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61편 녹취록-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조회 수 1404 추천 수 0 2009.08.08 00:26:53

시편 61편 강해-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시편 61편입니다. 1절에서 8절까지 있습니다. 제가 읽겟습니다.

 

1.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2.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 도하소서

3.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4.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5.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 게 주셨나이다

6.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7.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 하소서

8.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 하리이다

 

아멘! 시편 61편을 기록한 시편기자 이 사람이 지금 처한 형편이 어떤 지를 이 본문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따라 잡을 수 있습니다. 세세하게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어떤 큰 틀에서 볼 수 있는 그 사람의 정황 이런 거죠. 독특한 표현이 하나 나와 있어요. 그게 아마 이 사람이 처한 형편을 암시하는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2절이에요. 다음과 같습니다. 2.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땅 끝에서부터라고 그랬어요. 이게 단순히 문학적인 수사에 불과한 건지, 아니면 이 사람이 실제로 처한 어떤 형편을 말하고 있는 건지 딱 끊어서 뭐라고 규정하기는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문학적인 것만으로 볼 수는 없지요. 뭐 그렇게 봐도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이 사람이 나름으로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자기가 처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보입니다. 땅 끝이라고 할 때, 어떤 의미일까요? 이 사람이 멀리 고국을 떠나 있는 그러한 국외자를 말할까요? 보통 디아스포라라고 하지요. 고국인 팔레스틴 이 땅을 이 땅을 떠나서 사는 유대인들의 상태가 어떤지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난히 자기네 나라 땅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거든요? 어느 나라인들 그러지 않겠습니까 모든 민족들이 다 그렇지요. 민족의식이 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고국을 떠나 가 있게 되면 결국은 고국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거든요? 고국 혹은 조국이라고도 하고요. 모국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땅에 대한 그리움이 왜 심할까요? 네, 그런거야 뭐 제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바깥의 세계에는 모두 낯설다는 것이 대답이겠지요. 사람은 낯설면 긴장하게 되잖아요? 긴장만 해 갖고 살기엔 참 힘듭니다. 우리 삶이 너무 loose해 지는 것, 매너리즘에 빠진 상태도 좋은 건 아닙니다마는 그러나 늘 자신이 살아 왔던 삶과 반대되는 그런 낯선 것, 상황 속에서 긴장을 하고 살기는 어렵거든요. 이제 그걸 풀어야 되는데 그러면 고국을 가야 되는 거지요. 거기 먹을 거리도 그렇구요. 입는 문제라든지 노래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디아스포라가 겪는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정도가 더 심한 거지요.

 

인류 역사적으로도 유대인들이 갖는 그 고국에 대한 그런 갈망 그런 것들은 여러 문학에서도 표현되고 사실적으로도 많이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이들이 2000년동안 나라가 없이 살면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잖아요? 그것은 땅에 대한 그리움이 밑바탕 된 겁니다. 그러한 팔레스틴, 가나안 땅에 대한 갈망 그러한 열정, 혹은 욕망 이런 것들이 구약성서에도 그대로 나오고 있잖아요? 그 땅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었다고 하는 그러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역사, 그 뒤로 모든 것들이 다 가나안 땅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갈망에 의해서 벌어지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가나안 땅을 두 번 잃어 버렸었죠? 구약성서에 나와 있는 것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와서는 또 한 번 있었구요. 신약시대에는 아주 길었구요. 구약에서는 한 번은 자발적인 것이고 또 한 번은 강제적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이스라엘의 역사 더 정확하게 얘기해서 구약의 신앙적 역사의 두 기둥을 형성하고 있어요. 하나는 출애굽입니다. 출애굽이 발단(發端)하게된 것은 애굽의 노예생활이지요. 거기는 자발적으로 갔습니다. 야곱의 아들들, 그리고 요셉과 얽혀진 그러한 에피소드들은 여러분들이 잘 아실 거구요. 결국 가나안 땅에 있으면 기근은 면치 못하기 때문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의 어떤 도움으로 이집트의 고센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정착하게 됩니다. 한 70여명 식구들이 내려갔죠? 네, 거기서 약 400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왠만하면 70명이 내려가서 400년 동안 지냈다고 한다면 대게 그 나라에 동화 되고 말거든요? 거의 다 그렇습니다.

