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55편 녹취록-탄원의 영성

조회 수 1717 추천 수 0 2009.06.09 22:46:29

시편 55편 강해-탄원의 영성

 

시편 55편입니다. 1절부터 23편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1.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2.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3.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 하나이다

4.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5.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6.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은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7.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8.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9.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 서

10.그들이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 중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으며

11.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속임수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아니하도다

12.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 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3.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4.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15.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 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

16.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17.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18.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 다

19.옛부터 계시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낮추시리이다 (셀라) 그들은 변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이다

20.그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의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21.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22.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 시리로다

23.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아멘! 좀 긴 구절이었습니다. 23절까지 있어요. 55편도 탄원시입니다. 시편에는 탄원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와요. 탄원한다고 하는 것은 그 만큼 현실이 어렵다고 하는 이야기가 하나이고요. 또 하나는 하나님 이외에는 어디서든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그거 하납니다. 이러한 상황, 출구없는 방이라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얘기한 거와 같은 그런 상황에 들어간 경험이 없다면 이런 기도문이 나올 수가 없지요. 이런 기도문, 설교도 그렇겠고 하나님을 향한 그러한 진정한 마음들이요 이런 것들은 어떤 삶의 깊이 그런걸 꼭 전제합니다. 그게 없으면 나올 수가 없는 거지요. 생명의 언어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저도 설교자로 그런 경험을 종종 합니다. 설교문을 이렇게 저렇게 작성할 수 있어요. 평소에, 신학적인 것 그리고 영적인 경험들을 이런 것들을 모아서 쓸수 있습니다. 쓰는 과정도 성령과의 긴밀한 소통이 필요하긴 한데요. 그래도 어쨋던 그거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하는 순간은 그러한 글 쓰는 거하곤 좀 다른 거예요. 글 쓸 때는 자기 혼자에게만 설득되면 충분하거든요? 그런데 설교라고 하는 것, 이 설교가 기도문하고 비슷하기 때문에 시편에서 말하는 기도하고도 비슷하기 때문에 제가 비유적으로 말씀 드리는 거예요. 오늘 이 55편 기자의 상황이 얼마나 모질었었는가, 그 안에서만 시적인, 시인의 어떤 감성 그런 것들이 나온다고 하는 것을 말할려는 거지요. 설교문을 작성하는 것은 자기만 설득되면 되지만, 설교하는 순간에는 청중들이 있기 때문에 이게 좀 특별한 어떤 다른 계기가 필요합니다. 설교문을 작성할 때에는 다시 반복해도 되고 지워도 되고 또 생각이 진행이 안 되면 좀 기다렸다가 해도 되고요. 얼마든지 융통성 같은 것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하는 순간에는 그것이 안 되는 거지요. 청중들에까지도 설득이 될 수 있는 어떤 말들을 해야 되는데 그럴려면 특별한 어떤 경험들, 느낌들 그런것들이 설교자에게 가득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렇게 시편 공부를 하고 있는, 녹음하고 있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이긴 하지요. 설교하는 중에 영적인 깊이 이런 것들을 갖고서 하기가 힘들어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게 저절로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예 그것도 저절로 된다고 하는 말은 어패가 있겠군요. 늘 기도하고 말씀 읽고 성령의 충만한 상태가 늘 유지되고 있는 사람들은 설교하는 순간에도 그게 계속되니까 얼마든지 청중들과의 영적인 긴밀한 소통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게 잘 안되는 거지요.

 

