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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절망의 끝에 숨어 있는 새로운 시작- 작은 희망론』(Im Ende- der Anfang, 곽미숙 역, 대한기독교서회) 강독 29(157~161쪽), 대구 성서아카데미 정용섭 목사
2022.12.31 23:26:52
29번째 강독 시작합니다. 윤회설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윤회설 전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고 하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강조해서 나온 관점이 윤회설인 거죠. 자연 안에서 우리가 돌고 도는 거예요. 그래서 자연을 우리가 어떻게 파괴하지 않냐 하는 문제는 실천해서 그건 우리가 서로 협조해서 동양과 서양 기독교와 동양 종교가 협조해서 길을 찾을 수 있고 몰트만은 지금 근본
그
문제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어요. 도대체가 이 정체성이 윤회의 관점에서 이게 성립이 되냐 하는 거죠. 자 이제 또 한 가지 나옵니다. 157쪽 중간 3번입니다. 고대 인도의 이론에 의하면 윤회는 제탄생의 무의미한 바퀴에 속하며 카르마 그러니까 윤회를 벗어나는 게 그들은 이제 구원이죠. 카르마를 통해 업보를 통해 인간의 삶에서의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에 대한 보상을 설명한다. 재탄생은 말하자면, 육체적으로 나타나는 죄의 결과인 것이다. 윤회를 끊어내는 게
구원이죠.
서구에 심령주의와 뉴에이지에 따르면 재탄생은 현대 세계의 발전의 원칙이다. 무엇이 카르마인가 고대의 카르마 이론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행위와 결과의 연관성을 나타내고 있다. 곧 곡식을 훔치는 자는 쥐가 될 것이다. 사람은 잠자리를 펴는 잠자리를 펴는 대로 눕게 된다. 이 세계의 어떤 세력도 신조차도 이 연관성을 끊을 수 없다. 연관성 있다는 건 분명하죠. 뭐 기상학 또 인간 사회 뭐 개인의 운명 다 연관이 됩니다. 다 떨어져 있는 거는 물론 없죠 그건 뭐 누가 보더라도 다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서구적 해석에 따르면 재탄생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말하듯이
저 분이
제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름은 한번 들어본 듯한데 우리가 다음번에는 좀 더 잘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두 번째의 기회를 부여한다. 즉 우리는 완전성에 이르기까지 진보의 사다리를 점점 더 높이 올라갈 것이다라고 심령주의이자 엘란 카르덱은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이 윤회설에 대해 동양과 서양 사이에는 상반된 평가가 내려져 전자는 이를 심판으로 후자는 기회로 본다 동양에서는 윤회를 끊어내야 되고 서양에서는 윤회를 더 고양시켜야 되는 거죠.
응
성서의 종교들 안에도 세대들에게 연계되는 뭐 부모의 죄가 뭐 삼 대 사대까지 온다 부모의 복이 뭐 후대 어떻게 온다 그런 편들 있잖아요. 연계되는 카르마적인 요소가 업보죠. 요소가
있다.
158 쪽입니다. 예레미야 31장 29절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자식들의 이가 시게 되었다. 바람을 심는 자는 폭풍을 거둘 것이다는 일반적인 지혜다 그렇지만 성서의 전통들이 특별하고 새로운 것은 일반적인 행위와 결과의 연관성을 파기하고 무효화시키는 은혜의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업보가 있으나 그거를 이제 단절시키는 은혜의 원칙이 거기서 그걸 본다는 거죠.
주님의 긍휼일에 아침마다 새롭다 그는 너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너의 모든 상한 것을 치유한다. 이 은혜의 원칙은 카르마와 숙명을 깨뜨리고 끝없는 보복 대신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하는 생명의 능력 자체다 그러므로, 우주적인 카르마 법칙은 내가 누구를 만일 도와주면 그것이 어떻게 되고 뭐 이런 법칙 예 그건 결국 현재의 장애 질병 고난에 대해 더 이상 해명할 수 없으며 이를 조상들의 죄악으로 전가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자들은 어떤 카르마적인 죄에 대해 참회해야 했던 것인가? 동양에서는 그런 표현들 많이 있잖아요. 이 뭐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아 이건 내 업보예요.
