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시원적 사유와 신학적 사유

철학적신학 조회 수 1727 추천 수 0 2015.01.14 09:5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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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적 사유와 신학적 사유

 

 

우리가 지금까지 하이데거의 존재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개념이 여전히 우리에게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이유를 일단 두 가지로만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어떤 인식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바로 그 앞 단계에 도달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흡사 우리가 등산하는 경우에 중간 단계를 생략한 채 정상에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인식의 세계에도 역시 이런 중간 단계가 필연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하이데거의 존재개념에 이르는 중간 단계를 밝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 개념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없다. 어쩌면 신학생의 사유방식이 목회의 실용적 구조 안에 머물러 있다는 근본적인 한계로 인해서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사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으며, 따라서 하이데거의 존재개념을 포착하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른다. 둘째, 하이데거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적 구조를 벗어나 있다는 점이 그 개념을 따라가기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탈레스의 물,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 데모크리토스의 원소, 헤라클레이토스의 불과는 전혀 다른 구조로 해명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존재는 직접적으로 어떤 세계를 포함하고나 그런 세계 자체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어떤 상태를 지시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범주화하거나 체계화하는 우리의 인식론적 구조 안으로 들어오기 쉽지 않다.

존재의 간접적인 드러남이라는 사태에서 매개의 역할을 하는 것은 세 가지, 즉 사유와 언어와 세계이다. 존재는 사유, 언어, 세계 없이 드러나지 않지만 그것 세 가지가 곧 존재는 아니다. 이 세 가지는 존재가 드러나는 일종의 통로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그것의 작용에 따라서 존재의 역운이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 우리는 앞으로 이 세 가지 요소를 검토하게 될 텐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신학적 사유의 성격도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사유는 말 그대로 신학적 사유와 직결될 수 있으며, 언어는 곧 말씀과 설교라는 차원에서 신학 활동의 토대가 되며,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 사건이라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존재가 드러나는 이 세 가지 요소는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사유의 인간학적축점(軸點)

 

우리가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이 존재이지만 그 존재가 드러나는 길은 현존재’(Dasein)인 인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존재는 스스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현존재인 인간의 사유를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선 하이데거의 진술을 직접 들어보자.

 

형이상학은 (즉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인간이 존재에 의하여 말 건네어질 때 인간이 단지 그의 본질에 있어서만 본재(本在)한다는 단순한 본질적 현실태에 대하여 자기를 폐쇄한다. ... 단지 이러한 말 건넴으로부터 인간은 자기의 본질이 어디에 거하는지 발견하였던 것이다. ... 존재의 밝혀줌 안에 서있음을 나는 인간의 탈존(Ek-sistenz)이라고 부른다. ... 인간에게만 이러한 종류의 존재 방식이 적합하다. ...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즉 형이상학의 전래하는 언어로 말한다면, 인간의 본질은 인간의 탈존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되어진 탈존은 existentia라는 전래하는 개념과 동일하지 않다. existentia는 가능성으로서의 essentia와 구별하여 현실성을 의미한다. <존재와 시간>에서는 현존재의 본질은 현존재의 실존에 놓여 있다는 명제가 격자체로 인쇄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existentiaessentia의 대립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아예 이 두 가지 형이상학적인 존재규정이, 하물며 그들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이, 문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 오히려 그 명제는, 인간이 그렇게 본재하여(wesen) 인간은 현존’(Da), 즉 존재의 밝혀줌이라고 말한다. 현존의 이러한 존재와 단지 이것만이 탈존의 근본특성을, 다시 말하면 존재의 진리 속에 있는 탈자적인 내립(內立)의 근본특징을 갖고 있다.”(Brief über den Humanismus, 66ff.).

