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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절망의 끝에 숨어 있는 새로운 시작- 작은 희망론』(Im Ende- der Anfang, 곽미숙 역, 대한기독교서회) 강독 23(140~143쪽), 대구 성서아카데미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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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절망의 끝에 숨어 있는 새로운 시작- 작은 희망론』(Im Ende- der Anfang, 곽미숙 역, 대한기독교서회) 강독 23(140~143쪽), 대구 성서아카데미 정용섭 목사
강독 23번째 시간입니다. 22번째 마지막 단락에서 월프 비어만의 노랫말을 설명하면서 정확하게 말씀드리지 못한 대목이 있습니다. 각주 42번이에요. 이 글씨가 너무 작아서 제가 잘못 읽었습니다. 프로이시쉐 발음하기가 전 잘 안됩니다 프로이신이라고 하는 보통 그런 거에 프로이시쉐 이카누스가 아니라 이카루스입니다. 이카루스 에르를 엔으로 봤네요. 그래 좀 이상하다 그랬습니다. 이카루스 이거 제가 예 들었던 단어니까요? 희랍 신화에 나오는 겁니다. 어느 섬을 탈출하려고 날개를 만들었나 아니면 어떻게 해서 달고 탈출하다가 날개가 밀랍으로 만들어졌다고
그러네요. 그래서 햇빛이 나서 그 날개가 녹아 탈출하지 못하고 떨어졌다는 겁니다. 그 인간에 그 실존이 얼마나 제한적인가 하는 거를 신화적으로 묘사한 이야기죠 예 희랍 신화에 나오는 겁니다. 이카루스 이카누스가 아니라 이카루스다 그런데 어떠한 삶이 지금의 삶으로 들어오는가 삶의 생명이 생명 속으로 들어오는가 그리고 그 삶은 어딘가에서 소멸하는가?
무엇이 오게 될 수 밖에 없는가 이런 건 인류가 좀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계속됐던 질문들입니다. 성서 시대만이 아니라 성서에 에 속한 사람들만 아니라 그 이외에 다른 문명권에서도 똑같이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동양도 마찬가지구요. 가장 에 동양 에서 진지하게 생각했던 분은 싯다르타겠죠. 우리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질문할 때 우리는 언제나 의미 있고 살 만한 보람이
있으며 사랑했던 죽음 이전의 삶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죽음 이전에 우리가 긍정할 만한 충만한 삶이 있을 수 있다면 죽음 이후의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이 장의 첫 부분에서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삶으로부터 남는가 라는 주요 질문 아래 영혼불멸에 대한 다양한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표상들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영혼 불멸 육체는 네 해체되지만 영혼은 불멸한다. 그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근거한 교리죠 저게 기독교 안에 들어왔어요.
근데 조심스럽게 또 봐야 됩니다. 에 부활 사상과 영혼불멸은 약간 이렇게 모순적입니다. 그래도 그게 그리스도교 교리 안에 잘 자리를 잡았어요 각각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한 모순된 교리가 자리를 잡았다고 하면, 기독교의 가르침이 뭐 근거가 좀 약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들을 다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에
부분적으로 모순된다고 하더라도 못 나중에 그것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 우리는 죽은 자들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주요 질문 안에 2부의 1장 에서 다루울 이야기들을 미리 제시하는 거예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다양한 표상들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죽음 이후에 삶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지만 2부의 1장 제목이 그겁니다. 죽음 이후에 삶이 있는가 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경험할 수 있는 사실들과 증명할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지배지식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이게 이 독일어를 번역하기가 좀 까다로워요 이 좀 문장이 좀 이상하죠. 상황들에 대한 자연 과학적인 지배지식 패피유공 서피센 패피유공 서피센 자연과학이 자연과학에서 받아들여진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패러다임 자연 과학적인 패러다임의 범죄에 속하지 않는다. 그니까 자연과학적으로 그를 증명할 수 있진 않다 뜻이에요. 오히려 그것은 이 세상 삶을 살아갈 때에 신뢰를 주고 어 우리는 자연과학적으로 증명이 안된다면 그거는 뭐 근거가
없는 거지 이래 생각 하실 수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과학이 모든 것들을 다 재단하는 유일한 근거는 기준은 아닙니다. 자연과학이 음악이나 예술 또 그림 시 이런 것에 대해서 또 뭐 옳다 그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나요?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자연과학도 세상을 이해하고 해명하는 하나의 방법이에요. 모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을 삶을 살아갈 때 신뢰를 주고 또 임종 속에서 위로를 주는 실존적인 지식의 다른 범주에 속한다.
