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 (10:1-4)
                
동족의 구원을 위해
이미 9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 충분히 언급했는데도 이제 10장에서 다시 거론하고 있는 걸 보니 바울은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향한 연민이 유달리 강한 것 같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내 동족이 구원받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며 하느님께 간구합니다."(1절). 여기에는 두 가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우선은 자기의 개종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행위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입장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종교에 전심전력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주변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바울 자신에게도 나름대로 게름직한 부분이 없지 않았겠지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애정이 식은 게 아니라 여전히 모든 마음을 받치고 싶다는 심정을 이렇게 피력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하고 고백한 이후에 바울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헤아려보고 싶었습니다. 과거에 자신의 모든 삶을 투자했던 유대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도저히 납득하거나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헛된 게 아니라는 사실과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이 진리라는 사실 사이에 긴장이 없을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두 진리를 모두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긷든 이스라엘은 과거의 삶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현재의 삶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연민을 끊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동족을 향한 심정을 절절히 피력하면서도 이스라엘이 선택한 길이 옳지 않았다는 사실을 단정합니다. 이 문제는 이미 9장30-33절에서 진술된 바 있는데, 이제 10장1-4절에서 재차 확인되고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열성과 바른 인식
바울은 2절에서 동족인 이스라엘의 신앙 형태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나는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열성만은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바른 지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이 지적은 종교 현상이 그것 자체에 함몰되지 말고 진리의 근거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해봅시다.
우선 이스라엘 민족이 보여준 종교적 열성은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습니다. 종교는 자기의 생명 전체가 달려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뜨겁지도 차갑지 않은' 상태로는 그 본질이 담길 수 없습니다. 신앙에 관계된 것은 그것에 참여한 이가 최선을 다 할 때만 참된 모습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종교적 차원만이 아니라 모든 참된 것들의 차원에 속한 문제입니다. 음악가가 자기의 다른 부분을 희생하면서 음악에만 몰두하지 않는다면 그가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갖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어떤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기는 힘들 것입니다.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사물과 역사와 인간 삶에 침잠 하려는 노력을 어느 한 순간이라도 게을리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해 낼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여준 종교적 열성은 어떤 가치 있는 것을 달성해낼 만한 저력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열성은 그것 자체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대로 안타깝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보여주는 "그 열성은 바른 지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열성 보다 바른 '지식'이 우위에 있다는 점을 확인합니다. 왜냐하면 열성은 파괴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열성은 강렬할수록 훨씬 부정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요즘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두 명씩 짝을 지어 매일 가가호호 방문하고 있습니다. 젖먹이 아기를 등에 업은 이들도 있고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정도입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성은 아무도 따라가기 힘듭니다. 1992년에 큰 사회 문제가 되었던 시한부 종말론자들인 '다미선교회' 사건을 보면 한국 사람들의 종교적 열성이 얼마나 강한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즘도 서울 강남에 있는 '사랑의 교회'에서는 새벽 2,3세시부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장사진을 친다고 합니다. 아마 수능시험이 가까운 탓이기도 하지만 이런 종교적 열성은 이 세계 어느 나라 기독교인들도 따라올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열성이 개인과 사회를 변혁하는 에너지로 작동하기만 했더라면 우리의 삶은 지금과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사소한 일로 교회가 분열되고, 심지어는 교단이 분열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일도 없을 것이며, 그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사회정의도 한 단계 올라섰을 겁니다.
바울은 '바른 지식'이 이런 종교적 열성을 결정해주는 기준이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인식론적 판단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인식론적인 판단이 결여된 집단은 광신으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의 과거 역사에는 이런 모습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로이트 같은 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 '집단적 노이로제'라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민중의 아편'이라고 비판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늘 신앙을 이성으로 검열해야만 합니다. 이성이 신앙을 훼손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건강하게 만들기 때문에 교회는 이성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곧 신앙이 신학적 검열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성과 신학의 검열을 받지 않는 교회의 신앙적 열성은 그 개인과 교회와 사회를 광신적 상태로 몰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종교적 열성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義)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열성을 보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에 열성을 보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면 자기 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눅 18:9-14). 이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느님!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14절). 이 말씀에 따르면 자기 의는 결국 자기를 높이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자기 희생적으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를 높이는 수단이 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의를 세우는 일에 열성을 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의를 따르지 않았다고 책망합니다. 이 두 사실, 즉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돈과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없듯이 자기 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의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만약 하나님이 어떤 사물처럼 존재하는 분이라고 한다면 자기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동시에 가능합니다. 우리가 친구를 좋아하면서 가족을 사랑하듯이 말입니다. 음악을 좋아하면서 그림을 좋아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피조물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궁극적인 토대이기 때문에 피조물들과 비교되거나 양립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유일한 존재일 뿐입니다. 흡사 한 나라에서 왕이 둘일 수 없듯이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를 차지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으며, 심지어 하나님은 '질투하는' 분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표현은 모두 하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조금 더 풀어서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에는 절대적인 힘이 단 한 가지만 작용할 수 있습니다. 돈이 절대적인 것으로 작용하면 사랑은 뒤로 밀려나야만 합니다. 권력 쟁취가 절대적인 가치로 작용하면 평화와 정의는 절대적인 가치가 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업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한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비난합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설 수 있는 새로운 길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졌다고 진술합니다(4절). 이는 곧 그리스도가 바로 율법의 마침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전에는 다른 길이 없으니까 율법에 열성을 보였지만 이제는 그 율법은 끝났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은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율법의 시대로부터 은총의 시대로 돌입한 것입니다. 인간 상호간의 경쟁을 통해서 무언가를 성취할 수밖에 없던 시대로부터 그런 모든 경쟁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시대로 들어선 것입니다. 일종의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오늘 명시적으로 설명하듯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은총으로 옮겨갔다는 것은 자유 개념의 새로운 이해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성취함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로워진다고 말입니다. 이런 자유 개념은 단지 종교적인 차원에 머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전반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질문해봅시다. 오늘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형태에서 볼 수 있듯이 무한 생산과 소비 구조를 통해서 인간이 자유로워질까요?
이런 점에서 오늘 기독교 신앙도 근본적으로 은총의 세계를 좀더 명확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로 율법적인 일에 모든 힘을 쏟아내고 있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노자가 말하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에도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율법의 마침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인데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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