 

위의 진술이 매우 복잡한 철학적 언어학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매우 복잡한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런 그의 진술에서 핵심은 인간을 탈존(脫存)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 탈존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은 탈자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걸어 나온다. 인간이 자신 밖에 있을 때 그야말로 바르게 자신으로 존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인간은 존재의 밝혀줌 안에 내립하기 때문이다. 탈존을 완수하는 사유는 바로 존재의 사유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에게서 벗어나서, 즉 탈존함으로써 참된 존재의 빛에, 그 존재의 말걸음에 상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이 땅에서 인간에게만 해당된다. 따라서 존재의 빛에 들어가는 사유는 인간학적 축점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탈존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그게 가능한가? 이 말을 쉽게 기독교식으로 바꾼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혹은 성령에 충만하다는 뜻으로 새겨도 괜찮을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서만 존재하게 된다면, 이것은 곧 주관주의적 사유방식인데, 진리의 밝혀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로부터 탈존하여 진리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시원적(anfänglich) 사유의 본질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표상하는 형이상학적 사유와 존재자를 계량하는 과학적 사유를 존재의 말건넴에 응대하는 본질적이고 시원적 사유와 구별한다. 그러니까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원적 사유는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과학과 철학에서 사유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앞에서 여러 번 확인했듯이 존재자에 대한 사유는 시원적 사유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시원적 사유는 존재자에 대한 현존재의 주관주의적 사유가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로부터 발생하는 근원적 사태이기 때문이다. 그는 시원적 사유와 계량적 사유의 차이를 이렇게 진술한 적이 있다.

 

정밀한 사고는 단지 존재자를 계량하는 속으로 응고되어 오직 존재자에만 봉사한다. 모든 계량은 셀 수 있는 것을 세어놓은 것으로 변하게 하고 그것을 다음 셈을 위하여 사용한다. 계량은 셀 수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등장하게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단지 세는 것뿐이다. ... 계량하는 사고는 모든 것의 진행의 시종일관성에서부터 모든 것을 제어하는 강제성 속에 자기 자신을 강제한다. 계량적 사고는 계량의 계산 가능한 것 모두가 계량에 의하며 그때마다 산출된 총계와 산물에 앞서 이미 하나의 전체라는 것을 예감할 수 없다. 그 전체의 통일성은 물론 계산 불가능한 것에 종속되어 있다. 계산 불가능한 것 자신과 그것의 무지무지함(Unheimlichkeit)이 계량의 손아귀를 벗어난다. 그러나 도처에서 항상 계량의 무리한 요구에 대하여 자신을 폐쇄하였으면서도 항시 수수께끼처럼 알 수 없는 가운데서도, 인간 자신과 그의 계획이 들어서 있는 존재자보다도 인간에게 더 가까이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이 때때로 인간의 본질을 하나의 사유 속으로 조율할 수 있다. 이 사유의 진리는 어떠한 논리로도 파악할 수 없다. ... 시원적 사유는 존재의 호의의 메아리이다. 그 호의 속에서 유일자가 자기를 밝혀주고 스스로 발생하게 한다. 즉 존재자가 있도록 한다.”(Was ist Metaphysik?, 43f.).

 

하이데거가 시원적 사유를 계량 및 표상 사유로부터 구분하는 이유는 그런 계량 및 표상 사유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사유로는 근본적으로 존재의 역운을 따라잡기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이 이렇게 존재자를 계량하고 표상하는 것은 하이데거의 실존 개념에서 핵심적이라 할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이런 사유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존재의 역운이 인간의 계량 및 표상 사유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이데거의 시원적 사유 개념은 어떤 대안이나 처방을 내리려는 게 아니라 인간의 계량적이고 표상적인 사유로 인해서 존재가 망각되었다는 사태를 지시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가능한 존재의 역운에 순응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것뿐이다.

그가 말하려는 시원적 사유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그는 1954년에 출간된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유는, 더 정확히 말해서 사유하려는 시도와 과제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 시대에는 이제까지의 사유를 성취한다고 생각했거나 성취해야 한다고 사칭했던 오만한 요구들이 쇠잔해졌다.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길은 이러한 쇠잔함의 그림자 속으로 대달린다. 그것은 네 개의 명제로 표시될 수 있다. 1. 사유는 과학들처럼 어떤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2. 사유는 유용한 삶의 지혜를 가져오지 못한다. 3. 사유는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다. 4. 사유는 직접적으로 행동할 힘을 주지 못한다. ...

