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57편 녹취록 -지존하신 하나님

조회 수 1263 추천 수 0 2009.07.07 06:21:39

시편 57편 녹취록-지존하신 하나님

 

읽겠습니다.

 

1.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2.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3.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4.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5.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 이다

6.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7.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 리이다

8.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 이다

 

아멘!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57편은 탄원시와 감사시와 혹은 찬양시의 결합이라고 합니다. 앞 부분에는 탄원이 주로 나오고요. 뒷 부분에는 찬양 감사가 주로 나옵니다. 이러한 형식에 그러한 내용을 가진 그러한 시편이야 여기만이 아니라 곳곳에 있으니까요. 우리가 이것만 갖고 탄원이다 찬양이다 할 수는 없지요. 그래도 비슷한 형식과 내용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그 시편을 기록한 사람, 혹은 공동체가 처한 형편이 달랐으니까 우리는 구분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57편이예요. 오늘 여기 중요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서요. 이것만 갖고도 한 한 달 정도, 한 달이면 30일이지요? 예, 한 30일 동안 하나님과 세계와 구원과 종말 이런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57편만 그렇다고 말하기는 힘들지요. 참고적으로 한 말씀을 드려야 되겠군요. 여러분들이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되는가, 성서의 관점이 무언가 하는 것들에 도움을 드리기 위한 겁니다. 이 성경 부분 부분 각 구절구절 이런 것들은 다 하나의 창문으로 생각하시면 좋아요. 창문이지요. 그러니까 창문을 통해서 창문 밖을 바라 보는 거예요. 창문이 많은 거지요. 여러 창문, 모양이 이런 저런 것이 있을 수도 있고, 색깔이 좀 다를 수도 있고요. 여러 모양의 창문들이 있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우리는 결국 밖의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걸 봐야 되겠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창문이라고 하는 요 메타포라고 할까요? 요것만 여러분들이 잘 생각하더라도 성경이 뭐라 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창문 자체가 핵심은 아니잖아요? 사실은요. 창문은 안과 밖의 가시적인 통로를 열어 주는 어떤 가시적인 가시권이라고 할까요? 그걸 열어 주는 통로라고 하는 거지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집안에 있으면서 창문만 보고 창문이 참 예쁘다 이 재질을 뭘로 만들었나 몇 년도에 만들었나 촉감이 어떻다 이런 거로만 보고 있다면 좀 웃기는 거 아니겠어요? 창문을 통해서 밖을 봐야 되는 거지요? 그런데 또 창문이 없으면 또 밖을 볼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서는 하나님의 세계로 난 창문과 같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정확한 성서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똑 같은 창문을 본다고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보는 각도, 보는 내용들이 달라지지요. 그러니까 창문의 바로 앞에 있는 것만 보는 사람만 있고, 좀 멀리 내다 보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또는 창문이 다 드러내지 못하는 어떤 세계까지 유추해서 볼 수 있는 능력도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성서를 창문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를 얼마든지 멀리 혹은 가깝게 바라 볼수 있고 바라 봐야 되지요. 그러니까 그러한 능력에 따라서 그게 바라보는 거리와 내용 이런 것들이 달라 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57편에도, 이 57편이라고 하는 하나의 창문으로 생각하시면 되겠는데요. 여기에도 하나님의 세계를 볼수 있도록 어떤 통로를 열어 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 능력이 있다면 57편만 갖고 한 달 동안이라도 얘기 할 수 있는 거지요. 우리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 부분만 보겠습니다. 창문 바로 건너편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본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지요. 11절까지 있는데요. 여기서 핵심이 뭘까? 생각했습니다. 이게 앞서 말씀 드린대로 탄원시와 찬양시 감사시들이 겹쳐 있기 때문에 하나의 주제로 딱 묶어내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이 시편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오늘 시인들이 한 편의 시를 완성 하듯이 기록 된게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구전의 과정을 거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전승된 그러한 문건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들이 좀 보태지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고 편집되기도 하고 많은 과정을 거치게 됬어요. 그것을 아주 완벽하게 어떤 위대한 영성가나 문학가가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꼭 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또 그렇습니다만 이런 이야기예요. 이게 문학적으로 완벽하게 짜임새를 갖고 기록한 건 아니다 이거는 문학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문학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것 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얼마나 절절하게 표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중점을 둔 거지요. 그래서 57편도 일반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는 시 비평과 같은 관점으로 주제나 키워드를 찾아 내기는 그렇게 쉬운 건 아닙니다. 뭐 꼭 그렇게 되야 될 필요도 없는 거구요. 약간 느슨하게 시편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도 그런걸 전제하면서, 또한 저의 개인적인 어떤 시각도 여기 가미되었다고 하는 것을 전제 하면서 키워드를 하나 찾는 다면 4절에 나와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시편 기자가 계속 자기가 당하는 어려움 때문에 탄원하는 내용이거든요. 그런데 그 탄원의 내용이 4절에 표현되어 있는 걸로 보면 특이합니다. 아주 특이하기도 하고 아주 분명하고 정확한 거지요.

