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죽음과 영생   (6:15-23)
            

우리가 성서를 읽고 공부하는 이유는 거기서 어떤 정보를 캐내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신학(앙)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을 배운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우선 두 가지 의미로 한정해서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서 본문은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설명하는 게 아니라 그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과 인식을 담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계시이되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모두 죽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성서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도 역시 자기계시 방식으로 우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성서 기자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역시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가 어떻게 자신을 열어주시는지 인식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서읽기와 그 공부를 통해서 그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사유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만약 성서의 정보를 이미 완료된 그 무엇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율법 실증주의에 머물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법이나 형식에 제한 받지 않고 자유로운 영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위에서 말한 사실은 아주 명백합니다.
이런 관점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고 공부하게 될 바울의 진술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2천년 전 바울이 살던 시대의 한계, 그런 삶의 자리, 그리고 바울이라는 한 개체가 안고 있는 상황이 우리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기계적으로 따라갈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신학적 사유의 과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이 로마서 내용은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대상이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울이 아니라 그가 혼신을 기울여 선포하려 했던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
앞 단락에서 바울은 기독교의 세례가 갖는 심층적 의미를 분명하게 풀어주었습니다. 인간은 죽어야만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데,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이니까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듯이 기독교인도 역시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세례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바울은 이제 오늘 우리가 택한 단락에서 이 세례의 의미를 죄(罪)와 의(義)의  관계구도에서 해명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종'(둘로스)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그가 살고 있던 시대의 특징이 그렇게 짜여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로마는 로마 귀족과 로마 시민과 그들에게 속한 종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로마 시(市)는 전쟁을 통해서 강제로 잡아온 외국인 종들에 의해서 모든 노동력이 제공될 정도였기 때문에 종과 그들의 운명은 그들에게 일상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19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영적인 깊이를 이해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른다'(16절)고 말입니다.
'죄의 종'이라고 할 때 '종'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16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 바울의 표현은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어떤 다른 힘에 철저하게 의존해 있는 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와 맥을 같이 합니다. 미국 역사에서 노예 해방이 일어난 다음에 법적으로는 자유인이 된 흑인이라고 하더라도 대다수는 아주 오랫동안 그 노예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어떤 힘에 의해서 지배받는 데 익숙하게 되면 도저히 거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심층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아마 인간의 무의식이 인간을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의식보다도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의식에 비해서 무의식이, 또는 잠재의식이 훨씬 깊고 크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의식이 어떤 구조로 확정되어버리면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은 결국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일종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노이로제에 결렸다는 것은 그의 무의식에 불안한 심리가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겠지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약물치료도 하고, 요가나 마인드 콘트롤 같은 정신치료를 병행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문제를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라든지, 또는 인간의 도착된 심리를 기술적으로 교정하거나 치료해나가지 않습니다. 심리학은 인간의 심리 현상을 인간의 본질적 구성요소라고 보는 반면에 기독교는 부수적인 것으로 봅니다. 우리를 구성하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생명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연결되어 있을 때는 생명이 유지되고, 끊어졌을 때는 상실됩니다.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인간관계의 개선이나 심리치료를 통해서 생명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사용한 '종'이라는 개념은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떤 것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이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인간이 선택하게 될 한쪽의 삶을 '죄의 종'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말은 곧 죄가 지배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자신이 노력을 해도 이런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죄로 기울어진 무의식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며,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생명의 힘이 아니라 죽음의 힘이 그 사람에게서 주인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불법의 삶
바울은 로마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기 이전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19절). 로마 사람들의 생활태도가 어떠했기에 바울이 여기서 이렇게 혹독하게 비판하는지 그것에 대한 문헌을 보면 그럴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서양의 역사에서 로마만큼 돋보이는 문명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 이전까지의 모든 문명이 로마로 집대성되었고, 그 이후의 모든 서양문명은 다시 그 로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법, 철학, 학문, 예술 등, 인류 전체 문명이 그렇습니다. 이들의 이런 저력은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것에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대개는 자기 나라의 민중들을 수탈하거나 다른 나라의 힘을 강탈함으로써 생긴 힘이 밑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수탈과 문명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모든 나라가 똑같은 수준으로 풍요롭게 살수는 없기 때문에 한 나라가 풍요롭다는 것은 그 어떤 나라가 궁핍하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로마의 힘이 겉으로는 화려한 문명이라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만 내면으로는 지배와 소비라는 열매를 맺고 말았습니다. 인간에게 최소한 굶주림의 문제가 해결되면 두 가지 가능성이 주어집니다. 하나는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훨씬 감각적인 쾌락에 대한 추구입니다. 로마 문명에 정신적인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은 작은 부분으로 내몰리거나 숨겨지는 반면에 '마음껏 먹고 즐기자'는 욕구가 기승을 부리게 되었습니다.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사람들은 능력껏 출세하고 전쟁을 하고, 그리고 얻게 되는 재물과 권력을 통해서 끝없이 쾌락을 좇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세태를 가리켜 "저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르렀다"고 진술했습니다.