저도 일반적인 데 속합니다. 늘 그렇게 영적으로 민감한 그러한 상태로 있지 못하는 거지요. 어느 때는 그렇게 될 때도 있기도 하고요. 그러한 능력이 그 설교자의 영성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지금 성령과의 소통, 공명, 어떤 느낌 그런 것을 말씀 드렸잖아요? 그게 이런 거예요. 일상에 있는 어떤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는 거지요. 그거, 일상요. 우리가 살아가는 새로운 차원과 접촉하는 겁니다. 거기에 맞대있지 않으면 그러면 우리 영혼이 어떤 동력을 얻기가 힘든 거예요. 저도 그러한 일상의 깊이로 들어가는 그 안에서 경험되는, 생명의 깊이들이요 그런 것들을 늘 항시적으로 늘, 그렇지요. 항상 기도하라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그런 상태로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좀 하긴 하는데요. 그게 쉽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는 수도원 생활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일상의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로 인해서 머리가 복잡한 일에 치우칠 수 밖에 없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영적인 우리 생명의 깊이를 생각한다는 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니예요. 현대인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점점 더 일상의 범람이잖아요. 그 일상이라고 하는 것도 파편적이고 찰라적이고 보통 세속적이라고 할까 그런 차원에 휩쌓여 있단 말입니다. 드라마 연속극 서로 복잡한 연인관계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서로 빼앗고 그런 것에 빠져서 산 단 말이예요. 그게 이제 흥미를 끌거든요. 자극적이니까 말이지요. 그런 상태로 있다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탄원기도도 마찬가지고 오늘 우리가 읽은 이 55편 탄원기도도 어떤 깊은 삶의 고뇌들, 실제적 어려움들,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서 가능한 기도인 겁니다. 제가 앞서 이야기한 그 깊이에 있는 생명의 새로운 현실들을 경험한다고 하는 이러한 극한의 고난을 통해서도 가능한 거지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경험인데요. 성령의 경험이기도 하구요. 다 연관되는 문제이지요. 삼위일체론적인 차원에서 각각 다 궁극적 생명의 경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일상적인데에 머무르게 되면 잘 안되구요. 휩쓸려 버리니까요. 극한의 시련과 어려움에 들어 가게 되면 그 때는 그 방식으로 일상이 멈추게 되거든요. 일단 일상이 정지가 되지 않으면 어떤 생명의 깊이, 이런 것들은 우리가 맛보기 힘듭니다. 이런 말이 되겠군요. 영성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주어진다고 볼 수 있겠네요. 수도원 영성, 아까 말씀드린 그게 하나지요. 거기서도 일상이 정지 되는 거예요.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노동하고 기독교적인, 수도원 전통안에 있으므로 그 안으로 깊이 들어 가게 되는 거지요. 그 사람의 영혼이 늘 일상을 꿰뚫는, 그것을 넘어서는 혹은 그 안에 심화되어 있는 새로운 지평의 생명들에 대한 경험들이 풍부해지는 거구요.또 하나는 반대로 극한의 시련의 어려움들입니다. 불치병에 걸렸다고 한다면, 그때도 모든 것을 놓잖아요. 일상을 놓잖아요. 그리고 생명 자체에만 몰두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때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대화가 가능한 거지요. 네, 저는 아직 이런 탄원시인들의 영적인 경지를 도저히 따라 가지 못합니다. 저는 그들의 차원에서 본다면 유치한 그런 상태지요. 글쎄요 유치하다고 하는 표현이 그렇습니다만 좀 방향이 다르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제가 아까 두 가지로 말씀 드렸지요? 극한의 시련과 아픔들 그런 것을 통해서 일상의 정지됨으로써 하나님의 궁극적 생명을 향할 수 있다는 하는 거 하고, 또 하나는 수도원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므로 거기도 일상이 끊어지게 하구요. 끊어진다고 보다도 그것이 축소되는 거지요. 일상의 범람하지 않는 그러한 삶의 형식들이지요. 그러한 수도원 영성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게 되고요. 한 가지를 더 얘기해야 되겠네요. 저의 경우를 생각하다 보니까 고게 필요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신학적 영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신학적 깊이도 사실이 일상이 멈춰지는 경험들이거든요? 기독교가 자기 진리를 논리적으로 해명했던 이천년의 역사의 결과물인 신학이 바로 하나님의 참된 생명을 경험하는 또 하나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세가지를 기억해 두시는 게 좋겠군요. 그게 정답이라는 말씀은 아니구요. 제가 말씀을 전할려고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떠오르는 생각들이 갑자기 정리가 된 겁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세 가지 다시 정리해 볼까요? 수도원 영성, 이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직관 이러한 방식으로 기도와 그러한 말씀읽기와 이러한 방식으로 생명의 깊은 차원을 맛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학적 영성은 이천년동안 기독교 대한 자기 변증인 이 기독교의 교리에 깊이 들어감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을 맛보는 것이고 이것 두 가지가 기독교 전통아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고요. 세 번째는 삶의 큰 불행 큰 어려움 시련 이런데서 하나님의 생명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것을 예수님이 팔복 가운데서 말씀하신 내용들과 연결 시킬 수가 있겠군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든지 이러한 시련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복 이런 것들이 바로 고난과 시련가운데서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 55편의 이 사람도 정말 어려움 가운데 빠진 사람인데요. 보통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탄원할 정도까지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은 해결이 안 되는 정도의 어려움이어요. 주로 원수들에게 당하는 그런 끔찍한 억울한 일들이구요. 그런데 오늘 시편 기자는 더한 어려움 이었어요. 뭐냐하면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원래 원수였던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거지요. 오히려 동료 친구 가까이 있었던 죽마고우와 같았던 사람들이 그랬다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더 힘든 거지요. 12절에 그런 얘기가 나와요. 자기를 책망하는 미워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나는 이미 피했다 나는 대결해 가지고 상처받고 그런 일은 없을 거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13절에 보면 나의 동료 나의 친구 나의 가까운 친우 이런 사람들이 힘들게 했다는 거지요. 14절에 보면 그들 가리켜 이렇게도 설명합니다.