 

4절 전체를 일단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사자요. 동물 사자들 얘기이지요? 그 만큼 살벌하다고 하는 거지요? 내가 불사르는 가운데 누었으니 곧 사람들 아들들 중에라 그리 되었고 후반절에 이렇게 표현 되어 있습니다. 이걸 제가 지적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들의 이는 그들이요. 사자들, 불사르는 자들 그러한 사람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예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네 여기엔 이와 혀가 나오지요. 결국 이거는 말을 뜻합니다. 말, 이 사람이 당하는 어려움은 말에 의한 거지요. 말, 칼, 창과 화살 그리고 날카로운 칼 같은 말, 이런 거로 이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아주 힘든 상황인데 보통 물질적으로 손해를 봤다든지 신체적인 위해를 받았다든지 그런 쪽의 어려움 보다도 말에 의한 그러한 아픔이지요. 어떻게 보면 이런 것들이 더 어렵지 않을까요? 왜냐면 신체적인 큰 위해라든지 물질적인 큰 손해, 이런 것들은 물론 어렵지요. 감당하기 어렵지요. 그래도 어려우니까 그걸 각오하고 받아 드릴 순 있습니다.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으니까 업질러진 거니까요. 이제 감당해야 되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갖고 그걸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던지 그건 두 번째 치고요. 사업이 망해도 일단 처음은 힘들지만 또 다시 일어 설수도 있고 노력해서 어떤 방향을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큰 병에 걸려서 쓰러졌다 하더라도 그래도 그거는 붙들고 싸우며 이겨 나가야 되는 거지요. 그러나 이 말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거는 그냥 한 번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게 되요. 그러나 계속해서 그 사람을 만나서 그러한 마음을 상하게 되는 말을 듣는 것도 그렇구요. 반복되는 그러한 말도 그렇고 또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은 한 번 들어오면 쉽게 없어지지 않게 됩니다. 물질적인 거하고 신체적인 어려움들하고의 차이를 말씀 드려야 겠군요. 그런 것들은 일단 당하게 되면 그건 잊어 버리게 되요. 그 사건을, 그걸 해쳐 나가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은 헤쳐 나 갈수 없는 겁니다. 한 번 들어 와 버리면 그거는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남게 되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이 말은 그 어떤 시련 보다도 더 크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실질적으로 우리가 살아 가는데 있어서 경험하는 어려움에 가장 큰 부분이 말에 있을 겁니다. 이 시편 기자의 표현이 참 문학적으로 잘 되어 있지요? 정곡을 찌르지요? 창과 화살이요. 날카로운 칼이다. 우리가 이걸 벗어나질 못합니다. 우리가 좀 노력을 해서 조금 사람들의 마음을 덜 아프게 하는 하고 살 수는 있어요. 또 그렇게 살아야 되고요. 네 그게 쉽지는 않은 거지요. 쉽지 않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다 그런 말씀은 아니고요.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끊임없이 상대방에게 창과 화살과 칼 같은 말들을 쏟아 낸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구요.

