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58편 녹취록-하나님이 계시다

조회 수 1313 추천 수 0 2009.07.07 20:48:19

시편 58편 강해-하나님이 계시다

 

읽겠습니다.

 

1.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2.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6.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7.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8.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9.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 쓸려가게 하소서

10.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11.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이 58편은 너무 노골적으로 분노가 표현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우리가 여기서도 은혜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그 표현이 어떻게 말해야 될까요? 성서적인 근본바탕하고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이방인적인 사교적인 그래서 원수를 원수로 갚는 그러니까 악을 악으로 갚는 그러한 내용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또 어떤 편에서는 동의하기가 쉽질 않습니다. 이런 저의 표현이 이 말씀을 좀 상대화 하는 것은 아니예요. 그리고 제가 꼭 그렇다는 뜻으로 말씀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의 실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자칫 원수를 향한 증오, 분노 이런 것들을 합리화 하는 말씀으로 받아 드릴 수 있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오해가 되는 거지요. 겉으로는 그렇게 분명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세요. 부분 부분이 끔찍스럽습니다. 일단 악인의 상태가 어떠냐 하는 표현을 보면 4절 보십시오. 이렇습니다. 3절 부터도 그렇게 나오지요?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모태 때부터 잘 못 되었다. 거짓을 말한다고 하는 거예요.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이건 문학적으로 과장법 비슷하게 들리기는 합니다. 어머니 배에서부터 태어 날 때부터 진리에서 멀어지고 곁길로 나가고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얘기를 해야지요. 현재 아무리 악한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태어날 때 가장 순수한 거지요.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이야기인데요. 다음과 같은 문제가 기독교 윤리에서 논란이 되지요. 어떤 젊은 여성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을 경우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지요. 원하지 않는 임신이라고 하는 것은 성폭력을 당했다거나 그러한 경우를 이야기하는데요. 이게 참 어려운 문제지요. 아무리 그러한 일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생명은 귀한 거니까 무조건 나아서 잘 키워야 된다 키울 형편이 안 되면 다른 곳에 입양 시키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생명이 잉태됬으면 낳아야 된다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고요. 또 다른 쪽에서는 본인이 원하지 않는 임신이었기 때문에 아이를 무조건 나아서 키우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해야 된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편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어요. 이것도 좀 상황이 다르긴 할 겁니다. 그러한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지 않았다고 할 때 뭐 한 일주일 됬다고 한다거나 그러한 상태는 뭐 생명이라고 할 수 없을까요? 예, 이것도 참 생물학적으로 어려운 문제라서 제가 여기서 그런 구체적인 데 까지 들어 가긴 힘듭니다. 어쨋던,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독교적인 그 근본에서 본다면 아니 원칙만 말씀 드리면요. 원수의 자식을 낳았다 하더라도 그 생명은 귀한 거지요. 그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사건이니까요. 그런데 여기 본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고 아예 처음부터 잘 못 됬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거는 하나님의 창조와 능력과 배치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인이 왜 이렇게 까지 말했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지요. 이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부정할려고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문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같은 악이 있다고 하는 그겁니다. 그걸 직면한 사람이 도저히 어떤 방식으로라도 그것을 해명할 수 없어서 아예 모태부터 잘 못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이 악의 문제는 기독교신앙에서 처음부터 중요했습니다. 창세기에 창조사건 이후 벌어진 최초의 이야기가 바로 악의 문제거든요? 선악과에서 우리가 그걸 알수 있잖습니까? 뱀이라고 하는 어떤 동물을 등장시켜서 우화적인 이야기지요.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다는 이야기 말이지요. 아담과 이브가 자기의 뜻대로 자기 의지대로 선악과를 취한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 됬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인거지요. 하나님이 보기에 좋게 창조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니까 결국 만든 장본인에게 책임이 돌아가거든요? 성서기자는 뱀을 등장시켜서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뱀의 유혹을 넘어간 아담과 이브의 책임이구요. 그 뿌리는 뱀이구요. 그 이야기의 핵심은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입니다. 이 뱀은 불순종을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인 장치라고 할까요? 그렇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 뒤에도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이 나오지요. 성서는 창조에 이어서 창조를 부정하는 거와 같은 일들이 이 세상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목도한 것이예요. 그걸 이제 부정할 수 없는 거지요. 이게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풀어 갈수 있겠어요. 이 문제는 성서기자들도 고민을 많이 한 내용입니다. 네, 악인은 모태부터 멀어졌음이고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가서 거짓말을 한다 그렇게 표현하구요. 4절에도 보면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의 귀는 귀먹거리 독사같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 뱀이 등장하는데 창세기에 나오는 그 뱀과 연관 되겠지요? 시편기자가 그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표현하는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뱀은 5절에 이렇게 더 표현되고 있어요.