 

인류역사에서 볼 때 그렇지요. 그런데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히려 동화는커녕 더 차별, 차이가 심해졌어요. 그런 문제들을 이집트 파라오, 파라오의 백성들이 심각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가 구약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모세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파라오의 악정에 못 이겨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대 탈출 장정을 했다고 생각 할 수 있지요.그러나 객관적인 역사에서 본다면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파주의 이런 것들이 크게 작용 했을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날이 갈수록 점점 이렇게 따로 노는 그러한 태도를 보였을 거거든요? 이건 제가 좋다 나쁘다 하는 차원에서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니고요. 네, 그들이 그런 형태를 보였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걸 구약성서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보고 있는 거지요. 그들은 4백년 동안 지냈으면서도 그들은 결코 동화되지 않고 땅을 향해서 돌아 왔지요. 두 번째는 바벨론 포로예요 그거는 강압적인 상태로 갔습니다. 그때 겪었던 시련과 어려움들을 이러한게 한 50년 내지 70년 뭐, 그 뒤로도 주변의 제국에 의해서 계속 어려움을 당했는데요. 그런 어려운 역사 경험들이 성서를 형성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선 뭐 오늘 시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이 ‘땅 끝에서’ 라는 이 표현이 이 성서기자의 상황을 말한다고 하는 것에 대한 설명에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갖는 이 가나안, 팔레스틴 땅에 대한 갈망 이것을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 두 번 땅을 떠났다가 돌아 온 거구요. 신약시대에는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A.D.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당한 다음에 사실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긴 거 거 든요? 이스라엘인이라고 하는 히브리인들 역사가 완전히 없어져야 마땅한 거였지요.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살았으니까요. 그런데 2차 대전이후, 1947년인가요? 그때 결국 끈질긴 노력을 통해서 팔레스틴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세운 것이, 이런 일이 벌어지니 그러다 보니 당연히 먼저 있던 팔레스틴에 있던 원주민들은 쫒겨 나게 되고요. 그런 투쟁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쨋던 말을 줄여야 되겠군요.

 

이 성서기자, 시편기자는 땅 끝에서부터 주님께 부르짖는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고 이 개인도 아마 그러한 상황에 처해 진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는다 이러한 표현은 한 사람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실체 역사경험이고 신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들은 늘 변두리 생활을 해잖습니까 이 땅 끝은 변방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마이너리티 삶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땅 끝에서 제국으로부터 계속적인 억압을 받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황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끊임없이 부르짖은 거지요. 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그런 부르짖음이 없었다면 생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참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고 있는 아주 특별한 요소라고 할 수 있어요. 땅 끝에서부터 주님께 부르짖었다. 이스라엘의 백성의 역사경험과 신앙이 오늘 여기 시편 61편에 그대로 녹아 든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징이긴 하지만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가 일부러 주변사람들이 되자 땅 끝으로 떨어지자 그런 말씀은 아니고요. 그거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거는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니까요. 기독교가 박해를 받는 경우라고 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이 실질적인, 2차 대전 이후에 동구라파라든지 이런 데는 그렇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좀 다른 거지요.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는 시대 불문하고 기독교인들은 땅 끝에서 주께 부르짖는 삶을 사는 게 당연합니다. 왜 그러는지를 제가 굳이 설명 드리지 않아도 전달은 됬을 겁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거지요. 삶의 풍요 여유로움 이런 것에만 목을 걸고 사는 그러한 사람들하고는 다른 방식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궁극적인 상태를 생각한다고 하는 거지요. 그게 이제 땅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땅 끝 일수도 있고요. 그러한 상황에서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 끝이라고 하는 것을 좀 더 영적인 차원에서 설명을 해야 되겠군요. 자칫하면 이런 말씀들이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 땅 끝에서부터 주님께 부르짖는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여기서 열심히 노력해 갖고 만들어 가는 그런 삶의 형식들 그러한 내용들 그러한 것으로 생명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예, 사람들은 다 그런 데 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그 것 너머에 있는 생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람들이 계속 해서 추구하고 있는 삶의 문제들의 푹 빠져 버렸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그 너머에서 오는 생명을 기다릴 수도 없고 거기에 관심을 가질 수도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소유와 어떤 성취와 업적과 같은 방식의 삶으로부터 좀 벗어나는 그 끝자락에 가야 되는 거겠지요. 그러한 소위 말해서 그런 세속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 의미 없다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개입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현실적인 이 삶을 포기하거나 그것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이 안에서 우리가 또 투쟁하고 살아야 되는 거지요.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의 생명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는 거예요. 네, 끊임없이 우리는 이런 땅 끝이 어디냐 하는 것에 대해 질문해야 되고 그것이 우리 삶에 일치가 될 수 있도록 영적인 길을 가야 되겠지요. 이게 뭐 사실은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형식이라고 하는 것들이 계속 서로 땅 중심에 갈려고 하는 그 투쟁이라서 아, 나는 투쟁에 들어 가지 않고 저 끝으로 가겠다 하는 이러한 삶의 태도가 기독교인들에게서도 좀 찾아보기 어려운 거지요. 예, 오늘 여기 61편이 말씀의 특징을 제가 좀 길게 설명을 했네요. 예, 2절만 중심으로 제가 설명한 것 같습니다. 그 앞뒤로 연관된 내용들을 조금 더 보충해야 되겠어요. 땅 끝에서부터 주님께 부르짖는다고 하는 것을 제가 이 61편의 핵심주제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걸 중심으로 지금까지 말씀을 드린 거예요. 그 부르짖는다고 하는 단어가 1절에서 이미 나오고 있어요. 이렇습니다.1.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2절에서는 땅 끝에서 부르짖는다고 했으니 더 강조가 된 거구요. 1절에서 이미 나의 부르짖음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도에 좀 관심을 기울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하고 있네요. 예, 우리가 자주 대하는 구절들이라서 뭐 그런 이야기 뻔한 이야기라고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는다고 하는 말씀을 한 번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보통 부르짖으라!! 해서 예, 뭐 소나무 뿌리를 뽑는다거나 밤새도록 철야 기도한다거나 이루어 질 때 까지 간구한다거나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한 태도도 무조건 잘 못 됬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예, 그런 것 들도 필요 하겠구요. 경우에 따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기자가 얘기하는 부르짖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우리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발악 같은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그렇게 자해를 한다거나 그 광신적인 태도로 무엇을 간구하는 그러한 것도 아니지요.

