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강해 14편-어리석은 자들
오늘 우리 같이 읽고 공부할 시편 14편을 먼저 제가 읽을 테니까 여러분들은 눈으로 따라서 읽으십시오. 시편 14편입니다. 1절부터 7절까지입니다.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
1. 어리석은 자들, 제 속으로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말들 하면서,
썩은 일 추한 일에 모두 빠져서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2. 야훼, 하늘에서 세상 굽어보시며
혹시나 슬기로운 사람 있는지,
하느님 찾는 자 혹시라도 있는지
이리저리 두루 살피시지만
3. 모두들 딴길 찾아 벗어나서
한결같이 썩은 일에 마음 모두어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4. 언제나 깨달으랴. 저 악한들,
떡 먹듯 나의 백성 집어삼키고
야훼는 부르지도 않는구나.
5. 하느님께서 옳게 사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니
저자들은 겁에 질려 소스라치리라.
6. 비천한 자들 생각을 너희가 비웃지만
야훼께서 그들을 감싸주신다.
7. 바라옵나니,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오기를.
잡혀간 당신 백성을 야훼께서 데려오실 때
야곱은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은 기뻐하리라.
아멘! 말씀을 한 번 더 읽겠습니다. 내용을 잘 살피시면서요. 저하고 교독하겠습니다. 마지막 7절은 같이 읽겠습니다.
1. 어리석은 자들, 제 속으로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말들 하면서,
썩은 일 추한 일에 모두 빠져서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2. 야훼, 하늘에서 세상 굽어보시며
혹시나 슬기로운 사람 있는지,
하느님 찾는 자 혹시라도 있는지
이리저리 두루 살피시지만
3. 모두들 딴길 찾아 벗어나서
한결같이 썩은 일에 마음 모두어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4. 언제나 깨달으랴. 저 악한들,
떡 먹듯 나의 백성 집어삼키고
야훼는 부르지도 않는구나.
5. 하느님께서 옳게 사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니
저자들은 겁에 질려 소스라치리라.
6. 비천한 자들 생각을 너희가 비웃지만
야훼께서 그들을 감싸주신다.
7. 바라옵나니,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오기를.
잡혀간 당신 백성을 야훼께서 데려오실 때
야곱은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은 기뻐하리라.
<참고> 개역개정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 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 신즉
3.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4.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 하는도다
5.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6.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7.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아멘! 시편 14편은요. 똑 같은 내용이 다른데도 나옵니다. 54편인데요? 이 시편 전체 묶음에 똑 같은 게 다른 데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그건 확인하지 못했구요. 일단 14편과 54편은 거의 똑 같습니다. 아마 이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학자들에 따르면 14편이 조금 더 원본에 가깝다고 하는데요. 아, 그건 복잡한 문제니까 접어두고요. 이 14편, 저도 다시 읽으면서 이 시편기자의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 보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읽을 때마다 늘 새로워지니까요. 그런 게 문학에서도 고전이라고 하는 것의 특징이거든요? 그건 한 번 읽고 때려 치는 게 아니라 읽을 때 마다 달라지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정도에 따라서 그 텍스트가 자기에게 말을 거는 그러한 차원이 달라집니다. 그런 면에서 성서는 우리가 아는 거라고 하더라도 반복해서 읽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도 거의 평생 성경 안에서만 살았다고 생각하는데도, 그래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게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는 가르친 다기보다도 스스로 배우는 자세로 공부시간을 만들어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여기 1절부터 7절까지인데요? 세 단락으로 나누겠습니다. 첫 단락은 “악인의 타락”이라고 하는 소제목을 붙이면 됩니다. 전체 제목은 “어리석은 자들”이예요. 어리석은 자들, 첫 번째부터 그렇게 나오지요? 어리석은 자들, 전체 제목으로는 “어리석은 자들”이고, 그 중에서 첫째 단락은 1절에서 3절까지 “악인의 타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부터 3절에 시편기자가 그 악인의 타락에 대해서 아주 독특한 그러한 필치로 설명을 잘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여러분들이 이런 말씀을 읽을 때 좀 익숙하기 때문에 여기 있는 내용들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잖아요? 단어들도 그렇고, 내가, 하나님, 죄, 어리석음, 선, 악 이런 것들이 나와서,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자꾸만 아는 거라고 하는 데서의 성경읽기의 한계거든요? 이건 뭐 본문하고 상관없는 말씀인데 드리는 거예요, 아는, 익숙한 게 나오더라고 하더라도, 아, 이건 내가 아는 게 아니다, 생각하고 본문을 대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늘 처음 본문을 읽는다는 생각을 해야 되거든요? 이런 단어 하나하나, 문장, 이런 것도 늘 염두에 두면서 읽으셔야 됩니다. 예, 여기 나오는 이야기들이 만만한 이야기가 아니예요. 