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신학의 세계 지평

철학적신학 조회 수 2630 추천 수 0 2015.01.14 09:55:11

9

신학의 세계 지평

 

 

세계와 인간

 

기독교 신앙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목표이기도 한 하나님 나라의 세계성과 역사성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계와 하나님의 나라는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있다. 의로운 사람들이 가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하고 영원한 반면에 이 세계는 세속적이고 유한하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라는 흑인영가나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같은 복음찬송에 잘 드러나 있듯이 우리는 이 세계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철저하게 긍정하고 있다. 이런 이원론적인 세계관은 단지 근본주의적인 신자들의 정서에서만이 아니라 성서와 신학의 역사에도 매우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전반적으로 물질의 세계를 부정하는 일종의 정신주의로서 자리매김 되었다.

이런 이원론적인 나름의 정당한 논리와 직관이 있다. 성서와 신학은 이를 두 가지 관점에서 해명하고 있다. 하나는 이 세상의 유한성 내지 잠정성에 대한 직관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한탄하는 전도서 기자의 진술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삶은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했다고 하더라도 간단하게 폐기된다. 그렇다면 이런 물질적인 세계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시킬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렇게 손쉽게 해체되지 않는 저 세상에만 우리의 궁극적인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고, 바울도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가르친 바 있다. 요한계시록이 묘사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과 새 땅도 역시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를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죄가 그것이다. 성서 기자들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 바로 죄라고 보았다. 이런 죄는 이웃하고 있는 국가들끼리의 전쟁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존속 살인 사건에서도 확인되고, 충분한 부를 축적했으면서도 가난한 이웃의 재산을 빼앗는다거나 노예를 삼는 일에서도 확인된다. 이런 죄는 인격 수양으로 해결될 수 없을 정도로 뿌리 깊다고 보았기 때문에 성서 기자들은 선악과카인의 아벨 살해사건을 통해서 그 심각성을 증언했다. 기독교 교리 중에서 원죄개념이 이에 해당된다. 지금도 우리는 세례문답을 통해서 인간은 원죄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숙명적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배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이 원죄가 씻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죄의 경향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기독교 신학이 죄론에 경도된 역사적 동기는 아마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투쟁에서 다행스럽게도(?) 어거스틴이 승리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인간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남아 있다고 보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인간이 총체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그런 능력까지 완벽하게 훼손되었다고 보는 어거스틴의 주장에 의해서 이단으로 밀려났다. 인간에 관한 이런 이견이 알미니안과 칼빈주의 사이에, 그리고 브룬너와 바르트 사이에 계속 이어져왔는데, 기독교 주류는 역시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자기 구원의 불가능성을 선택했다.

물질적으로 구성된 이 세계가 허무하고 무상하기 때문에 영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는 기독교 신앙과 인간이 원죄에 물들어있기 때문에 오직 은총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일목요연하거나 확정적인 도그마라 할 수 없다. 이 말은 이 도그마가 근본적으로 왜곡되었다기보다는 여전히 논의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그 이유를 다시 두 주제에 따라서 검토해보자.

우선 어떤 사람들에게 허무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를 창조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첫 주제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이다. 만약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가 헛되다면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도 역시 헛된 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아름다웠지만 인간의 죄로 인해서 이 세계마저 죄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죄의 문제를 이렇게 자연에까지 확장시킨다면 그것은 단지 논리를 위한 것일 뿐이 보편적 설득력을 얻기는 쉽지 않다. 창세기에 서술되어 있는 아담과 이브의 타락이나 카인의 살인사건에도 인간의 죄만 다루어지지 자연의 타락은 언급되지 않는다. 아마 바울에 의해서 자연까지 죄의 능력 아래 놓였다는 점이 언급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율법과 극한적으로 투쟁해애만 했던 바울의 삶의 자리를 감안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지 오늘 우리는 창조론에 근거해서 이 세계를 보다 더 새롭게, 훨씬 영적인 지평에서 해석해야 할 시기에 도달해 있다.