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누가 뭐래도 아무리 전문적인 사람이 등장해도 결코 통제가 되지 않는 그러한 악의 본성을 여기서 이야기 하는 거지요. 앞서 이 두 가지 문제가 충돌한다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 완벽한 창조와 이 세상의 죄와 악 말입니다. 성서는 그 문제를 아주 확연하게 우리들에게 풀어 주지는 못해요. 뱀이 등장했는데, 결국 이 불순종의 원인이 뱀의 출현이라고 하는 건데요. 그럼 뱀은 어디서 온 거예요? 우리가 지금 초등학생처럼 성서를 따라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한 어린아이 같은 눈으로 성서를 볼 필요도 있어요. 주일학교 아이들이라고 한다면 뱀을 누가 만들었나요? 선생님, 이렇게 물을 겁니다. 네 그 물음은 굉장히 중요하지요. 어디서 왔을까요? 그 뱀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고 한다면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지요? 하나님이 만든 뱀에 의해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결국 책임은 누구에게 있겠어요? 이런 문제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창조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그리고 그 창조는 선하고 아름답고 완벽했다. 이거는 성서가 늘 말하는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에 악이 등장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명백한 사실이지요. 그런데 그 악과 죄 이런 것들은 우리가 적당하게 교육을 받아서 해결하거나 어떤 법과 제도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건 뭐 당연한 이야기지요. 인류이래로 악과 죄가 없던 때가 있나요? 지금처럼 법이 고도로 발달하고 생존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옛날 같으면 싸울 거리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그런 삶의 기본들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악을 행하지 않습니까? 이건 우리 인간사회에 나타난 빼도 박도 못하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성서는 이 인간이 어떠한 방식으로도 처리할 수 없는 악의 존재론적 차원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지요. 그게 뱀이라고 하는 그런 우화적인 이야기로 나오기도 하거나 뭐 사탄이라든지 뭐 그런 등등의 기능들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하나님과 대립되는 또 하나의 근원적인 세력이 있다는 말이냐, 하는 것이지요. 세계에 대한 이원론적 이해인 거지요. 선과 악의 대립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하나님은 선한 신 악을 다스리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어서요. 그렇게 이 세계는 선과 악이 대립하는 걸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보면 그렇게도 볼 수 있어요. 헬라의 영지주의 그러한 데서는 이러한 입장이 강했습니다. 선악, 빛과 어두움 영혼과 육체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대립하는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있어요. 하여튼 앞서 제가 몇 번에 이야기 한, 반복해서 설명하는 건데요. 하여튼 그 뱀, 사탄 그러한 바알세불 등등 여러 가지 인간이 어떻게 제어 할수 없는 악의 존재론적이고 근원적인 힘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세계를 선악간에 이원론적 대립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직 일원론이지요. 오직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생각해요. 하나님,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이 세계에는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는 것 같은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인류역사 이래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어요? 그러한 문제들을 성서시대에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완벽하게 해명을 못하는 거예요. 그냥 악이 결국 하나님의 통제 안에서만 활동한다 그렇게 보는 거지요. 그러니까 악은 임시적인 거지요. 기독론적으로 본다면 이미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악의 힘은 꺾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패잔병들만 남아 있는 상태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완벽하게 제거되는 때가 종말이고 그때 일어나게 될 마지막 심판입니다. 그때 까지는 여전히 악이 준동(蠢動:벌레 따위가 꿈적거린다는 뜻으로, 불순한 세력이나 보잘것없는 무리가 법석을 부림을 이르는 말)하게 되고 그 안에서 우리는 시험을 받게도 되고요. 또 투쟁을 해야 되고요. 그렇습니다. 네 58편 시편기자가 이 악을 그렇게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다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제가 다 말씀드린 배경으로 해서 나온 이야기들입니다. 이 시편기자가 그러한 악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를 드려야 했을까요? 거의 악이 행한 것과 비슷한 차원에서 그 악을 멸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이게 시편을 읽을 때 우리들이 조심해야 부분입니다. 이런 표현 자체가 사실 성서적인 것은 아니예요. 보세요. 8절에 악들 악을 행하는 이들 소멸해 가게 되는 달팽이 같게 해 달라고 기도 하잖아요? 달팽이가 쨍쨍 햇빛이 내리 쬐는 길 한복판에 놓여 있다고 해 보세요. 뭐 금방 죽지요.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이러한 저주는 정말 참혹스럽습니다. 심지어 10절에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의인이 악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하며 그의 발을 악인의 비로 씻으리로다 이것은 상당히 이교적인 표현들입니다. 악인의 피에 의인의 발을 씻는다니 참 성서의 말씀으로 참 받아 드리기 힘든 그러한 내용들이지요. 이렇게 이해 하시면 됩니다. 이 성서에도 이교적인 내용들이 부분적으로 들어 왔다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건 좋은 뜻으로도 그렇고 좀 부정적인 뜻으로도 그렇습니다. 부정적으로 보면 이와 같은 원수에 대한 증오심이고요. 좀 약간 좋은 쪽으로 본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이른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시는 분으로 이해 한다고 하는 것들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이러한 농경신하고는 달라서 이른비와 늦은 비와는 상관없이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그러한 하나님 이해가 맞다고 봐야 하는 거지요.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런 원주민들과 어울려 살면서 신에 대한 이해가 조금 확장 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농사 짓는 것까지 다 책임을 지시는 그러한 하나님으로 이해 한 건데요. 그거는 가나안들의 바알, 토착민들의 신 이해와 연관되는 겁니다. 이거야 뭐 신약성서에서도 이교라고는 할 수 없어도 그 당시 로마 헬라의 일반적인 도덕관념들이 들어와 있어요. 바울도 거기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 걸로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성서가 관계없다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영향을 받는 것 자체가 그런 역사적 종교가 어쩔수 없는 한계인 거지요. 그게 좋은 뜻으로 영향을 받으면 더 좋구요.

