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연계시와 하나님의 심판  (1:18-32)
                
진리론적 변증학
바울이 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 기독교는 일종의 신흥종교였기 때문에 자신의 정당성을 진리론적으로 변증해야 할 절박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이 진리론적 변증이라는 관점은 그 이후로도 기독교가 이방 세계를 의식해야 하는 경우에는 늘 중요한 자기 해명의 방식으로 작용했습니다. 기독교의 내용을 일방적인 선포로 끝내지 않고 진리(알레테이아)의 차원에서 변증해나간다는 이런 논의는 초기 기독교와 역사상의 기독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비록 교회 밖의 세계가 당장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가르침이 '보편적' 진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오늘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진리론적 논의와 대화를 두려워하거나 또는 무시합니다. 두려워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히 형식 논리에만 매달림으로써 해석학적 토대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무시하는 이유는 성속이원론에 빠져서 자기들의 주장이 무조건 옳다고 예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 현상은 한 사실의 이면에 불과합니다. 그 한 사실이라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세계의 관계가 왜곡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아무리 세계 초월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연히 세계와 역사 안에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놓쳤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과의 대화에서 소통의 곤란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우리의 신앙을 궁극적인 진리라고 실제로 믿는다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와 역사를 통해서 그 신앙의 내용을 풀어내는 일에 소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독단적 태도로 인해서 이 세계와의 말문이 막힌다면 선교적인 차원에서도 무사려한 태도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적 태도는 근본적으로 그 틀을 바꿔야 합니다. 자폐증 환자처럼 말문이 막히는 세계로 숨지 말고 말문이 트이는 세계로 나와야합니다. 기독교인이 생각하고 있는 구원, 믿음, 사랑, 정의, 평화를 세상사람이 알아듣도록 말문을 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선 기독교의 근본에 대해서 질문할 줄 알아야합니다. 질문을 닫아두는 것이 바로 말문을 닫아두는 것이라고 할 때 정확하게 질문하고 대화함으로써 자신의 진리론적 토대를 확대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게오르크 가다머라는 독일 철학자가 있습니다. <Wahrheit und Methode>라는 책으로 현대 해석학에 새로운 장을 연 이 사람이 백살 되던 2000년 초에 <슈피겔> 지(誌)의 편집장이 그에게 이렇게 가장 개론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철학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지금 제 기억으로는 가다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철학은 어떤 사물이나 사태에 대해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소유와 존재,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 역사와 종말, 정치와 법, 교육과 경제 등등, 우리의 눈에 매우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새로운 각도로 질문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신앙과 신학도 역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근본에 대해서 질문할 줄 알게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십일조 헌금을 드리라고 하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근원과 의미를 갖고 있으며, 오늘 우리에게까지 타당한가? 우리가 부활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기독교의 가르침은 우리 삶의 핵심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질문할 게 많습니다. 더구나 그런 것들은 이미 끝난 문제가 아니라 종말까지 열려져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참된 '앎'을 위해서 질문하기만 한다면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은 창조적인 역동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교회생활에서는 이런 진리론적인 질문이 막혀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서 질문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데도 그것을 억지로 틀어막습니다. 교권이 그렇게 하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 질문을 제거해버리기도 합니다. 교회로서는 그렇게 해야 교인들을 쉽게 다룰 수 있으며, 개인 기독교인으로서는 이런 질문이 유발할지도 모를 신앙의 모험을 받아들일만한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질문 없이 사는 게 모두에게 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중심으로 모인 기독교 공동체가 흡사 그 어떤 논리와 설득력 없는 교주의 지침이 절대적 준거로 작용하는 사이비 집단과 비슷한 현상을 보인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

자연계시
바울은 로마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진리론적인 토대를 훼손시키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거론하지 않고, 이방인 세계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로마 문명을 나름대로 분석합니다. 이 로마 문명의 특징은 불의라고 말입니다. 더구나 그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이 허황하며 어리석은 마음에 빠졌다는 사실을 엄중하게 경고합니다(21절).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어떤 의미에서 아직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이 로마인들에게 하나님을 인식할 만 것이 주어졌다고 주장하는지 검토하겠습니다.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죄의 책임을 묻을 수 없는 것처럼 복음이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지 않은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내릴만한 이유는(18절)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이미 그들에게 계시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19절). 사람들이 동의할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창조 이후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과 신성이 이 창조 세계에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인간이 옳고 그름을 모른다고 변명할 수 없다는 것이(20절) 바로 바울의 논리입니다.
