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영광스런 삶을 향하여(8:18-30)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의 의미는 각각의 구절마다 우리가 그 무게를 감당하기에 벅찰 정도로 깊고 넓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전체 본문을 몇 단락으로 나누기보다는 핵심적인 구절을 따로 떼어서 묵상하는 방식으로 공부하겠습니다.
바울은 앞서 17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라는 질문으로 기독교인이 누리게 될 영광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 영광이 바로 오늘 본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삶에서는 그것과 유비될 만한 것을 찾아보기 힘든 '영광'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조금씩 풀어가게 되면 그 답이 자연스레 주어질 것으로 봅니다.

18절: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영광이라는 단어가 자주 쓰이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헬라어 '독사'는 독일어로 'Herrlichkeit'라고 합니다. 독일어를 직역하면 '주(主)되심'입니다. 따라서 영광이라는 단어가 갖는 가장 초보적인 뜻은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곧 하나님이 주님이 된다는 뜻이고, 오늘 본문처럼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라는 말은 우리가 거의 주님과 같은 수준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19절)는 진술은 곧 영광의 때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명실상부하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드러나게(계시) 될 때 우리가 거의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앉게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런 일은 종말론적인 시각에서만 가능할 뿐이지 현재는 그것과 전혀 반대되는 삶이 우리게 주어져 있습니다. 지금은 바울이 말하는 대로 '고통'을 겪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비록 현재의 삶이 고통이지만 앞으로 우리에게 임하게 될 영광과 비교한다면 이 고통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앞서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우리의 생각이 막히는 이유는 하나님과 같은 자리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자랑스러운 자리, 높은 자리, 심지어는 남에게 칭찬 받는 자리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자리가 바로 그것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간혹 가난한 집의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변호사가 되거나 장군이 되었을 때 그 집안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또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따위의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영광'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려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지위에 올라가는 것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이 세상의 기준을 일단 포기해야만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영광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 사태를 뛰어넘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비유적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21절: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영광은 우선 피조물이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멸망의 사슬에 묶여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확한 사실입니다. 잠시 이슬처럼 살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젊음도 순간이고 재물과 권세도 순간입니다. 더 나아가 국가도 예술도 이데올로기도 순간입니다. 어쩌면 45억년 쯤의 나이를 먹은 태양도 앞으로 그런 정도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 사라진다는 점에서 역시 순간적인 사물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 멸망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시간 속에서 사멸 당합니다. 따라서 영광은 곧 멸망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피조물들이 이런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이런 점에서 영광은 곧 자유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멸망당한다는 것은 숙명적으로 죽음에 종속되어 있다는 뜻인데, 이런 죽음의 종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곧 영광스러운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자유'에 대한 철학적, 정치적, 사회학적 논의를 전개하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자유담론이, 또는 그것을 위한 투쟁이 인간 역사 안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런 점만은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자유는 곧 영광과 동일한 지평의 사건이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서 획득된다기보다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져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 심리적으로 자유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마약에 취해 있을 동안에도 역시 자유의 심리적 상태가 어느 정도까지는 유지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의미에서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유를 생산해낼 수 없습니다. 에릭 프롬이 오래 전에 말했듯이 인간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만을 생각하고 추구하지 '무엇을 향한 자유'(freedom to)에 대해서는 무능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인간에게 임하는 영광이 종말에 주어지듯이 완전한 자유도 역시 종말에나 가능할 것입니다.
노파심으로 한 마디 해야겠습니다. 비록 궁극적 자유가 종말론적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따라서 우리가 이끌어내려는 자유형식이 상징의 한계를 갖고 있지만 아직 '중간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자유 투쟁을 유보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실존적 자유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적 자유는 종말 이전의 시간 안에 살고 있는 우리가 획득하고 진작시켜야 할 삶의 리얼리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성육신이듯이 영원과 초월은 현재와 내재와 불가분리이기 때문입니다.