 

14.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었지요. 같이 재미있게 살기도 하고 함께 하나님의 집에 다녔다 신앙적으로도 같이 있었고 함께 했고 그런 사람들이 자기를 책망하고 미워하고 그랬다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의 배신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컸겠는가 하는 겁니다. 못견디는 거지요. 오늘 전체 내용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다 섞여 있는 거예요. 정말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원수들도 있고 자기 동료였다가 돌아서서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러니까 이 사람의 처지는 사면초가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펼칠수가 없는 거지요. 하나님을 향하여 탄원합니다. 4절에 보면 그 사람의 정신적인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4.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일단 정신적으로 버텨낼수가 없을 정도가 됬다고 하는 거겠지요. 5.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예, 이 사람의 현재 처한 상황이 어느정도로 심각했는지를 이 두 구절만 통해서도 잘 알수있습니다. 아주 구체적인 것은 우리가 말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이러한 문장으로 자기의 현재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전달되는 거지요. 그 상태가 어떤지 전달됩니다. 지난 5월 23일 토요일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 이 시편 공부를 준비하는 날은 몇일 지나서 수요일 저녁입니다. 그 사이에 벌어진 일들, 많은 사람들의 추모 역기 이런 것들을 아실 분들은 아시겠구요. 이 강의가 이번에만 듣는게 아니라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에 듣는 분들이 계실 텐데 그런 분들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을 지도 모르겠군요. 오늘이 2009년 5월 27일입니다. 23일 세상을 떠나시고 27일 요즘의 분위기를 아는 사람들은 제 말씀이 정확하게 전달되겠지요.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이 처한 입장을 견디지 못하고, 또 다른 뜻도 있겠지만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고향 마을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가 처한 어려움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고요. 자세한 이야기를 지금 제가 드릴 필요가 없구요. 드릴 생각도 없습니다. 어쨋던 그 분이 처한 절망적인 상태 그런 것이 오늘 여기 시편 5절6절에서 말하고 있는 그런 것 하고 4절과 5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내용과 비슷한 게 아니냐 하는 겁니다. 일국의 대통령이었다가 그만 둔지1년 몇 개월만에 이런 상태까지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최선의 방법으로 서민적인 탈권위적 대통령을 수행했고 고향에서 생태마을복원을 위하여 노력하던 한 인간을 죽음으로 내 몰았다고 하는 것, 이러한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 속에 우리가 놓여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슬픈일이고 참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예, 6절에 이렇게 계속 이야기 합니다.