 

가장 깊은 기도라고 할 수 있어요. 가장 깊은 기도, 가장 영적인 기도, 언어로서는 도저히 담아 낼수는 없는 기도인 거지요. 이 사람이 하나님이여! 이렇게 처음 시작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했어요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부른다고 하는 것도 이게 이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요. 어떤 생각을 갖고 하나님을 부르는 걸까요? 하나님이여 이러한 호칭 부르는 이 말에 어떤 뜻이 있을까요? 하나님이여!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하나님을 부를까요? 우리가 부르고 있는 하나님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을 부른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통해서 얻을 수 없는 그것에 대한 깊은 인식이 있을 때 가능한 거지요. 그럴 때 하나님을 부르는 거지요. 습관적으로 나에게 무엇을 해 주십시오, 뭐 어떠십시오, 하는 그러한 차원에서라고 한다면 이거는 하나님을 부른다고 하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 겁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들은 하나님 없이도 늘 잘 살아가면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가 좀 노력하면 더 어떻게 되니까, 기술적으로 잘 살아 가니까, 그것으로도 만족을 하면서도,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 가면서도, 하나님을 부른단 말이예요. 거기서의 하나님은 그냥 이런거라고 할 수 있어요.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더 좋은 어떤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러나 세상은 자기 식대로 다 살아 가는데 거기에 보충적으로 그것을 잘 되게 해 줄 대상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이럴 때는 하나님이여!라고 말한 의미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을 부른다고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어떤 삶과 생명의 깊이에서 나오는 거예요. 물론 그러한 깊은 인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더불어서 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가능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런 문제들을 엄격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에 있어야 된다는 뜻으로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니예요. 원칙은 원칙인 것, 근원은 근원인 것이니까 말씀을 드리는 거구요. 실제적인 우리의 삶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엄밀하게 구분하면서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냥 할 수 없다 이렇게 자기를 합리화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서를 읽는 것은 고도의 영적인 경지에서 신앙의 근본을 말하는 것을 배우는 거니까요.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영적인 자세만 갖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신앙적으로 어른이 될만한 거지요. 어른이 되는 거지요.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은 다른 거를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부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무관심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절대적인 어떤 대상을 부르고 있는데 그와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데 상대적인 것들에 마음을 둘 수 있을까요? 조수미씨 같은 분들이 오페라의 아리아 고도의 테크닉과 음악성이 필요한 아리아를 부르지 않습니까 그러한 절대적인 음악성에 들어간 사람이 대중가요 이런 것에 흥미를 갖겠어요? 어쩌다 한 두 번 그냥 재미삼아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부를 수는 있지만 그러한 오페라 가수들이 유행가에, 그리고 별로 음악적 깊이가 없는 그러한 유행가에 관심을 가질 까닭이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이러한 기도는 클래식 중에서 클래식을 하는 사람의 경우처럼 절대적인 생명의 공급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런 사람인 거지요. 그러한 1절에 나와 있는 말씀이 2절에서도 강조 된 거예요.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이게 땅 끝의 경험, 예, 그러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생산해 내는 그러한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가 아니라 그 끝에서 더 이상 도움이 없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그러한 지경에서 나오는 부르짖음 이지요. 네, 그러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주님이고요. 3절에 나와 있는대로 그 분이야말로 피난처이시구요. 아시겠지요?

