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101편 녹취록-제관식 선포문

조회 수 1482 추천 수 0 2010.09.25 17:42:15

시편 101편 강해- 제관식 선포문

 

시편 101편 1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같은 목소리를 통해서 이 시편말씀을 읽겠습니다.

 

〚다윗의 시〛

1.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2.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 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3.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4.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5.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6.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7.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8.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 로다

9.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아멘!! 시편 101편은 다른 시편하고 구별이 됩니다. 각각 모든 시편들이 다 똑 같은 건 아니지요. 비슷한 게 있긴 있지만 그래도 각각 전반적으로 볼 때는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101편은 제가 보기에 다른 시편보다 영적인 깊이가 좀 떨어져 보입니다. 그렇게 평가하는 게 쉽지 않지만 일단 드러난 것만 보면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보통 시편을 쓴 사람, 혹은 시편의 중심이 되는 하나님을 향해서 고백하고 있는 이 사람의 상황이 특별하거든요? 아주 실존적으로 아주 큰 어려움을 당하든지 말이지요, 하여튼 그러한 우리의 삶의 우여곡절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고는 더 이상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 없는 그러한 사람, 혹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의 어떠한 극한의 기쁨,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오늘 여기 시편 101편의 ‘나’로 나오는 그 사람은 그런 게 좀 없어요. 밋밋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 도움을 바라는 갈망 그런 것도 별로 없어요,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고백, 이런 것도 없습니다. 다른 시에는 많잖아요? 우리가 지난주에 읽은 100편만 하더라도 얼마나 우주론적입니까, 온 땅이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 지어다 쭉 하면서 성전에 들어가는 기쁨을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 성실하심, 이런 것들을 노래하는데요,

 

그런데 101편은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조금 찾아보면 1절 후 반절에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구절이 나오긴 합니다. 그렇지만 그냥 지나가는 투로 하는 거구요,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이런 구절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것은 인사말 정도로 던져 놓고 그 뒤에는 그렇지 않은 내용들,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요, 좀 색깔이 다른 그런 내용들이 나옵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시편 101편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그런 관점들이 강합니다. 우리가 읽은 그대로예요. 이웃을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하고 눈이 높은 자, 마음이 교만한 자 용납하지 않겠다, 그런 표현들, 등등.. 그런 것들입니다. 물론 시편에도 그런 내용들이 나오긴 합니다만, 이런 특징은 잠언에 주로 있습니다. 격언집이거든요? 시편은 악한 것,그리고 하나님의 정의, 등등..이런 것들이 나오긴 합니다마는 그러나 윤리, 도덕적인 것들을 이야기 하지는 않아요, 시편하고 잠언하고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두 가지 다 구약에 들어오긴 합니다마는 그래도 어떻게 보면 비슷한 부분들이 있긴 있습니다만, 아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어요.

 

잠언은 주로 윤리, 도덕, 격언, 인간의 행위에 대한 것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한다면 시편은 그런 부분들을 담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거거든요, 그런 점에서 영성의 격을 좀 나눠 본다면, 시편이 잠언보다는 훨씬 높아요. 저도 주일설교를 잠언을 본문으로 거의 하지 않습니다. 지난 번에 한 번 딱 한 것 같은데, 그건 교회력에 따라서 특별한 경우에 가능한 대로 그걸 피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그런 잠언투, 보통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공자 왈 하는 거거든요? 사람을 어떻게, 어떻게 교정해 가고 바른 사람 만들어 가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런 잠언의 차원보다는 최소한도 시편, 더 나아가서는 더 중요한 것은 복음, 이런 쪽으로 우리가 설교도 그렇고 신앙의 초점을 맞춰야 되겠지요, 시편 101편은 그런 잠언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시편 101편은 유대왕 즉위식에서 사용되던 선포문이라고 해요. 유대왕의 즉위식 있잖습니까, 거기에 여러 순서들이 있잖아요? 그 중의 하나로써 왕이 있는 거죠, 나, 왕은 어떻게, 어떻게 하겠다, 이런 거 말이지요, 요즘도 대통령 취임식에서 대통령이 읽는 취임선서와 비슷합니다.

