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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큉(Hans Küng)의 「나는 무엇을 믿는가」(WAS ICH GLAUBE, 이종한 역, 분도출판사, 2021년)를 정용섭 목사가 강독한다. 장별 차례는 아래와 같다. 1 삶에 대한 신뢰, 2 삶의 기쁨, 3 삶의 여정, 4 삶의 의미, 5 삶의 바탕, 6 삶의 힘, 7 삶의 모델, 8 삶의 고통, 9 삶의 기술, 10 삶의 비전
'알'은 '리벤'이라는 독일어 단어죠. '리벤'은 '삼 생명' 이렇게 번역됩니다. 이게 아,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나? 그냥 사는 거지, 이렇게 지나갈 수도 있고요.
그 삶 자체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저 이렇게 깊이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그냥 쉽게 사는 것의 결과적으로는 아무 차이가 없지 않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차이는 크죠.
제 일정은 삶에 대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마지막 라는 전체는 읽지 않고요. 77쪽에 이런 얘기가 나와요. 도대체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대답은 이렇다.
언제나 집으로, 집으로 가는, 언제나 집으로. 퀘스천 마크를 했어요. 어딘가, 어디가 인간의 본집이 돌아가야 하는데, 하는데 어디야? 이게 묻는다.
그리고 그리로 향하는 게 그
그러나 그것으로 참되게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기억나네요. 뭐, 해외에 여행 다니고 뭐, 즐거운 멋진 것들 보고, 근데 너무 거기에 탐닉하지 마라,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 일리가 있는 겁니다.
이제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참된 만족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 제가 그 구절을 한번 찾아보려고 하는데, 눈에 확 띄지 않나요? 자연에서 느끼는 기쁨을 이야기하면서 그 얘기를 했거든요. 너무 거기에 탐닉하지 마라.
자연에는 그렇게 낭만적이고, 아주 신비롭고, 참 새롭다는 것만이 아니라, 아주 잔인한 구속도 많이 있는 겁니다.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고, 도대체 그
지금 하루하루
이 선언문에서 표명된 원칙들은 종교적 근거가 있든 없든, 윤리적 신념들을 지닌 모든 인간이 함께 견제할 수 있다. 1993년 9월 4일 시카고에서 개최된 세계 종교 의회의 세계 윤리 선언문이랑, 삶에 대한
이때 찌르레기, 갈매기, 야생 거위 등은 어떻게 활동하는가? 이들은 지휘관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이들의 움직임을 통합 조종하는 당국도 없으며, 사람들에게는 하나하나의 해는 것이 없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전체 군체는 일정한 질서 속에서, 그리고 흔히는 모험적 운동 속에서 움직인다. 태풍을 만나기도 하죠.
나아가 육식 맹금류 무리 속으로 돌진하면, 대피를 위한 고의 비행까지 해낸다. 이런 현상을 조사 분석한 새로운 조류 연구는, 개미 연구나 물고기 연구에서와 유사하게, 일종의
연구가들이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개개의 동물은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우리는 왜 존재하지? 다른 것과의 관계는 뭐지?" 이 전체는 파악하지 못해요. 인간은 하지 못 고, 그죠? 구름이 구름이나 무리 속에 어울리지만, 확실한 본능으로 움직이는 소리나 방향, 아, 방향 향기예요.
냄새 벌들도 그런 향기를 맡죠. 물질 같은 방향, 물질 같은 특정한 기능에 도움을 받아 바른. 길을 찾아간다.
그 집단 능으로 가능한 거예요. 어디로 갈지 자기들이 모릅니다. 지도를 뭐 갖고, 아, 우리는 지금 남동쪽, 뭐 몇 몇, 어디를 향해서 몇 킬로 날아가서 어디에 안착하여 겨울을 지낼 거야.
