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
천당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공간적인 의미를 주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죽은 다음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어떤 곳, 혹은 어떤 때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비슷한 의미라는 걸 전제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천당에 가면 우리는 서로 알아 볼 수 있을까? 저 사람은 나의 어머니, 아버지, 동생, 이 사람은 나의 아내, 남편, 아들과 딸들이라고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늘나라, 혹은 천당에 가면 다시 반갑게 만나게 될 것이라는 찬송이나 몇몇 성구에 따르면 그럴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생각의 폭을 넓히면 이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우리가 보통 어떤 사람을 알아보려면 그 사람의 생김새, 성격, 옷차림 등을 확인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알아보려면 그가 이 땅에서 살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해야만 할 것이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게 될까? 지금과 같은 이런 얼굴과 체형을 그대로 유지하는가? 더 나아가서 ‘나’는 어느 나이 때의 나일까? 나는 태어날 때부터 80살까지 계속되는데, 어느 때가 진정한 나일까? 만약 죽을 때의 모습을 하늘나라에서도 유지한다면 하늘나라는 완전히 양로원 같을 것이다. 내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돌아가셨다면 하늘나라에서는 내가 할아버지보다 훨씬 늙은이로 살아갈 것이다.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거나, 장가가고 시집하는 게 아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걸 보면 오늘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존재양식과는 전혀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조금 말을 바꾸어, 하늘나라에 갈 것까지 없이 지금 이 땅에서 ‘나’의 실체는 무엇일까? 나는 몸인가, 인격인가, 마음인가, 심지어 목사, 학생이라는 직책인가? 심층심리학에서는 인간을 다중인격체라고 하는데, 만약 그 말이 옳다면 오직 하나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 이 땅에서의 ‘나’라는 정체성도 사실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 내 정체가 어떨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거의 무모하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의 구원이 분명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실체가 여전해 숨어있다는 말이다.
기독교 구원론에서 우리가 빠져들기 쉬운 오류는 이 땅에서의 생명 형식을 절대화하고 하늘나라의 생명을 이런 땅의 생명이 연속하거나 확대되는 것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마음에는 죽어 천당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배고프지 않고 싸움도 없고 영원하게 행복하게 사는 걸 기대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내다 탓하고 싶지 않다. 단지 소박하게 그런 희망을 품고, 믿고 사는 것은 옳다. 그러나 자기의 그런 생각을 절대화하게 되면 그것은 이제 신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참된 신앙과 이데올로기의 혼동 말이다. 사람들은 실존적으로 불안할 뿐만 아니라 여러 심리적인 억압과 욕망에 사로잡혀서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기의 삶을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만들 가능성이 많다. 이런 것이 집단화하면 폭발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바로 그러한 전형이며, 사이비, 이단 종파들도 마찬가지이다. 약간 상식적으로 자기 성찰이 가능한 사람들은 이렇게 극단적인 이단에 빠지지 않지만 그럴 가능성들은 누구나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청중들을 바르게 이끌어 가는지 끊임없이 성찰해야만 한다. 이런 성찰이 곧 신학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 신학 무용론이 지배하고 있다는 이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신학적인 성찰은 신앙의 이데올로기화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판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는 목회자나 몇몇 지도자의 신앙경험과 그 열정에 의존하지 말아야 하고 철저하게 교회의 역사에 의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교회 역사는 이런 신앙의 왜곡을 뚫고 2천년동안 바른 길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그중의 하나가 교회력이다. 교회의 모든 예전, 성서읽기, 설교, 행사 등등, 이런 모든 것들을 교회력에 근거해서 실행해야만 우리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 시리즈 강해설교가 범람하고 있는데 이건 교회력 전통을 무시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시 머리말로 돌아가서 우리는 천당에 가서 서로 알아볼 수 있을까? 당연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서로를 확인하는 이런 방식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이런 생명 형식과는 전혀 다른, 혹은 완전히 변화된 그런 어떤 생명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런 새로운 생명마저 우리의 경험과 선입관과 우리의 욕망으로 재단하지 말자. 그건 오직 하나님만이 통치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그런 생명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이 놀랍고 자유롭고 기쁜 그런 세계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로서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처럼 깨어있으라고 가르치신 게 아닐는지.
제가 평소에 생각해 오던 것을 목사님께서 일목요연하게 정리 잘 해 주셨군요. 좋은 글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