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역사의 신비와 찬양  (11:1-35)

                
남은 자 사상(1-10)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도 구원받기를 원했던 이스라엘이 이 구원의 길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믿음의 길이 아니라 율법의 길을 고집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이스라엘이 구원의 길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실적으로는 구원의 길에서 벗어났지만 구원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이 모순을 바울은 '남은 자' 사상으로 해결합니다. 참고적으로, 바울이 논리적 모순을 해결한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래 없던 사실을 바울이 잔꾀를 내어 문제를 회피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뜻을 좀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그런 인식론적 심화의 과정을 통해서 발전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이며,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기계적인 작용이 아니라 훨씬 역동적이면서 동시에 인식론적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지 바울은 이제 열왕기상 19장에 등장하는 엘리야 이야기를 통해서 '남은 자'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중에서 가장 카리스마가 강한 예언자인데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시련을 당했습니다. 아마 그런 시련으로 인해서 예언자로서의 능력이 강화되었는지 모르지만 일상에서는 참으로 무기력증을 많이 느꼈던 인물입니다. 아합왕과 그의 부인인 이세벨의 박해로 인해서 그는 차라리 죽는 게 좋겠다는 절망으로까지 떨어집니다. 절망하면 사람은 죽음을 생각합니다. 바알의 예언자 450명과 아세라 예언자 400명을 혼자의 힘으로 물리쳤던 엘리야였지만 이스라엘 안에서 자기 혼자만 하나님을 따른다는 그 절대 고독으로 인해서 절망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 앞에서 죽겠다고 선포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공연한 걱정을 말고 예언자로서 왕을 세우는 일을 계속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극한의 박해 속에서도 바알신(神)에게 무릎을 끓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 칠 천 명을 남겨두었다고 알려주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엘리야는 정신을 차리고 자기의 일을 계속 추진해 나갑니다.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이런 남은 자 사상에 의해서 그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이런 남은 자들이 없다면 구원의 역사는 단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처럼 물신이 득세하는 시대 속에서도 이런 데 빠져들지 않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생명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을 자기 삶에서 실천해나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요? 이들은 숨어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은폐의 방식으로 그들을 분명히 남겨놓지 않았을까요?
바울은 "이와 같이 지금도 은총으로 뽑힌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5절)라고 엘리야 사건을 현재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들이 곧 유대 기독교인들입니다. 초기 기독교를 선도적으로 끌어가던 유대인들이 곧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기 위해서 남아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방 기독교인(11-24)
11절에서 16절까지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와 이방인의 구원이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앞 단락에서는 '남은 자들'이라는 사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약속이 유효하다는 점을 논증했다면, 이제 여기서는 좀더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포함한 전체 인류가 구원의 가능성 앞에 서게 되었다는 점을 논증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범죄가 세상에 풍성한 축복을 가져 왔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들에게 풍성한 축복을 가져왔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을 받는 날에는 그 축복이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12절). 바울은 분명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임했던 구원의 약속이 그들의 죄로 인해서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유대인의 시기심이 발동함으로써 다시 이스라엘까지 구원받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슨 뜻으로 이방인의 구원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猜忌)나게 한다고 주장하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것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각성하게 된다는 뜻이겠지요.
바울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입장을 '접붙임'으로 설명합니다. 17절 이하에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는 이 접붙임 이야기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겠습니다. 접붙임을 하기 위해서는 원가지가 잘려나가야 합니다. 원래 '돌감람나무'였던 이방인 기독교인은 잘려 나간 가지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두려워할지언정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20절). 접붙임 당한 가지도 다시 잘려나갈 수 있으며, 거꾸로 원래 잘려나간 원가지가 접붙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잘림과 접붙임은 바로 하나님의 '준엄'과 '자비'가 작용하는 현상입니다. 악에는 준엄하시고 선에는 자비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물론 여기서 악과 선은 인간의 실정법이나 도덕과 윤리를 뜻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없이 자기를 목표로 하는 삶이냐, 아니냐의 차원에서 구분됩니다.

모든 이들에게 자비를!(25-32)
바울의 역사이해는 구원론적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날에 이스라엘 사람들도 역시 자기들의 고집을 꺾고 바른 길을 찾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주장은 논리적으로 약간 이상하게 보이긴 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유대인을 일시적으로나마 버리셨다는 주장이 말입니다. 바울의 논리는 사회과학이 아니라 영적인 해석입니다. 원인과 결과가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적 역사관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변증법적으로 움직이는 역동적 역사관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과거에 한번도 있지 않았던 고유한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기다리고 해석할 뿐이지 사회과학 안으로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어쨌든지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우여곡절을 거쳐서 결국 하나님의 '자비'를 얻는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곧 모든 역사의 목표(텔로스)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구원사적으로 해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곧 종교다원이라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준다고 봅니다.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타종교인들에게도 하나님을 정당하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바른 계시를 인식하지 못한 과거의 역사가 있고, 지금도 그런 과정 중에 있지만 결국은 그들도 "이방인이 받은 하나님의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를 받게 될 날이 오는 것"(31절) 처럼 오늘의 타종교에도 그런 날이 온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종교와 종교 사이에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부단한 대화가 진행되는 게 옳습니다.

하나님 찬양(33-35)
'아멘'으로 끝나는 문장은 일종의 노랫말입니다. 1장25절의 찬양은 피조물와 창조주가 혼동되는 현상 앞에서 창조주에게 영광을 바치는 것이며, 9장5절은 그리스도와 이스라엘 민족의 연관성 가운데서 하나님께 바치는 찬양이며, 이제 11장 33-36절은 역사의 신비 앞에서 그 역사를 끌어가는 하나님께 영광을 바치는 찬양입니다.
33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공동번역). 마틴 루터 번역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 하나님의 지혜와 인식, 이 양자의 풍요로움이 안고 있는 심연이여! ..." 바울은 25-32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역사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을 밝힌 다음에 여기서 그런 신비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심연'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혜와 인식의 깊이가 무엇일까요? 깊이가 있다는 말은 곧 높이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깊이 없음'이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굳이 실존철학의 개념을 빌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직관하게 되면 끊임없이 깊이로 빠져드는 걸 경험합니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내가 어디서 왔을지, 어디로 갈지, 내 앞에 있는 것들은 그 근원과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하면 흡사 깊은 물 속의 깊이나 또는 지평선의 소실점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만추에 나뒹구는 낙엽 한 장도 그런 근원과 미래라는 차원에서 볼 때 심연의 세계에 속합니다. 물론 바울은 이런 깊이를 하나님의 세계로 인식합니다. 본문의 주제와 연관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담고 있는 깊이를 말합니다. 참고적으로, 초기 기독교는 이런 심연을 '하늘'로 표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의 높이는 오늘 본문에 표현된 깊이와 같습니다.
3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 만물의 근원과 현실과 미래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바울의 찬양은 분명히 헬라의 철학적 사유를 배경에 두고 한 것 같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바로 바울이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그 하나님과 거의 동일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기독교 신앙은 '만물'의 근원에 대해서 해명하고 있는 철학이나 과학과 계속해서 대화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을 보편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심연에서 경험하는 경우에 우리에게 요청되는 바는 오직 '찬양'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기 때문에 어떤 구체적 형상이 아니라 일종의 '깊이'로 다가오는 하나님 앞에서 공연한 논리를 펼치기보다는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게 마땅합니다. 찬양과 기도를 넘어서는 것은 장광설이며 교언영색(巧言令色)입니다. 어쩔 수 없이 말을 하더라도 그 바탕에는 찬양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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