 

기독교가 2천동안 주변의 철학들하고 끊임없이 진리론적인 관계를 가졌거든요. 영향도 많이 받았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도 많이 받았거든요? 인간이해도 영향을 받았구요. 플라톤도 그렇고 스토아 철학도 그렇고 그 뒤로도 계속 그렇구요. 지금도 그러한 일반세계의 학문 철학 문학 그러한 것에 신학이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대신학자 중에서 유명한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30대 중반에 쓴『희망의 신학』이 있어요. 그게 몰트만을 세계적인 신학자의 반열에 오르게 한 책이예요. 그건 정말 좋은 책입니다. 신학생들은 꼭 읽어야 될 책입니다. 그런데 그 책은 어느 철학자의 영향을 받고 쓴 거예요.Das Prinzip Hoffnung라고 하는『희망의 원리』책을 쓴 에른스트 블르흐(Ernst Bloch)의 영향을 받은 거지요. 이거는 종말과 희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막시즘적 철학자의 어떤 정신적 영감을 받아서 기독교의 신학이야말로 종말론이다 그런걸 이야기 했습니다. 제가 전공한 판넨베르크도 헤겔의 보편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거거든요? 성서 안에 주변안에 여러 종교 문학 학문 과학 이런데서 영향 받은 요소들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부정할 필요도 없고 당연하게 우리들이 인정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우리가 좋은 쪽으로 영향을 받는게 좋고요. 영향을 받기만 하는게 아니라 주는 것도 있어요. 서로 역사가 지나면서 당연히 일어 나는 일이니까요. 우리는 이걸 다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라고 보면 됩니다. 가능하면 좋은 쪽으로 영향을 받아야 되는데 나쁜 쪽으로도 영향을 받을 수 있은 거예요. 근본적으로 잘못을 받아 드리면 곤란한데요.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한 방식에서 영향을 받을 수도 있어요. 그런 것들은 오늘 우리가 잘 해석을 해야 되는 거지요. 앞서 제가 바울이 그당시 로마헬라의 어떤 도덕적인 규범들을 받아 드리면서 그것이 기독교적이라고 이야기 한 것은 아니고 그 기독교인 로마헬라 문명권 안에서 살아야 할 될 기독교인의 삶의 자세를 제시한 거거든요? 그것을 읽는 우리들은 바울이 말한 그 내용이 정말 기독교신앙의 근본을 이야기 하는 것인지 아니면 로마헬라에 있었던 몇가지 도덕적 목록들을 이야기 하는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되지요. 그것 없이 그 말을 무조건 이해하다 보면 조금 기독교 근본신앙으로부터 멀어지는 겁니다. 오늘 여기 나와 있는 원수들에 대한 증오에 가득찬 이 표현들을 성서적인 거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곤란하다고 하는 거지요. 다만 문학적인 방식으로 이것을 채택했을 뿐이예요.

 

중요한 것은 이 성서 기자가 극한의 악이 준동하는 세계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신앙적 방향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결국 그래서 이 58편 기자도 이야기 할려고 하는 것은요. 악이 그렇게 악랄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승리하신다 하는 것을 말할려고 하는 거예요. 앞서 제가 선악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성서는 결국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심판 그걸 이야기 한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이 시편기자도 그걸 이야기 하는 거지요. 아무리 이 세상이 악하다하더라도 그래서 내 입에서 저주의 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라고 하는 거지요. 그걸 말할려고 하는 거예요. 11절 이렇습니다. 그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 하리로다 네 이게 인제 시편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중심이지요. 핵심이지요. 맨 앞에 나와 있는 1절과 2절 요것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까다롭고요. 번역에 따라서 조금 다르게 전달 될 수 있어요. 통치자들아 이렇게 시작하네요.