사유는 자체가 하나의 길이다. 우리는 단지 이 길에 상응할 뿐이어서 우리는 도중에 머물러 있게 된다. 길을 놓기 위하여 길에서 도중에 있는 것은 어디서부터이든지 길로 들어서서 그 길에 대하여 환담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일이다. 도중에 있는 것은 가령 앞뒤로 뻗어나간 길이 얼마나 각양각색이고 그처럼 상이한 가운데 심지어 얼마나 합치될 수 없는지에 대하여 환담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 사유의 길은 잘 닦아놓은 신작로처럼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향해 가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어디엔가 그 자체상 놓여 있는 것도 아니다. 간다는 것이 비로소 그리고 그것만이, 여기서는 사유하는 질문이 움직임(길놓음, Be-wegung)이다. 이것은 길을 내는 것이다. ... 사유는 질문하는 행진에서야 비로소 그의 길을 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길놓기는 희귀한 일이다. 그 놓인 길은 뒤에 남거나 그대로 놓여 있지 않고 도리어 그 길은 다음 발걸음 속으로 들여 놓이게 되고 이 발걸음보다 앞서 놓이게 된다.

 

하인리히 오트에 의하면 위의 인용문에서 하이데거는 시원적 사유의 성격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사유는 어떤 것에 대한 대답도 아니고 대답에 이르지도 않는다. 사유는 과학처럼 지식을 전달하지도 않고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지도 않고 행위를 위한 윤리적 처방을 주지 않는다. 둘째, 사유는 본질적으로 명령이며, 명령에 결부되어 있고 그 명령을 주목한다. 셋째, 사유는 길이다. 이 길은 사유의 질문을 수행하는 과정에 놓인다. 이 세 가지 성격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대답 없음

 

위의 인용문 앞부분에서 하이데거는 사유가 감당할 수 없는 요소를 네 가지로 설명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요소는 지금까지 과학과 철학이 사유를 통해서 얻어 보려 했던 것들이다. 어쩌면 기독교 역시 이런 실증적 대답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는지 모른다. 지난날 철학, 과학, 신학이 이런 문제를 풀어내려고 했다는 것은 그만큼 시원적 사유에 천착한 게 아니라 존재자에만 관심을 기울였다는 말이 된다. 하이데거의 의하면 사유가 이런 요소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포기와 단념을 말한다. 대답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존재의 신비를 해체시킬 뿐이지 본질적인 대답을 확인할 수 없다. 본질적 사유는 영속적인 신비를 알고 있으며 신비의 영역 속에 체류하고 있다.

일전에 나는 소극적인 설교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성서의 세계를 이미 훤히 뚫어보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그 세계를 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다는 듯이 공격적으로 설교하는 모습들을 자주 보아왔기 때문이다. 성서를 깊이 묵상한 사람들은 그 텍스트가 지시하고 있는 신비의 세계 앞에서 할 말을 잊는다. 자신의 인식과 언어의 세계가 하나님의 신비를 포착하고 묘사하기에 얼마나 옹색한지 명백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대로 뒷걸음(Schritt zurück) 치지 않을 수 없다. 지나치게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려는 태도는 설교자로서 결코 바람직한 게 아니라고 본다.