22절: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는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영광'을 이해하려면 아직 영광에 들어가지 못한 피조물의 현실을 뼈저리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바울이 증언하듯이 사람들의 삶에는 마디마디에 신음과 진통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물론 외면상 즐겁게 사는 모습이 있긴 합니다만 그런 상황을 그야말로 순간입니다. 노래방에 가거나, 자녀들이 좋은 직장을 잡거나, 심지어는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잠시 흥분하고 즐거운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순간입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허무한 일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이 상실되는 죽음에 이르기 전에도 우리의 일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욕망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음이며 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4,25절: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에 대한 희망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바울의 증언은 옳습니다.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인간의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역시 멸망당할 것에 대한 희망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입니다. 아마 바울은 로마의 정치나 유대의 종교, 또는 헬라의 문화와 철학과 예술을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 모든 인간적 가치들에 우리의 삶을 걸어두기에는 그것들의 토대가 너무나 빈약하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이라고 증언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또한 영광스러운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런 영광스러운 삶이야말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기다려야 할 희망의 세계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바울의 이런 증언을 듣다보면 그는 열광주의자, 신비주의자, 또는 허무주의자처럼 보입니다. 물론 바울은 허무주의자도 아니고 냉소주의자도 아니고, 더더욱 영육이원론자도 아닙니다. 그는 사물과 사람과 세계를 좀더 심원한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것뿐이지 우리의 구체적인 삶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즉 그가 무시하고 있는 '보이는 것'은 인간의 자기 욕망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듯이 이런 욕망에 근거한 모든 삶의 설계는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된다고 하더라도 참된 생명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현재의 멸망당하게 될, 사멸하게 될 모든 것들의 훨씬 궁극적인 토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컨대 사랑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있어야만 멸망하게 될 이 땅의 삶에 생명이 공급됩니다. 따라서 바울의 이 진술은 이렇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욕망이 성취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을 기다린다고 말입니다.

26절: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 해주십니다."
이 말씀에서도 우리는 바울이 그렇게 신비한 신앙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열광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때를 기다리는 우리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를 간단히 해소해버릴 수 없습니다. 그 '신음과 진통'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이게 곧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삶의 모순, 곤혹, 딜레마가 우리의 말문을 막습니다. 예컨대 무죄한 자의 고난, 우리의 무한정한 충동, 사멸에 대한 절망감 등등.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기도가 너무 잘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깊기 때문에 많은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존재의 무게를 가볍게 여김으로써 야기되는 '말많음'은 오히려 부끄러움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막혔을 때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 해주신다는 바울의 증언은 약간 신비주의적인 구석이 있긴 합니다.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가 신자들을 위해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중보 기도를 드린다고 믿습니다. 이런 가톨릭의 신앙이 오늘 본문이 진술하고 있는 성령의 중보기도와 맥을 같이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기독교 신앙에는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 어떤 사태가 신비한 방식으로 풀려간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라고 표현합니다. 우리의 언어로 모두 담아낼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런 성령의 개입이 우리의 언어로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신비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아주 명확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28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이 바울의 증언은 최소한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첫째, 어떤 일의 좋고 나쁨은 그것 하나만으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사업이 잘되어서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소비가 증가하게 될 것이고, 소비가 늘게 되면 마음이 황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또는 자동차 사고를 만나서 장애를 얻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한편으로는 불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연히 돌아다니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에 '새옹지마'라는 고사가 딱 들어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일에 양면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하는 것만을 분명합니다. 둘째,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오늘 본문이 언급하고 있듯이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다가온다는 점에서 결국 결과가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삶을 전체로 바라본다는 것에 모아집니다. 순간 순간에 일어나는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전체를 한 묶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전체로서의 삶이 좋은 결과를 맺는다는 인식을 갖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바울의 이런 확신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이 세상에서의 삶을 회피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모든 게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속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역사적 책임을 모면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편이주의입니다. 사실 바울의 증언과 그것의 왜곡인 편이주의를 구분하기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양측 모두 신앙의 초월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인간과 역사의 현실을 감당하는 것이라면, 편이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이 세상을 초월함으로써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탈아(脫我)로서 세계에 들어간다면, 후자는 자기집중으로서 탈(脫)세계화 하는 것입니다.

30절: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주셨습니다."
바울은 29절에서 하나님이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을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갖도록 미리 정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을 좀 쉽게 풀어본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맏아들이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써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아들이나 맏아들이니 하는 이 표현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들은 19절에 기록된 '하느님의 자녀'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29절은 19절의 반복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30절에서 우리가 참여하게 될 영광이 진작부터 예정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물론 29절에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도 예정된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들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맺는다는 바울의 주장은 논리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일들이 '미리' 정해진 것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제외된 사람들은 불평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예정론'에, 특히 칼빈을 중심으로 한 예정론에 시시비비를 벌일 생각이 없습니다. 단지 바울의 생각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의 결론 삼아 선입견 없이 잠시 반성해볼 생각입니다.
저는 바울의 예정론은 바로 성령론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의 말문이 막혔을 때 대신 그 길을 터 주시는 영의 활동을 믿는다면 우리의 영광은 분명히 그분의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일방적이라는 말은 "말로 다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선택의 시간을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핵심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영의 중보기도에 있습니다. 그의 활동에 온전히 마음을 여는 사람은 영광스런 삶이 약속되었습니다. 성령의 생각을 아시는(27절) 하나님이 그렇게 택하셨습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