1.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2.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

그렇게 1절과 2절이 되어 있습니다. 이거는 천상의 신들의 회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약간 좀 이교적이지요? 헬라 신화 이런데에서는 뭐 신들이 인간들처럼 똑 같이 회의하고 미워하고 이러한 것들을 하는데 이 성서에서는 그러한 생각들이 없거든요? 거의 없다고 봐야지요. 부분적으로만 영향을 받아서 남아있어요. 1절과 2절도 그거예요. 통치자들아 그렇게 했지만 이건 신들아 이런 말하고 똑 같습니다. 천상에 있는 악한 신들이 이 지상에 있는 인간들을 다뤄갖고 악을 더 행하게 한다 그런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신들에게까지 명령할수 있는 그러한 분입니다. 이제 그걸 이야기 할려고 하는 거지요. 그래도 왜 하나님이 이 땅위에 악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느냐 모든 능력이 있으면서 왜 그러느냐 결국 통치자 한 분이 당신인데 왜 결국 악을 놔 뒀느냐 뭐 이런 질문은 무죄한 자의 고난이라고 하는 신정론에 맞물려 있는 겁니다. 이 58편도 사실은 크게 보면 신정론에 해당된다고 볼수 있어요. 하나님이 전능하고 사랑이 있는 분이라고 하면 이 세상에 왜 악을 그대로 허락하냐 이런 질문들이죠. 이런 완벽한 해명은 종말에 가서나 드러날 부분들이구요.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그것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어쨋던 여기 1절에서 통치자들아 이 얘기는 신들아 라고 하는 그런 단어로 바꿔 생각하셔도 되구요. 결국 이들이 정의를 말해야 되는데 잠잠하고 올바르게 판결해야 되는데 잠잠한다 이 악한 신들의 성향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지요. 네, 58편 1절에서 11절까지 쭉 보았습니다. 좀 어려웠지요? 그리고 자칫하면 오해 될 수가 있을 만한 내용입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들이 성서를 혼자 읽고 은혜를 받는 다는 것은 쉽지도 않고 어떻게 보면 바람직한 것이 아닐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오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사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안다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문적으로 공부를 한 사람이라고 한 사람들이니까 그걸 전제해 놓고 본다면 우리가 그런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목사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신학자들이 쓴 책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도움을 받는데 꼭 필요합니다. 58편 여기에는 이교적인 표현들이 들어 와 있지만 그러나 결국 이 세상에 있는 악에 대한 인간적인 분노를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되고요. 결론적으로 그러한 증오 할 수 밖에 없는 악이 준동하는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이걸 이야기 할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2500년전 고대 유대인들만 아니라 오늘 여기 우리들에게도 똑 같이 고백될 수 있는 그런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위르겐 몰트만,『희망의 신학 Theologie der Hoffnung』이신건 역, 대한기독교서회

에른스트 블로흐,『희망의 원리 Das Prinzip Hoffnung』박설호 역, 열린책들


[레벨:12]harris

2009.07.07 21:07:58
*.151.112.164

라라님은 작은 겨자씨 같은 소중한 분이세요.

감사 말씀 드립니다.

아울러 인도의 사티아 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두 분께 항상 빚진 마음 갖고 있습니다.녹취록이지만 읽을 때 마다 두 분의 마음씨가 더해져

정 목사님의 강의가 더 제 마음에 다가옵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profile

[레벨:38]클라라

2009.07.08 05:59:11
*.234.35.112

harris님,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

녹취록이 도움이 되신다는 말씀에

다른 시편들도 몽땅 녹취해야 겠다는 마음이

굴뚝같이 일어 납니다^^

전에 선교사님께서 절 보고 녹취록을 권유 하셨었는데,

저도 녹취록 하면서 시편을 새롭게 알아 가는 거 같습니다. 

시편의 창문을 통해서 보여지는 생명의 세계에 초대 받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

감사 드립니다.

profile

[레벨:29]유니스

2009.07.08 23:08:03
*.251.192.157

라라님, 제가 녹취록 덕분에 강의를 대합니다.

시간도 줄이고, 장소도 마음대로 정해서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라라님과 사띠야님께서 꼬박 작업을 하셔야 하니

진짜로 감사드려요~~

 

profile

[레벨:38]클라라

2009.07.08 23:26:24
*.234.35.112

오웃~!

유니스님께도 감솨!!

제가 녹취록을 하게 되면서 얻은 수확이 엄청 많답니다.

우선은 목사님의 시편 세계를 알게 되었지요.

목사님은 천상 시인이시라는 거요..

하기사 제 눈엔 성경 기자들이 몽땅 시인으로 보이긴 하지만요.^^

목사님이 열어 주시는 '신세계'가 엄청 신기합니다.

신비 그 자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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