 

명령

 

하이데거는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인간이 주관적으로 무엇을 사유할 수 있는가 하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를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차원에서 해명한다. 물론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 만드는 것은 존재이다. 그가 볼 때 사유는 하나의 명령이지 인간의 능력이 아니다. 명령이 없으면 사유는 없다. 적어도 본질적이고 시원적 사유는 없다.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사유의 본질은 이 사유가 명령 없이, 즉 자신의 충동으로부터 일어난다는 데에 있다. 이런 사유는 결코 존재의 역운에 참여할 수 없다. 이 존재의 역운이 곧 명령인 셈이다. 존재의 역운을 따르는 사유가 시원적이라는 이 사실이 곧 하이데거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토대이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우리가 여전히 주관주의적인 사유에 머물거나 그런 쪽으로 치우치는 것도 역시 존재의 역운에 속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헤어 나오기 힘든 딜레마가 이 대목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언급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형이상학과 과학을 주관주의적이라고, 무명령적이고 무역운적이라고, 그래서 자력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사유가 도대체 주관주의로 돌아오고 이러한 연운망각에 이르게 된 것도 그 나름으로는 존재의 역운과 명령에 기인한 것이다.”(오트, 185).

존재의 역운은 곧 사유에게 명령으로 다가온다는 이 하이데거의 사유 이해는 기독교의 성서 영감설을 생각하게 만든다. 성서의 저자들이 주관적인 체험으로 무엇인가를 기록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절대적인 힘이 성서 기자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사유하게 함으로서 성서가 기록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무엇을 사유했다는 말은 자칫 하나님을 존재자로 생각했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는데, 하이데거의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성서 기자들이 하나님을 사유한 게 아니라 성서 기자들로 하여금 그렇게 사유하게 한 그 힘이 곧 하나님인 셈이다. 즉 하나님은 그 어떤 것으로서 존재한다기보다는 성서기자들로 하여금 사유하게 만든 근원이라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시원적 사유를 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설명한다. 사유 자체는 항상 도중에 있고 늘 그의 길을 가야한다. 어떤 학설을 주장한다는 것은 주관의 자의적 행위일 뿐이지만 도중에 있음은 명령에, 즉 역운에 주목하는 것이다. 스스로 주관적인 능력으로 무엇을 사유한다기보다는 말 걸어옴에 대해서 응대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길이라 할 수 있다.

 

(Holz)이란 말은 삼림(Wald)의 고어이다. 숲 속에 길들이 있으나 그 길들은 대부분 밟히지 않은 데서 갑자기 끝난다. 이 길들은 숲길이라고 불린다. 각각의 길은 따로 구분되지만 모두 같은 삼림 속에 있다. 흔히 이 길과 저 길이 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보일 뿐이다. 나무 베는 사람과 산지기는 그 길들을 안다. 그들은 숲에 길이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길로 가는 것은 길을 가는 사람이 길을 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길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이처럼 본질적인 사유는 존재의 명령을 받는 것이지 인간의 주관적으로 사유하는 게 아니다. 사유의 길은 어떤 면으로든지 이미 먼저 표시되어 있고 추적하기만 하면 된다. 본질적인 사유는 제한 없이 자의적으로 빗나갈 수 없다. 그 사유는 길을 유의해야 한다.

 

그렇지만 마치 그 길이 이미 전재(前在)하고 있어서 단순히 확정되고 지식으로 받아들이고이를테면 따라 걷기만 하면 그만인 것처럼 되어 있지는 않다. 도리어 그 본질적 사유의 길은 밟지 않은 것 속으로 돌진하고 어느 정도로 사유의 수행 속에서야 비로소 놓여진다(187).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사유의 길은 무미건조한 여행이 아니라 길의 말건넴에 응대한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사유의 길을 가고 있는 현존재인 인간에게 존재의 역운이 명령을 내린다면 그 사유하는 인간은 그 도중(道中)에서 그것을 경험한다. 물론 여기의 경험이라는 것도 인간의 주관주의적 요소로 간주하면 하이데거의 생각을 놓친다. 이 경험은 인간의 실증적인 세계라기보다는 존재의 역운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존재는 시비한 방식으로 인간의 사유를 통해서 경험된다.

 

뇌성을 동반하는 폭풍이 일 때, 오두막 창가에서 바람의 수레바퀴가 노래 부르면 ...

사유의 용기가 존재의 무리한 요구로부터 생기고 그 다음에 역운의 언어가 번성한다.