그냥 우리들에게는 굉장히 낯익고 익숙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말씀 드리냐면 저도 이렇게 읽으면서 참, 어렵구나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그러한 조금 어려운 상황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보지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떻게 얘기 하냐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말하죠? 지금 시편기자가 하는 얘기를 여러분에게 전하는 겁니다. 그들은 다 썩은 일, 추한 일에 빠져 있어요. 그러니까 악을 행하는 거지요? 착한 일 하는 일 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가 연결되요. 어리석음, 기본적으로 어리석음, 두 번째는 무신성(無神性),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것도 사실은 더 들어가게 되면 여러 가지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이 있다, 있다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이 있지 않는 것처럼 사는, 그런 것은 무신성이나 마찬가지인데요, 그런 게 두 번째라고 하더라도, 무신성의 문제, 그러니까 어리석음은, 이 시편기자는 어리석음의 토대가 뭐냐 이건 하나님을 모르는 것,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 이런 거죠, 입으로도 그렇게 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사는 것, 그러니까 이 어리석음의 문제를 더 심층적으로 살피고 있는 겁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결국은 썩은 일, 추한 일을 한다, 이 세 가지가, 그러니까 악이죠, 결국 악은 어리석음의 결과이기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신이 없다, 노골적으로 그렇게 얘기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 정신이 없는 것처럼 사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나오면 결국 악이 나올 수 밖 에 없다, 그렇게 지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아마 동의를 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죄와 악의 뿌리, 어리석음의 뿌리 이런 것들을 모두 이제 신이 없다고 하는 무신성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럼 왜 그럴까요? 이 말은 우리가 많이 들었기 때문에 다 알고 있는데, 왜 그런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이 왜 맞는지, 어리석음과 악에 근원 그 이후의 뿌리가 무신성에 있다고 하는 이 주장이 왜 그래요? 아, 왜 그렇다니, 당연히 하나님을 없다고 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당연히 어리석은 거고 악한 일들이 당연한 게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 아니냐를 아셔야죠. 그러니까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시거든요? 그런 것뿐만 아니라 생명의 완성자이시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생명의 창조와 유지와 완성이라고 하는 이 세계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거예요. 그게 어리석음이지요. 그러니까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생명의 존엄성, 그 창조자, 그리고 또 여전히 그것을 종말론적으로 완성하실 그 분에 대한 두려운 생각이 전혀 없는 거죠. 이런 게 바로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바로 제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이 무신성이라고 하는 것은 노골적으로 신을 무시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지 않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는 것 같은데,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무신적인데 가까운 그런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뭘까요?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무시하지 않는데, 오히려 겉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거리가 있듯이 사는 삶들이 어떤 걸까요? 그건 일일이 따지고 들면 많겠습니까만, 그냥 큰 틀로만 하나만 말한다면, 하나님을 이 세상의 정치, 사회적인 이데올로기(Ideologie)와 일치시키는 거,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하나님 되지 못하게 하는 그런 또 하나의 무신적인 태도입니다. 뭐 그런 것 많이 있잖아요? 제가 지난번에 설교 할 때 나온 단어이기도 합니다마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같이 말이죠? 로마의 평화, 이데올로기 이잖아요? 그런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 하는 이러한 작업들, 이러한 것들은 그렇게 되면 기독교 이름으로 악을 행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교라고 하는 미명하에 제 3세계 들어가서 반인권적이고 반생명적인 일들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로마 가톨릭도 그렇고 우리도 마찬가지였는데요, 17세기, 18세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도 마찬가지고, 아프리카, 아메리카 이런데 가서 선교를 한다고 하지만, 많은 것을 파괴 시켰습니다. 그들이 갈 때에는 교황의 십자가와 황제의 칼을 동시에 같이 들고 간 거거든요? 그러니까 종교와 정치 이데올로기 이런 것도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이건 무신적인 게 아니냐,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어리석으냐 하면 악을 행하고, 뭐 등등.. 정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의 뿌리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인데요?