인간의 원죄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인격이라는 부분과 숙명주의의 극복이라는 부분에서 여전히 논의가 필요한 교리이다. 인간에게 죄의 경향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죄의 세력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 만약 인간이 죄에 의해서 전적으로 타락해버리고 말았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그만큼 불완전하다는 말이 된다. 더구나 인간에 죄에 의해서 완전하게 부패했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 앞에서 무능력하다면 결국 인간에게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기독교의 죄론은 인간의 내면을 심층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인간을 숙명주의에 빠지게 하는 함정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 세상은 악하다든가,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말로 이 세상을 무조건 부정하는 태도는 현실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서적이거나 신학적이지도 않다.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여기서 한 마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 세상과 인간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곧 이 세상이 곧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하다거나 인간의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곧 구원이라는 뜻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구원의 나라)를 생산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자유(인격)로 일으킨다고 믿는다. 일종의 대강절신앙이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긴장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의 관계는 초월과 내재의 변증법적 성격이다. 이런 세계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예수의 부활에서 보듯이 순전히 정신적인, 또는 초월적이지 않으면서도 역시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의 세계와는 다른 사건이 바로 초월과 내재의 변증법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실체는 아직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았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세계와 그 나라는 우리에게 역운(歷運)적으로말을 건네고 있을 뿐이지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는 바로 이런 계시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점에서 존재는 세계로서 발생한다.”는 하이데거의 설명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비밀을 계시 사건으로 해명해야 할 신학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현실개념의 해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시대는 그 시대 나름의 세계관에 의해서 작동되었다. 아마 고대 동양은 거의 무속적인 세계관에 의해서, 고대 서양은 대표적으로 그리스도의 플라토니즘과 히브리의 야훼 신앙에 의해서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로 기독교와 로마 정치의 일치는 서양 세계를 이끌어온 유일한 토대였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유럽의 종파전쟁을 거치면서 세계문명과 종교 사이에 놓였던 다리에 균열이 생겼으며, 데카르트와 로크 이후, 또한 프랑스의 계몽주의와 독일의 관념론 이후로 자연과학에 토대를 둔 세계관은 종교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종교가 이 세계를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면, 대신 그 자리를 자연과학이 차지했다. 이런 결과에 이르게 된 원인과 그 과정은 하이데거의 세계 개념이라는 오늘 우리의 주제와 직접 연관되지 않으니까 접어두도록 하자. 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이 급진적인 발전을 이룬 과학과 기술이 이 세계를 해명하는 유일한 권위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사실만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의 정신은 오늘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현대인들에게 궁극적인 진리는 자연과학에 의해서만 검증받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또 하나의 극단적인 기독교의 반응은 소위 창조과학회가 펼치는 작업이다. 그들은 성서의 내용이 자연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는 텍스트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또 다시 자연과학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논리학을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똑같은 차원에서 반론에 직면한 것처럼 성서의 내용에 대한 자연과학적 증명은 동일한 반론에 직면할 뿐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근대의 자연과학적 발전을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물리적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해명하고 있다.