 

이 시편을 쓴 사람, 이 시편의 주인공이 왕이라고 하는 증거는 몇 가지가 있는데 세 가지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 것들을 학자들이 세밀하게 연구하는 거죠, 그런 것들을 히브리어 원어를 통해서 더 알아야 되고, 또 그 당시에 고대의 이스라엘의 어떤 의식들, 그리고 주변에 있었던 이집트의 예식문들, 이런 것들을 두루두루 다 연결해서 연구합니다. 그래서 구약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고어도 많이 연구를 해야 되기 때문에 힘들어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신학자들이 굉장히 전문적으로 공부를 합니다. 그러니까 서양학문은 거의 다 신학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겠죠? 신학과 철학인데요? 그래도 철학보다도 신학이 더 많이 세분화 되었습니다. 성서신학, 조직신학, 윤리신학, 실천신학, 역사신학 뭐, 많이 있어요. 그 중에서 성서신학에서도 구약신학, 신약신학, 구약에서도 여러 가지 많이 나눌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전문적인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시편 101편의 언어라든지 내용들을 파악해 보면 이것을 쓴 사람이 혹은 이걸 읽는 사람이 왕이었다고 하는 것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와 함께 살게 할 수 있는 사람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죠, 6절에 나와 있는 거구요, 그리고 이 사람을 따르는 사람은 완전한 길을 얻는다고 하는데 그건 명예를 얻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자기 신하들에게 훈장도 줄 수 있는 능력있는 사람이죠, 그리고 이 사람에게는 악을 행한 자를 추방할 수 있는 권력도 있습니다. 8절의 뉘앙스가 그런 것들이예요.

 

9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자기가 이 예루살렘 도성 안에서 내쫓겠다, 그런 뜻인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들 머릿속에 그렇게 넣어 두시면 됩니다. 이 101편은 이스라엘 왕이 왕 위에 올라갈 때 여러 가지 순서 중에 한 순서로 이 내용을 읽었다, 그 때 사용되던, 선언문이, 혹은 선포문이 이 시편 묶음집에 남게 됬다. 그거죠, 여러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그리고 시편 시작할 때 말씀 드렸고요, 처음에 딱 이렇게 있었던 건 아닙니다. 구약성경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뭐, 창세기만 하더라도 그것이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었던 건 아니고요, 다 각각 문서들이 많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지나가면서 이렇게 안에 한 작품으로 하나의 전체 묶음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거지요, 시편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유대인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승 되면서 가치 있는 것, 영적인 것, 이런 것들은 살아남게 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제거되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리를 잡게 된 거죠, 그러니까 이 101편은 왕에게만 해당되는 건데, 왜 이것이 시편에 포함되었을까, 좀 궁금하지요, 그 이유를 저는 두 가지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러니까 이 내용을 별로 말씀 드리지 않겠어요.

 

101편, 이것은 그 당시 왕이 난 이렇게 하겠다, 하는 하나의 형식적인 거예요. 한 의식문 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깊이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건 좀 접어두면서, 왜 이런 것들이 시편 안에 들어오게 됬는가를 같이 좀 설명하려고 합니다. 두 가지로 말씀 드린다고 그랬지요? 하나는 이거죠, 이스라엘은 신정일치 국가였습니다. 뭐, 고대사회는 대개가 그렇긴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보통 고대 원시사회로 가면 그 부족장, 족장이 제사장도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족장이면서도 동시에 제사도 드리고, 분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원시사회라고 할 수 있겠죠? 지금도 아마 그런 부족이 어딘가는 있을 겁니다. 조금 세월이 지나면서 분리되요. 이스라엘의 그 당시에도 왕과 제사장이 구분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 나라는 종교국가였습니다. 왕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백성 전체 일 인거죠, 그래서 이 왕의 선언문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어떤 운명으로 받아드리고 그렇게 하나의 신앙적 전통으로 받아 드렸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종교와 정치관계, 이건 아주 미묘합니다. 고대사회로 갈수록 일치가 됬고요, 현대로 오면서 그건 세속사회로 오면서, 점점 분리되고요,

 

이제는 거의 종교와 정치가 거의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은데 계속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앞으로 이게 굉장히 가까워질 수도 있을 거예요.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옛날엔 종교와 과학도 하나였었거든요? 예언자들이 뭐라고 하느냐에 따라 세계가 달라지는 거구요. 복음서에도 나오지요? 문둥병 걸린 사람이 치료되었다고 하는 것을 낫다고 증명해 주는 사람이 제사장이었거든요? 그게 다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과학과 종교가 그렇게 하다가 점점 현대로 오면서 완전히 갈라지고요, 지금 거의 배타적인 상태까지 갔다가 앞으로 가까워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근본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은 야간 기독교를 중심으로 얘기한다면, 유럽에서 기독교가 과학을 너무 억압적으로 다루다가 이제는 너무 반발이 심해갖고 툭 튀어져서 종교를 완전히 반대하는 쪽으로 갔는데요, 기독교 신앙이 제 자리를 잡게 되면, 과학의 문제도 종교와의 어떤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겁니다. 과학계에서 기독교를 반대하는 그런 책들도 많이 썼어요. 많이 썼지요. 최근에,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닙니다. 하나의 일부를 얘기하는 거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것 때문에 두려워 할 건 업고요, 그래도 그들이 무슨 말하는가는 귀 기울여 볼만은 합니다.