우리가 그 사상을 눈여겨보고 그리고 마음속에서 말씀에 청중하자마자 사유는 성공한다.

학문으로 가르쳐진 대상과 사유된 사상(事象) 사이에 있는 구별에서 몇 안 되는 것이 충분히 경험된다.

 

하인리히 오트의 설명에 따르면 이 문장들 속에서 사유의 역운성이 분명하게 파악된다고 한다. 존재의 무리한 요구(말건넴, 명령)’로부터 사유의 용기가 나온다. 이러한 사유의 언어는 역운의 언어이다. 사유는 역운적 생기(生起)이기 때문에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여기서 과학과 형이상학적 사유를 본질적 사유와 구분해야 한다. ‘학문으로 가르쳐진 대상’(gelehrten Gegenstand)사유된 사상’(gedachten Sache)가 구별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하이데거가 구분하고 있는 그런 시원적 사유가 어떤 사람에게 가능할까? 우리는 기껏해야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그런 대상만 이해하고 살아갈 뿐인데, 표상과 계량과 구분되는 엄격한 사유를 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유의 경험이 위대한 천재들에게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하이데거의 이런 성찰은 결국 엘리트주의의 산물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시원적 사유가 고도의 철학적 산물이라거나 구도자의 훈련을 거친 다음에야 가능한 경험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이데거는 오히려 그런 형이상학과 과학의 주관주의적 사유를 뛰어넘고자 한다. 비록 사유의 특별한 능력이 없거나 그런 훈련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우리에게는 그런 존재의 말걸음 사건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가을바람을 맞을 때, 휘날리는 눈발을 볼 때, 젖먹이의 숨소리를 들을 때 존재가 우리에게 역운적으로 말을 건네고 있다는 경험이 가능하다. 다만 우리가 이런 존재의 역운에 마음을 닫아두고 있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할 뿐이다. 존재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놀라는 사람은, 또한 그렇게 사유한다는 것 자체에 충격을 받는 사람은 존재의 역운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이른 아침의 여명이 산 위로 올라올 때. ...

별 하나를 향하여 간다. 단지 이것만이.

사유는 한 때 별 하나처럼 세계의 하늘에 남아 있는 사상(思想) 하나에만 한정되는 것이다.

 

시작(詩作)과 사유

 

이런 점에서 시원적 사유는 시작과 깊은 연관이 있다. 시작이나 사유 모두 존재의 진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들은 존재의 진리를 언어로 나타낸다는 점에서 같지만,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사유자는 존재를 말한다. 시인은 거룩한 자를 명명(命名)한다. 존재의 본질로부터 생각할 때 시작과 감사와 사유가 어떻게 서로 의존하는 동시에 갈라져 있는지 여기서는 미결인 채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 하기야 사람들이 철학과 시의 관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매우 갈라져 있는 산에서 가까이 거하고 있는시인과 사유자의 대화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191).

 

저녁 황혼이 삼림 어디엔가 떨어지면, 수목들이 금테를 두르고 ... 노래 부름과 사유는 시작의 이웃해 있는 수목들이다. 그들은 존재에서부터 자라나서 존재의 진리에 도달한다. 그들의 관계는 횔덜린이 삼림의 나무들에 대하여 노래 부르는 것을 사유하도록 해준다(192).

 

참고적으로 하이데거가 횔덜린의 시를 해석한 <시와 철학> 중에서 한 대목을 인용하기로 하자.