인간의 구성 요소는 정신과 육체이기 때문에 육체가 요구하는 부분을 무조건 억제하는 것이 최선이라거나 신앙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먹고 마셔야 하며, 스포츠를 즐겨야 하고, 그 이외에도 우리의 육체적 즐거움이 요구하는 것을 공급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충족시키는 것에만 우리의 삶을 집중시킨다면 결국 인간은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아무리 겉으로 교양을 갖춘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이 자신의 육체가 요구하는 것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면 생명과 끊어지게 됩니다. 그 막강했던 로마 문명이 멸망하게 된 이유를 여러 관점에서 진단할 수 있긴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 사실, 즉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심에 기울어지면서 그것을 정당화시키려 한 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법의 끝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렸다'는 말은 단지 도덕적 불감증 정도의 의미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제가 여러 번 강조했듯이 기독교는 도덕주의가 아닙니다. 도덕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도덕의 뿌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 도덕적인 행위를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아니라 그가 어디에 삶의 자리를 확보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도덕적인 행동이 바람직 한 것이지 도덕적인 행동이 있기 때문에 그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바울의 말은 로마 사람들의 행동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경향성을 가리킵니다.
21절 말씀이 바로 그것을 증명합니다.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이 진술은 자칫 추상으로 들립니다. 부도덕하게 살았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산 사람보다 빨리 죽는다거나 더 불행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물론 사람이 평소에 나쁜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면 그런 심리상태가 자기의 육체적 건강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하겠습니다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빨리 죽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부도덕하게 살던 사람이나 도덕적으로 산 사람이나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누구나 마지막을 죽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슨 뜻으로 부끄러운 일들의 마지막이 죽음이라고 말씀하나요? 이런 말씀은 단지 영적인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걸까요? 실제적으로는 별로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교훈적인 의미가 있는 걸까요?
이 말씀에도 역시 인간학을 뛰어넘는 바울의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지막은 죽음이지만 사람은 그런 죽음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게 아니라 그가 어떤 힘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의 욕구에만 충실함으로써 결국 죄의 종이 된 사람은 이 땅에서 유지되는 삶으로 모든 게 끝장납니다. 그 사람의 근본 마음이 이 땅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형식에 한정되지 않는 새로운 생명을 일구어 가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꼬마들이 동네 골목길에서 놀고 있습니다. 어떤 꼬마는 구슬치기에만 자신의 모든 삶을 걸어두었습니다. 구슬을 따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놀이가 끝나자 구슬을 많이 따기는 했지만 돌아갈 집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꼬마는 다리 밑에서 혼자 사는 전쟁고아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른 꼬마는 돌아갈 집이 있었기 때문에 구슬을 잃어도 그렇게 결정적으로 상심하지는 않습니다. 집에는 재미있는 동화책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들도 있기 때문에 구슬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앞의 꼬마는 구슬치기가 끝나면 모든 삶이 실제로 끝나게 되지만, 뒤의 꼬마는 전혀 새로운 삶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딱 들어맞는 예는 아닙니다만,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이 어디에 삶의 목표를 두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에만 한정되는가, 아니면 이 땅에서 성취할 수 없는 것에까지 초월하는가. 이 말은 이 땅의 삶을 무시하거나 냉소적으로 평가한다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주 전체를 하나님의 창조행위라고 본다면 앞으로 4,50억 년으로 수명이 다하는 이 지구에 있는 것에만 궁극적인 생명을 한정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주 먼지가 어떤 물리 화학 작용을 일으켜 별이 생성되는데, 우리는 지금 태양을 뿌리로 두고 있는 지구 안에서 이런 형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지구의 생명만이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굳이 외계인 운운할 필요 없이 우리가 이 지구를, 그리고 그 안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현상을, 더 나아가서 우주의 지평에까지 눈을 조금만 돌릴 수 있다면 우리가 지구 안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만을 절대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죄는 이 땅의 죽음으로 모든 게 끝장날 수밖에 없는 것에 목을 매달 듯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로마 사람들의 불법도 역시 자기들의 법, 정치, 군사력, 예술, 도덕성에 절대화입니다. 로마 사람들의 인간성이 부패했다는 것보다는 자기들이 성취해나가는 것 이외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삶의 태도입니다. 이런 것은 그것이 아무리 선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죄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삶으로 모든 게 끝장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
위에서 말한 로마 사람들의 삶을 버린 기독교인들의 삶은 이제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19절). 바울이 말하는 의의 종은 곧 하나님의 종(22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정의와 하나님이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는 말인가요? 하나님이 의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이 말은 일단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의 편에서 쉽게 정의라고 생각하는 그런 가치들을 하나님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주제이기도 한 이 의(義)를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서는 의를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는 곧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하는 의는 대개가 자기의 주관에 의한 가치판단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폭력'은 정의입니까, 불의입니까? 평화만이 옳은지, 폭력은 무조건 악인지. 물론 우리는 폭력이 정당하게 사용되면 그것도 역시 정의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정당하게 폭력을 사용할 능력이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정의가 늘 이렇게 상대적이니까 언급하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정의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니까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고 신뢰하는 것이 우선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기독교 윤리는 인간론이 아니라 신론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주제의 결론을 영생으로 맺고 있습니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영생은 단지 이 세상의 삶이 영원히 연장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상상하게 된 인간의 욕망이 아닙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시간적인 차원이 아니라 생명의 신비에 대한 표현일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본질이 사랑이라고 하신다면,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우리가 이 땅에서 간접적으로라도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궁극적 생명을 준비시키셨다는 믿음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런 일련의 사건과 희망이 선취되었으며, 우리에게 일어날 것을 믿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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