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절대 능력    (8:31-39)

            
케제만의 설명에 따르면 오늘 이 구절이 로마서 5-8장의 결론일 뿐만 아니라 바울 신학의 총결산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앞에서 언급한 죽음, 죄,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문제가 이제 여기서 수사학적 방식으로 그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승리주의
31절: 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편이라는 바울의 이 말을 그 당시 유대인들이 들었다면 크게 비웃었을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수 천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왔으며, 예루살렘 성전이 있으며, 곳곳마다 회당이 있고, 종교업무에만 자기 삶을 바친 전문가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이방인들과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낸 민족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선민으로 자처하며 살아온 그들 앞에서 이제 막 모임을 시작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자기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 그들에게 가소로운 행태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인가? 자칫 하면 이런 질문은 왜곡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편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서 기독교 역사는 큰 상처를 당했습니다. 이미 1054년 이탈리아 로마를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의 분열이 그 싹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우기면서 상대방을 파문했습니다. 1517년에 다시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개신교회가 분리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편'이라는 세력다툼이 재연되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그런 역사의 흐름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기독교의 '승리주의'와 맞물려 있습니다. 바울이 오늘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라고 표현하듯이 기독교는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승리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흡사 레슬링 선수인 형을 둔 골목대장처럼 그 형을 믿고 으스댄다는 말입니다. 요즘도 교회가 믿음, 또는 선교라는 명분으로 승리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교회를 흡사 체인점처럼 생각하면서 늘려나간다거나, 신앙의 이름으로 피라미드 방식의 사업을 벌이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이런 승리주의는 기독교라는 종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경제, 또는 국제관계에서도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예컨대 지금 대구 곳곳에 대형매장이 들어서고 있는데, 그들의 공격적 마케팅으로 인해서 작은 상점은 모두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였던, 그리고 지금도 벌이고 있는 행동 역시 승리주의에 결과입니다. 일종의 패권주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이 진술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바울과 그 당시 기독교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실 바울은 이렇게 말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44:22절을 인용한 36절을 보면 그의 형편을 알만 합니다.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 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
예수님과 비슷한 연배였던 바울이 활동하던 1세기 중반의 기독교는 사실 아무런 조직도, 힘도 없었습니다. 거의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렇게 진술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승리주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보아야 한다. 즉 교회당을 크게 짓거나 교인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거나 선교사를 많이 파송했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일종의 영적인, 그러나 궁극적으로 참된 차원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죄를 선언하신 하나님
33-34a절: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자신감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죄선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소', 또는 '단죄' 같은 법정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소는 검찰이 피의자의 범법 사실을 적용시키는 것이라며, 단죄는 재판관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제 그런 고소와 단죄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났다는 게 바로 바울의 주장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기독교인들에게 이미 무죄를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무죄 선언이 옳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단지 그렇게 믿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믿음이라는 차원에서만 말하자면 이단 종파에 속한 이들이 우리보다 고수입니다. 영생교 신자들은 자기들의 교주를 믿으면 말 그대로 영생한다고 믿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믿는 행위에 앞서서 그 대상이 믿을 만하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의 내용이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명확하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죄를 선언했다는 바울의 주장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모든 율법적 의무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바울이 누누이 언급했듯이 율법은 죄의 결과입니다. 또한 율법이 있어야 죄가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법이 없으면 죄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죄 선언이 확실한가 아닌가를 확인하려면 우리가 율법 없이 사는가, 아니면 율법으로 사는가를 확인하면 됩니다.
율법 없이 산다는 것을 말로 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깨우치기는 힘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늘 율법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인식과 판단은 한쪽으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갑자기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을 평생동안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 사람은 그것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여선교회와 남선교회 활동에 신앙의 모든 것을 걸어둔 사람은 그런 활동 없이 신앙생활을 못합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죄를 지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동굴 안에 갇혔다. 이들의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서 움직이는 데 많은 힘이 들었으며, 어두움 때문에 활동하는 데도 지장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차츰 동굴 안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동굴 안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전혀 불편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늘 족쇄를 차고 있었으며, 손으로 더듬어 물건을 찾았다. 그들은 그렇게 동국 특유의 침침한 분위기에 길들여졌다. 그런 세월이 흐를수록 동굴 밖의 세계는 그들에게 잊혀지다가 결국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족쇄를 풀게 된 어떤 사람이 동굴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동굴 밖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사물이 내뿜은 영롱한 색깔, 꽃향기, 호수, 나비, 민들레를 보았다. 이 사람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 동포들에게 어서 빨리 동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동굴 밖은 정말 멋진 세계라고 외쳤다. 그러나 동굴 안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고 살아온 동굴만을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동굴 세계의 원로들은 동굴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엉뚱한 말을 하는 이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고 단죄하고 옥에 가뒀다. 옥에 갇혀서도 동굴과 해방을 계속 외쳐대는 이 사람을 그냥 두어서는 동굴세계가 위태롭다고 생각한 끝에 그를 화형 시켰다. 그후로 동굴의 세계는 다시 옛날처럼 행복감을 느끼며 살게 되었다."(이왕주, '철학풀이 철학살이'에서 참조).

