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6편 강해-탄원기도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시편 6편입니다. 표제가 이렇게 붙어 있지요?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8현금에 맞추어 부르는 다윗의 노래〕
1.야훼여! 노여우시더라도
나의 죄를 묻지 말아주소서.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나를 벌하지 말아주소서.
2.야훼여! 힘이 부치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뼈 마디마디 쑤시오니 나를 고쳐주소서.
3.내 마음 이토록 떨리는데,
야훼여! 언제까지 지체하시렵니까?
4.야훼여! 돌아 오소서, 이 목숨 구하소서.
당신의 자비로써 살려주소서.
5.죽으면 당신을 생각할 수 없고
죽음의 나라에선 당신을 기릴 자 없사옵니다.
6.나는 울다가 지쳤습니다.
밤마다 침상을 눈물로 적시고
나의 잠자리는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7.울다 울다 눈이 안 보이고,
괴롭다 못하여 늙고 말았습니다.
8.악한 짓 하는 자 모두 나에게서 물러가라.
내 울부짖는 소리 야훼께서 들으셨다.
9.야훼께서 나의 애원 들으셨으니
야훼께서 나의 기도 들어주시리라.
10.내 원수들이 모두 겁에 질려 당황하는구나.
창피하거든 어서들 물러가거라.
(공동번역)
<참고>개역개정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1.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사망 중세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8.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9.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아멘! 예, 오래전 어떤 히브리 시인의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마음을 모아서 쓴 시입니다. 사실은 우리처럼 생각 없이, 생각해 봤자 별 깊지도 못하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이러한 시인들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따라가기가 참 힘들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런 시편을 읽어도 와 닿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냥 변죽을 올릴 듯이 이럴 때가 많이 있어요. 이 시간만이라도 여기에 마음을 담아서, 같이 읽고 공부를 좀 해야 되겠습니다. 교독해서 다시 한 번 읽읍시다.
1.야훼여! 노여우시더라도 나의 죄를 묻지 말아주소서.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나를 벌하지 말아주소서. 2.야훼여! 힘이 부치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뼈 마디마디 쑤시오니 나를 고쳐주소서. 3.내 마음 이토록 떨리는데, 야훼여! 언제까지 지체하시렵니까? 4.야훼여! 돌아 오소서, 이 목숨 구하소서. 당신의 자비로써 살려주소서. 5.죽으면 당신을 생각할 수 없고 죽음의 나라에선 당신을 기릴 자 없사옵니다. 6.나는 울다가 지쳤습니다. 밤마다 침상을 눈물로 적시고 나의 잠자리는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7.울다 울다 눈이 안 보이고, 괴롭다 못하여 늙고 말았습니다. 8.악한 짓 하는 자 모두 나에게서 물러가라. 내 울부짖는 소리 야훼께서 들으셨다. 9.야훼께서 나의 애원 들으셨으니 야훼께서 나의 기도 들어주시리라. 10.내 원수들이 모두 겁에 질려 당황하는구나. 창피하거든 어서들 물러가거라. 예, 성서학자들, 구약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초기 공동체 기독교가 시편 150편중에서 참회시로 이렇게 이용한 시편이 특별히 있다고 합니다. 이 시편이 여러 가지 종류의 내용을 담고 있거든요? 그 중에서 참회를 담은 시편들이 초기 기독교에서 사용되었는데요, 오늘 우리가 읽은 6편과 32편,38편,51편,102편,130편,143편, 일곱 편이죠, 예, 그게 탄원이면서 참회하고 용서해 달라고 하는 탄원을 담은 시편으로 초기 기독교가 아주 특별하게 이렇게 사용했다고 합니다. 오늘 여기 시편 6편이 바로 그것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 있는 시편기자가 무엇을 하나님께 자기 잘못을 고하는지 대해서는 잘 나오지 않아요. 구체적인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회하는 형식이 아주 진솔하고 감동적인 그러한 거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게 다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인데요,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뭐, 이 사람의 상태가 어떤가, 이 사람의 잘못이 뭔가 그런 것을 우리가 정확하게 따라 가기는 힘듭니다. 다만 그의 심정이 하나님 앞에 더 이상 설 수 없는 그러한 큰 부끄러움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걸 전제하면서 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그대로 드러 내려고 하고 또 어떠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에 대한 부끄러움과 주님의 용서와 또 그것을 뛰어 넘는 하나님 은총아래서의 확신을 얻게 되었는가, 그런 것들을 이 본문에서 우리가 배우면 되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이게 4연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시는 늘 연으로 나누잖아요? 