 

우리가 늘 그렇다는 것은 아니구요. 이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차이가 많이 있습니다. 정말 어떤 사람은 옆에서 나오는 것 마다 제 3자나 아니면 앞에 있는 대상자나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계속 공격하고 있어요. 때에 따라서 그런 사람들은 조금 숨겨지기도 하는데, 그러나 결국 그 안에 어떤 것들이 숨겨져 있지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성적으로 얘기를 해야 될지 아니면 본인도 그렇게 당했기 때문에 나오게 되는 것인지 뭐 그거는 제가 이렇다 저렇다 단적으로 끊어서 말씀 드리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서도 마찬가지고요. 아마 이러한 말들은 대게 자기 무의식 속에 있는 어떤 생각들이 쏟아지는 거기 때문에 그런 거 같습니다. 하이덱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잖아요?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공격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자기도 모르게 말에서 나오게 되는 거지요. 또 이제 다른 말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냥 교언영색이지요. 자기의 실질적인 존재라고 할까? 자기 삶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닮지 않는 그러한 말들 있잖아요? 형식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랑한다든지, 형제님이라고 하든지 할렐루야 하든지 우리의 입에서 붙어서 나오는 그러한 말들요. 그러한 말들도 자꾸 하다 보면 결국 말들이 주는 힘 때문에 그런 쪽으로 갈 수 있기는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거는 오히려 정반대일 수도 있어요. 그러한 형식화된 말 거기에 자기가 숨어서 자기의 무의식에 있는 그런 공격성들을 합리화 할 수 있는 거지요. 참 말이라고 하는게 어렵습니다. 이제 우리가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창과 화살과 칼처럼 막 나오기만 하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그러한 것도 안되고 무늬만 그럴 듯한 말로 꾸미고 자기 삶이 담기지 않는 진정성이 없는 그러한 말들을 하는 것도 문제고요. 실질적으로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 연대성 그런 것들을 담아내는 그러한 언어의 세계로 들어 갈 필요는 있습니다. 이게 억지로 되는 게 아니지요. 이게 바로 영성인거 같습니다. 헛 소리를 하지 않고 자기의 깊은 신앙이 그대로 표현되는 그러한 살아 있는 언어세계로 들어 가는 거지요. 이제 그게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 언어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요. 57편에 핵심적인 개념을 여러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남은 시간에 그래도 주어지는 시간 만큼 여기 있는 내용들을 좀 보겠습니다.

 

