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시편 36편 녹취록

조회 수 1842 추천 수 0 2008.12.23 10:12:53
시편 36편 강해(081220)

오늘 말씀은 시편 36편입니다. 이제 제가 받들어 읽겠습니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하는 빛이 없다 하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아래 피하나이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교만한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악을 행하는 자들이 거기서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아멘.

오늘 제가 읽은 시편 36편 1편에서 12절 말씀은 조금 내용이 다른 두 가지 시가 하나로 묶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1절에서 4절까지예요. 여기에는 악한 자, 악의 행태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5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이거는 앞에서 나오는 악한 자와 악에 대한 악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대(對)가 되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주 신실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시심을 높이는 송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하게 구별되죠. 앞에 있는 거는 악의 속성에 의한 진단이라고 한다면 두번째는 그것과 완전히 대별되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의에 대한 송영입니다 서로 다른 내용이지만 그  두 가지가 하나의 시 안으로 결합되는 것은 의의가 있는거죠.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악행들 그 악을 가능하게 하는 그 선천적인 악, 존재론적인 악을 이야기하면서 그러나 시인은 거기에 매달리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집중한다고 하는 점에서 이 두 가지는 겉으로 드러난 면에서는 다르지만 시적인 감수성이라는 점에서 볼 때 같이 이야기될 수 있는 겁니다.

세번째는 10절부터 12질까지인데 10절과 11절, 나머지 12절인데 12절은 결론인데요. 10절과 11절 이거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에 대한 평가 하나님의 신실하신 송영이 끝난다음 하나님에 대한 기도라고 할 수 있고 12절은 그 모든 것에 대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엃게 본다면 시편 36편은 크게 보면 세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4절, 5절-9절 10-12절입니다.

1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하는 빛이 없다 하니” 문학적인 표현이죠. 이 악, 악인의 죄가 마음속으로 이른다고 할 때 죄가 이른다고 하는 거는 좀 표현이 사실적인 것은 아닙니다. 악인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는 거죠. 이 죄라고 하는 것이 개념적인 용어인데 그것이 의인화되는 것 같습니다. 죄가 마음속으로 이른다. 죄라고 하는 이 개념이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것 처럼 표현되죠. 문학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적인 장치가 첫 귀절에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악인, 죄 그냥 하나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죄에 빠진 사람을 악인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는 것이죠.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죠. 이 말은 곧 자기 행동에 대해서 자기의 잣대로 생각한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하는 그러한 경향, 이런 것들을 우리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로 죄의 구체적인 결과들은 상대방을 파괴하는 것 파렴치한 일을 행하는 것, 그러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의 행위를 드러난 것만으로는 죄가 이다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행위라고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평가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를 들자면 어떤 부모가 아이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따끔하게 때렸다고 합시다. 그 행위 그거를 어떻게 봐야 될까요?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는 그러한 체벌을 가해야 된다. 마땅하다 생각이 들 거구요.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리 그렇더라고 아이들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생각될 수 있을 겁니다. 똑같은 행위인데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것은 판단하기는 쉽지는 않습니다.

작은 차원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더 큰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국군이 이라크에 주둔했다가 자이툰 부대라고구요. 크게 사고 나지 않고 말썽 부리지 않고 미안합니다. 표현이 적당하지 않았군요. 실제로 이라크 주민들과 폭력적인 방법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건설 지원 그런 것이었지만 마음 한편으로 찜찜한 구석이 있었지만 소기의 목적을 잘 이루고 돌아온 것 같습니다. 크게 사고가 난 게 없는 거 같고요. 천만다행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미국 주도하에 일어난 전쟁의 한 구석을 담당했다고 하는 점에서 이게 역사적으로 어떻게 판단될지는 모르지만 마음이 그렇게 깨끗한 것은 아니거든요. 아마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이 일으킬 때 미국에 있는 많은 국민들이 지지를 했어요. 지금은 그 지지가 다 돌아섰습니다만 그 당시는 그랬습니다. 그러한 전쟁을 일으킨 행위인데 그렇게 어느 한쪽에서는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완전히 거부하고 하여튼 그러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행위만을 갖고는 이게 쉽지 않다. 모든 것을 판단 못한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드러난 것 몇 가지로 현상적으로만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요. 근원적인 어떤 악한 힘과 연루된 그 점을 놓치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죄이거든요. 인간이 그런 거죠.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간의 행위들도 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그렇게 판단된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죄의 핵심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는 거예요. 그것도 교만이라고 할 수 있고요. 자기 사랑, 아모르 쉐이 자기 집중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는 거죠. 이거 이 문제가 인간 죄론과 연관해서 아직도 완전히 아직도 완전히 풀지 못한 문제입니다. 인간이 왜 죄를 짓느냐는 거죠. 죄의 책임이 누구인가 하는 겁니다.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한 뱀의 책임, 그렇게 우리가 연관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뱀도 여전히 하나님이 만든 거라고 한다면 그렇게 뿌리를 찾아 올라간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책임까지 가는 것이 아닌가? 성서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잘못이 아니라 그 뱀을 대표하는 타락한 천사로 대표되는 어떤 근원적인 존재가 더 결정적인 책임이 있는게 아닌가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또 우리들의 책임들이 인간들이 져야 될 책임들이 다 무시되기 때문에 그것도 바람직한 해석은 아닙니다. 조금 더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될 문제들이죠.