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존재 망각이 일어났던 것처럼 형이상학의 극단이라 할 자연과학에서도 역시 일들이 그대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근대 과학 인식의 결과가 정당한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게 아니라 그 결과를 얻게 된 근거가 되는 방법과 공리의 자명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미 데모크리토스가 만물의 본질은 원소라고 본 것으로부터 물리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결국 자연과학은 형이상학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한 시대를 근거 설정한다. 형이상학은 존재자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통하여 그리고 특정한 진리관을 통하여 그 시대의 본질적 형태의 근거를 제공함으로서 그 시대를 근거 설정한다. 이 근거는 그 시대를 특기하는 모든 현상들을 두루 지배한다. 반대로 이 현상들을 충분히 고찰하기 위하여 이 현상들 속에서 형이상학적 근거가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 고찰은 자신의 전제들의 진리 여부와 자신의 목표들의 공간을 극도로 의문시하는 용기이다.”(Die Zeit des Weltwildes, 69). 예컨대 천동설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모든 논의들이 이 천동설에 토대를 두고 전개되는데, 이런 사태를 정확하게 인식하려면 이 천동설 자체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일반적인 과학자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이 천동설 자체가 안고 있는 논리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뛰어난 과학자가 출현하게 된다면 천동설은 그 토대를 상실하게 된다. 그 이전 까지는 이 천동설이 모든 자연과학의 평면도 역할을 한다. 따라서 모든 자연과학자들은 이 평면도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일들은 단지 천동설과 지동설이라는 이미 알려진 사실만이 아니라 아직 우리에게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물리학과 생물학의 세계에도 역시 적용된다. 우리는 아직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 ()이론, 게놈 이론 이후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의 평면도 안에서 이 세계를 말해야 하지만 이 세계가 이런 이론 안에 닫혀 있는 게 결코 아니다. “연구의 근본적 진행은 ... 존재자의 한 영역에서, 예를 들어 자연에서자연의 경과에 대한 어느 특정한 평면도가 설계됨으로써 수행된다. 그 설계는 인식하는 동작이 자신을 열려진 구역에 어떤 방식으로 속박해야 할지를 앞에 그려 보인다. 이 속박이 연구의 엄밀성이다.”(aaO. 71). 그래도 이런 이론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게 아닌가, 하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런 과학적 증명이라는 것도 역시 우리 시대의 과학적 평면도에 의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앞에서 학습한 하이데거의 논리에 따라 이 문제를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미 언급된 것을 기준으로 해서 진행될 뿐인 자연과학은 아직 언급되지 않은 것에서 역운적으로 계시되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일상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아가 있다고 하자. 이 아이는 배가 고플 때마다 울기만 하면 어머니의 젖을 먹을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닫고 있다. 이 아이는 반복 실험을 통해서 이 논리가 엄밀한 과학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이 아이에게 정확한 공리로 경험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현상으로 어머니와의 관계를 모두 해명할 수는 없다. 이런 공리에 절대적으로 묶여 있는 아이라고 한다면 어머니가 아프다거나 급한 일도 자리를 비우게 되는 어느 날 흡사 지동설을 깨닫게 된 인류처럼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헬라인들의 과학이나 현대의 첨단 과학 사이에는 아무런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과학이 다루어야 할 대상의 특성을 밝혀나가는 그 방식이 이미 주어진 평면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물리학에서는 기하학적인 점 역학으로 표상되고, 오늘의 물리학에서는 원자핵과 장이라는 표제어로 표상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의 이런 입장은 인간의 주관주의적인 사유나 언어행위를 제거하고 그것을 존재의 역운에서 바라보려고 했던 것처럼 현대의 자연과학적인 현실 이해를 상대화하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 학문은 결코 정밀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그것은 본질상 정밀할 수도 없었고 정밀한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 과학이 고대의 학문보다 더 정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갈릴레오의 물체의 자유낙하설은 참되고, 가벼운 물체는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이 있다고 가르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물체의 본질과 장소의 본질 및 양자의 관계의 본질에 대한 그리스적 이해는 다른 존재자 해석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자연의 경과를 보고 묻는 방식도 다르게 제약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셰익스피어의 시가 아이쉴로스의 시보다 발전 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근대의 존재자 이해가 그리스의 존재자 이해보다 더 올바르다고 말하기는 더욱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대 과학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면 우선 최신의 과학을 이전의 과학보다 단지 등급적으로 발전관계에 따라 강조하는 습관을 버려야한다.(Die Zeit des Weltbildes, 70이하).

