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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절망의 끝에 숨어 있는 새로운 시작- 작은 희망론』(Im Ende- der Anfang, 곽미숙 역, 대한기독교서회) 강독 25(146~148쪽), 대구 성서아카데미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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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절망의 끝에 숨어 있는 새로운 시작- 작은 희망론』(Im Ende- der Anfang, 곽미숙 역, 대한기독교서회) 강독 25(146~148쪽), 대구 성서아카데미 정용섭 목사
25 강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위르겐 몰트만의 책을 차례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제 3부입니다. 제 1장 죽음 이후에 삶이 있는가 입니다. 3부의 1장 죽음 이후에 삶이 있는가 이런 제목입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도 돼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게 말이 안 되는거에요. 죽음 이후에 무슨 삶이 있어 다 지구에 원소로 해체되고 마는데 뭐가 있어 그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니지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서 배고픔도 없고 외로움도 없고 영원하게 행복한 삶을 산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걸 더 희화화해서 뭐 오막살이 집에 사는 사람도 있고 이제 널직한 멋진 집에 사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도 얘기하죠. 그 죽음 이후에 삶에 대한 그림들이 각양각색이에요. 그게 자칫하면 여기서 우리가 살던 삶이 극대화되는 어떤 것쯤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거죠. 그런 죽음 이후의 삶을 우리는 성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표상들이 부분적으로 있긴 있어요. 그것을 제가 일일이 또 다시 여기에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 기독교 신앙에 이러한 궁극적인 문제들은 오해하기가 딱 쉽습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영역 대목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도 또 어떤 사람은 지옥 가고 뭐 이런 것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있거든요.
죽음 이후에 삶이 있는가 강렬한 메시지가 담긴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실존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가 죽잖아요. 다 그런 길로 가고 있는데, 그럼 뒤에 우리의 삶이 이어지는가? 아닌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그런 것들을 있다. 없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당연히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있다고 얘기하죠. 다만 있다는 게 어떤 뜻이냐에 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거를 한마디로 일단 거칠게나마 정리를 한다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품에 안긴다는 게 뭔지 또 영원한 생명이라는 게 뭔지에 대해서 또 생각을 해야 되는 거죠. 자 지금 그런 이야기들을 몰트만이 3부에서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초반부에요. 제 1장입니다. 죽음 이후에 삶이 있는가 거기 대목에서 146 쪽 제4번입니다.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화이트헤드가 나와요. 이런 과정 철학자들의 그 설명이 죽음의 이후의 삶에 관한 주제와도 연관됩니다. 이제 존재하는 게 뭔가 리얼리티가 뭔가 하는 그러한 질문이 다 연관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화이트헤드 리얼리티 이즈 프로세스라고 얘기하죠. 과정 철학의 핵심은 프로세스에 있습니다. 리얼리티를 프로세스로 보는 거예요. 그 화이트헤드의 주저의 제목이 바로 그겁니다. 리얼리티 앤드 프로세스예요. 또 단어가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프로세스 앤드 리얼리티인지 리얼리티 앤드 프로세서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 리얼리티가 먼저 있을 겁니다. 중요한 건 리얼리티의 문제거든요. 그걸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서로 입장들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한 철학자들의 사유를 통해서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고 할 때에 그것의 리얼리티가 뭔가 하는 것들을 좀 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그니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어야 되죠.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구원 표상에도 직접 연관되는 겁니다. 일단 내가 그거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대표적인 과정 철학자고 여기 찰스 하르트숀이 또 나오는데 이 사람은 신학자고요. 화이트헤드는 신학자는 아니고 철학자입니다. 원래는 영국의 수학자였다고 하는데, 미국으로 건너가서 과정철학의 태두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인제 과정 신학도 나왔죠 신학 이름이 참 많습니다.
