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율법 선생에게   (2:17-29)
                  
바울은 앞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썩는 것과 썩지 않는 것을 혼동했다는 점에서, 정확히 말하면 영원한 신성을 인간이 만든 유한 것으로 대체해버렸다는 점에서 한결같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엄격한 어조로 확증하고 비판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이 문제를 종교적으로 모범을 보이고 있는 유대인들의 삶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모범생의 길
17-20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매우 소상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율법의 교훈을 따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 안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구체적인 형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각장애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로 자처합니다. 어두움의 빛이며,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이의 선생이라고 자처합니다." 이런 서술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특별히 종교적으로 선택받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관한, 즉 바리새인들과 랍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이런 모범적인 삶에 대한 동경이 내재해 있다는 점에서 유대인 일반에게 해당되는 서술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이런 정도로 모범적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칭찬 받을 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숫자가 많은 사회는 건강하고, 드물면 건강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화적인 사회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들을 많이 길러내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공교육도 역시 학생들을 모범생으로 키우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범생 키우기가 지나치게 경쟁적인 방식으로만 진행되고 있다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교육의 경쟁력 제고 문제는 여기서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 필요도 없이 우리 교육의 가장 적나라한 현주소입니다. 환경 좋은 고등학교를 가기 위한 위장전입, 영교시 수업, 자율학습, 재수 삼수 등, 우리의 교육 현장에서만 통용되는 이런 용어들은 한결같이 경쟁력 제고를 최고의 교육 목표로 삼기 때문에 파생된 현상들입니다. 어떤 체제이건 나름대로의 경쟁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만 교육의 종속 변수이어야 할 경쟁이 교육의 상수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교육의 왜곡현상을 보게됩니다. 모범생을 만들기 위한 경쟁력 강화를 교육의 목표로 삼을 게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교육의 궁극적인, 그리고 본질적인 목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교회의 신앙교육에도 거의 똑같이 적용됩니다. 교회 생활이 신자 상호간에 경쟁하게 만들거나 교회 상호간에 경쟁하게 만드는 일에 집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의 예만 들겠습니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교회에서 "총동원 주일" 행사를 많이 했습니다. 식용류, 세탁기, 금반지, 심지어는 승용차를 경품으로 내걸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전도  해야겠다는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렇게 인간적인 경쟁심을 이용해서 전파할 필요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어떻게 해서라도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모범생이 되어야 한다는 경쟁심의 발로가 우리를 신앙의 본질보다는 인간의 욕망에 기울어지도록 만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생은 없다
바울이 본문에서 서술하고 있는 유대 선생들의 특징은 그들이 선생으로 자처한다는 것입니다. 자처한다는 것은 학생들보다 자기가 낫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먼저 배운 게 있으니까 학생들에게 가르칠만한 것이 있을지 모릅니다만, 가르치고 배우는 이 일의 존재론적 깊이를 생각한다면 인간이 인간을 가르치는 일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다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 수학 선생이 한 분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학생들에게 수학의 원리를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이렇게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선생의 업무라고 한다면 선생 노릇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수학 선생은 수학이 학생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는지 전혀 모릅니다. 학생들의 운명을 모르는 사람이 궁극적인 진리를 가르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세상에 선생은 없습니다.
그래도 일반적인 차원에서 선생은 필요합니다. 다만 가르치는 사람이 겸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리를 가르칠만한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실제로 인식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선생들은 선생으로 자처하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기 앞에 놓인 진리의 길을 단지 걸어갈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옛 스승들은 제자들을 불러모으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굳이 배우겠다고 찾아온 학생들에게도 많은 말로 가르치지 않았으며, 가능한대로 빨리 자기로부터 떠나게 했습니다. 결국 이런 분들은 배움이라는 사건이 어떤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진리 자체로부터 일어난다는 사실을 진작에 깨달은 스승들입니다. 그런데 충분하게 알지 못한 사람들은 스스로 선생처럼 행세하려고 합니다. 이런 태도는 우리 기독교인에게 너무나 흔하게 나타납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모든 진리를 혼자 독차지하고 있는 듯이 열변을 토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런 기독교인들을 두고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맹자도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남한테 선생 노릇 하는 것을 좋아하는 데 탈이 있다."(人之患在好爲人師).