뭐 그렇게 빠져들이잖아요.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의 죽은 자들은 어떤 카르마적인 보복을 당해야만 했던가 장애아로 태어난 아이는 이런 문제 제기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자
이 책 제 3부에 1장 죽음 이후에 삶이 있는가 에서 네 번째 단락 단절되고 파괴된 삶의 미래를 보겠습니다. 요게 제 1장의 마지막 단락이네요. 많은 것들이 우리의 삶에서 미결인 채로 남아 있다.
그렇죠.
다 해결 될 날은 오지 않습니다. 세상에 종말이 오지 않는 한 하나님의 실체가 완벽하게 드러나지 않는 한 다 미결인 채로 남아있는 것들은 여전할 겁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시작했지만, 끝내지는 못했다. 죽은 다음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가에 대해서 아직 끝장은 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삶의 계획을 요 글도 그렇죠.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다는 거죠. 삶의 계획을 시도했지만, 그것은 좌절되고 말았다. 삶이 우리에게 약속되었고 우리는 삶을 약속했다. 뭐 잘 살아보자 행복하게 살자 평화롭게 살자 뭐 그런 이야기 들이죠.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완성되거나 성공적일 수 있을까? 아무도 없어요.
여러분들이 굉장히 멋진 인생을 사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잖아요. 뭐 매스컴에서 많이 나오고 뭐 등등등등 뭐 많이 있습니다. 완성은 없습니다. 죽음이 이후에 무엇이 우릴 기다리는가 죽음 다 죽음으로 향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 완성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영원한 죽음 혹은 영원한 생명을 표상하듯이 죽음 이후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실패된 시작들 혹은 삶에 대한 좌절된 시도들의 영원화가 아닐까 물론 아니죠. 그리스도교 신앙에에서는 저런 절망은 없습니다. 이러한 류의 인생들 아이 뭐 인생살이 이건 아무리 해봐도 해결되지 않는 것 뭐 계속 우리는 이렇게 고통 속에서 살다가 죽고 또 다시 태어나서 어떻게 되고 뭐 그런 인상들 곧 우리가 살았던 삶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계속되는 역사를
성찰게 하는 인상들이다. 여기서 하나님 우리가 살았던 삶과 함께하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속되는 역사를 성찰..이 역사를 보면 완성이 되지 않았으니까. 여전히 죄가 있어서 이렇게 되는가 뭐 그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겠죠. 왜냐면, 그것들은 죽은 자들이 아직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159쪽으로 넘어갑니다.
연옥이든
아니면 영혼의 유랑이든 다음의 인상이 남는다, 즉 나는 제대로 되지 않을 일을 바로잡고 시작했던 것을 마무리 지으며 놓친 것을 다시 만회하며 죄과를 청산하며 아픔을 완치하며 완성하지 못할 일 완성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다시 또 다시 올 것이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이 나와요. 요거는 일단 지나가서 다음에 봅시다 책을 제가 지금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의 인상들 곧 우리가 살았던 삶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계속되는 역사를 성찰케 하는 인상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죽은 자들이 아직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연옥이든 영혼의 유랑이든 다음에 인상이 남는다 나는 연옥만이 아니라
완성되지 못한 일을 완성을 시키기 위해 이 세상이 다시 올 것이다. 이런 건 전 문맥에 맞지 않는데
조금 더 가 봅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질문하게 하는 자신의 삶의 역사 속에서 단절 자신의 삶의 역사 속에서의 단절들만은 아니다. 나는 살 수가 없었고 살도록 허용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 이를 때면 출생과 함께 죽은 사랑 죽은 사랑하던 아기 사랑했다는 아기 출생과 함께 죽은 사랑하는 아기 네 살에 자동차에 치여 죽은 아이 내게는 해를 끼치지 않았던 폭탄에 맞아 몸이 찢겨 죽은 내 곁에 있던 열여섯 살의 친구 이건 직접 경험이겠죠. 그리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후 폐기되어 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한다. 그래제 이런 거 생각하면 세상 똑바로 하기 위해서 내가 뭔가 해든 하기 위해서 다시 와야 된다는 걸까요? 분명 곧 그들의 운명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큰 의미를 갖는다는 건 심각하다 그런 뜻이겠죠. 그러나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그들 자신의 삶이 완성될 것인가? 그래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들 어릴 때 자동차 사고 당한 이들 여기서 표현된 대로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이들
뭐등등
어디서 완성된가 완성되나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안식을 누르게 될 것인가? 정말 거리가 먼 그러한 삶 아닙니까 그들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 라는 생각은 온 세계를 전적인 무의미성에 빠뜨리게 될 것이다. 에 이렇게 저주스럽게 죽은 사람들에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장이라고 한다면, 이게 완전히 카오스에 떨어지는 거잖아요.