 

이 피난처라고 하는 말이 얼마나 근원적인 의미가 있는 단어인지 말이지요. 피난처,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실제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말 자유로운 거예요. 예,그 차이를 사람들은 자꾸만 놓칩니다. 계속 내 자식도 잘 되야 되고 뭐도 잘 되는 방식으로 주님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피난처로 여기게 된다면 그건 뭔가 근원적으로 잘 못된 거지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다 피난처이고 망대이다 주님만이 그런 분이다 이렇게 기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영적인 경지라고 하는게 뭘까요? 이건 입만 종알종알 대는 그러한 기도가 아니고 실질적으로 자기의 영혼, 영적인 실존을 다 담은 기도를 드린다고 할 때 말입니다. 그 분만이 나의 피난처이고 나의 망대라는 이러한 고백 말입니다. 이럴 때에 이제 우리가 참된 영성이 뭔가 알 수 있는 거지요. 4절에도 이어져요. 주의 장막에 머문다 주의 장막, 주님이 내가 거할 곳이다 라고 얘기 하는 거지요?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날개라고 했어요 장막, 날개 이러한 성서적 용어들이 참 재미 있습니다. 의미도 있구요. 깊이도 있구요. 성서적인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3절과 4절의 단어들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지요. 피난처 망대 장막 날개 과연 우리는 그렇게 시편기자가 말하는 이러한 단어에 나와 있는 그러한 분으로 이해하고 있을까 아주 실질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을까 하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게 도와 주는 것들이 어떻게 변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실망하지 않게 되겠지요.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피난처가 아니라 주님이 바로 피난처라고 하는 것을 아니까요.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 마지막 단락까지 가게 된다면 죽음도 넘어 서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 요기까지가 핵심이고 5절부터 8절까지는 조금 다른 내용들을 담고 있어요. 서원에 대한 이야기하고 기업에 대한 이야기 5절에 나와 있는 단어가 그거예요. 핵심적으로 그렇습니다. 나의 소원 그리고 기업을 주신 것 그런 거구요. 6절, 7절 8절은 왕에 대한 중보기도예요. 전체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대목들인데 이렇게는 연결시켜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4절에 장막안에 머물고 날개 아래 피한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이 가능해 질려면 유대인들에게는 왕이 바로 하나님이 보낸 대리자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왕이 그런 일들을 잘 할 수 있도록 탄탄하게 자리를 잡는 것, 이게 중요한 거지요. 그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고 어떤 힘들이 여러 세대에게 걸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유대인들의 특별한 신앙 아래에서만 이해 될 수 있는 부분이지요. 왕에 대한 특별한 은총이 있어야 백성들의 삶도 평안해진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왕에 대한 관점들이 구약성서에 다 일치되고 있는 것은 아니예요. 아마 이런 것들은 바벨론 포로 이후 어려웠을 때에 그 뒤로도 몇 백년동안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의 제국에 의해서 어려움을 당했으니까요. 왕의 역할을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겁니다. 왕이 제자리를 잡는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모든 삶과 신앙이 탄탄하게 자리를 잡는 거였어요. 그런 차원에서 이 왕에게 장수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게 된 거지요. 그러나 좀 더 거슬러 올라 가게 되면 예언자 시대에 이 왕은 하나님 뜻을 거스리기도 하는 그러한 인물들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왕권과 예언자가, 왕들과 예언자들이 충돌하게 되는 거지요.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여러 가지 그 세력들이 충돌하고 또 결합도 하고 그러면서 발전되어 온 거예요. 네, 오늘 말씀드릴 부분들은 다 된 거 같습니다. 다시 결론적으로 처음에 서론으로 여러분들에게 드렸던 그 구절로 돌아 가겠습니다. 2절 내 마음이 약해질 때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땅 끝에서 주께 부르짖는다 예, 이러한 방식이 아니면 우리는 참된 의미에서 구원받기 힘듭니다. 구원은 거기서 시작하는 거니까요. 이건 우리 기독교적인 신앙으로 바꾸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께 부르짖는다 그러한 말이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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