그, 다시 봄이 되면 다시 우리가 어둘 어둘, 그런 계획이 없어요.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각 사람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내내 자신의 길을, 자기
사실 인간이라는 종 역시 동물계 한가운데에서, 이만 년에 걸쳐 자기 자신의 길을 찾고 발견해야만 했다. 먼 옛날, 그 여러 인원들과 어울려서 살았을 때를 생각해 보면, 이 스킹의 말이 이해가 되죠. 첫 번째 소제목: 인류의
인류의
80년, 90년, 100년 살아요. 아프리카의 잠비아와 짐바브웨의 국경에서, 다 더 집중적으로 내가
그곳은 잠베지 강의 빅토리아 폭포에서, 빅토리아 호수, 유명하죠? 100m 아래로 우렛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곳이었다. 우리는 1990년대 말, 그곳에서 텔레비전 연속 프로그램 "여정 중에 있는 세계 종교들" 일부를 촬영했다. 제목이 "여정 중에 있는 세계 종교들"네 기독교도 세계 종교 안에 들어 있죠. 그래서 그런 종교들과 비슷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우리 형제로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되고, 막지 말아야 됩니다. 아, 종교인들은 다, 그 우상 숭배자들이 이렇게 표하면 안 되죠. 그렇다고 해서, 아, 우리도 그들과 똑같다, 뭐 별거 아니다 이 생각해서도 좀 곤란합니다.
그, 형제이기 하나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길을 가고 있는 음, 그니까 그들과는 다른, 같은 길이라고 하더라도 분명하게 구별되는 그런 종교다, 그런 생각은 또 놓치지 말아야 되죠. 일부를 촬영했다. 프로그램의 부제는 "흔적 찾기"였다. 시리아 북부에서, 근동에 있는 시리아 북부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동쪽을 따라 발달한 유명한 대지구대가 있다.
대지구대? 뭔가가 어떤 비슷한 흐름들이 있었던 지역을 일컬어서 지구대 하는데, 대지구대 있다. 그게, 아마 인류 조상 혹은 유인원들이 살아왔던 여정이 있는 곳인가 봐요. 거기서 발굴된 천사 시대의 도구와 화석에 대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오늘날의 인간인
있는 호모 에렉투스, 여러 가지 용어들이 그런 것처럼, 호모사피엔스가 있는 거예요. 비슷한 유인원들이 그 당시 여러 곳에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서로 만나기도 했을 거고, 거리가 있어서 만나지 못하기도 했겠죠.
대다수가 멸종해서,
이렇게 갑자기 그냥 생겨났다는 게 아니라, 진화돼서
그와 비슷한 종족들은 옆에 많이 있죠. 그런데 왜 이름을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죠. 20만 년 전에 비로소 열대 아열대 기후에 따뜻하고 야생 동물이 많은 아프리카에서 생겨났습니까? 확실하다, 나는 인간이 진화적으로 친족인 유인원들과 염색체 수부터 치아 배열과 뇌의 발달을 거쳐 사회적 형태와
그런데 다른 유인원들은 멸종하거나 그런 정도로 수준이 떨어지고 말았는데, 호모사피엔스는 더 강한 인간의 특징을 발현시켜 나갔습니다. 씨앗을 땅에 뿌렸는데, 싹이 비슷하게 다 났어요. 그때는 비슷하죠, 다 모든 게.
하라코, 싸기 등등. 그런데 다른 것들은 더 발전하지 못하고 그 상태로 남았지만, 어떤 싹은 꽃이 펴버린 거예요. 그게 이제 인간이라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냐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설명이 되지만,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왜 인간만 언어를 이렇게 풍부하게 쓸 수 있었냐, 왜 인간만 개념적인 세계를 생각할 수 있었냐, 왜 인간만 도구를 사용해서 어떻게 했냐. 물론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라는 이름도 있긴 합니다.
그들도 도구를 사용하긴 했어요. 그러나 인간만의 특징들이 종합적으로 나타난 거예요. 이것은 인간에게 아주 특별한 사건입니다.