 

최근에 나온 책인데 제가 이름만 신문에서 보고, 사야 되겠다 하는 책이예요. 칼 세이건(Carl E, Sagan1934-1996)이 쓴 건데,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신의 존재에 대한 한 과학자의 견해>예요. 칼 세이건은 벌써 죽었잖아요? 언제 썼나? 저는 그 분이 아주 옛날에 쓴 거 <코스모스>라고 신학대학 다닐 때 읽고, 우주에 대한 생각을 많이 공부 했습니다.그런 것들이 아직까지 그 뿌리로 남아 있는데요, 그 분이 종교에 대해서 쓴 거예요. 과학자로 철두철미한 사람인데 그가 종교에 대해서 어떻게 크게, 뭐 아마 신이 있다, 없다 그런 식으로는 말하진 않을 겁니다. 몇 가지 가능성을 과학자로 설명을 할 텐데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종교와 정치와의 관계는 좀 미묘한데요. 잠깐 기독교 역사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래 유럽을 보면, 중세기 때까지 교황하고 황제하고 굉장히 밀착했잖아요? 가까웠습니다. 그게 언제부터인지 여러분들이 아시겠고요, 콘슨탄틴누스 대제(AD 280-337)가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 칙령 이후로 기독교를 로마제국 안에서 공인 받게 된 거구요. 그리고 조금 더 나가서 4세기 후반(392)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었습니다. 기독교가 유럽에 국교가 됬다고 하는 것은 콘슨탄틴누스가 아니라 훨씬 후에,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때부터 기독교는 유럽의 온갖 기득권을 다 누리게 된 거죠, 그 전에는 박해를 받고 있다가 누리게 됬습니다. 그러니까 억압받던 자리에서 나중에는 억압하는 그런 자리로 가게 되었어요. 그 때 이제 수도원도 많이 발달하고 또 로마에 있는 어떤 주교관 이런 것들도 많이 커지고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교황은 황제의 신적인 권위를 부여해 주고, 황제는 교황의 어떤 물질적인, 세속적인 토대들을 확보해 주는 그러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시대가 오랫동안 계속 됬습니다. 그 이전에는 상황은 달랐죠, 로마가 기독교를 아주 모질게 박해하지는 않았습니다. 몇 몇 황제들은 있어요. 정상적이지 않은, 네로 황제라든지, 몇 사람 있는데 제가 이름이 기억나지 않은데,(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막시미누스 등등..) 기독교를 박해하긴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박해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완전히 다른 거지요. 로마정치하고 기독교는 다른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 출발점은 강의안에도 썼습니다마는 예수님과 빌라도의 관계로 보면 좀 알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았잖아요? 그게 어쩌면 기독교와 정치의 관계를 푸는 하나의 열쇠, 키워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치는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만 판단하게 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요? 그래도 유대인들과 그런 세력들이 사회 소요를 잘 못하면 정치적인 반대 이런 것들이 일어 날까봐 예수님을 사형선고 내렸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한 두 마디로 해결 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가 거기 있습니다.

 

빌라도가 무조건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세기의 오판을 했다, 꼭 그런 건만은 아니죠, 예수님에게는 로마체제가 두려워 할 만한 어떤 근거들이 있었다고 하는 거, 그것을 빌라도가 분명히 보긴 보았을 겁니다. 여하튼 그러나 정치가는 늘 자기에게 이해 타산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매달려 있어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그 얘기입니다. 예, 기독교가 정치적인 헤게모니를 잡으려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것은 이슬람국가처럼 기독교가 그런 목표를 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무조건 비정치적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인간의 역사는 정치하고 많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파괴된 형상이 회복되는 걸 만약에 복음으로 전달하게 된다면 오늘의 이 교육이 잘못 되는 것도 신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다뤄 볼 문제들이거든요? 비인간화 시키는 노동화 문제들 말입니다. 이런 것들을 언급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는 인간의 삶의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노동, 교육, 이런 것들은 사실은 다 정치하고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 장로대통령이 세 분이나 배출 됬어요. 많죠? 이승만대통령부터 현재 대통령까지 그렇습니다.