성서는 이 두 가지 문제를 정확히 짚고 있는 거예요. 분명히 악한 행위들은 인간이 저지른 것이라서 인간이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이 하나고요. 하나는 더 근원적인 힘들이 인간에게 임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거죠. 오늘 여기 1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는 것 스스로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자기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 이런 것들이 악인, 죄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절 이렇습니다.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이 드러나지 않고 미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자기에 대한 합리화죠. ‘자기가 그런 일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들키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것으로 자기에게 불이익이 오지 않는다.’ 그걸 확신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파렴치범들은 오히려 순진한 거예요. 누구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은 양심을 가책을 받지 않습니까?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자기합리화가 아주 강하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것도 모르면서 그런 일을 행하는 거죠. 더 근원적으로 죄가 깊이 연관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동안에도 오히려 그 당시 파렴치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세리나 죄인들을 향해서 회개해라 이런 닦달하지 않으셨다 말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어깃장난 사람들은 자기 확신을 한 사람들이었죠. 종교적으로 자기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포악한 죄의 모습들을 나타냅니다. 여러분들이 늘 들었듯이 기독교 역사에 마녀재판, 종교재판 이런 것들을 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는 거죠. 하나님이 내편이라고 하는, 하나님 안에서 정당성을 확보한 채 어떤 사람들, 어떤 제도들, 어떤 문화들을 파괴하는 행동들이 많았거든요. 자랑하는 거죠. 아무 문제없다.

3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4절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침상에서 마저 죄악을 꾀한다. 그러니까 자나 깨나, 깨나 자나 늘 그러한 것만 생각한다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이익을 채울 것인가. 아니면 남에게 피해가간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할 것인가 그러한 쪽으로 완전히 빠져 있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 그러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침상에서마저, 꿈속에서 마저 어떤 자기합리화에 빠진 채 파괴적인 생각과 행동을 한다.’ 하는 거죠. 1절에서 4절까지 악과 죄의 본질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앞서 말씀드린 대로 5-9절까지는 앞에 나오는 것과 완전히 대립되는 신실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진실하심이 하늘과 공중에 있다. 주의 인자하심? 이거를 우리가 어떻게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을까요? 인자하심. 악이나 죄와 완전히 대립되는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이자 동시에 능력이거든요. 인자하다. 인자하심.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는 두려울 게 없는, 그 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니까요. 그렇게 인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뻔뻔스럽게 잘못을 해도 괜찮다는 그러한 뜻은 아닙니다. 성서를 읽을 때 조심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니까 이렇게 해도 괜찮다 그런 쪽으로 읽으면 잘못된 것입니다. 성서기자들은 하나님의 그러한 속성들을 말하고 있을 뿐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신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죄를 지어도 된다, 악을 행해도 된다고 한다면 그거는 우리가 성서를 거꾸로 읽는 겁니다. 동시에 이런 것은 있는 거죠. 우리가 어떠한 악을 행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그렇게 용서하시기 때문에 악을 행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어떠한 죄와 악 가운데 머물러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받아주신다. 인자하심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실하심이 공중에 선포되었다 하늘과 공중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근원적인 어떤 세계를 말하는거죠. 근원적인 세계 말입니다 하늘과 공중, 이 땅에서는 인간들이 마음대로 싸우고 미워하고 그렇게 살지만 하늘과 공중에는 고대인들의 표현에는 그러한 땅에서 일어나는 오만가지의 변화되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하나님의 참된 통치영역이거든요. 그러니까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인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시적이다. 근원적이다.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 그런 세계 안에 영적 세계안에 깊이 들어간 사람들이 신앙인들이죠. 하나님에 대해서 뒤로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6절,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의가 산, 하나님은 산과 같고 높다 확 드러난다. 분명하다. 산은 보이잖아요. 의인은 그렇게 드러나고 심판은 바다와 같다. 모든 것들을 평정하니까 모든 것들을 다 담아내니까 심판도 사실은 하나님의 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이면서 은총일 수도 있어요.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현재 억울한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6절 후반절에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구원에 대한 문제예요. 6절에 중요한 용어들이 나왔군요. 주의 의, 죄의 심판 이것은 주의 구원과 연관됩니다. 하나님의 옳음, 하나님의 판단, 이런 것들은 구원의 차원이다 하는 거죠. 그러한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인간들의 이해타산 때문에 움직이는 것과 같은 세상 속에서도 전혀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와 주님의 심판, 그리고 그분의 구원, 여기에 우리의 삶을 완전히 의존하는 거죠.