그걸 전제하고 왜 그들이 어리석으냐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좀 살펴본다면 그렇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현실로부터 도망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이 없다는 듯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니까 그건 어리석은 거지요. 철없는 아이가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어머니 아버지 보호아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아닌 것처럼 이렇게 큰 소리를 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어요? 이게 2절에서 그렇게 얘기하죠? 야훼께서 하늘에서 세상 굽어보시며 이건 우주 공간 하늘을 뜻한다기보다도 우리의 삶을 하나하나 다 속속들이 살피신다는 그러한 뜻입니다. 손금 들여다보듯이 우리의 삶을 다 아시는 분을 표현 할 때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본다, 그런 거죠, 밑의 땅에서 땅을 보면 한정적으로 보이죠. 아는 것만 알게 되죠,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다 보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옳고 그름, 이런 저런 것들을 다 살피는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있는 거죠.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상의 악이나 선이나 이런 것들을 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는데, 왜 악이 여전하고 이렇게 내버려 두시는가 질문이 가능합니다. 이런 건 정말 어려운 문제인데요? 신정론에서 다뤄야 될 문제인데 그걸 오늘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좀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듯이 우리 모두를 살피고 있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이 악을 행하고 있다, 그러니 정말 그건 어리석은 거 아니냐가 그런 얘기가 핵심이었습니다. 그래도 왜 악은 제거하지 않느냐 한 말씀만 드린다면요, 하나님은 하나님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잘 못한 사람이 있으면 꿀밤이라도 한 방 주어요. 더 잘 못한 게 있으면 감옥에 보내고, 그렇게 하는 게 일반적인 우리 생각입니다. 일종의 권선징악, 그런 거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방식은 그것하고는 좀 다른 겁니다. 능력을 내 보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능력한 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거요, 그냥 악으로 하여금 악을 자행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의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 깊이를 우리가 다 헤아리지 못해요. 우리가 어린아이 같은 기준으로 그 어른들이 하는 것을 다 풀어 낼 수 없듯이 초등학교 아이들이 대학교 철학 선생의 그 생각들을 다 알 수는 없잖아요? 뭐 적당한 비유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쨌든 하나님은 고유한 방식으로 심판을 끌어가시기 때문에 당장 우리 앞에 보이는 악이 제거되지 않는 것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다 알고 계시다고 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냐, 그런 질문은 좀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1절에서 3절까지 시편기자가 악인의 타락에 대해서 얘기하는데요? 2절까지 말씀드렸고, 3절에는 그 총체적인 악을 표현한 겁니다. 모두 땅을 찾아가서 다 마음이 썩었다 얘기죠. 두 번째 단락은 4절에서 6절입니다. “악인의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소제목을 붙이면 되겠네요. 4절에는 그 사회적인 무책임에 대한 이 시편기자의 책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악한 자들, 떡 먹듯 나의 백성을 집어 삼키고, 참 이 성서기자들은 영적으로도 깊이가 있지만, 문학적으로도 차원이 높습니다. 얼마나 표현이 적절합니까? 떡 먹듯이 백성을 집어 삼킨다, 옛날부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러한 가난한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사회가 잘 감싸 안고, 끌고 가야 되는데요? 그걸 안하거든요? 떡 먹듯 백성을 집어 삼킨다, 이런 것, 사회적 책임감, 사회적 책임, 사회적 안정장치라고 할까요? 어떤 복지라고 할까요? 복지라고 하는 것은 자기 능력을 스스로 자기를 방어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최소한도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주는 사회적 안전장치를 가리키죠, 그러한 것들이 잘 작동 되야 되는데, 그게 잘 작동 되면 선진국이라고 해야 되고요. 서유럽, 유럽이 인제 그런 게 잘 되겠죠? 미국은 그런데서 좀 취약한 것 같구요. 의료보험이나 학교교육에서도 등등 이런데 미국은 양극화가 좀 심한 것 같구요. 제가 잠깐 있었던 독일엔 잘 되어 있습니다. 장단점을 따지자면 좀 있긴 있겠지만, 그래도 사회적인 안정망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그래도 유럽이 미국보다 좀 나은 것 같습니다. 사회적 책임감의 결여라고 하는 것을 시편기자는 한 두 사람이 저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냐 차원이 아니라 이것을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으로 본 거예요. 