이 장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결과들에 대한 표상들 자신의 죽음과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표상들 앞에서도 나왔죠 표상이요 그리고 죽은 자들과 함께하는 우리 살아있는 자들에 교통에 대한 표상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건 우리에게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걸 다 경험하잖아요. 가족이 죽고 또 나도 이제 죽을 거고요. 그러면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되는 건가 과연 교통이 가능한가 아닌가 모든 것이 깜깜한 그 망각으로 끝나는 건가 하는 그런 문제들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입장권을 돌려드리겠다. 지금 더 이상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질문도 가능한 거고요. 하여 그런 문제들을 두루두루 살피려고 합니다. 자 다음 141 쪽입니다. 141 쪽으로 가봅시다 3 부 1장에 2번 삶으로부터 무엇이 남는가 우리는 사멸하는가? 아니면 불멸하는가? 우리가 아는 인류의 매우 오래된 종교적인 표상들은 표상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나오네요.
너무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요
응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아요. 코끼리 하면 어떤 표상들이 있잖아요. 코가 길고 덩치도 크고 뭐 꼬리는 반면에 아주 가늘고 뭐 그런 거요 우리 머릿속에 그릴 수 있지 않습니까? 포슈델롱 앞에 놓는 거 그런 어떤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코끼리를 생각하는 거죠. 표상이에요. 오래된 종교적 표상들은 죽음 이후 인간의 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생각들이다. 그게 동서양 모든 종교에 남아 있는 거예요. 가장 오래됐죠 가지각색입니다. 제사 지내는 것도 이러한 표상에 근거한 거죠.
이 생각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죽음 이후 육체를 남겨둔 채 이 땅 저편 하늘에 있는 그의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간다 돌아간다 고대의 이집트인들은 새로서의 영혼이 죽은 자들의 모습을 가진 것으로 표상하였다. 날아다니는 새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테리지언 슈타트의 슈타트 뭐 테리지언 슈타트 슈타트 도시라는 거예요. 테리지언 시의 강제수용소에서 아이들이 그렸던 그림들 가운데 유달리 나비 그림들을 많이 발견하였다. 강제 수용소는 거의 죽음과 같 죽음과 같은 곳이죠.
죽음을 아주 직면 한 그런 곳입니다. 이 그림들에 의하면 어린 유충은 번데기가 되고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멀리 날아간다 중세기의 그림들에서는 인간의 영혼이 천사의 날개를 단 어린아이로서 출생 이전 육체 안으로 들어온다 이를 통해 영혼은 인간의 죽음 이후에 나라가 하늘로 돌아간다 부고장에서 우리는 아이헨도르프의 유명한 시구를 때때로 발견하곤 한다.
응
우리의 영혼은 멀리 날개를 펼쳤고 마치 집으로 날아가듯이 적적한 땅을 지나 날아갔다 이것은 마치라는 소설적인 비현실성을 내포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생각이다. 날아서 여기를 떠나
네
새로운 세계로 간다는 표상입니다. 감옥 안에 수감되어 있는 모든 죄수들과 또 병석에 누워있는 모든 병자들은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 구속이 없는 광활한 공간을 동경하게 된다. 일반적인 그 우리에 생각입니다. 거의 죽음과 같은 자리에 가게 되면 날아서 여기를 빠져나가 새처럼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동경한다는 거죠. 그러나 우리가 불멸하는 우리 삶의 영혼에 대해 말할 때에 무슨 뜻으로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살지 않았던 삶의 불멸성에 대해 말하는가? 이제 살아보지 않았던 생명의 불멸성에 대해서 말하는가? 아니면 살았던 이미 여기서 살았던 삶의 불멸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 지금 여기 살았던 것이 계속 남아 있어서 계속되는 걸 이야기하는가? 아직 살지 않았던 새로운 어떤 미래에 그 불멸성을 이야기하는가? 그러니까 죽은 다음에도 새처럼 날라서 어디로 간다는 그러한 일반적인 표상이 있잖아요. 그때 그 자유로운 세상 혹은 자유로운 생명이 그럼 계속 죽음 다음에도 이어지니까. 불멸성이잖아요. 그게 이미 여기 살았던 이런 삶이 계속된다는 건가 아니면 미처 살지 못했던 그러한 삶이
불멸 한다는 건가 그런 질문입니다. 142 쪽입니다. 예 플라톤이 나옵니다. 서구 사상에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예 플라톤입니다. 그런 말이 있다고 하죠.