 

6.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은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그 심정을 이해 할 수 있겠지요? 날개가 있다면 더 이상 여기 머무르고 싶지 않다 있을수록 더 고통만 심해진다 자기도 힘들고 주변도 힘들고 모두가 힘들다 안식할 수 있는 곳으로 날아 가고 싶다고 하는 거지요. 7.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아무도 없는 곳에 가고 싶다고 하는 거지요. 아주 절박한 상황에 빠진 한 시인의 탄원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가 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네, 그러한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그는 거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고요. 그 원수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구합니다. 9.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확 드러냅니다. 여기서 우리가 시편기자들의 기도내용을 두 가지로 조금 구분해서 봐야 되겠어요. 구분한다고 보기보다는 두가지 긴장이 있다고 하는게 더 좋겠군요. 읽을 때 이 말씀들이 우리의 영적인 시각과 갈등 긴장 그런 것을 보인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보세요. 멸하소서 혀를 잘라 버리소서 이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이게 왜 이렇게 밖에 못 할까 그런 생각을 일단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그러한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지,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기 싫다면 아예 침묵하기나 하지 이렇게 멸하라 혀를 잘라 버리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느냐 하는 그러한 생각입니다. 그리 생각이 들잖아요? 당연하지요. 시편기자는 그렇게 자기의 속생각을 신앙적으로 승화시키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우리 입장에서 잘못 됬다 신앙이 미숙하다 이렇게 말하기는 또 좀 어렵습니다. 왜냐햐면 이것은 두가지 긴장의 두 번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게 정리가 잘 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는 바로 앞에서 말씀 드린대로 이 시편기자가 신앙적으로 승화되질 못한 거다 하는 점 이었구요. 일단은 맞는 이야기예요.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매도할 수 없는 이유는 두 번째로 이거지요. 그들은 최소한 자신들의 중심을 하나님께 미화 해가지고 돌리지는 않고 솔직하게 아뢰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무조건 매도하기는 힘들다는 겁니다. 신앙적으로 자신의 적개심 분노 이런 것들을 승화시키지 못한 한계가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실제로는 전혀 용서하고픈 생각도 없고 분노가 나는데도 그냥 말로만 미워해 버리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쳐 주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고 연결 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미사여구로 기도했어요. 미화한 거지요. 자기들의 삶을 미화한 거예요. 그러나 세리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한 거예요. 자기가 잘 못 된 걸 거기 비유에서 세리가 자기가 한 행동을 하나하나 말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인이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모든 인간적인 요소들을 쏟아 놓았다고 하는 뜻이지요. 네, 그러한 긴장이 우리가 이런 탄원시를 읽을 때 겪을 수 밖에 없는 그런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인은 이렇게 자기 속에 있는 분노, 다른 얘기로는 정의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것들을 위해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멸하라 혀를 잘라 버리소서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예 그런 것들이 그 뒤로도 쭉 나와요. 그런 것들이 그 뒤로도 쭉 나아요. 그런데만 이 사람이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성숙한 신앙단계에 들어간 게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미숙한 거도 아니고요. 아직은 불안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 같습니다. 제가 시편 기자의 신앙을 평가할 위치는 되지 못해요. 그러나 제 기준으로 보고 그렇게 말씀 드리는 겁니다. 이 사람이 그렇게 원수를 멸하라 라고 하는 그러한 속에 있는 말들을 막 쏟아 내면서 그러나 거기에만 잊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호소와 구원에 대한 기대, 이런 것들을 여전히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6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해요.

 

16.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17.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18.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이런 것들이 바로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신앙입니다. 구약에도 그러한 흐름들은 많이 있잖아요? 많이 싸우기도 했어요. 전쟁도 많이 했지요.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자기를 지킨다는 신앙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이고 생명의 하나님이신데요. 자기들은 전쟁을 벌이면서도 하나님은 자기들을 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파괴적이면서도 하나님의 생명을 기대했다고 하는 것 이게 어떻게 보면 모순적입니다. 파괴하면서 일으킨다? 파괴하면서 생명을 기대한다고 하는 거 말이지요? 그건 그들의 한계이니까 어쩔수 없는 거지요. 그래도 아주 큰 틀에서 볼 때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 임한다고 하는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했다고 하는 그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겁니다. 예, 사람이 백 프로 완벽하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믿는다고 하더라도 완벽하게 행동을 그 분의 뜻에 따라서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거구요. 우리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어떻습니까? 계속 그렇잖아요? 그런건 우리 스스로도 인정하는 거지요. 그렇지만,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때문에라도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하는 사실, 거기에 우리가 깊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 55편 기자가 원수에 대한 박멸을 외치면서도 그런 분노와 증오심에만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이 내 탄식을 들어 주시고, 내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나를 구원하신다고 하는 그러한 신앙 안에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완전히 절망하진 않겠지요. 정말 화가 나서 막 화풀이 하듯이 하나님께 탄원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계속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곧 돌아서지요. 그리고 바른 길을 찾게 되지요. 왜냐하면 아주 궁극적인 구원의 토대가 어디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요 점을 우리 기독교인들도 잊지 말아야 된다고 봅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비슷하게 희노애락과 증오와 미움과 가능하면 우리 그렇게 살지 않아야 되겠지요? 그러나 거기서 같이 섞혀서 살 때가 많습니다. 이건 저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사람하고는 대화하기 싫으니까요. 당연히 그렇지 말아야 되겠지요?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 문을 열고 정말 따뜻하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대화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요. 굳이 그렇게 할려고 노력할 수도 없습니다. 노력은 좀 하지만 그게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거가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러한 마음에 늘 휩싸여 있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바로 거기에서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있는 거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또 구원이 그 분의 선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우리가 온전하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허물어지는 그러한 많은 것들 그러한 모든 분노들 실망들 그런 것들이 오래 가진 않는 거지요. 완벽하게 해결되진 않는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거기에, 진흙탕물에 계속 빠져 있진 않습니다. 결국은 벗어나서 또 길을 가지요. 가다가 또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또 길을 가게 됩니다. 그게 이제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하게 믿는 알고 있는 사람들의 영적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26]사띠아