그걸 어떤 신학자는 이게 소유격의 신학이다. 얘기를 해요. 과정 신학인데 과정의 신학 소유격이에요. 뭐 여성 신학 정치 신학 해방 신학 이런 것들이요. 신학은 신학이지 무슨 소유격이 소유격으로 말할 수 있냐 그런 약간의 비판이 담긴 표현이에요. 그렇게 무슨 특징을 드러내면서 신학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긴 합니다. 근데 신학이 그 안에만 있는 건 아닌 거예요. 네 과정 신학이라고 할 때 이 과정에만 우리가 한정돼서 신학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하나님은 과정과 또 해방과 정치와 또 뭐 말씀까지 말씀 신학 이렇게 하잖아요. 역사까지 역사 신학이라고 얘기하잖아요. 그런 것들을 다 뛰어넘는다고 봐야 되겠죠. 화이트헤드와 하르트숀을 주축으로 하는 미국의 과정 신학은 하르트숀은 과정신학자입니다. 화이트헤드는 과정 철학자예요.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의 이러한 그니까 죽음 이후에 삶이 있는가 에서 하나님 품에 들어간다고 할 때 관계가 중요하잖아요. 관계 속에서 이러한 인간 존속을 객관적인 불멸성이라 명명하였다.
각주 46번 밑에 여러분들 보십시오. 하르트숀 스펠링이 잘못됐나 제가 책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에 잘못됐군요. 하르트쇼로 되있어요. 하르트숀 엔이 빠졌습니다. 스펠링이. 하르트쇼넷은 나 로기로지 오브 책을 봐야지 좀 또렷하게 들어오겠군요. 퍼펙션 완전 논리 완전에 완전에 대한 논리학 예요. 근데 로지가 로즈 로기 영어로 하려면 엘오지와인데 로기라고 돼 있는데, 로기 하면 독일어인데.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완전성에 대한 논리학 논리 뭐 책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객관적인 불멸성이라고 명명했다. 하나님만이 모든 사물들에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들도 하나님에게 반응한다. 주고받는 관계 하나님의 계시 인간의 응답 네 고런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단지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편에서도 하나님에게 인상을 남긴다 대단히 적극적인 적극적으로 반응 한단 말이에요. 우리만이 하나님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는 이제 인간이죠. 우리만이 하나님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우리에 대해 경험하시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 경험은 우리가 죽음에 이를지라도 하나님 안에 존속할 것이다.
우리의 역할을 아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네요. 우리의 삶은 시간 속에서 덧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현재를 가질 것이다. 이런 문장은 외워두십시오. 우리는 덧없지만, 분명하죠. 소년에서 청년 장년 노년 이게 멈추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반짝 하는 정도로 살다가 가요 덧없죠 근데 그런 거 생각하면 작은 일로 서로 싸우고 뭐 속상해하고 한다는 게 참 우습긴 합니다.
덧없는 것이지만
덧없기 때문에 더 겉으로 보면 덧없는데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에서 보면, 우주와 같은 무게가 있는 거죠. 그래서 열심히 우리는 살아야 됩니다. 덧없다는 말은 허무하다는 거를 가리킨다기보다 그만큼 소중하다 비밀스럽다 신비스럽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현재를 가질 것이다. 이건 외워두세요.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현재를 가질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시간이 현재예요. 138억 년 전에 있었던 빅뱅 그것도 현재고 지금도 현재고 미래도 현재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과 결속된다면 우리는 영원한 현재를 가지는 거죠.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게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 강독하는 행위도 그렇고 우리의 일상 매 순간 그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현재와 연결되는 거죠. 그게 무슨 말이지 손에 안 잡히는데 그래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삶의 역사는 일시적이며 우리 자신도 이를 빨리 망각해 버린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경험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경험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은 저런 표현하고도 연관되겠죠. 우리의 삶을 경험하셨던 것처럼 우리, 다른 동물 식물들은 그렇게 반응하지 못하죠. 인간만이 특별하게 창조자의 가장 가까이에서 반응하는 존재예요. 우리 삶의 역사는 마치 삶의 책과 같이 하나님의 기억 속에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성 안에 있는 객관적 불멸성에 대한 이러한 표상은 이게 객관적 불멸성 그니까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이런 것들이 불멸하다는 거잖아요. 객관적인 불멸성이라고 과정 철학자들이 이야기를 하잖아요. 근데 그다지 위안을 주는 생각이 아닐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말했고 행동했고 경험했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원성 속에서 회상되길 원하는가? 그대로 그대로 하나님의 기억에 남기를 원하는 게 아니죠. 성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신이라고 한다면, 기계적인 신이죠.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순간에 모든 하는 일들이 그냥 그 인공지능처럼 기억되는 거라고 한다면, 그런 신은 기계적인 신이죠. 그 성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잖아요. 우리의 반응들 우리의 하나님 경험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말과 행동 뭐 그런 모든 것들을 하나님을 고대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변형시키는 거죠. 하나님 안에서 새로워지는 거죠. 그러니까 몰트만은 과정 철학자와 과정 신학자들이 말하는 동기 그 관점을 이제 받아들이면서 네 그런 관점은 중요하니까요? 그러면서 성서와 신학 정통 신학 안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겁니다. 구약성서 시편에 의하면 하나님의 기억은
147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몰트만 147쪽 기억은
하나님의 기억은 우리의 살아온 삶을 영원히 상영하는 비디오가 아니라 천만다행이죠. 그대로 비디오 찍듯이 찍어놓고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누가 거기서 견뎌내겠습니까? 오히려 시편 기자가 당신의 자비에 따라 나를 기억하소서와 나의 소년적의 죄악을 기억치 마소서 라고 기도했듯이 자비롭고 구원하며 교정하는 기억이다 그것은 국가보안기관 모니터에 차가운 렌즈가 아니다.