서양 철학은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철학의 각주다 뭐 그런 얘기하고 각주 플라톤 철학을 근거로 해서 나온다 얘깁니다. 기독교 신앙도 플라톤에게 에 영향을 받았죠 플라톤에 근거를 둔 서구 철학의 전통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실체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불멸한다. 영혼은 순수한 거예요. 영혼 불멸이에요. 이데아에서 우리에게 왔어요. 왔다가 육체를 입고 살다가 육체는 유한에서 없어지고 그리고 그 영혼은 다시 이데아로 가는 겁니다.
기본 표상이 그렇습니다. 죽음은 불멸하는 영혼을 그의 사멸하는 육체로부터 분리시키는데 그래서 플라톤 사상에 의하면 죽음은 영혼의 자유를 얻는 순간이에요. 그거는 환영해야 되는 거죠. 그러고 나서 육체는 생명력이 없는 시신으로 남겨지게 된다. 죽음은 모든 감각과 정열을 다해 육체를 사랑했던 모든 이들에게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영혼에게 있어서 죽음은 자유로 향하는 여정에서의 최고 축제다 디히트리 본회퍼도
그런 얘기를 했나요? 뭐 그건 누구나 그건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본회퍼 아까운 개신교 신학자 루터교 신학자였습니다. 그에 관련된 일화는 참 감동적이죠. 40살도 채 되지 않아서 히틀러 나치들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영혼은 불멸하기 때문에 사멸하는 육체 곧 감옥 속에 머물러 있는 단지 손님에 불과한 것이다. 손님으로 와서 육체에 거하다가 육체가 인제 때가 되면 없어지니까.
떠난다 그런 사고방식이에요. 그게 그리스도교적이진 않죠 그리스도 에 신앙에서는 우리의 육체도 중요한 겁니다. 영육이원론 으음..큼..영육이원론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좀 거리가 있어요. 약간 그런 흔적들이 뭐 없지 않긴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영육이원론 플라토니즘에 근거한 그러한 쪽하고는 구분됩니다. (차한모금마시고)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자 한다.
즉 우리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이 사멸하는 데 반해 왜 하필이면 영혼이 불멸 하게 되는가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진 않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단순하다, 즉 영혼은 결코 태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피조된 게 아니기 때문에 불멸의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원래 있었던 거라서 새로 만들어진 게 아닌 거죠. 그러니까 죽지 않는 거죠. 만들어진 적이 없으니까. 죽지도 않은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 뭐 구약도 포함해서 성서는 인간이 피조물이라고 하고 영혼은 영혼도 피조된 거죠. 거기에 쪼금 예민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지나갑시다 영혼은 아기의 탄생 이전에 존재했기 때문에 네 예민한 부분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고 앞부분에 탄생 전승에 따르면 흙으로 만들고 영혼을 불어넣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니까 그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온 거기 때문에 건 창조된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이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존재했기 때문에 노인의 죽음 이후에도 존재할 것이다. 죽음 이후의 삶은 출생 이전의 삶이기도 하다 이렇게들 보고 있는데, 이게 과연 충분하냐? 바른 생각이냐 아니냐 하고 지금 몰트만이 이제 뒤에 좀 얘기를 하겠죠.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하는지 안 했는지는 제가 이 책 다 읽어보긴 했는데 고 디테일하게는 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제가 알고 있는 창조론 인간론 기독교 인간론에 의하면 그 영혼불멸 이 영육이원론 영혼은 불멸한다 이데아 그 플라톤 사상에 의한 그런 거는 아니에요. 기독교 신앙은 왜냐하면, 영원한 삶은 이 세상에서의 죽음과 죽음 저편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이 태어나지 않았고 또 불멸한다면, 영혼은 이러한 태어나지 않고 사멸하는 않았고 영혼의 그러한 태어나지 않았고 사멸하는 삶의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와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게 된다.