이러한 시각들이 우리에게 좀 필요한 것 같아요.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드냐 안드냐 너무 민감하잖습니까? 인정받느냐 아니냐 이런 것들로 우리가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어쩔 수 없겠지요. 그러한 영향을 어떻게 받지 않고 살아가겠습니까? 감정도 있기도 하고 우리가 여전히 구원의 세계에 완전히 들어가지 않는 상태라서 부활의 생명으로 변하지 않는 상태라고 한다면 우리는 결국은 주변의 영향을 분명히 받습니다. 그거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래도 이런 말씀을 통해서, 경건, 신앙 훈련을 통해서 그러한 영향을, 사람들로부터 영향, 조건과 환경들로부터 받는 영향을 넘어서서 하나님에게 실질적으로 우리 삶의 토대를 두는 것, 그게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그건 개인에 따라 차이가 많이 있어서 그것을 딱 선을 그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전제하면서 성령에 온전히 의존해서 산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평화 이런 것들이 임한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인자하심, 진실하심, 의, 심판, 구원, 이런 세계속으로 들어가야 되겠지요.

7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아래 피하나이다.” 인자하심, 피함, 인자하심을 주님의 날개 그늘로 표현했군요.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병아리가 암탉 가슴아래 피하듯이 새들이 어미 새의 날개아래 피하듯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에게 피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시거든요. 하나님의 인자하심, 5절에 나와 있는 그 단어죠. 그게 여러분들에게 느껴지시나요. 하나님의 인자하심 말입니다.