예 뭐 검찰이나 경찰이나 뭐 하여튼 그러한 보안 기관 또 있죠. 기억이 나지 않은데 뭐 이 우리 나라에 그 저 뭐라 국가 보안댄가 하여튼 그 국가 반정부 그거를 인제 자기들이 이제 적발하고 지켜낼려고 하는 그런 정보기구가 있어요. 아그게 생각이 안나지 정확한 이름이니까. 어떤 건지 알겠는데 안기부라고 하나요? 이름이 자꾸 바뀌어 갖고 정확하게 기억이 안나는 거 보통 안기부 완전 기부 안기부 차가운 렌즈가 아니라 고것들은 네 사실을 고대로 밝혀내려고 하잖아요. 팩트를 근데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는 팩트를 찾아내는 게 아니라, 덮어씌우기를 많이 했죠.
우리를 주목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광채가 나는 시선이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기억된다는 거는 그렇게 비디오 찍듯이 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그런 기억이다. 천만 다행인거죠. 예 그러한 하나님이시죠. 그래서 인격적인 분이라고 우리가 성서으로부터 계속해서 지금까지 이어진 겁니다. 그런지 안 그런지 어떻게 알지 여러분 그런 생각이 들죠 누가 봤어 어떻게 알지 신학은 시와 같아서요
그 실증적으로 어떤 진리를 증명해 내는 게 아닙니다. 1+1=2이다. 이러한 논리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시와 같다니까요 그 요즘 이름이 뭐더라 또 기억이 안 나네요. 시인의 시가 저기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시인만이 아니라 다른 시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벼 이삭을 벼에 이삭을 트인 건 개구리의 울음소리다 예를 들자면, 그런 시구가 있다고 합시다. 근데 과학적으로 증명된 게 아니거든요. 그러나 시인의 영적 시각으로 그게 리얼리티인 겁니다. 그래 아무것도 안 되는 거를 허황한 것도 갖다가 말을 하면 그게 리얼리티가 되냐 고런 질문이 가능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허황된 게 아닌 거예요. 시인의 시각이 옳다는 것이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면 좋은 시가 되는 거예요. 이 세계가 그리 실증적으로 특별히 인제 과학 그 인과론적으로 해명되는 게 아닙니다. 그 단락으로 여러분들이 좀 더 들어가셔야 돼요. 뭐 종교의 열광주의로 떨어지는 게 옳다는 게 아닙니다. 자 5번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이게 우리의 죽음 이후의 삶과 연관되는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관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 혹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죠.
그것은 대화적인 불멸성이라 표현될 수 있다. 앞에서 객관적인 불멸성이라고 하는 표현이 있었잖아요. 그것 바꾸어서 몰트만이 대화적인 불멸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에 오고 가는 거죠. 그냥 아주 차가운 팩트 요것만 응 기억하는 게 아니라, 고 시각으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그 팩트 너머에 진리를 찾는 거죠. 마틴 루터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하네요. 진노 가운데서든 혹은 은혜 가운데서든 간에 하나님과 대화한 사람은 불멸한다. 심판받아야 될 사람이 어떻게 불멸하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든 은혜를 받든 그건 하나님과 대화가 전제되는 거니까 불멸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강조한 거죠. 이 말이 아마 다음과 같은 말과 연관될 겁니다. 예수님이 지옥에 계시다면 나는 지옥을 택하겠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많은 신학자들은 이 견해에 동조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청종하지 않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대화 상대라는 것이다. 각주 47번 나왔네요. 라칭어가 쓴 가톨릭 신학자입니다.