그.. 금방 나오네요. 앞에 있는 설명은 일반적인 관점인 거예요. 근데 그게 우리 제가 보통 알고 있는 그게 성서적이지 않다는 거를 지금 몰트만이 말하는 겁니다. 영혼은 실체에 있어서 불변하고 언제나 동일하며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 또한 느끼지 못한다. 이래갖고는 성서적인 인간이 인간이해라고 할 수 없는 거죠. 우리가 일컫는 살았던 삶과 살아있음의 의미에서 볼 때 영혼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따로 노는 거죠. 따로 놀아요. 그럼 살아있는 게 아니죠. 잠깐 머물다가 휙 날라가 버리고 말잖아요. 그거는 성서적인 인간 이해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날카롭게 말해 불멸하는 영혼의 영혼에 대한 표상은 이 세상에서 살았던 삶의 불멸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지 않았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네, 그렇죠. 그렇게 봐야 되겠죠. 이것이 사실이라면 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이론은 무엇이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부터 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지 못한다. 그 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이론은 여기서는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그것은 생성되지 지금 이게 몇 쪽입니까? 생성되지 않으며 또 죽지 않는다. 그게 어디서 인용한 겁니다.
이건 인도 철학에서 인용한 문장입니다. 고 다음 쪽 일단 볼까요? 이게 요거 말고 좀 더 진행이 됩니다. 143쪽 영혼 불멸이 이 인제 어떻게 이 인도 철학 이런 데까지 연결돼
있나 뭐 하는 것들을 지금 설명하려고 인도에 에 중요한 문헌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겁니다. 그것이 존재했던 것처럼 그렇게 언제나 그대로 있다. 예 영혼불멸과 비슷한 표상이죠. 그 영혼은 그대로 보존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태어나지 않으며 또한 죽지 않는다. 이게 인도 쪽인 건데 어떻게 플라톤 이데아론하고도 이렇게 좀 연결이 되네요. 기쁨과 고난 속에서 확고한 사람 언제나 자신과 동일하게 머무는 사람은 불멸을 얻기에 성숙하다 모든 욕망을 거부하고 자기 추구와 욕망으로부터 순수하며 이 땅에 거하는 사람은 고요한 평화를 얻을 것이다.
각주 44번입니다. 이렇습니다. 각주 44를 함 보실까요? 또 글씨가 작네요. 바가바드 기타 예 바가바드 기타 정확하게 읽었죠. 바가바드 기타 인도의 그 고전 중에 고전 책입니다. 예 책에 책의 한 부분을 여기 이렇게 인용한 거예요. 자 다시 한번 봅시다 근데 내용이 뭐 특별한 건 없습니다.
순수하게 영혼은 불멸하고 그래서 이 땅에 살면서 거의 육체에 거기에 흔들리지 말고 평등심을 얻고 평상심을 갖고 고요하게 이렇게 살면 그럼 된다. 구원 받은 거다 그 얘기예요. 에 동양 사상에 상당한 특징들을 다 내포하고 있습니다. 에 저게 불교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겠습니까? 아 여기 그렇게 표현돼 있네요. 저도 비슷하게 느꼈는데 몰트만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마도 헬라와 플라톤 이데아론 에 영육이원론 영혼불멸설 헬라와 인도 사이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긴밀한 관계가 있었던 거 같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오늘날 영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본래 내적인 무감각의 속성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니까 육체 전에 영향받지 않고 고요한 어떠한 내적인 상태 우리는 영원히 담긴 삶에 대해 말할 때 전적으로 살아 있는 삶 열려 있고 행복과 고난을 느끼며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생각한다. 그런 열정 페토스가 있는 그러한 삶. 이 영혼의 삶 우리는 이 어머니가 그녀의 가족의 영혼이다 라고 말할 때 결코 어머니가 가족의 무감각한 무감각한 한 부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뭐 가족이 어떻게 되든지 평상심을 유지하고 고요하게 이렇게 흔들리지 않고 사는 삶 그건 아닌 거죠.
오히려 그 어머니가 그녀의 사랑으로 가족을 결속시키고 살아 있게 만든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몰트만이 여기서 얘기하려고 하는 핵심은 영혼 불멸설이 에 우리가 묻고 있는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자 요 23강 일단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