8절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주의 집에 있는 살찌우게 하는 것, 그게 뭘까요? 지금 이 시가 다른 시편들도 상당히 많은 시들이 그렇다고 볼 수 있는데 축제시, 제사 행위때 불리는 거거든요. 제사를 드릴 때는 제물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제사장이 제단에 올려놓고 일부를 제사장이 취하기도 하고 제사를 들리러 왔던 사람들이 같이 먹기도 하고 그런 거거든요. 아마 그러한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거는 더 영적인 거죠. 그렇게 봐야죠. 주님의 집에는 영적인 먹을거리도 풍족해진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늘 풍족한 것은 아닙니다. 재물이 늘 풍족한 것이 아닙니다. 재물은 믿음과 상관없이 주어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그렇습니다. 그런 것은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운이 좋으면 돈을 벌수도 있고 성실하게 일하면 성실한 대가로 건전한 사회에서는 주어지는 거지요. 그러나 늘 그런 거는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근면하게 일해도 운이 닿지 않아서 망할 수도 있고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풍족하게 된다고 할 때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할 때 그 자체가 풍요로움이거든요. 여러분들이 느끼시잖아요. 그러한 영적인 시각이 우리들에게 많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9절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바로 이겁니다. 여기 나오는 군요.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빛, 생명의 원천이거든요. 사실은요. 태양의 빛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생명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지금 시편을 녹화하고 있는 시간이 오후 4시20분인데. 지금 햇빛이 석양에 걸쳐 있습니다. 아직 노을이 지는 상태가 아닌데요. 겨울철이라서 그런지 빛의 강도가 좀 약합니다. 그래도 저 빛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이죠. 이 성서에 나오는 빛이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님과 그 생명을 가리키는 종교적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하는 게 여러분들에게 어느 정도 정확하게 전달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생명의 원천이 주님께 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질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오랫동안 잘 먹고 잘 살게 마련하는 것을 생명의 근거라고 착각을 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다고 하더라도 생명의 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정확하다는 표현보다도 아주 실질적으로 자기의 삶과 일치되어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추상적으로 남는 거죠. 그러니까 교리로만 남는 거죠. 언어로만 남는 거죠. 언어와 자기의 삶이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거를 우리가 점점 넘어서야 되는데 어떤 단계가 필요하겠죠. 어떤 영적인 깨우침의 단계 말입니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다. 생명의 원천이 뭐냐 이해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 이해가 없이 어떻게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이 생물학적으로 그렇고 심리학적으로도 감정적인 부분도 있고 이렇게 생명 전체, 우리 기독교에서는 영적인 생명이라고 하는 데, 이러한 것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와 그리고 복음서에서 주님이 주신 말씀들과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는 사건들, 종말에 일어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성서의 희망과 비전들, 그러한 전반적인 성서와 기독교의 가르침 안에서 우리의 생명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신앙은 종교적 낭만주의는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 믿고 마음이 따뜻하고 좋다 이러한 정도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이해가 거기에 따라다녀야 되는 겁니다. 세계는 인간, 생명의 원천 여전히 우리가 다 파악하지 못하는 과학 생물학으로서도 다 풀어내지 못하는 생명의 신비가 예수님 사건에서 우리들에게 드러났는가. 이러한 점 등등을 깊이 알아야 됩니다. 어쨌든 생명의 원천은 주님께 있다는 것은 분명하구요. 생명,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 그리고 부활, 재림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 안으로 더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10절과 11절은 기도문이라고 그랬죠. 1-4절까지 악에 대한 속성들을 말했고 5-9절까지 그것과 대립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이야기했고요. 노래했고요. 10,11절은 기도입니다.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교만한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신실하신 주님을 향한 진솔한 그러한 기도입니다.

마지막 결론 12절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거기서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넘어진다. 거기서 넘어진다고 하네요. 거기서는 뭘까요? 하나님이죠. 하나님의 행위죠. 하나님이 공의를 베푸시는 그 자리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타나는 그 순간이죠. 그런 것을 보면 악은 넘어 집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것저것 우리가 배워야 될 내용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중간 중간 제가 설명하면서 여러분들이 나름대로 소화하셨을 거라고 보고요.

오늘 결론 말씀과 연관해서 언뜻 지나가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그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씀과 더불어서 다가오는 깨우침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다른 게 아닙니다. 악과의 투쟁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보는 것이죠. 하나님이 싸우시는 거죠. 우리는 악과 싸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를 베푸시고 신실하심을 그대로 드러내실 때 악은 넘어지고, 악을 행하는 자를 포함하는 겁니다. 현실의 삶이 하나님의 승리가 완전히 결정될 때는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우리는 그 마지막 때를 선취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진실하심을 온전히 의존할때 이러한 일들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날 줄 믿습니다. 아멘. 오늘 말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profile

[레벨:38]클라라

2008.12.23 11:17:23
*.216.132.150

목사님,
생명에 대한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은 뛰는데,
갈망 때문에 그렇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움 같은거, 맞는 거 같습니다.
생명에 대한 그리움..
저는 이 그리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생명이 대체 무엇인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12.23 19:36:00
*.139.165.38

라라 님,
생명이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창조하셨지요?
그 창조 행위가 바로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랍니다.
그렇다면 결국 생명이 하나님이지요.
예수님께서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만약 자연과학의 힘으로 생명의 본질이 완벽하게 드러난다면
그때는 하나님이 누군지 밝혀지겠지요.
그러나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생명은 기계적인 매커니즘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힘이거든요.
이런 저의 설명이 실질적으로 이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렇게 설명하는 데는
어떤 인식이 작용하고 있는데요,
그건 언어의 한계로 인해서 숨어 있는 거거든요.
생명에 대한 질문이 절실해졌다면
그것으로 이미 기독교 영성의 중심에 발을 디뎠다는 증거입니다.
성탄절이 왜 생명의 절기일까요?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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