쭉 연결되어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 단락이 조금 씩 조금 씩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요. 제1연은 1절에서 3절입니다. 1절에서 3절, 여기 이제 자기 실존적인 고백이 녹아 있지요. 이게 우리가 볼 때, 이게 도대체 뭘까, 딱 와 닿을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정말 이 시인의 깊은 두려움, 자기에 대한 책임감, 자기에 대한 절망감, 하나님을 향할 수 밖 에 없는 영적인 상태, 그런 것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시편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노여우시더라도, 하나님의 분노가 있지만, 나의 죄를 묻지 말아 주십시오. 나에게 책임을 묻지 말아 주십시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요, 하나님이 분노하실만하다, 그걸 전제하는 거예요. 예, 이 시편기자의 상태가 곰곰이 자기를 드려다 보니까 이건 하나님이 참으실 수 없을 정도의 문제다, 야훼 하나님이 분노를 내실만하다, 이어서 또 그렇게 비슷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나를 벌하지 마소서, 하나님의 성품을 두 가지로 이야기하네요. 분노와 화, 이것은 인간적인 표현이죠, 사실은요,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과 똑 같은 분노와 똑 같은 화를 내실 수 있겠습니까, 이건 문학 시니까 문학적으로 표현한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우리가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다는 거, 그리고 그걸 경험한 성서기자들의 표현을 통해서 그 근처를 따라 갈수 있을 뿐이지, 하나님의 본성, 성품 이런 것들을 우리 인간에게 해당되는 용어들하고 일치시켜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노, 분노, 하나님의 화,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하지만, 그걸 자꾸 사람들이 약 올라서 화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분노와 화에 초점이 있다기보다도 하나님 앞에 선 시인의 실존적인 상태에 대한 고백인 거예요. 아, 나를 보니까 하나님이 화 낼 수 밖 에 없다, 나를 보니까 하나님이 분노하실 수 밖 에 없다, 그런 고백인 거지요. 물론 이런 하소연은요. 나에게 죄를 묻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벌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렇게 이야기 하지만, 이게 역설적인 거예요. 사실은 내가 그렇게 벌을 받을 만하다, 내가 그렇게 죄를 책임질 만하다, 그런 것을 인정하는 이런 시인의 고백입니다. 이런 시인의 고백 앞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예민하다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자신을 의롭다고 말 할 수 없구나를 인정해야 됩니다. 우리는 에잇, 나 혼자만 그러냐, 저 사람도 그러고, 저 사람도 그러고, 인간이 다 그렇고 그렇지 하면서 자기 자신을 합리화 하거든요? 이런 시인들의 영성은 예민하기 때문에 그렇게 대충하고 넘어가지 않습니다. 아마 이 시인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만큼 영적으로 예민하다고 하는 거지요. 예, 이렇게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지만, 이제 절망적인 것 같지만, 그러나 이 시인의 마음속에는, 3절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이 구원 하실 거라고 하는, 희망, 확신,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있어요. 언제까지 지체하시렵니까? 야훼 하나님, 분명히 하나님이 나를 내 버려두지 않으리라고 하는 것을 아는 거죠, 비록 자기에 대해서는 절망하지만, 그러나 밑바닥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이 시인에게 있는 거죠, 이런 게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야훼 하나님 곧 오실 것 아닙니까, 곧 나를 도와주실 것 아닙니까, 내가 이러한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도록 인도하실 것 아닙니까, 언제입니까, 이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희망하는, 그러한 시인의 자세가 제1연의 1절에서 3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제2연은 4절과 5절입니다. 예, 하나님을 향해서 더 간절히 탄원하는 거지요. 야훼여, 돌아오소서, 이 목숨 구하소서, 당신의 자비로써 살려 주소서, 하나님이 돌아온다는 것은, 떠난 아들이 돌아 온다 이런 방식은 아니지요. 하나님이 돌아오고 말고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언제 어디나 계시는 분이고, 우리가 외면하고 있을 뿐이지, 예, 하나님은 돌아오고 아니고는 아닙니다. 