특별한 현상이죠. 그건 이제 그런 비슷한 것들이 인류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서 자기는 찜찜한 말을 느끼지 않는다고, 침팬지와 침팬지, 고릴라라고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유사성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전혀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물들에 비해 인간의 특별한 위상을 결정짓는 것도 마찬가지로 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것은 제가 입에 달고 사는 또 다른 단어입니다.
그다음에는 물론 자의식도 꼽아야 한다. 이것 역시 윤리적 개념이 되었다. 일반 동물들에게는 윤리의식이 없어요.
침팬지 세계 혹은 고릴라 세계에서 수컷 왕, 수컷 우두머리가 자기 씨만 퍼트리려고 다른 숫놈들 다 굴복시키는, 이
인간이 똑바로 서야 성대도 발전하고, 그래서 언어들을 아주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언어 사용에 재능을 가진 인간만이 흔히 말하듯이 전략적이고 개념적인 사유와 자기 반성의 능력을 보유하며, 사랑, 애무, 희망과 두려움, 신과 소망 같은 정향적 어떤 방향이 있는 정신 상태를 지니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인류의 문화적 상승 발전과 특히 인간다운 품성, 에토스를 위한 토대였다.
다른 주인과 비슷한 점들이 있는 건 분명해요. 그러나 인간만 독보적으로 그 인간다운 품성, 에토스에서 온 게 에틱이에요. 윤리에 그런 어를 얻게 된 거죠.
그 종합적으로, 여기 보면 그 표현이 통사적, 어려운 단어가 나오는데, 뭐 그 비슷한 뜻입니다. 똑바로 서서 이제 세계를 바라보면서 자기를 알게 되고, 매우 복합적인 언어를 구사할 줄 알게 되고, 그런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그거를 실적으로 다 수는 없으나 상당한 경우에 비약과 우연의 일들이 겹쳐서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 드러나게 된 겁니다. 이건 기적적인 사건인 거죠.
인간의 이중 구조가 신앙과 영성이 각인되다. 이중 구조라는 건 한편으로는 모든 유인원들이 비슷한 속성들이 있다는 거고, 또 하나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비약하는 부분이 있었다는 거 아닐까요? 저는 일단 그렇게 생각이 되는데, 무슨 뜻으로 이렇게 얘기하는지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이중 구조가 나의 신앙과 양성에 각인되어 있다.
나는 결코 정신만이 아니며, 결코 본능만이 아니다. 본능은 이제 모든 유인원들에게 똑같이 있는 것들이에요. 두 가지가 다 있어요.
이중 구조라고 했어요. 본능적으로 다른 유인원들과 비슷하고요, 그러나 정신적인 면에서. 완전히 다르고요,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언제나 그 둘 다이니, 정신적인 존재며 본능적인 존재다.
나의 영성은 항상 나의 육신도 내포한다. 아마 동일어 '플리카이'라고 썼을 거예요. 퍼리카이.
그 추상 명사가 되면 '카이트'가 붙거든요. 리카이, 그럴 겁니다. 회를 이게 육신이 이라는 후퍼 리카이.
육성, 육신도 포함되겠죠. 인간은 동물과 견주어, 영성주의 교만도 안 되고, 자기를 천사처럼 생각하면 안 되죠. 인간과 동물의 생물학 주의적 평준화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물에 불과해요. 정도 안 된다.
리체도, 도킨스 같은 사람들, 이건 공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네 자연과학적 연구 결실을 증거로 내세우면서, 역사학자들이 공정하고 철저하게 연구한 그리스도교와 그 밖의 종교들의 추문과 범죄의 역사를 끊임없이 표절하고, 적당히 짜맞추어 이른바 과학적 무신론을 유치한 건데, 무신론을 바로 열고, 순진한 독자들을 겨냥하여, 바로고 만들어낸 괴담과 마찬가지인 거죠. 실한 자연과학적 논증과 종교 비판을 나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도킨스의 이기지 유전자와 만들어진 신에 근거한 자연과학적 무신 비판을 아예, 이건 뭐 대화의 상대도 되지 않은데 그런 뜻이죠. 음,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