 

상주(常住)하는 것은, 그러나 시인이 건설한다.” 이 말은 시의 본질 문제에 빛을 비춰준다. 시는 언어 속에서 언어에 의한 건설이다. 그러면 무엇을 건설하는 가? 상주하는 것. 그러나 도대체 상주하는 것은 건설될 수 있는가? 그것은 언제나 이미 현전(現前)해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상주하는 것이야말로 지열(支裂)되지 않도록 머물러 있게 되어야 하고, 단순한 것은 혼란으로부터 쟁취되어야 하며, 유한한 것은 무한한 것으로부터 비호되어야 한다. 존재자 전체를 담당하고 지배하는 것은 개현(開現)되어야 한다. 존재자가 현상하기 위해서는 존재가 개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 상주하는 것이야말로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그렇게도 빨리 모든 신적인 것은 사라지기 쉽다. 비록 무의미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러나 이 신적인 것이 머물러 있다는 것은 시인의 배려와 봉사에 맡겨져 있다.”(시와 철학, 52, 53).

신학자의 사유

 

하인리히 오트가 하이데거의 사유에 기대어 말하려는 바는 신학도 역시 본래적 사유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단지 어떤 사물과 현상을 설명하고 분석하고 증명하는 것에서, 이는 바로 형이상학적 과업인데, 머무는 게 아니라 존재의 말건넴에 응대하는 사유의 본래적 자리를 확보해야 한다.

 

우리는 신학이 본원적이고 본질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사유이고 사유로서 추월 불가능이며 다른 종류의 사유로 말미암아 능가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즉 신학은 그 자신의 자기이해에 따르면 신학이 아닌 다른 어떤 사유를 통해서도 한정되거나 정돈되거나 상대화되거나 목록화되거나 또는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신학의 원리를 자기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지 다른 어떤 사유 속에 가지고 있지 않다. 이처럼 신학은 자체 상 시원적이고 본질적인 사유라는 결론이 나온다.

 

신학이 타자로부터 추월당하지 않는 시원적 사유라는 말은 자칫 오해될 수 있다. 신학이 자기의 권위에 안주함으로써 다른 것으로부터의 비판을 완벽하게 차단해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런 오류와 왜곡은 기독교 역사에서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현재도 진행 중이다. 특히 현재의 설교 현장에서는 시원적 사유는커녕 그 앞서의 기본적인 사유 활동도 배제되어 있다. 설교 현장에는 사유 대신 일방적인 설득과 선동과 우격다짐이 산만하게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과 설교의 시원적 사유와 자기 독단을 예민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일방적인 설득과 선동을 좋은 뜻으로 해석해서 설교자의 주관주의적 신앙체험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이데거가 그렇게 명백하게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사유방식이다. 신학은 이런 주관주의적 신앙체험을 벗어나서 계시의 빛을 조명하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계시의 역운에 응대하는 신학과 설교만이 우리의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우리의 마땅한 태도이다.

오트는 신학자의 사유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신학 자체는 도중에 있는 존재이다. 신학은 지시하는 사유이지 증명하는 사고가 아니다. 신학은 선포와 더불어 지시, 명령, 역운 안에 머물러 있다. 신학은 선포처럼 자신이 역운의 언어이다. 신학적 사유의 존재 역운, 즉 신학의 특수한 명령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계시는 신학의 사유가 응대해야할 말건넴이다.”(196, 197). 이 진술에서 좀더 정확하게 풀어야 할 내용을 세 가지로 정리하자.

1) 도중의 존재: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신학도 역시 반듯하게 포장된 길이 아니라 들길을 간다. 아직 완전히 만들어지지 않은 길을, 자기 스스로 길을 내며 간다. 그러나 자기가 길을 내는 게 아니라 길이, 아직 고정되지 않은 길이 그곳에 있다. 즉 신학은 다른 것에 의해서 간섭받거나 재단당하지 않고 자기의 고유한 길을 열어가며 나아간다. 이 개념을 조금 더 확대한다면 기독교의 도그마가 아직 종착역에 도달하게 아니라 여전히 해명되어야 하는 그 과정에 있다는 뜻이다.

2) 지시하는 사유: 우리는 자주 신학을 신 존재증명으로 생각했다. 그런 방식이라면 신학은 자연과학의 계량적인 사유에 머무는 격이 된다. 여기서 지시하는 사유라는 표현은 흡사 동양에서 말하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비슷한 의미로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 우리 설교 현장에서는 이런 지시하는 사유로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확인해주려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청중들을 흡사 위험한 장소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로 생각하고 늘 잔소리와 같은 교훈을 내리려고 한다.