배우지 않는 선생
바울은 이제 선생이라고 자처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충고합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21절). 이어서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자신이 간음하며,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말하면서 우상 앞에 놓였던 물건을 훔치고, 율법을 자랑하면서 율법을 범한다고 지적합니다. 이 율법 선생들은 간음과 우상과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알고 있지만 그 가르침대로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행동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일단 이런 현상들이 그 당시에 흔한 일은 아니라고 해도 종종 일어났을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아무리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말은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재물에 쏠릴 때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속으로는 늘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언행이 일치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의 뿌리에는 바울이 말한 대로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배우지 않는다는 데에 놓여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늘 남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으니까 자기 스스로는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을 판단하기는 잘 하지만 자기 반성(reflextion)은 없습니다. 목사만이 아니라 장로급 지도자들도 신앙생활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배울 마음을 먹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이미 알고 있는 교리와 교회 체제를 강화시키는 방법론에 모아집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이 명제를 그럴듯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만 모색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배우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기독교의 진리를 생명의 길(道)로 생각하지 않고 이미 완료된, 굳어진 체계로만 생각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길은 그곳에 그렇게 고정적으로 놓여있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가고있다"는 사실에 무게를 두고 사유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점에서 길의 메타포는 "되어짐", "도중", "미래"를 가리킵니다. 심지어 물리학적 사실들도 과정인데 하물며 물리학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진리는 두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이 길의 문제를 우리의 삶과 연관해서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모든 사람들은 사실 자기가 인식하고 있든지 못하든지 나름대로 자기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고속도로처럼 모든 사람들이 빨리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길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런 길이 있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출세해서 명예와 재물을 얻게 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길을 열심히 갑니다만 그것은 길이 아닙니다. 길이라고 하더라도 가장 빠른 길도 아니고 좋은 길도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은 각자의 집에서 여기 공부하는 자리까지 왔습니다. 승용차를 운전하거나, 얻어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또는 걸어서 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빨리 가는 방법만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방법과 상관없이 "가고있음"에 집중합니다. 후자에 속한 사람은 가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많은 경험을 합니다. 봄바람을 느끼기고 하도, 달이나 별을 보기도 하고, 꽃향기를 맡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전자의 사람은 자동차 액셀레이터만 열심히 밟을 뿐입니다. 이 사람의 삶은 빨리 가는 것에만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삶의 과정에서 다가오는 은총을 받아낼 수 없습니다. 결국 길을 가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생명 현상을 외면하니까 그것을 배울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런 것은 모두 빨리 가는데 방해가 될 뿐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영성 없는 종교의식
위에서 설명한대로 율법 선생들은 이미 율법 수호에만 관심을 고착시켰기 때문에 그 율법이 드러내고자 한 하나님을 가리고 말았습니다. 진리인 하나님을 가리게 되면 인간은 훨씬 불안한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까 결국 율법을 더욱 강화시키는 데 마음을 두기 마련입니다. 이런 악순환이 유대의 바리새인들에게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서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틈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한쪽은 율법의 절대화이며, 다른 한쪽은 그것의 상대화입니다.