1.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제가 앞에서 이 57편 하나만 갖고도 한달 동안 우리들이 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이 1절만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잖아요? 과연 이게 가능 한가 이런 것들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생각하는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얼까? 57편을 기록한 이 시편기자의 독특한 은혜에 대한 이해 인식이 따로 있는 건가 구약 신약 전체를 통괄하는 일반적인 그 개념 안에 있는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 할 수 있지요.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이렇게 하나님께 탄원하는 거지요. 자기 상태가 어려우니까요. 그러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시편을 우리가 읽는 이유는 세상을 사는 요령, 그런 것들을 배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깊이로 들어 갔던 영성가들의 신앙을 배우는 거 거든요? 하나님을 향해서 은혜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도 할 수 있는 기도이기는 해요. 그러나 실질적으로 우리의 신앙적 진정성을 닮고 그렇게 말을 하는 건지 아닌지 그런 건 우리가 늘 구분해야 합니다. 생각도 없이 입에서 쏟아지는 기도들 많이 있지 않습니까? 습관적인 기도 말이지요. 예, 우리는 어쩌면 이 기도가 뭔가로 부터 기초지요. 기독교 신앙의 기초, 기도가 무엇인가에서부터 차근차근히 다시 배워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릴 만한 영적인 준비가 됬냐 하는 것도 질문해야 되는 거예요. 은혜를 베푸소서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온전히 집중한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그것 없이 은혜를 베푸소서 하는 이야기 많이 있잖아요? 다른 것들이 너무 좋아 갖고 하나님 은혜는 그것을 보충하는 그런 정도로 머물 때가 많습니다. 은혜를 구한다. 복을 구한다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 그 은혜와 복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똑 같은 것들이거든요? 잘 먹고 잘 사는 것 자식들 다 잘 되고. 등등.. 좋은 뜻이든 어떤 뜻이든요. 일반적으로 구하는 것들의 그러한 내용으로 하고 은혜라고 하는 말이 껍질로 모양만 그럴 듯하게 만들기 위해서 거기에 제공 되는 거지요. 그건 참된 기도라고 할 수 없지요. 기도라는 말이 나왔으니 한 마디 붙인다면요. 보통 예배 시간에 대표기도를 많이 하잖아요? 샘터 교회는 개인이 대표기도 하지 않고 공동기도를 드립니다. 이 대표기도 할 때 많은 경우에 빈 자리 채워주소서 하는 기도를 해요. 그런 것들이 도대체 예배 시간에 드릴 기도 제목인가 그런 것에 대해선 회의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기도 할 수 있지요. 교회가 사람들이 좀 많이 있겠다고 하는 거야 그거야 굳이 비신앙적이다 어떻다 그렇게 문제 삼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에 그런 기도를 드릴 수는 없는 거지요. 교회의 자리가 비어 있느냐 비어 있지 않느냐 하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은혜가 중요한 거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자리 채웠다 안 채웠다 상관없이 오는 하나님의 고유한 그러한 선물이잖아요? 우리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그 분의 고유한 선물이잖아요? 그 은혜를 구해야 될 자리에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똑 같은 방식의 어떤 것들을 거기에 첨부한다면 아니, 그런 것들을 머리 속에 넣고 기도 드린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습니까? 은혜만을 사모하는 사람만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제가 앞서 드린 말씀, 우리는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에 대해서 질문해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여기에 해당 된다고 하는 겁니다.

 

1절 중반절입니다. 내 영혼이 주께 피하되 이런 심령이 우리가 될까요? 되어 있을까요? 주께 피한다 그런데 그 주님이 누군지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피해요? 말만 그렇지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많지요? 다른데 좋은게 많은데 즐겁고 재미 있는게 많고 자기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사회적인 안전망도 많은데 무슨 주께로 피합니까? 주께로 피하되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재앙들이 지나가기 까지 피하리이다 네 2절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이러한 각각 구절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입니다. 그 민족 전체가 하나님을 향해서 가졌던 신앙의 태도인 거지요. 지존하신 하나님 가장 존경 받을 만한 가장 높은 곳, 가장 위험 있는 분 가장 존경을 받을 만한 그 분, 그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지요. 지존하신 하나님 이 지존하신 이라고 하는 형용사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명사로 결합 되어 있는 지존하신 하나님 이러한 것만 같고도 우리가 많은 생각을 나눌 수 있어요. 설교자들이 이러한 용어들을 개념적으로 이해를 해야만 설교의 깊이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지존하신 하나님 하면 그게 고유명사가 되어 있던가요? 아니 뻔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요. 그러니까 신앙적인 용어들이 오히려 공동체 안에서 타성에 젖어 버리고 말았어요. 지존하다고 하는 것을 좀 이해를 해야 이러한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오는게 아니겠습니까? 지존하다니, 뭐가 지존하다고 하는 거야.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인식이 되는 겁니까? 네 여기서 두가지 점을 좀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두가지가 딱 연결 되 있는 것은 아닌데 제가 설명을 하다 보니까 그런 지존하신 하나님께라고 하는 이 표현에서 생각해야 될 꺼리가 있는 거 같아서요. 지존하다고 할 때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은 섬기지 말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것들은 사실은 우습게 보여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 처럼요.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하는 거 말이지요. 그런게 보여야만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향해서 지존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게 되지 않잖아요? 좋은게 많은데요. 칭찬 받고 싶은 것도 많고, 박수 받고 싶은 것도 많고, 인정받고 싶은 것도 많은데 그런 것들이 존경스러운 거지요. 우리들에게는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마음에 가득 차 있어요. 개인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어떤 사람은 그걸로만 똘똘 뭉친 사람이 있고요. 어느 한 순간도 숨 쉴 틈 없이 그것, 자아를 강화하는 거죠. 그렇게 인정받는 그런 쪽으로만 가는 사람이 있고 좀 덜한 사람이 있고 많은 경우에 그런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러면서는 우리는 하나님께 지존하신 이라는 하는 말을 붙일 수가 없지요. 그건 정말 죽은 말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아직 우리들에게 실체를 완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지존하신 이라고 하는 형용사를 붙였는데, 그 이외에 다른 것들도 필요한 거거든요.

