기억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한게 맞다면,
평소에 시간은 없고 머리는 좋지 못하고 읽어야 할 책들은 많게만 느껴졌는데,
그러지 않아도, 차분히 침묵속에 존재의 음성에, 하나님의 부름에 귀기울이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걸로 만족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근데, 이전 강의 '존재의 역사'에서 궁금한점이,
왜 존재는 하필 비-은폐의 방식이여야 하며,
그런 존재의 역사 가운데,
IS 같은 끔직한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설명되느냐는 점이 궁금합니다.
금요일이라 회사동생놈들과 커피한잔하러 내려가야겠습니다.
항상 다비아를 통해서 많은도움을 얻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