다만 이것은 문학적인 표현이니까요. 하나님의 그 구원, 그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시인의 자세가 여기 놓여 있습니다. 목숨을 구원 하소서, 생명을 구원 하소서, 이러한 기도를 드리고 있네요. 여기서 이 목숨이 무얼까요? 예, 그것도 우리가 더 생각할 꺼리이기도 하고요. 또 이 시인의 마음을 통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 우리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라는 거죠, 너무 상투적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이것을 우리가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산해 내는 어떤 것들이 나를 지켜 줄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쉬운 표현을 빌리자면, 통장에 돈이 많다거나 등등.. 그러한 복지를 위해서, 노후를 잘 보장 해 놨다거나, 이런 것들이 우리 생명을 지켜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 그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부분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분명하지요. 그러나 그런 것들이 아무리 확실히 보장이 됬다고 하더라도, 우리 생명의 깊은 세계의 영혼, 생명이 밥만 먹고 산다고 해서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생명의 깊이를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건 영적인 세계라는 말입니다, 그건 잘 먹냐, 배부르냐, 아니냐 하고는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그러한 생명의 세계거든요? 하나님만이 하신다, 이런 통찰? 이러한 믿음? 이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킨다고 하는 거죠, 만약 우리가 이것을 정말로 확실하게 알고 있다면, 세상에서 두려운 게 없을 겁니다. 불안하지 않을 거예요. 예, 그렇게 우리를 구해 주시는 하나님 그 분이 바로 자비로우신 분, 당신의 자비로써 살려 주소서, 하지 않습니까, 그거죠, 예, 정말 여기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4절에, 이 목숨을 구 하소서, 이게 아, 어떻게 설명을 더 잘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지킨다고 하는 사실을 아주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것, 이것이 영성입니다. 현실적이라고 하는 것은 reality 라고 하는 건데요, 바로 앞서서도 얘기 한 거지만, 통장에 돈이 많다거나, 이런 저런 일들을 내가 잘 처리해 갖고, 복지, 노후 이런 것이 보장되었다고 하는 그런 것들이 하나님 구원의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그러한 영적인 체험이거든요? 그게 우리들에게 아주 막연한 것으로가 아니라 현실적인 것으로 닿아야 합니다. 그게 뭘까요? 조금 구체적으로 얘기 하자면,어떤 것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참된 구원의 현실들일까요? 우주론적으로 보면 죽음 이후에 우리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구요. 그러나 이미 당겨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들에게 제공해 주시는 구원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자유, 그러니까 참된 자유죠. 묶여 있고 구속되는 상태가 아니라, 정말 참된 자유, 혹은 참된 평화, 살롬, 이런 것들 말이죠, 이런 것들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확보하기가 어렵죠, 그렇습니다. 저는 정말 이렇게 자유롭고 평화 안에 들어 가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지 못했어요. 저도 정말 멀긴 멀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제가 가야 할 방향이라고 하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이제 구원의 현실들이거든요?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영적인 자유와 참된 평화, 이게 삶의 중심으로 내 삶의 현실로 확실하게 들어 와 있어야 되겠지요. 이제 그러한 자세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기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야훼여 돌아오소서, 이 목숨 구 하소서, 고 5절이 조금 재미있는 표현이에요. 죽으면 당신을 생각할 수 없고 죽음의 나라에선 당신을 기릴 자 없사옵니다 죽음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스올’이라고 하거든요? 사람이 죽으면 가야 될 그 지하의 세계라고 하는 히브리인들의 신학적, 신앙적 표상에서 나온 어떤 세계를 가리킵니다. 죽음의 나라에서는 기릴 자 없다, 아, 그럼 이건 죽기 싫다는 얘기구나, 이거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 아닌가, 이 시인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이것은 죽기 싫다, 살아 있는 것에 대해 연연한 그러한 호소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인거죠, 자기 사는 이 생명에 연연한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겨지니까요. 