2009.06.10 11:07:50
*.162.176.231

라라집사님 수고하셨어요.

녹취록 읽다보니 일전에 자주 되뇌었던 사무실을 들어서면서 드리는 기도가 생각이 나네요.


주님, 상관을 이해할 지혜를 허락하소서

그를 용서할 사랑도 주시고

그의 행위들을 이해할 인내도 주시되

그러나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저에게 힘은 주지 마옵소서.

힘을 주셨다가는 그를 박살낼 것 같사옵니다.

오 주여~!

profile

[레벨:38]클라라

2009.06.11 00:17:06
*.234.35.112

선교사님, 녹취가 영 시덥잖지요?

저는 언제나 사도신경해설 맨치로 매끈하고 수려하게 뽑아낼 수 있을까여?^^

하기사, 흉내 낼수도 없어요.

그래도 저 아주 용을 쓴 거예요.. 하하

근데, 선교사님네 상관은 시방이 어느시대라고 저러신데요? 에효~~^^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9.06.10 23:33:35
*.139.165.36

 녹취록을 쓴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라라 님, 수고가 너무 많으셨습니다.

그런 수고가 어느 순간에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풍성한 결실을 맺겠지요.

난삽한 강의를 글로 옮기느라 정말 애 많이 쓰셨습니다.

감사. 

profile

[레벨:38]클라라

2009.06.11 00:06:34
*.234.35.112

목사님,

수고라니요? 수고가 아니라 행복이어요.

제가 이 시편강해를 녹취하면서 얻은 수확을 아신다면,

깜짝 놀라실 걸요? 나중에 자랑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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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64편 녹취록-여호와로 인한 즐거움 file 박은옥 2009-08-25 1538
40 63편 녹취록- 영혼의 갈망, 영혼의 만족 file [3] [1] 박은옥 2009-08-08 1943
39 62편 녹취록-영혼의 침묵 file 박은옥 2009-08-08 2060
38 61편 녹취록-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file 박은옥 2009-08-08 1402
37 60편 녹취록-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file 박은옥 2009-08-07 1513
36 59편 녹취록-주는 나의 요새 file [16] 박은옥 2009-08-07 1836
35 58편 녹취록-하나님이 계시다 file [4] 박은옥 2009-07-07 1312
34 57편 녹취록 -지존하신 하나님 file [2] 박은옥 2009-07-07 1262
33 56편 녹취록-사람이 내게 어찌하랴 file 박은옥 2009-06-13 1438
» 55편 녹취록-탄원의 영성 file [4] [16] 박은옥 2009-06-09 1717
31 54편 녹취록-주의 이름으로 file [2] 박은옥 2009-05-28 1285
30 53편 녹취록 -어리석은자 file 박은옥 2009-05-28 1726
29 52편 녹취록-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file [4] 박은옥 2009-05-01 1992
28 51편 녹취록-원죄와 구원 file 박은옥 2009-04-3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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