그리스도의 단죄?
34b절: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라는 문장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정확한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사건에 가담한 모든 이들이 단죄 받을 만한 사건입니다. 의로운 사람을 죽인 사람은 그것으로 자기의 불의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2천년전 구체적으로 십자가 사건에 가담한 몇몇 사람들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는 모든 인류가 곧 가해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십자가 사건은 인간에게서 벌어질 수 있는 일들 중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이면서, 인간 운명의 가장 큰 실패입니다. 우리는 늘 그런 것을 조롱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종교적 패권과 정치적 패권의 야합으로 인해서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이 세상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경제가 그렇게 굴러가고, 교육도 그렇게 굴러갑니다. 이 사회는 그것을 경쟁력 확보라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진리를 힘으로 억압하는 이런 사태가 곧 하나님의 단죄입니다. 왜곡된 힘의 질서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거기에는 자유도 없고 평화도 없고, 대신 끝없는 소비와 경쟁과 위선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리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게 끝났다면 인류는 영원히 단죄 받았겠지만 부활로 인해서 구원의 길이 다시 열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예수님이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신다"고 진술합니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간구해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단죄가 아니라 부활의 생명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복음의 세계입니다. 의무가 아니라 사랑의 세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35절: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일곱 항목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오늘 우리의 잣대로는 그들의 실정을 충분히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게 순교를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순교 앞에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37절). 이런 상태가 바로 순교의 신비입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죽음'이냐 '신앙'이냐를 선택해야만 할 기로에 섰다면 참으로 곤란할 것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말로만 배교한다고 하고 마음속으로는 믿으면 괜찮다는 식으로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의 순교역사를 보면 실제로 신앙 때문에 화형을 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라는 영화는 그런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순교역사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그들만의 특별한 은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을 화형 시키는 로마의 힘이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명확하게 인식했겠지요. 마찬가지로 이런 옛 에온이 지나가고 새 에온이 다가온다는 인식도 뚜렷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가 순교 없는 시대에 살고 있긴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궁극적인 토대가 된다는 사실만은 되새겨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늘의 악한 세력
38,39절: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위에서 기독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실존적 고난에 해당되는 일곱 항목을 적시한 다음에 여기서 다시 열 항목의 나쁜 세력을 제시합니다. 죽음, 생명, 천사, 권세의 천신, 현재의 것, 미래의 것, 능력의 천신, 높은, 깊은, 피조물. 앞의 일곱 항목은 실제 삶에서 감당해야 할 어려움이라고 한다면 여기의 열 항목은 묵시사상적인, 또는 그 당시의 우주론이고 철학적인 의미에서 제기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우주관은 하늘과 땅과 지하라는 삼층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지하는 물론이고 하늘에도 악한 세력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은 그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묵시사상에 의하면 아직 옛 에온에 속하는 지금은 하늘과 지하의 나쁜 세력이 땅의 인간을 위협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다스릴 새로운 에온이 오면 모든 악한 세력이 제압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은 악한 세력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열거하고 있는 열 가지의 악한 세력에 대해서 지금 일일이 검토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 중에서 '높음'과 '깊음'에 대해서만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리츠만(Lietzmann)에 의하면 이 단어는 점성술 용어로서 한 별의 최대의 거리를 타나낸다고 합니다. 별이 인격화한 것입니다. 사실 성서에는 죄, 죽음, 영과 육에서 권세들의 인격화가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죄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죄를 인격적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별도 높음과 깊음의 능력을 갖고 인격적으로 활동한다고 그 당시에는 생각했습니다. 고대 세계는 그런 점성술을 통해서 인간의 운명을 점지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성서의 이러한 신화적 요소들, 자연과 우주의 인격화를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계시인 성서라고 하더라도 당시의 문화, 과학,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런 힘들을 상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악한 세력들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성서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을 능가한다고 가르칩니다.

고된 현실과 그 뿌리를 넘어서
39절: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당하고 있는 고된 현실과 그것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우주론적 악한 세력은 우리를 두렵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사실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에 직면하면 모든 삶의 에너지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아직 무(無)가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합니다. 고대인들이 점성술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던 것처럼 오늘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한편으로는 허무주의로 나타나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탐욕으로 나타납니다. 기독교인들도 여전히 이런 인간실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 업적에 치우치거나 소종파주의자들처럼 감정적 열광주의에 사로잡힙니다.
이에 반해 바울은 전혀 다른 삶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된 현실과 별들의 힘들이 만들어내는 운명이 있지만 기독교인은 그런 것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그런 현실과 점성술에서 구원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리얼리티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사건으로 드러난 그 사랑만이 참입니다.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무슨 증거가 있는가? 물론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사랑을 실험실에서 증명해낼 수 없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성서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며, 역사가 증명하고 있고, 결국 종말에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 중요한 것은 이미 그것을 인식하고 믿는 기독교인들이 이 사실을 삶에서 증명해야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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