죽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잖아요? 그런 것, 결국은 이 시인은 생명을 구해 달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몇 년 더 살겠다, 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말 돈독해지기 바라는 그런 신앙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제3연은 6절에서 7절입니다. 요거는 다시 한 번, 이 시인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탄식합니다. 조금 과장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밤마다 침상을 눈물로 적시고, 잠자리가 눈물바다가 되었다, 바다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문학적인 과장법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눈이 안 보일 정도가 되었다, 자기에게 임한 고통들, 뭐 죄의식들 이런 것들로 인해서 거의 죽음 일보직전까지, 다다른 시인의 상태가 여기 다시 한 번 묘사되어 있습니다. 대충 3연까지 나왔지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제1연, 1절에서 3연까지는 시인자신의 실존적 죄성, 이런 것들을 묘사하면서, 하나님이 결국은 나를 지키실 거라고 하는 희망을 이야기 했고요. 제2연, 4절과 5절에서는 하나님이 구원하신다고 하는 그것의 현실들을, 그것이 정말 확실하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 했고요. 제3연, 6절과 7절에서는 자기 자신이 당해야 될 운명의 탄식을 조금 과장된 수사법(修辭法)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제4연, 8절에서 10절에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여기에는 어떤 승리, 여태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희망이 있긴 있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긴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기에게 실존적으로 감당해야 될 시련과 아픔과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이런 것들이 다 어우러져서 있는데요, 그런데, 이 8절에서 10절 마지막 연에는 굉장히 강력한 확신, 어떤 승리에 찬, 찬가 같은 것들로 진술되고 있습니다. 8절에도 보면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더 강한 거죠, 악한 짓 하는 자 나에게서 물러가라, 예, 그렇게 이야기 하고요, 그 다음에 8절 후반 절 부터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하는 것을 세 가지로 이야기하네요. 울부짖음, 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나의 애원을 들으셨고, 그 다음에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 울부짖음, 애원, 기도, 예, 다 비슷한 이야기죠? 세 가지 방식, 세 가지 단어로 나눠서 하나님이 이 시인의 탄원을 외면하지 않고 들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 이러한 신앙의 상태가 뭘까요? 광신은 아니고, 뭣도 모르고 되는 둥, 안 되는 둥, 무조건 믿는다, 그런 상태는 아니고요. 이런 시인은 기도해도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것 같은 상태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걸 뚫고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예,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고 하는 그러한 신뢰, 확신, 믿음이 마지막 연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 불안한 시대를 우리가 살지요, 믿음 생활하면서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매 순간순간 불안하게 생각해서 매달리듯이 그렇게 살지요? 오늘 시편기자는 이미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 애원, 울부짖음, 그런 것을 들어 주신다고 하는 깊은 신뢰를 그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내적인 자유가 주어지는 거지요, 아,10절에 그런 것들을, 그러한 하나님에 향한 신뢰를 이 10절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좀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내 원수들이 모두 겁에 질려 당황하는구나. 창피하거든 어서들 물러가거라. 예, 이건 원수들을 향한, 이 원수들이 누구일까요? 그건 접어 두고요, 오늘 우리들이 그걸 다 찾아내기는 힘듭니다. 그게 어쩌면 실제적으로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사람이 지금 하나님에게 죄에 대한 탄원을 하는 거기 때문에 이 원수가 어쩌면 죄를 범하게 하는 그 어떤 악한 세력들, 보통 마귀다, 사탄이라고 하는, 그렇게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어떤 거다 단정해서 말하기는 힘들겠군요. 