맨 아래에 각주 47번 라칭어가 쓴 에스카탈로기 토트 운 투 에비게슬 에벤
종말론 죽음 그리고 영생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재밌겠는데요. 저런 책은 물론 번역되지 않았겠죠. 못했겠죠. 이 사실을 죽음도 변경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청종하게 된다면 이제 듣는다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거죠. 청종하면 그의 전체 삶은 하나님께 응답하는 책임적인 실존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응답하고 스스로 책임을 진다 이것이 옳다면 죽음은 우리 삶의 한계이긴 하지만 우리에 대한 하나님 관계에 한계일 수는 없을 것이다. 요런 표현들은 신학을 전공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뭔가 신학적인 사유로 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이러 문장은요, 다시 읽어볼게요 이게 옳다면 죽음은 우리 삶의 한계이긴 하지만 우리 인간 입장에서 볼 때 한계이긴 하지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의 한계일 수는 없다. 그니까 하나님에게는 한계가 아닌 거죠. 죽음이 한계가 하나님에게는 한계가 아닌 겁니다. 우리 삶에 대한 관계 속에서 우리의 죽음은 오히려 하나의 통과 관문 우리 편에서의 하나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와 대화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며 종국에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의 죽음을 넘어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대화적 불멸성이 예 가능하다는 겁니다. 가능한 게 아니라, 그게 우리 죽음에 우리의 삶이 있는가에서 하나의 대답인 거죠.
6번 주관적인 불멸성과 긍정적인 부활 신앙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의 교통에 대한 경험이 신앙 속에 존재한다. 이 문장이 조금 애매해요. 주관적인 불멸성 앞에서 객관적인 불멸성이라는 단어가 과정철학에서 왔고 과정신학에서 왔고 또 대화적 불멸성이라는 단어가 몰트만 에게서 왔는데 또 여기서 주관적 불멸성이라는 단어가 또 나왔어요. 긍정적인 부활신앙 이게 독일의 어떤 건지 모르겠는데 적극적이라는 게 더 맞을 것 같은데, 지나갑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경험이다. 즉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로마서 8:14 라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왕의 자녀이며 신적인 족속이다.
우리는 희망에 힘입어 이미 여기에서 이미 여기에서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미래적인 세계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부활의 영 안에서 이미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게 된다. 아 이 문장도 더 설명이 필요한데 뭐 그러다 보면 뭐 이게 시간이 끝도 없으니까. 지나가겠습니다.
요 다음 쪽에 단락까지 오늘 좀 보겠습니다. 148 쪽으로 가요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삶으로부터 남게 되는가 우리는 두 가지 인상을 받는다. 한편으로는 우리는 아무것도 우리 자신도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다. 죽음으로 다 모든 것이 끝나니까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린다 빈몸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빈몸으로 세상을 떠난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무것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머물기 때문이다. 멋진 표현이죠. 아무것도 잃지 않아요.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죽음도 하나님에겐 한계가 아니니까요?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 사멸할 존재는 불멸하게 될 것이다.
저 불멸이란 단어가 딱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뭐 영혼 불멸 뭐 이런 뜻으로 그런 뉘앙스가 강하니까요?
에
사멸해야 될 우리 존재는 사멸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요게 오히려 낫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경험하듯이 우리는 유한하고 없어질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경험하시듯이 우리는 영원히 불멸하는 존재다 하나님에게서 아무것도 행복의 순간들도 고통의 순간들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 누가복음 20:38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저 표현이 저도 지금 정확하게 그 우리말 성경으로 와닿지 않아서 찾아보겠어요. 에 38절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느니라 하시니 고 구절입니다.
예 독일 찬송가 한 가사가 나오네요. 게르하르트라고 유명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너희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과 너희들을 괴로워하는 것을 떠나게 하라 그렇지요. 하나님에게 예 맞지 않는 거니까 떠나도 그건 아쉬울 게 없어요. 갈 건 가야 돼 버릴 건 버려야 돼 없어질 건 없어져야 돼요. 나의 명예심 뭐 이런 것도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래 떠나게 하라 내가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한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죠. 우리가 보듬껴 안으려고 했던 것들은 사실은 그렇게 좋은 게 아닌 게 많잖아요. 그것마저 우리가 보듬껴 안고 하나님에게 간다면 그것도 모양이 우습죠 그냥 죽으면서 떠날 건 다 떠나라 하나님께서 회복하신다 예 좋은 찬송가 가사네요.
자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