 

이 분들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이니까요. 그건 역사가 더 지나서 평가가 될 거구요. 어쨌든 기독교 신앙이 잘 정리된 정치인이 나오는 건 참 필요합니다. 신앙을 정치적으로 풀려고 하는 것은 뭐 그건 바람직한 건 아니구요. 정치는 정치적으로 풀어야 되는데, 그래도 그가 하나님 나라가 뭐냐,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인간을 수단으로 다루지 않고 온 천하보다도 귀한 하나님의 피조물로 여기는 어떤 근본들, 이런 것들이 필요한 거죠. 이런 정치인이 많이 나와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기독교는 유럽사회에서 오랫동안 황제와 밀월관계를 누렸어요, 그 때 재산이 많이 늘었습니다. 황제들이 때에 따라서는, 황제만이 아니라 유럽의 여러 국가의 왕들은 교황의 눈치를 보고 말이지요, 물론 다른 경우도 있긴 있었습니다만, 교황은 계속 이어지고 왕들은 이게 단절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결국 힘은 교황이 갖게 되거든요, 어쨌든 콘슨탄틴누스 대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을 받고 유럽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빛과 그림자가 같이 있습니다. 빛이라고 한다면 그동안 어려웠던 처지에서 떳떳한 처지로 나왔다, 성직자들은 세금을 안 내도 되고, 군대 안 가도 되고 하여튼 혜택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리고 수도원 이런데에 땅도 많이 받았구요.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고 하는 건 뭐, 어쨌든 기독교가 힘을 갖게 된거니까 빛이라고 한다면, 어둠이라고 하는 것은 뭘까요? 당연하죠, 이제는 황제가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입 뻥긋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시편 101편이 시편 묶음집에 나오는 두 번째 이유는, 방금 말씀 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신정국가라고 하는 사실만이 아니라 이 시의 내용이 이상적인 군왕의 표상을 노래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이것을 구약성서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입장은 아닙니다만, 후자가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 시편의 표제가 “다윗의시” 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고 보면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수 많은 왕들 중에서 최고의 성군, 덕군, 용장, 하여튼 그러한 임금을 뽑으라고 한다면, 다윗이거든요, 이 사람의 시다 그렇게 이름을 붙였어요. 이것을 다윗이 썼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윗의 이름을 두고 이러한 시가 전승되어 내려온 거지요. 다윗의 이름을 두면 그 만큼 권위가 있는 겁니다. 예, 다윗과 같은 정치인 사실은 뭐, 요즘 같은 시대에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요? 어쨌든 이 다윗에게서, 다윗이라고 할 때 핵심은요, 이 사람은 완벽한 인간 아니었습니다. 실수도 많이 한 건 여러분이 아시고요, 밧세바 사건만이 아니라 그 외에 많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짐작하시듯이 역사라고 하는 것은 승자의 논리가 개입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구약성서는 다 이 다윗을 중심으로 기록된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다윗을 미화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성서기자들은 일단 그렇게 하면서 행간에 다른 말들을 넣고 있는 거지요. 다윗의 문제점들이 거기 많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걸 좀 더 객관적으로 읽게 된다면 다윗이 얼마나 권모술수가 많은지 이건 뭐 그 당시 고대 군왕들이 저지른 일들, 다 그대로 했습니다. 다만 이제 이 사람이 괜찮다고 하는 것은, 사실 괜찮은지 않은지는 누가 딱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신앙 안에 녹아 있는 다윗의 장점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허물이 많음 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 그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런 신앙이었습니다. 요게 이제 양면성이 있는 거거든요, 그렇게 해서 자기를 합리화 하면 잘 못이고 그러지 않고 정말 자기의 존재를 가볍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잖아요? 정말,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그걸 본다 그 얘기죠, 예, 그러니까 가장 바람직한 성군의 표상이 여기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이 시편 묶음집에 들어왔습니다.