바울이 지금 제시하고 있는 문제는 '창조'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학적인 논의를 길게 끌고 갈 수는 없고 몇 가지 단서만 대략 정리하겠습니다. 우선 성서의 전통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분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창조세계는 떼어낼 수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 대립적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는 인격자의 개입이라는 주장과 '저절로 그렇게 있음'이라는 주장 사이의 논란도 무의미합니다. 앞의 것은 기독교와 과학의 논란이고 뒤의 것은 기독교와 동양사상과의 논란인데, 서로 다른 관점에 의한 규정을 같은 범주에 끌어들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굳이 연결시켜서 설명한다면, 하나님은 진화의 방법으로 창조하셨다, 또는 자연으로 하여금 저절로 있도록 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대충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 성서와 신학에서의 문제는 이 자연이 원래의 창조된 그 자연인지, 아니면 죄로 인해서 부패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도 역시 이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 인간의 영혼에 원래의 창조된 그 모습이 남아있는지, 아니면 죄로 인해서 모든 것이 손상되었는지가 여기서 관건으로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장구한 교리사적 흔적을 모두 살펴볼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바르트와 브룬너 사이에 전개된 논쟁은 우리 기독교에서 이 자연신학 문제가 얼마나 치열하게 작용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우리의 논점을 좀더 사실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 우리나라에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이 계시되었는지, 또는 그때 살던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겠습니다. 오늘 바울의 논리에 따르면 삼천리 강산과 그 안에서 살고 있던 우리의 조상들도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이 계시되어야만 합니다. 비록 유대인들만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겼지만 우리 민족들도 여전히 간접적으로나마 하나님을 섬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서도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제약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이를 "익명의 기독교인"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라다크 마을 소개한 책 <오래된 미래>를 읽은 적이 있는데, 정말 순수하게 자연과 하나 되어서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그들이 비록 우리와 다른 티베트 불교를 따르고 있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도 역시 자신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우리의 구원론이 흔들리는 게 아닌가, 또한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에게는 그것이 절대적인 사건이 되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서는 여전히 자연신학이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자연신학, 또는 자연계시 문제는 우리나라처럼 종교 다원적인 사회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샤머니즘이나 불교는 어떤 면에서 자연종교입니다. 그들은 자연에 긷든 신성(불성)을 보고 거기서 구원의 실마리를 찾고 있습니다. 샤머니즘에는 인간을 숙명주의에 빠지게 하는 요소가 있지만, 그 근본에는 자연과의 조화가 놓여 있습니다. 풍수지리설도 역시 그렇지요. 불교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자연적 신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는 점에서 자연과의 일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분별심을 없애는 게 깨달음의 경지라고 말합니다. 노자와 장자는 더욱 노골적으로 자연과 도의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세계관을 갖고 있는 여러 종교들과 같은 자리에서 살아갑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타종교인들은 모두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아야만 할 사람일까요? 그들의 구원관은 모두가 반(反)기독교적일까요? 오늘 바울이 말하고 있는 창조 안에 긷든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에서 자연종교와의 대화가 일정 부분이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정적인 대답은 미루어 둡시다.