 

그렇다면 우리는 오트가 지적하듯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정밀한 자연과학의 현실 개념에 따라서, 그리고 정밀한 자연과학에서 보는 현대인의 현실개념에 따라서 파악되는 현실은 현실 제체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이 자기를 보여주는, 즉 현실이 임재 하는 어떤 방식과 일치할 뿐이다.”(223). 신학적 버전으로 표현한다면, 자연과학의 이론들은 하나님의 계시 자체가 아니라 계시의 방식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데거가 철학의 전통을 부정하지 않듯이 자연과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연과학은 존재의 역운에 응대하는 태도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비은폐성인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근대의 자연과학은 과학이 존재 역운인 이 세계를 자신들이 처분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오히려 존재가 자신을 은폐시키고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세계내존재인 인간이 그 세계를 다룬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개척한다기보다는 자신을 도구화하는 결과에 이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늘의 유전공학에서 인간의 유전암호에 대한 설계도를 상당한 부분까지 해독해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인간이 읽혀지는 걸까? 어쩌면 자연으로서의 인간은 그런 해독술에 의해서 훨씬 더 많은 부분이 가려지는지도 모른다. 존재가 현현할 수 있도록 사유하는 현존재인 인간을 이 시대의 유전공학적 평면도를 통해서 조작하려고 한다면 인간 본질은 더욱 은폐될 수도 있다. 그런 기술을 확대해가는 인간의 사유가 바로 존재의 역운에 근거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인간을 대상화해서 분석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하이데거는 자연과학이 이미 대상성에 의해서 제한된 영역에 자신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자연의 숨은 본질 충만을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피해버린다고 말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서양의 형이상학이 존재 망각에 빠져버렸듯이 자연과학도 역시 존재의 역운성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연은 자연의 본질 충만이라는 점에서 자연을 대상화하는 과학에 자기를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역시 자연과학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리학은 물리학으로서 물리학에 관하여 아무런 진술도 할 수 없다. 물리학의 모든 진술은 물리학적으로 말할 뿐이다. 물리학 자체는 물리학적 실험의 가능적 대상이 아니다. 언어학도 마찬가지다. 언어학은 언어와 문학의 이론으로서 결코 언어학적 관찰의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과학에 대해서도 역시 타당하다.”(65).

 

()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근대 자연과학과의 논쟁에서 하이데거가 제시하고 있는 세계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의 개념을 따라잡아야 한다. 그의 물 개념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주관적으로 자연을 다룰 수 있다는 근대의 자연과학관을 극복하기 위한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다. 더구나 <존재와 시간>으로 시작한 하이데거의 사유가 최종적으로 물로 전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존재 이해가 단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게 아니라 근원적이라는 사실을, 또는 실존주의라기보다는 존재론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는 기독교로서는 이 사물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을 통해서 그것의 영적인 지평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물()은 단지 정적인 상태의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의 지평에서 이해되어야 할 역동적인 발생사건(Ereignie)이다. “모든 존재자는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자기 자신에게 되돌려지게 되는 사건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존재자의 기본적인 존재론적 구조이다. 그러나 이 구조는 발생사건 속에, 즉 존재와 인간의 서로 내맡겨져 있음 속에 근거해 있다.”(231). 존재의 밝혀줌은 현존재를 통해서 물이 있는 그대로 있도록, 그것이 물로서 본재(本在)하도록 가능한 공간을 제공한다. 물에서 어떻게 존재의 발생사건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잔()을 통해서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잔은 제작되었기 때문에 그릇이 아니라. 오히려 잔은 이러한 그것이기 때문에 제작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제작은 잔을 잔 자신의 것이 되도록 만든다. 그러나 잔의 본질의 이러한 자신의 것은 결코 제작을 통하여 만들어지지 않는다. <중략> 주벽과 바닥은 그릇에 있어서 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직 담는 것은 아니다. ... 그릇의 담는 것은 비어 있음이다. 비어 있음, 즉 잔에 있어서의 이런 무는 제작의 손길마다 규정한다. 그릇의 물적인 것은 결코 재료에 있지 않고 도리어 담고 있는 비어 있음에 있다.