그들을
파괴된 삶을 다시 완성시키기 위해서 세상이 다시
또
온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죠. 윤회죠 말하자면, 그 불행했던 삶이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죠. 고 얘기 같아요.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는 생각은 전적인 무의미성에 빠뜨리게 된다. 만일 그들의 삶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의 삶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우리는 뭐 다행스럽게 불행을 당하지 않아서 뭐 잘 먹고 잘 살으면 잘 살았다면 그걸로 생명이 완성되는 건가 그런 질문들입니다. 자연적 죽음에 대한 현대의 표상은 노년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생명이 보장된 복지사회의 시민들에게나 적합한 생각이다. 늙기 전에 죽은 사람들 많죠 사실 제 3세계 나라들의 대부분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 때 나의 세대의 젊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조기 사망과 강제적이고 결코 긍정되기 어려운 죽음을 당한다. 죽음이 살아온 삶의 영원화라는 생각은 생각은 살 수 없었고 살도록 허용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행복한 삶이 그게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생각은 뭐 행복한 사람에게나 가능하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게 해당되지 않는다. 그냥 지금 상식적으로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단절되고 파괴된 삶과 함께
그렇죠.
그렇게 사는 분들이 오죽 많습니까? 함께하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역사를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한다면, 그렇게 무죄한 자의 죽음으로 그것로 다 끝난 거 끝났다 말짱 이제 끝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냐는 겁니다. 계속적인 역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파괴가 일어나는 이 세계 속에서 생명을 긍정하고 모든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사랑하며 파괴와 잔혹함을 거부하고 생명을 보호해야 되지 않는가
나는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시작하신 삶을 완성시킬 빌립보서 1장 6절 거라고 믿는다 160 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빌립보서
한번 읽어볼까요?
요 대목은 참 마음이 좀 쓰립니다. 읽기가
이게
우리 현실에서도 나타나는 거잖아요. 빌립보서 1장 6절 이렇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하나님이 명실상부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이 완성을 강제적인 죽음이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과 함께하시는 우리의 생명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죽음 이후에도 우리의 영혼이 안식을 얻고 복락을 누리는 완성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걸
몰트만이 믿기만 하지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 알 수 있나 그렇게 질문 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곧 자칭 이제 똑똑하다고 생각한 사람들 그리 질문 합니다. 예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평가는 어느 누구도 내릴 수 없습니다. 근데 몰트만처럼 저렇게 믿고 사는 사람과 저렇게 믿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어떨지는 그건
우리가 알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이 몰트만의 저런 믿음은 그냥 혼자서 이 책상 머리 앞에 앉아서 나온 게 아니라, 성서와 기독교 신학 역사와 그의 모든 경험 그리고 공부 안에서 나온 거라서 근거가 있는 겁니다. 고대의 전통에 의하면 이는 아직 하나님 나라와 미래적 세계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이곳에서의 사멸했던 삶과 저곳에서의 영원한 삶의 중간 상태다 중간
상태 이러한 중간 상태는 연옥설과 윤회설은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대한 세계 심판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죽음과 영원한 생명 사이에 무언가가 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우리의 죽음과 영원한 생명 사이에 무언가가 있음을 나타낸다
나는
연옥에서의 참회를 위한 업적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지 않는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씻김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겠죠. 나는 징벌을 위한 하나님의 거대하고 최종적인 심판도 믿지 않는다. 저놈 못된 놈이니까. 지옥 보내려고 하는 그런 심판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은 행해진 불의에 대한 최종적인 처리이며 휘어진 것을 최종적으로 바로잡는 교정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교정입다 그러므로, 나는 중간 상태를 연옥설과 윤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중간 상태를 이 세상에서의 단절되고 파괴된 삶이 자유롭게 펼쳐지는 확대된 삶의 공간으로 생각한다.