이 성서를 통해서 우리는 늘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확인하지만, 시편기자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 저 사람 저렇게 악랄해, 워낙 악랄한 사람도 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문제에서 이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회적인 책임감을 충실하게 지키지 않는 사회,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외면하는 거다, 그래서 4절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야훼를 부르지도 않는다, 그냥 내버려 둔다, 그냥 산다, 이 사람들이, 이러한 시편기자의 진술은 오늘 이 현대사회를 향해서도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와 같은, 신자유주의 보통 이야기 하구요. 양극화가 심화되고, 교회도 양극화구요. 아, 이런 문제점은 어떻게 풀어가야 되는데, 쉽지가 않네요. 예, 이런 것들 자체가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 아니냐, 이러한 지적은 참 날카롭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런 사회의 어려운 문제들 속에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성서기자들은요, 오히려 새로운 희망을 보죠, 그리고 또 어떤 그 반전, 어떤 그 새로운 세계를 보죠, 5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자들은, 그들은 악인들이죠? 겁에 질려 소스라치리라, 두려움에 떨게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좀 이 공동번역이 좀 의역이 돼서 문장이 바뀌어서 그렇습니다. 이 악인들은 겁에 질려 두려워 떨게 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옳은 사람들, 의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 얘기입니다. 예, 요 부분에 대한 생각이 어떠세요? 동의하시겠지요? 예, 악인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어리석게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겉으로 보면 자신감이 넘쳐요, 그러나 결국은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곳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겉으로 편안한 것 같아도 결국 그렇지 않으니까 여러분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게 뭐냐, 하나님이 없는 상태가 뭐냐를 우리는 더 내면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더 심층적으로 봐야 되는 거예요. 그냥 보디가드 잘 세워놓고, 어딜 가나 비서가 잘 따라다니고 말이죠, 사람들은 그런 걸 보면 평안하고 자유롭고 참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정신세계, 그의 내면세계의 영적인 그런 세계는 결국은 공허하게 되는 거지요. 그 공허가 그걸 메꾸기 위해서 다른 걸 많이 하겠지요. 그게 이제 충격인 거예요. 그러니까 두려움에 떨게 되는 거지요.
예, 그건 분명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들을 아주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실질적으로 이해하면 우리가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거지요.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였고, 생명자체이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생명이 없는데, 어떻게 편안하겠습니까? 겉으로 육신적으로만 생명이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만 같고 생명이라고 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비록 억울한 일을 당하고, 좀 가난하고, 여기저기 좀 괴롭힘을 당해도, 그래도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떵떵거리고 살아도 생명이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국 그런 사람들은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얘기 하듯이 충격, 두려움, 겁에 질려서 소스라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6절에, 이 말씀도 공동번역에는 너무 풀었어요. 그래서 제가,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봤는데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여기서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꼭 물질적인 가난, 그런 것만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 사회적인 그 소외당하는 사람들 전반을 가리키죠, 독일어로 아르멘,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비더 덴 아르멘(wider den Armen) 가난한 사람을 대항하는 어떤 작업, 어떤 충격, 그런 것들, 가난한 사람들을 반대하고 소외된 그들을 괴롭히려고 하는 그런 많은 시도들, 시도라고 하면 되겠네요. 그런 것들을 향한 시도가 결국은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주샨덴 베르덴(zuschanden werden)이렇게 되어 있어요. 덴(denn), 왜냐하면, 주님이 그들의 Zuversicht, 주님이 바로 그 사람들, 그러니까 소외당하고 가난하고, 억눌린 그런 사람들의 확신, 신뢰이기 때문이다. 이게 조금 더 정확한 번역인 것 같애요.