 

판넨베르크 신학을 빌려서 설명 드린다면 이와 같습니다.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지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개념 이런 것들은 앞으로도 계속 확장 심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냥 이렇게도 변할 수 있고 저렇게도 변할 수 있다 우리의 어떤 인식에 따라서 달라 질수 있다 그런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건 우리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부차적인 거구요. 더 우선적인 것은 하나님의 계시인 거예요. 하나님이 완전히 우리에게 자기를 계시하지 않았다고 하는 거지요. 종말에 가서야 완전히 계시하시는 분인데요. 그때 까지는 우리는 그 분이 당연히 누구이신가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되고 그 분이 우리에게 자기를 드러내 주는 만큼 알아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 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표상 이런 것들은 계속 확장 심화 되어야 된다고 겁니다. 4세기때 삼위일체론 이런 것들도 바로 그러한 과정인 거구요. 삼위일체로서 하나님을 이해 한 거구요. 인격적인 하나님, 바로 그런 것이구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이런 것도 그렇구요. 그렇습니다. 그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신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다라고 하는 거지요. 자신의 욕망에만 사로 잡히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아니니까요. 정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다. 그게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이루시는 방식인 거지요. 그러한 영적인 경지를 이해 하시겠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신다 그 말씀이예요. 이건 옳은 이야기입니다. 좀 노골적으로 말씀 드린다면 좀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서 이 이야기의 의미를 잘 전달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장애인이 됬다 얼마나 하나님게 불평불만이 쏟아지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모든 일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에이 뭐, 어쩔 수 없으니까 받아 드리는 거지 하는 숙명주의가 아니예요. 여러분 우리가 다리 하나가 없어지면 정말 불편한게 많은데, 그것 때문에 얻어 지는 또 새로운 삶이 있는 거예요. 특히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그런 지존하신 하나님께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인 그 하나님안에 있기만 한다면 그와의 공명이 그치지만 않는다면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행위 인거지요. 오늘 우리가 시편, 여기서 이러한 영적인 경지를 배우는 건데 얼마나 실제로 우리의 삶에 들어오겠냐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숙제입니다.

 

네 이제 말씀을 마쳐야 되겠네요. 11절만 읽겠습니다. 마지막 결론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찬양으로 마칩니다. 찬양시죠. 아, 우리도 이런 찬양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위에 높이 들리시며 우주 공간 어디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고요. 생명의 깊이, 가장 깊은 곳 그건 하늘입니다. 궁극적 생명이 은폐 된곳 그래서 우리가 그 무슨 수단으로도 어떤 방식으로도 다 실체를 파헤칠수 없는 그 곳에 높이 들리시며 고양 되시며 높임을 받으시며 그런 뜻이지요. 주의 영광이 온 세계에 높아 지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온 세계를 통치하는 그 사건, 그 상황 그러한 힘 이러한 것들을 영광이라고 합니다. 영광이 드러나기를 바란다 높아지기를 바란다 그런 기도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지요. 여러 가지로 국내에 어려운 일들이 많은 요즘입니다. 실망하고 또 걱정거리도 많이 있긴 있는데 오늘 우리 시편에서 배운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상황상황에 따라서 싸울 때 싸우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에 드러나는 그러한 기도를 우리 삶의 중심에 놓아야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레벨:18]눈꽃