 

핵심은 ‘인자와 정의’예요, 1절에 나와 있는 대로, 인자와 정의,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다, 실행하겠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인자와 정의는 서로 대립되는 거예요, 인자는 품어주는 거라고 한다면, 정의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자를 베풀 때에는 베풀어야 되고, 용서를 해 줘야 되는, 정의를 세워야 될 때는 과감하게 처단해야 할 때는 처단하고 이걸 구분하기가 사실 쉽지 않은 거죠, 하기는 하지만, 다 한계가 늘 있는 거지요. 옆에서 참모들이 아무리 조언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결국은 지도자가 결단을 내려야 되는데요, 고독한 길이고요,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지도자는 진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자로 품어 줄 때 품어주고, 정의로 시시비비를 따질 수 있는 거죠,

 

그 2절 중간에 보면,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이게 다른 사본으로 보면, “진리가 나와 함께 머물리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번역이 사본(寫本)에 따라 좀 달라요, 사본이 뭔지 아시지요? 성경은 원본은 없습니다. 다 배껴 쓴 것만 있어요. 옛날에는 양피지나 아니면 파피루스에 쓰거든요, 세월이 지나면 이게 다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걸 또 배껴쓰고, 또 배껴쓰고 계속 반복해서 배껴써야 되요. 그걸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서기관이라고 합니다. 복음서에도 나와 있는, 그런데 쓰다 보면 실수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리고 하나님 이름을 부르지 못하니까 그럴때마다 붓을 빨아갖고 새로 쓰고 말이지요. 아주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이 구약성경, 신약성경을 다, 한 권을 사본으로 쓰려면 얼마나 세월이 걸릴까요? 끔찍합니다. 부피도 대단한 거잖아요? 이사야 두루마리만 하더라도 이거는 양피지 몇 벌 되었을 겁니다. 보관하기도 힘들고 말이지요. 가장 오래된 양피지(사본)는 사해문서이고,(사해 문서들(Dead Sea Scrolls)은 1947년 베두인에 의해 쿰란 동굴지역에서 발견, 대략 B.C 2C~A.D.1C, 이사야 문서는 B.C.335~A.D.107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 그 뒤는 다 후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이제 컴퓨터로 다 맞춰보니까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과 거의 맞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본에 따라서 달라요, 여러분이 성경 읽다 보면 난외주에 번호 매겨서 “00사본에는 없다. 어느 사본에는 다른 뜻이다.”이런 게 나오지요? 그와 같습니다.

 

오늘 이 시편을 쓴 사람은, 이 왕은 완전한 정치를 실현하겠다고 다짐하는데 완전한 정치는 불가능합니다. 과장된 표현이긴 한데요, 그러나 이것은 과장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거는 의식문이니까요. 여러분들이 결혼 할 때도 그렇잖아요? 영원히,영원히 변치 않고 그 사람만 사랑하겠다고 하는 거 과장이잖아요? 사실 그렇게 되지 않아도 그런 것처럼, 이것도 선포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겠다고 하는 이 왕의 마음이 담겨 있으니까 그런 한도 안에서 받아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특별하게 결론이라고 따로 내릴 것은 없어요. 이건 아주 특별한 시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도 한 마디만 결론을 드린다면 인자와 정의가 이러한 왕과 지도자만이 아니라 우리 개인들에게도 필요한 삶의 지혜가 아니냐, 하는 거지요, 사람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교회공동체도 마찬가지고요, 인자와 정의, 이런 것들이 아주 시의적절하게 아주 진리의 요청에 따라서 잘 진행되어야만 가족도 그렇고, 친구관계도 그렇고, 교회공동체도 그렇고 바람직한 쪽으로 나가지 않겠냐, 그런 생각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주님, 이렇게 복 더위에 우리들 시편 101편을 공부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우리가 도저히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의 2500, 혹은 3000년 전에, 그리고 우리하고는 아주 삶의 뿌리가 다른 이스라엘에 있었던 제왕들의 즉위식의 선포문을 같이 읽었습니다. 하나님 여기에도 하나님의 귀한 뜻이 담겨 있는 줄로 아오니 우리가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슬기롭게 살아가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인자와 정의가 우리 삶에서 균형감 있게 시의적절 하게 표현되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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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02편 녹취록-탄원과 찬양 file 박은옥 2010-09-25 1350
» 101편 녹취록-제관식 선포문 file 박은옥 2010-09-25 1482
15 100편 녹취록-선하신 하나님 file [4] 박은옥 2010-09-23 1310
14 99편 녹취록-거룩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999
13 98편 녹취록-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file 박은옥 2010-09-23 1108
12 97편 녹취록-의로우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077
11 96편 녹취록-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file 박은옥 2010-09-23 930
10 95편 녹취록-완악한 마음 file [3] 박은옥 2010-09-23 1001
9 94편 녹취록-복수하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8-31 1587
8 93편 녹취록-하나님의 권능 file [2] 박은옥 2010-08-3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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