자연세계의 죄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수밖에 없었던 로마인들의 죄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질 인간이나 새나 네 발 가진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었습니다."(23절). 고대인들은 어느 민족이나 토테미즘의 틀 안에서 살았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곰이나 호랑이라고 한다면, 유럽인들에게는 소, 늑대, 특히 독수리가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미 십계명에서도 가르치고 있듯이 유대인들은 이런 형상들을 섬기지 않고, 오직 말씀에 집중했지만, 그들의 역사를 보면 그들도 어떤 형태를 통해서 신을 섬기던 가나안의 바알을 종종 따랐습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고대인들인이, 그리고 로마인들이 일종의 종교의식 때 동물의 형상을 만들었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그런 종교의식을 통해서 그들의 정신세계에 무엇이 자리를 잡게 되었는가에 있습니다. 소의 형상을 만들어서 숭배한다는 것은 곧 그들이 다산과 풍요를 절대적인 가치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결국은 사라질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섬기며 사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게 바울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24-27절에 묘사된 그 당시의 성(性)윤리에 대한 비판은 이것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유한한 것을 절대화함으로써 나오게 된 당연한 귀결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헬라어 원의에 따르면 24절의 정욕은 짐승 같은 성욕을 뜻하고, 26절의 부끄러운 일은 성행위 자체를 뜻합니다. 특히 26,27절은 동성애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이미 이런 동성애자들이 거론되고 있는 걸 보면 이것의 뿌리는 인류 역사와 맞먹을 정도로 오래된 것 같습니다. 이성간의 관계만을 정상으로 생각하는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의 행위는 유별나게 보이긴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우리로서는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부적절합니다. 물론 이미 창세기에 하나님이 남자 아담과 여자 이브를 짝으로 만들어주었으니까 이런 형태를 벗어나는 관계는 죄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할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고대 근동이라는 특수한 문명의 세계관적 한계를 지닌 문서이기 때문에 그것을 오늘 우리에게 무조건 적용시킬 수만은 없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동성애라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이유는 결국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물로 바꿔치기 하는 그 당시의 문명을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즉 바울의 눈에는 인간의 탐욕을 채우는 방식의 로마 문명이 어쩔 수 없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귀결이 바로 동성애였다는 말입니다.
29절부터 바울은 인간의 죄에 해당되는 일련의 목록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무지한 자. 이런 목록은 로마서만의 특성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스토아 철학이나 랍비 전통에서 언급되던 개념들이 아닐까요? 바울은 지나치게 많은 죄의 항목들을 여기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읽는 사람들에게 기분을 상하게 할지 모르지만 이런 요소들이 우리에게 내재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아무리 우리가 인격적으로 심신을 수련해도 역시 이런 악한 기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자연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문명이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어느 것(하나님, 혹은 자연)에 의존적인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문명의 유혹으로 인해서 자기를 독립적으로 성취하려다 보니까 여기서 악을 행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문명이 인간의 죄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우리가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릴만한 단계가 아닙니다. 다만 문명이 자연을 도구화한다는 점에서 자연 계시를 가로막을 개연성이 많다는 점만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바울은 지금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고 따지거나, 또는 예수님을 믿어야 천당 간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지 않고 거대한 문명을 자랑하고 있는 로마 사회를 향해 보편적 인식론에 근거해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이 창조 이후 만물에 계시하셨는데도 오히려 썩고 말 사물을 절대적인 것으로 섬기며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거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논리를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는 동성애와 탐욕 같은 요소들 때문에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을 보이는 것으로 바꿔치기 한 것 때문에 내린 진노가 바로 부도덕한 삶의 행태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죄라고 생각하는 이런 부도덕성은 죄의 본질이 아니라 죄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진노)이 내리는 방식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자기 멋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내어 버려두사"라는 단어가 24절, 26절, 28절에 반복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사람들은 의롭지 못한 사람이 당장 벼락을 맞든지, 사업이 망해야 심판이 임했다고 생각하지만, 바울은 그 의롭지 못한 삶 자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합니다. 이미 구약성서의 예언자들도 우상을 섬기는 것 자체가, 즉 하나님 없이 사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생각은 옳습니다. 악은 그것 자체로 자기를 파괴시킵니다. 예컨대 마약이나 놀음에 빠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순전히 돈 버는 일에만 모든 삶을 투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다른 사람보다 많은 돈을 벌 수는 있겠지만 그런 무의미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자기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판넨베르크는 현대인들이 "노동과 오락" 사이만 오락가락 하면서 인생을 소비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옳은 지적입니다. 결국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에 빠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사실의 반증입니다. 아울러 오늘의 교회가 성장지상주의와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빠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곧 하나님의 진노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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