 

우리는 보통 잔이라는 사물을 볼 때 그것의 쓸모만 보거나 그것을 만든 사람을 생각하지만 하이데거는 잔의 비어있음을 본다. 이 비어있음이 존재의 자리이며 이렇게 비어있음이 인간을 통해서 드러남으로써 이것이 하나의 발생사건이 된다. 즉 하이데거에게는 이 비어있음과 발생사건이야말로 물의 궁극적인 현실인 셈이다. 이에 반해서 과학은 이 물을 추상화하고 물의 핵심을 왜곡시킨다. “추상은 자체상 자신을 유일하게 표준적 현실로 고입하면서 다른 모든 생각의 길을 단절하거나 혹은 시()적인 것이라고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다.”(233)

잔의 비어있음이 잔의 본질에 대한 소극적인 해석이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부분은 잔의 본질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이다. “잔의 비어 있음이 어떻게 담는가? 비어있음은 들여 부어지는 것을 잡음으로써 담는다. 비어있음은 수용된 것을 간직함으로써 담는다. 비어있음은 이중으로, 즉 잡음과 간직함으로써 담는다. ... 잔으로부터 따라냄은 선사함이다. 담고 있는 비어있음의 본질은 선사함에 속에 수집되고 잔의 잔다움은 부은 것의 선물 속에서 본재한다.”(170). 독일어의 직역이기 때문에 이런 문장을 이해하기는 좀 까다롭지만 그 내용은 매우 명쾌하다. 하이데거는 겉모양의 잔을 서술하려는 게 아니라 잔이라는 물의 존재 역운적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그 안에 담기는 물, 그것이 들어갈 수 있는 비어있음은 단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존재의 발생 사건적 현상이라는 말이다. 잔은 비이었음을 통해서 잔으로서의 본질을 유지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갈증을 느끼는 누군가에게 해갈의 선물을 주는 그 사건과 연결됨으로써 존재의 역운에 참여한다. 이런 잔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곧 사중자’(Gevierte)의 회집이다. 하이데거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부은 것의 선물은 마심(Trunk)일 수 있다. 마심은 물이나 포도주를 마시도록 준다. 그 선물의 물() 속에는 샘이 체재한다. 샘 속에는 암석이 체재한다. 암석 속에는 하늘의비와 이슬을 맞는 땅의 어두우누 졸음이 제재한다. 샘의 물 속에는 하늘과 땅의 결혼식이 제재한다. 그 결혼식은 포도주 속에 제재한다. 포도나무 열매가 포도주를 준다. 포도 속에 있는 땅의 자양분과 하늘의 해가 서로 신뢰하여 맡긴다. ()의 선물 속에서, 포도주의 선물 속에서 그때마다 하늘과 땅은 체재한다. 그러나 부은 것의 선물은 잔의 잔다움이다. 잔의 본질 속에는 땅과 하늘이 체재한다. 부은 것의 선물은 사멸할 자들을 위한 마심이다. 마심은 사멸할 자들의 목마름을 해갈시킨다. 마심은 사멸할 자들의 한가로움을 원기 회복시킨다. 마심은 사멸할 자들의 교제를 쾌청하게 한다. <중략> 부은 것의 선물 속에는 사멸할 자들과 신성들이 각기 상이하게 체재한다. 부은 것의 선물 속에는 땅과 하늘이 체재한다. 보은 것의 선물 속에는 특히 땅과 하늘, 신성들과 사멸할 자들이 체재한다. 이 네 가지는 자체로부터 볼 때 하나이지만 함께 속한다. 그들은 모든 임재자들보다 먼저 와서 하나의유일한 사중자 속으로 겹쳐져 있다. 부은 것의 선물 속에는 넷의 겹침이 체재한다(170f.).

 