3) 역운의 언어(Wort des Geschick): 하이데거가 존재의 말건넴에 응대하는 게 바로 본래적 사유의 과업이라고 했듯이 신학도 역시 하나님의 계시에 응대할 뿐이지 자기 스스로 계시를 밝혀내는 게 아니다. 그런 뜻에서 신학은 역운의 언어이다. 이 말은 곧 신학은 우리의 주관적 인식능력으로 무엇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응대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기본적으로 계시론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사유의 역운

 

지금까지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유를 설명했지만 이게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인류의 문명은 건전한 오성에 의해서 발전되었다고 믿는 상황에서 사유를 인간의 주관 영역으로부터 존재 역운으로 돌리는 하이데거의 시도는 그렇게 마뜩치 않게 들릴만하다. 사물의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성질을 분명하게 살피고 측량하고 계량하는 방식으로 오늘의 이런 문명사회를 일구어온 게 사실이다.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인류의 미래는 유토피아가 현실화할지 모른다. 오늘의 유전공학이 거의 끝을 모를 정도로 발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가 이런 생명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하고, 더 나아가서 생명 창조의 영역까지 개입하게 될 날이 올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유전공학이 훨씬 발전하는 미래가 되면 태아의 유전자를 조작함으로써 육체적으로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과 건강을 가진 아이들을, 그리고 지성적으로 거의 천재에 가까운 아이들을, 더 나아가 마음도 천사처럼 착한 아이들만 낳게 될 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 살다가 심장이 망가지면 심장을 갈아 끼우고, 시력이 떨어지면 눈을 갈아 끼우고, 뇌의 작용이 무뎌지면 자동차 엔진을 볼링 하듯이 간단히 원상으로 복귀시키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말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보고 인식할 수 있고,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건전한 오성에 매우 그럴듯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형이상학과 과학의 사유가 우리에게 거의 절대적인 진리의 척도로 제시되었지만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런 형이상학적 사고는 오직 확정 가능한 존재자에게만 의지할 뿐이다. 인간 오성으로 세계를 분별하는 방식으로는 존재자의 존재는 여전히 사유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존재의 말건넴 앞에서 사유가 역운적으로 속박되거나 자유롭다는 사상은 결코 진부한 주장이 아니라 그야말로 본질적 사유의 성격을 잘 나타낸 특성화이다.”(188). 오트는 자명한 것을 놀랍게, 그리고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면, 그는 결코 철학적 사유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그런 사람은 신학에서도 큰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신학도 하나님을 단지 명증한 존재자로 설정하고 그것을 형이상학적 기준에 따라 묘사하고 진술하는 행위가 아니라 계시에 응대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숲길이라 일컬을만하다.

이 문제를 조금 쉽게 풀어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는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생각하는 그 주체가 과연 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좀더 심각하게 질문해야만 한다. 물론 나의 뇌에서 그런 사유의 기능이 작용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사유에는 그런 뇌의 작용에 한정되는 않는 훨씬 근원적인 힘들이 작용한다고 보면 잘못된 것일까? 똑같은 진흙 덩어리를 갖고도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겨우 그릇 비슷한 것을 만드는 데 머물고 말지만 어떤 사람은 위대한 작품을 빚는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작품을 만든 사람의 머리가 좋다거나 경험이 많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서 어떤 시원적인 사유가 작동했다고 보아야 한다. 흡사 우리에게 성령이 작용하듯이 말이다. 이런 점에서 사유는 존재가 현존재를 통해서 작용하는 근원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의 신학도 역시 이런 시원적 사유의 영역을 확보해야만 계량적 사유라 할 과학이 일종의 메시아처럼 부각되는 이 시대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성서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인간의 주관주의적 사유를 뛰어넘어 시원적 사유에 참여함으로써만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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