재밌어요.
연옥설과 윤회설을 중간상태로 보잖아요. 단절된 삶이 확대된 삶으로 나아가는 공간 그렇게 보내요. 나는 또한 중간 상태를 인간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이 계속되고 완성에 이르게 되는 새로운 삶의 시간으로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죽음 속에서 생명의 원천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살아 있을 때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그
가까이 가는 건데 이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생명력과 생명에 대한 긍정을 창출하게 될 것이다.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이고 예수 그리스도죠 이리하여 사고를 당해 죽은 사람들 깨어진 사람들 파괴된 사람들도 그들에게 정해졌던 삶 곧 그것을 향해 태어났지만 그들에게서 빼앗 낀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디에서
연옥설과 윤회설이 말하는 중간 상태에서라는 거죠. 아이 저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막 어우 너무 상상력이 너무 끝까지 나간 거 같은 느낌이 들죠 예 여기서 좀 숨을 고르긴 해야 되겠습니다. 나중에 뭐 여러분들이 더 이 본문을 읽어보십시오. 저에게는 강한 임팩트가 있는 대목으로 읽힙니다.
중간 상태를 이 세상에서 단절되고 파괴됐던 사람들의 삶이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확대되고 새로워지는 그 어떤 곳
어떤 시간 어떤 사태라고 하는 거죠. 그것은 여전히 비밀이죠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그리고 우리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불행이 어떤 것이며 그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통해서 볼 때 그렇다는 겁니다. 자기 믿음이죠. 그게 근거 없는 믿음이 아니라 평생 동안 세계적인 신학 대가로 활동했던 사람들 사람의 입에서 나오 아주 진솔한 고백입니다. 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루터가 그랬듯이 죽음 이후의 삶을 잠으로 비유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잠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좀 어중간한 상태죠 잠이라고
하는 건 바울도 얘기한 거예요. 오히려 나는 칼빈처럼 죽음 이후에 영혼히 깨어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통해 영혼은 그의 구원과 완성을 인지하고 장차 도래할 세계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각주 52번에 있네요.(..)
우리가 죽은 자들이라 일컫는 자들은 결코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장으로 넘어갑니다. 오늘 우리는 무슨 그 거창한 교향곡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응
새로운 세계라서 약간 낯설게 느껴지긴 한데
근데
기쁨과 평화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네요. 그러나 그들은 아직 궁극적으로 구원받지를 못하였다. 그들은 죽어있는 자들이요 그들은 우리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 동일한 희망 속에 있으며 따라서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미래로 향하는 도상이 있다. 죽은 자들이 우리와 살아있는 자와 함께 그들은 우리와 함께 깨어 있으며 우리는 그들과 함께 깨어 있다. 이것이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하는 죽은 자들의 희망의 공동체성이며 죽은 자들과 함께 하는 살아있는 자들의 희망의 공동체성이다. 그러니까 지금 살아있는 자들이 그 하나님의 미래를 향해서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이 죽은 자들에게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죠. 나는 자기 중심적인 동기들, 즉 개인의 완성이나 도덕적인 정화를 위해서가 아닌 오히려
내가 믿는 정의 곧 정의가 본래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의 첫 번째 선택이라는 믿음에 근거해서 그렇게 생각한다.
네 정의로운 세상이 우리 살아있는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깨어있는 자들의 삶의 태도라고 하는 겁니다. 자 오늘 여기까지만 보겠습니다. 이제 1장이 끝났군요. 이제 2장은 슬퍼함과 위로함이라는 제목입니다. 자 30강에서 다시 여러분들 뵙겠습니다. 오늘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