6절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동번역에는 비천한 생각을 너희가 비웃지만 야훼께서 그들을 감싸 주신다. 공동번역은 주로 영어성경의 RSV를 많이 따른 것 같습니다. 고렇게 되어 있는 것 같애요. 그러니까 이 말을, 좀 전체적으로 본다면, 똑똑한 척, 잘난 척 하는 이렇게 하는 사람들의 시도는, 여러 가지 영악하게 머리 굴리는 것 있잖아요? 그런 것들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하는 시도들, 그렇게 당하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피난처라고 한다면, 누가 사람들이 옆에서 힘들게 하더라도 그게 뭐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 되는 거거든요? 여기서 이 가난한 자들, 의로운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의 피난처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들을 우리가 좀 촘촘하게 잘 살펴야 되는데요? 오늘 저는 그것까지는 뭐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하나님이다, 그냥 그렇게만 말하면 곤란하거든요? 그것이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냐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좀 더 생각해 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아주 분명한 건데요? 그것을 아주 관념적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하고, 실질적으로 좀 생각할 수 있도록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마지막 7절,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여러분들, 지금 시편기자가 쓰고 있는 흐름을 잘 알겠지요? 쭉 나오면서 마지막에, 7절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그것은 곧, 잡혀간 당신의 백성을 야훼께서 데려 오신다하는 거거든요? 구원, 야훼가 데려 오신다, 그러니까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서 실행된다고 하는 겁니다. 예, 비록 악이 득세하는 세상이지만, 그러나 시편기자는 야훼 하나님을 통한 구원의 희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희망들이 오늘 우리가 성서에서 배워야 될 좋은 영적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야훼가 구원을 일으키신다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그것도 또 우리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요? 여기 지금 대략 오신다, 잡혀간 백성을 야훼께서 데려 온다. 이건 구체적인 해방을 이야기 할 겁니다. 몸이 팔려간 사람이나, 이런 저런 사람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그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그러한 것을 물론 포함해서요. 예, 우리의 영적인 생명의 세계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온전하게 허락하신다고 하는 그런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오늘 14편의 말씀의 결론을 내린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고유한 방식으로 악한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그래서 그들이 충격 가운데 빠지는, 생명을 잃음에 대한 충격에 빠지게 하고, 그리고 의로운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아주 멸시 받았던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에겐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구원을 베푸신다. 그것이 곧 은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명백한 구원의 은혜, 이것들이 오늘 우리 개인과 그리고 이 사회에 더 풍요로워 질수 있도록 우리가 기도하고 또 그 쪽 방향을 향해서 열심히 살아야 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2500여년전, 어느 한 하나님을 잘 믿고 살던, 그러나 악이 득세한 시대 속에서 힘들어 하던 어떤 이 시편기자의 이 기도를 우리들이 오늘 같이 공부했습니다. 이것이 아주 오래 전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호소였지만, 오늘 바로 우리들에게도, 우리에게 마땅한 호소입니다.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이런 시편기자의 영적세계를 허락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임하며 우리 예상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오는지, 잘 헤아려 깨닫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참된 지혜로운 자들 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우리 각자가 다 처한 형편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순간순간마다 생명을 창조하고, 유지하고, 완성하실 그런 하나님의 통치를 늘 새겨 삼고, 그런 일상의 삶속에서 생명의 영과 호흡하는 저희들 되게 늘 인도하여 주십시오. 비록 힘든 일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 너머에서 우릴 향해서 오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눈 여겨 보게 하시고, 비록 즐거운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취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놓치지 않는 자들 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 새기 길 다시 한 번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가 주님의 낯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오 주님,
사악하고 불안한 우리가 주님을 피해 도주할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보고 계시며
우리가 도주하는 어두운 길을 쏘아보십니다.
아름다운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 자신은 스스로 추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주님께 해를 끼칠 수도 없으며
또한 하늘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는 공의롭고 완벽한
주님의 통치를 손상시킬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낯을 피해 도주한다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주님이 찾을 수 없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보지 않으려고 피해 가지만
주님은 우리를 항상 보고 계시며,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여
주님과 부딪혀 다시 만나게 하십니다.
주님은 주님이 만드신 것을 하나도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불의한 우리는 주님의 자비를 피해 가다가
주님과 주님의 공의에 부딪혀
우리가 택한 험한 길에서 넘어지게 되고
그에 합당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진실로 어디에든지 계시나
어떤 장소에도 매이지 않으며,
주님에게서 멀리 떠난 자들에게도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돌아가 주님을 찾게 하소서.
우리가 주님을 버렸어요
주님은 주님의 피조물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돌아가게 하소서.
아멘.
어거스틴 『고백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