위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 글이 철학이라기보다는 흡사 요정이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처럼 느낄 것이다. 일개의 사물인 잔에 신성, 사멸할 자, 하늘, 땅이 체재한다는 말은 어떤 논리적 타당성이 없이 단지 문학적 수사에 불과한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만약 자신이 셰익스피어보다 이 세계를 정확하게 직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글에 대해서 냉소를 퍼부어도 괜찮겠지만 이 세계의 비밀과 신비를 약간이라도 들어다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는 못하리라. 하이데거 따라하기 차원에서 책상에 대해서 설명해보자.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책상이라는 사물을 단지 사람이 그 앞에 앉아서 공부하는 물건이라거나 또는 이 책상을 만든 사람의 수고, 더 나아가서 그 책상의 경제적 가치만으로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상에 연루된 사태를 우리가 모두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이 책상을 마음대로 다루거나 계량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 어떤 다른 힘의 발생 사건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이 책상의 소재인 통나무는 인도네시아의 보루네오 섬에서 자랐을지 모른다. 그 숲을 조성하고 있는 모든 나무들은 태양의 에너지와 물과 탄소가 결합하여 탄소동화 작용을 일으킨다. 여기 있는 이 책상 앞에서 공부한 어떤 학생은 나중에 위대한 신학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영원과 생명의 세계를 사람들에게 해명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상을 단지 이 순간에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은 어떤 대상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신성과 사멸자와 하늘과 땅이 우리가 모른 방식으로 작용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대량 생산이 일상화한 기술 시대에서는 물은 더 이상 본질적인 의미에서 물이 아니다. 생산품은 사중자를 회집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계의 기술적 지배(Bemächtigung)에 이용되는 대상으로 떨어져버렸다. 그렇다면 물은 더 이상 존재의 역운으로부터 언급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인가? 이 문제는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존재가 망각되었지만 그것 자체가 존재의 역운인 것처럼 비록 오늘의 물들이 존재를 드러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의 역운이라는 사실을 포착하는 게 중요한다. 존재는 기술 시대에 물에서 자신을 은폐하면서 물이 아닌 기술의 대상들속에 본재한다.

 

우리는 오늘날 아직 한번도 그것을 위한 바른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기술적으로 지배 가능한 과학의 자연과 인간이 습관적으로 거주하는 자연적 자연이 서로 두 개의 낯선 구역으로 떨어져 있고 그 낯설음이 계속적으로 촉진되어 점점 더 멀리 서로 갈라져 나간다는 것은 의문시할 만한 것이다. 자연의 계산 가능성이 자연의 신비를 푸는 유일한 열쇠를 위하여 내주어진다는 것은 의문시할 만한 것이다. ... 자연적 자연이 환상적 구축물의 무실한 것 속에 가라앉아서 다시는 한 번도 시인들에게 말을 건네지 못한다는 것은 의문시할 만한 것이다. ... 모든 것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집안 친구가 없는 세계의 집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미혹에 빠진다. 집안 친구는 말하자면 같은 방식과 장점으로 기술적으로 준공된 우주와 더 본원적 거주를 위한 집으로서의 세계에 기울어져 있다. 그 집안 친구는 자연의 계산 가능성과 기술을 새롭게 경험된 자연의 자연스러움이라는 공개된 신비 속으로 되돌이켜 감출 수 있다.”(여기서 집안 친구는 존재에 대한 다른 이름일 것이다. 필자 주)

 

계시의 세계 차원

 

하인리히 오트는 하이데거에게 물 개념이 전개되지 않았다면 존재의 명령에 따라 사유하는 인간과 물체적 세계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선험적인 존재의 역운은 이 세상을 철저하게 초월하면서 진행되기 때문에 이 세상과는 철저하게 유리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놀랍게도 물에서 존재의 역운을 해명함으로써 존재와 물, 존재와 역사, 존재와 세계의 토대를 탄탄하게 다졌다.