어쨌든 이건 좀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예, 그렇기도 하고 또 실제적일 수도 있구요. 어쨌든 원수들, 원수들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좀, 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왜 원수, 원수 하는가,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는데, 정말 원수들을 향한 욕망과 분노를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거는 역설적인 것이라고 말씀 드렸지요? 원수들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 창피하냐? 물러가라,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얼까요? 하나님을 향한 그러한 전적인 신뢰가 이렇게 표현되는 겁니다. 예,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고 하는 그 사실, 그런 것들을 강조하기 위해서, 원수들 다 도망가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죠. 여기까지입니다, 제4연으로 되어 있는“탄원의 기도”입니다. 오래 전 히브리 시인의 이런 기도가 오늘 우리들하고 전혀 삶의 방식은 달랐지만, 하나님 앞에 서 있고, 또 이 세상 살아 나가야 한다고 하는 점에서 우리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네, 영적으로 예민했던, 그래서 자신에게 일어난 죄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징벌을 받을 수 밖 에 없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이 있었고,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고 하는 참된 신뢰를 회복한 시인의 기도가 오늘 우리들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마음으로 이 기도문을 이 시편기자의 귀한 기도를 마음을 모아서 한 목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1.야훼여! 노여우시더라도 나의 죄를 묻지 말아주소서.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나를 벌하지 말아주소서. 2.야훼여! 힘이 부치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뼈 마디마디 쑤시오니 나를 고쳐주소서. 3.내 마음 이토록 떨리는데, 야훼여! 언제까지 지체하시렵니까? 4.야훼여! 돌아 오소서, 이 목숨 구하소서. 당신의 자비로써 살려주소서. 5.죽으면 당신을 생각할 수 없고 죽음의 나라에선 당신을 기릴 자 없사옵니다. 6.나는 울다가 지쳤습니다. 밤마다 침상을 눈물로 적시고 나의 잠자리는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7.울다 울다 눈이 안 보이고, 괴롭다 못하여 늙고 말았습니다. 8.악한 짓 하는 자 모두 나에게서 물러가라. 내 울부짖는 소리 야훼께서 들으셨다. 9.야훼께서 나의 애원 들으셨으니 야훼께서 나의 기도 들어주시리라. 10.내 원수들이 모두 겁에 질려 당황하는구나. 창피하거든 어서들 물러가거라. 아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함께 드리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가 영원히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님은 죄인들의 죽음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기독교 이단으로 알려진 마니교도들을 위하여
오, 자비롭고 은혜가 픙성하신 주님,
주님은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사랑과 진리로 가득하십니다.
햇빛을 선인과 악인에게 같이 비추시고,
단비를 의인과 불의한 자들에게 같이 내리십니다.
주님은 죄인들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이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십니다.
오 주님,
주님은 사람들을 계속 꾸짖으시나
회개할 기회를 주시어 그들이 악행을 버리고
주님을 믿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굳어지고 완고한 마음을 좇아 살며,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진노의 날과
의로운 심판의 날에 그들이 받아야 할 진노를
스스로 쌓아올리고 있지만,
주님은 인내로써 그들이 회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행한 악으로부터
주님의 자비와 진리로 돌아설 때
주님은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허락하사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지겹고 무서운 오류가 비판받고 교정되어
이미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된 것처럼
그들도 자유로이 되게 하소서.
세례의 성례를 통해서든지...
참회의 희생제사를 통해서든지
그들이 모르고 주님을 거리끼게 한 불경의 죄를
용서하여주소서. 아멘. (『선의 본성』, 48)
성 어거스틴 『성 어거스틴의 기도』선한용 엮음, 대한기독교서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