2009.07.08 03:49:18
*.187.19.193

성서는 하나님의 세계로 난 창문과 같다.
성서를 창문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를 얼마든지 멀리 혹은 가깝게 바라 볼수 있고 바라 봐야 되지요
아! 절묘한 비유입니다

. "은혜를 베푸소서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온전히 집중한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판넨베르크 신학을 빌려서 설명 드린다면 이와 같습니다.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지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개념 이런 것들은 앞으로도 계속 확장 심화되어야 합니다".

밑줄 그을 부분이 많지만  줄이고 줄여서 위 두부분에
 밑줄 쫙~입니다

지존하다고 할 때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은 섬기지 말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것들은 사실은 우습게 보여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 처럼요.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하는 거 말이지요. 그런게 보여야만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향해서 지존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하나님을 지존이라고 깨달아질 때 세상에 있는 것들이 배설물처럼 여겨질까?
세상에있는 것들이 배설물처럼여겨질 때 하나님이 지존으로 보일까?
전자일까? 동시일까? 아~ 아리송해   그래두 난 전자에............

라라님!
동영상 강의를 듣고 다시 녹취록을 대할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으로 귀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언젠가는 이 시편 강의도 책으로 되어 우리품에 안길 날이 있겠지요

강의해 주신 목사님과 라라님께 진심으로 감사!


P.S
시편을 우리가 읽는 이유는 세상을 사는 요령, 그런 것들을 배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깊이로 들어 갔던 영성가들의 신앙을 배우는 거 거든요? 요기서 물음표는 빼는게.......

profile

[레벨:38]클라라

2009.07.08 06:01:49
*.234.35.112

눈꽃님, 감사합니다.

타이핑이 굼떠서 시간은 좀 걸리지만,

무진장 즐거운 작업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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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70편 녹취록-지체하지 마소서 file [1] 박은옥 2009-11-01 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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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68편 녹취록- 신앙의 세 가지 토대 file [1] [11] 박은옥 2009-10-01 1973
44 67편 녹취록-하나님의 빛에 휩싸임 file [5] 박은옥 2009-09-29 1714
43 66편 녹취록-주님으로 인한 기쁨 file [2] 박은옥 2009-09-19 1816
42 65편 녹취록-영혼이 안식할 토대 file 박은옥 2009-09-01 1429
41 64편 녹취록-여호와로 인한 즐거움 file 박은옥 2009-08-25 1539
40 63편 녹취록- 영혼의 갈망, 영혼의 만족 file [3] [1] 박은옥 2009-08-08 1944
39 62편 녹취록-영혼의 침묵 file 박은옥 2009-08-08 2064
38 61편 녹취록-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file 박은옥 2009-08-08 1405
37 60편 녹취록-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file 박은옥 2009-08-07 1514
36 59편 녹취록-주는 나의 요새 file [16] 박은옥 2009-08-07 1836
35 58편 녹취록-하나님이 계시다 file [4] 박은옥 2009-07-07 1316
» 57편 녹취록 -지존하신 하나님 file [2] 박은옥 2009-07-07 1263
33 56편 녹취록-사람이 내게 어찌하랴 file 박은옥 2009-06-13 1438
32 55편 녹취록-탄원의 영성 file [4] [16] 박은옥 2009-06-09 1717
31 54편 녹취록-주의 이름으로 file [2] 박은옥 2009-05-28 1285
30 53편 녹취록 -어리석은자 file 박은옥 2009-05-28 1729
29 52편 녹취록-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file [4] 박은옥 2009-05-01 1996
28 51편 녹취록-원죄와 구원 file 박은옥 2009-04-3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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