사실 기독교 신학에도 물의 문제에 돌입하기 이전에 하이데거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런 긴장이 있다. 하인리히 오트에 의하면 신학은 한편으로 성서의 소식 및 그 소식이 증언하는 우주적 차원 앞에 서 있음을 알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계시 및 성서를 통한 계시 증거의 인격주의의 법 아래 서 있다. 다시 말하면 계시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말건넴과 결단과 죄책과 책임을 통하여 규정된 인격들 사이의 관계들이다.”(252).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인식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계시 사건에 우리가 노출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가 인식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할 이 세계에 직면해 있다는 말이다. 한쪽은 신앙의 세계라 할 수 있고, 다른 한쪽은 보편적 학문의 세계라 할 수 있는데, 이 두 세계 앞에서 신학은 어정쩡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말건넴에 무게를 둔 초자연주의나 인간의 인식론적 토대에 방점을 치는 합리주의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오트는 하이데거의 물 개념에서 파생되는 사이’(Zwischen) 개념이 이런 긴장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 사이는 결실불능한 반명제로부터 한번에 취소불능하게 벗어나도록 신학적으로 사유하는 자에게 희망을 준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물 해석에서 볼 수 있는, 세계의 역사적 신체성의 사이이다. 이 새로운 시도는 과학의 전체성 주장을 해체하는 방법이 동반될 때 그만큼 더 확신 있게 작용한다.”(253). 오트에 따르면 물이 단순히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사중자의 회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물 개념에 의해서 존재와 세계 사이의 관계는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돌입한 게 된 것인데, 바로 여기서 신학은 하나님 계시와 세계의 모호한 관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오트의 설명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자.

 

이제 신체적인 물의 세계가 다시는 자체상 폐쇄되어 외부로부터 어떠한 개입에도 철갑을 둘러친 내재성의 관련성이 아니다. 이 내재성과의 관계에서 보면 창조론, 섭리론, 마지막 날의 땅의 완성 등은 단지 사상(事象)에 아무 관계 없은 순수한 이론적 주장으로만 나타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자체상 폐쇄된 내재성의 관련성으로부터 출발하고서도 창조 등에 대하여 주장한다면 그것은 단지 미봉책으로서의 고약한 언설일 뿐이다. 개별적인 피조물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창조의 사건에 대한 어떠한 내적 관계도 없게 된다(253).

 

하이데거의 물 개념에 의하면 이제 물은 더 이상 폐쇄된 숙명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신체적(leibhaft) 세계는 초월을 향해서 열려진다. 물이 신성들과 사멸자들, 하늘과 땅이 회집하는 공간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영적인 차원으로 열린 구조를 갖게 된다. “신체적인 것으로 증거된 주님의 부활과 신체적인 것으로 증거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다시는 부자연스럽게 신체성이 벗겨져서 한편으로는 역사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자연주의적인 사고의 법관석 앞에서 합법적으로 나타내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이 세계를 성속 이원론에 근거해서 무시하면서 순수 심령주의에 빠진 경향을 보였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마르크시즘이 등장했으며, 오늘의 자연과학자들도 역시 이런 기독교의 심령주의에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런 우리의 태도는 당연히 반성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학자의 세계 해석 앞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사이비 과학주의(창조과학회)에 빠지는 것은 훨씬 위험한 선택이다. 이제 하이데거의 물 사유로 인해서 신학은 물의 영성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기독교가 말하는 영성과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 또는 만물에 긷든 창조자의 손길과 존재의 역운이 발생하는 물이 만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 셈이다. 하이데거 사상이 기독교 신학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하인리히 오트의 설명을 들어보자.

 

이처럼 최근 하이데거의 사유 시도가 신학에 대해서 가지는 가능한 의미는 광범위하다. 창조론으로부터 기독론을 거쳐 종말론에 이르고 성례전론과 교회 론에까지, 그리고 섭리론과 기도론에 있어서 신앙을 위한 계시의 최종적 구체화와 활성화에까지 이른다. 물에의 전향은 하이데거의 사유의 사유에 있어서 이제까지 마지막으로 디딘 발걸음이고 가장 깊이 성찰된 성찰의 최후의 발걸음이다. 이것은 신학으로 하여금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변증하는 고집에서 풀어놓아 자유롭게 성서를 듣도록 하기에 적합하다.”(254).

 

하인리히 오트의 해명에 의해서 하이데거의 물 개념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초월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가 바로 물로 이루어진 지상천국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단지 우리는 물과 영의 이원론으로부터 벗어나서 물의 영성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한 것으로 만족해야만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미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순수 심령주의를 선택한 적이 없으며,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도 역시 신체성이 부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존재가 세계로서 발생한다는 하이데거의 세계와 물 이해는 기독교 신학으로 하여금 앞으로 착수해야 할 신학적 과업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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