바울은 율법 선생들이 절대화하고 있는 율법과 할례의 상호관계성을 설명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은 일단 "토라"라고 일컬어지는 모세오경을 말합니다만, 그것 이외에도 수많은 구전과 성문화된 시행세칙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안식일을 지키라는 십계명의 말씀에 대한 유권해석이 시대를 거치면서 매우 세세한 부분의 삶까지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시시콜콜하게 해석하고, 바리새인들은 이 세칙들을 문자적으로 지켜나갔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획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율법 문제가 예수님 당시에는 안식일 논쟁으로, 바울 당시에는 할례 논쟁으로 집중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에는 이 할례 문제가 상당히 자주 거론됩니다. 심지어는 "할례당"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어쨌든지 오늘 본문에서도 역시 바울은 율법을 범하면서 겉으로만 할례를 받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실제적인 삶이 따르지 않은 채 행하는 종교의식(儀式)은 별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영성이 없는 종교의식의 공허함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영성은 생명(삶)의 문제이기 때문에 삶이 없다는 것은 곧 영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특히 인간을 창조할 때 자신의 영(숨)을 인간에게 불어넣자 인간이 살아있는 영적 존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외에도 많은 예언자들의 가르침과 시편, 그리고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바로 진리와 생명의 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말은 곧 우리가 영적인 세계에 들어간다는 뜻인데, 이것은 곧 이 세상과 아무 상관이 없는 다른 세상을 올라간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의 생명 세계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생명은 단지 우리의 생물학적인 현상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것을 초월함으로써 늘 새롭게 일어나는(Ereignis) 영적인 현상입니다. 이런 영적인 세계를 체험하는 영성이 없다면 우리가 행하는 화려하고 세련된 종교의식은 할례가 그렇듯이 자기만족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할례가 영(Geist)에 있지, 문자(Buchstabe)에 있는 게 아니라고 증언합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종교의식은 영적인지, 아니면 인간적인지 명백하게 검증 받아야 합니다. 실제로 율법이 말하는 삶의 내용은 없이 종교적 상징의식인 할례만을 고집하는 율법 선생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이 늘 영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굳이 예를 들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교회의 예배, 설교, 전도, 친교 등, 이런 모든 종교행위를 통해서 참된 사귐과 평화와 해방이 일어나는가, 아니면 오히려 반목, 분노, 탐욕이 일어나는가 하는 점만 눈여겨보기를 바랍니다.  소로우는 <월든>에서 남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철학선생은 많지만, 실제로 지혜롭게 살아가는 철학자는 드물다고 말했는데, 이게 교회의 영성 문제와 연관해서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칭찬
바울은 오늘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신앙의 본질을 매우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할례가 거의 결정적인 신앙 과정으로 여겨지던 그 당시에 바울은 겉모양의 유대인이 아니라 숨어있는 유대인이 참된 유대인이며,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는다고(28,29) 선포합니다. 이 말을 듣는 율법 선생들은 아마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은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다는 말은 역으로 할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율법선생들은 하나님의 칭찬이 아니라 사람의 칭찬만 받을 뿐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사람의 칭찬과 하나님의 칭찬"이라는 이 표현을 상투적으로 받아들이면 바울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흔히들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된다고 말을 합니다만 이게 자칫 자기의 무능력이나 불성실에 대한 합리화로 오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성실하게 살아야 되지만 그런 칭찬을 근본적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의 삶은 훼손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칭찬은 일관된 게 아니라 기분에 따라서 변화무쌍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칭찬에 마음을 주게 되면 결국 자기 본래의 모습은 실종되고 다른 사람의 평가만 자기를 지배하게 됩니다. 사태가 이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의 남에게만 신경을 쓰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여성분들이 헤어스타일이나 옷의 유행에 민감하다는 것은 물론 미학적 판단이 따르는 경우가 있긴 하겠습니다만 대개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의미입니다. 사회적 신분 상승만을 지고의 목표로 삼고 있는 남자들의 삶도 역시 이런 범주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런 삶은 그야말로 추상이며, 껍질입니다.
삶의 실질(reality)은 영적인 현상에 있습니다. 따라서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야말로 우리의 삶이 가장 구체적이며 리얼한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 바른 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칭찬이 바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칭찬은 우리에게 가깝게 느껴지지만 하나님의 칭찬은 그렇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성령은 바람처럼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영을 영으로 체험하기에 우리의 오감이 너무나 잡다한 것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 우리의 오감 안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작은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는 하루만 굶어도 배고프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지만 영적으로 허기가 진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둔감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실제로 배가 고픈 것보다 영적으로 피곤한 상태를 더 힘들어합니다. 우리가 간혹 근원을 모르는 불안에 휩싸이는 것도 이런 조짐 중의 하나입니다. 영의 활동에 대한 체험의 증거인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이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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