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의 기적

조회 수 2367 추천 수 0 2013.12.24 22:53:23


아래 글은 칼 바르트의 <신학묵상>에 나옵니다. 오래 전 다른 세 분 신학자들과 함께 제가 공역한 책입니다. 금년 성탄 전후에 다비안들과 함께 읽어보려고 여기에 싣습니다.


성탄절의 기적

12월24일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눅 2:11).

 

<너희에게> 오늘 구주가 나셨다고 주님의 천사가 말합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높이려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자신과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 소유도 없었으며,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여러분과 우리를 위해서 이런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따라서 성탄 이야기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와 더불어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다르게 말한다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에 관한 소식은 우리가 동화책을 읽고 받게 되는 감동이나 느낌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천사는 저와 같은 그런 교수가 아니었습니다. 교수는 그저 구주가 사람을 위해 태어나셨다는 방식으로 말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람을 위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 일이 나에게 관계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만 관계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흡사 우리가 영화나 연극을 보러가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자신은 그런 관객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는 목자들과 우리를 가리킵니다. 그의 소식은 일종의 구체적인 ‘말건넴’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오늘 구주가 나셨습니다! 우리가 이 소식을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우리가 선하고 경건한 사람인지 아닌지, 우리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묻지 않고 ‘여러분’이라고만 말합니다. 바로 여러분을 향한 말씀입니다! 이 일은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말입니다. 보십시오. 성탄 이야기는 우리와 상관없이 일어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이 이야기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들레헴에서 아기가 태어났다는 이 소식을 단지 우리가 잘 지내고 있는지 어떤지 안부를 묻는 것처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체부가 오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온 편지가 있는가 하고 묻듯이 말입니다. 편지를 받아들고 읽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혼자 그 편지를 읽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사적인 용무이니까요. 그런데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일은 결코 사적인 용건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구주가 태어나셨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당신과 나를 가리키며 ‘너희에게!’라고 말합니다. 그가 가져온 소식은 아버지가 보내준 예쁜 선물을 받아든 남매들처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여기에는 일등도 없고, 꼴등도 없습니다. 뛰어난 사람도, 뒤처진 사람도 없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실패한 사람도 상관없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분은 우리 모두의 <공동의 맏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를 그분의 이름으로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에게 나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우리에게> 오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식탁인 성만찬에 참여해서 하나의 빵을 나누어 먹고, 하나의 잔으로 나누어 마십니다. “받아서 잡수십시오! 모두들 받아 마시십시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전체 삶은 바로 거대한 성찬예식입니다. 즉 구주와 함께 하는 친교이며, 따라서 상호간 친밀해지는 사귐입니다. 구주와의 친교가 없는 곳에는 사람들 상호간의 사귐도 없습니다. 사람들 상호간의 사귐이 없는 곳에는 구주와의 친교도 없습니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한 <너희에게!>라는 호칭에 들어있습니다.

 

성탄절 전야

오늘! 주님의 천사는 여러분에게 <오늘!>이라고 말합니다. 구주가 태어난 때가 바로 오늘이라는 뜻입니다! 한 밤중에 새로운 날이 열렸습니다. 주님이 바로 이 날의 해(日)였으며, 모든 날들의 해이셨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 새로운 날은 성탄절만이 아닙니다. 이 날은 우리의 매일입니다.

<오늘>은 단지 <그 당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옛날이야기를 들으라.”는 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목자들에게 말했던 것과 똑같이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날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 형편과 인간관계, 일상사, 더욱이 세계사마저도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졌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지난날의 슬픔, 잘못, 그리고 두려움이 여전히 우리 옆에 있지만 은혜로 덮여졌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주가 태어나시어 모든 것이 더 이상 우리에게 상처를 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되었으며, 정신을 차리고, 새롭게 시도하고 확신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우리 스스로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천사가 우리에게 말합니다. 구주가 태어났기 때문에 새로운 오늘이 열린 것입니다.

<오늘>, 이 오늘은 물론 <내일>을 뜻하는 게 아니지만 분명히 <내일>이기도 합니다. 2천 년 전 그때 태어난 분은 더 이상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영원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내일을 시샘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단지 오늘만을 위한 게 아니라 내일, 그 내일을 위해서...”라고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외치면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바젤 시(市)의 입찰자들을 반대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더 많은 선동을!>이라는 구호는 분명히 위험한 낱말입니다. 우리가 내일도 역시 이렇게 살아있다는 게 분명할까요? 구주는 분명히 살아계시겠지만, 우리는 어떨까요? 과연 우리가 값진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는 말을 내일도 듣고 사들이고, 그래서 쾌적하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런 문제는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바로 어제 예레미야스 고트헬프(Jeremias Gotthelf)의 글을 읽었습니다. “삶은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빛을 점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불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불꽃으로 이 세상을 태웠으며, 다시 오시어 태우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는 이런 불꽃의 시간을 <오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고트헬프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오늘, 여러분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녹슬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천사가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단어로 말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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