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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큉(Hans Küng)의 「나는 무엇을 믿는가」(WAS ICH GLAUBE, 이종한 역, 분도출판사, 2021년)를 정용섭 목사가 강독한다. 장별 차례는 아래와 같다. 1 삶에 대한 신뢰, 2 삶의 기쁨, 3 삶의 여정, 4 삶의 의미, 5 삶의 바탕, 6 삶의 힘, 7 삶의 모델, 8 삶의 고통, 9 삶의 기술, 10 삶의 비전
녹취 스크립트와 요약본입니다.
청취에 참조하세요.
그리고 그 이후로 계속 그런 일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오또 한에에 옷도 한 매달까지 수상을 했고요 그
원래 원래 그렇습니다. 윤리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다 언급됐던 것들이 20세기 예, 그리고 1세기에 걸쳐서 인류 역사에서 아주 어복이 드물게,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물질이 풍부해지고 기술이 발전한 세상인데도 여전히 윤리 부재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런 사실 앞에 서 다시 한번 이정표를 제시하는 겁니다. 그 이정표에서 핵심은 인간성을 봅시다. 백기 쪽 크나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바로 기본적인
공적 부다, 모세, 나사렛 예수, 그리고 무슬림들이 가장 존경하는 무하마드도 모두 각자 자기 방식으로
나에게 분명한 것은 다음이다. 나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자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면
그 밖에 있는 사람들도 아주 괜찮은 이야기를 만해 그렇게 인정이 되는 말을 교회가 해야 되는 거죠. 설교도 늘 그래야 된다고 저는생각합니다. 거기서는 일종의 강령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갖 비인간적인 것을 직면하여 우리의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신념들은 다음과 같이 신들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답게, 다시 말해서 인간은 누구나 나이, 성, 인종, 피부색, 육체적 정신적 능력, 언어, 종교, 정치적 견해, 국가나 사회적 출신의 구별 없이, 아 여기에는 성적 지향은 안 나왔네요. 그때는 아직 동성애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을 일지 모릅니다.
양도할 수 없고 밀할 수 없는 존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두가 개인과 국가가 이 존엄을 존중하고, 효과적 보호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인간의 권리들과 의무들은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내가 부모와 같이 살아야 되냐, 말아야 되냐, 또 이혼해야 되냐, 말아야 되냐, 이건 다 개인 윤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개인 윤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아, 그란 뜻보다
남이 너에게 행하는 것이 네가 싫어하는 것이면, 너도 그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 그 사자 성어에 이런 게 있죠.
내로남불, 나에게는 로맨스지만 남에게는 불륜이다, 그렇게 이제 작동이 되거든요. 남에게 행하는 것이 네가 싫어하는 거면, 너도 남에게 행하지 마라, 요게 흥과 연결돼요.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아요.
자기 대한 관점과 남에 대한 관점은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원칙에 내포된 인간 사회를 위한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의의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500년 전에 이미 중국의 공자에서 발견됩니다. 논노 안연편 2장, 위령공편 23장에 나오는 문장이에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마라.
그 후에도 이 원칙은 인류의 모든 위대한 종교적, 윤리적 전통 안에서 비슷한 정식적 표현으로 등장했습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않는데도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헌금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 원칙은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 명령에서 이를테면 세속적 형태를 취했습니다.
그의 세 가지 정식적 표현 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그대는 인간성이 그대의 인격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다른 인간의 인격에서 언제나 목적으로서 필요한 것처럼 행동하고, 결코 단순히 도구로서 취급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라. 사람을 도구로 다루지 말라는 겁니다. 또한 영국의 히포크라테스라고 불렀던 의사 토머스 드은 17세기에 황금을 치료와 관련지어 끔찍하게 표현했습니다.
그 누구도 만일 내가 동일한 질병에 걸리면, 내가 치료받고 싶어하는... 방과 다르게 나에게 치료받지 않는다, 맞는 길을 바라는 것처럼 나도 남을 치료하겠다는 거예요. 대단하죠? 그니까 환자를 그 돈벌이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앞에서는 인간성이 그요, 두 번째는
그런데 나는 인류 윤리 또는
근데 미국이 그렇게 하나요? 안 하잖아요. 미국만 그런 게 아니라 제국들은 대서 그럽니다. 뭐 제공만이 아니라 이 나라 민족주의에 빠지게 되면, 저주로 그렇게 되죠.
그거를
인간성과
이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한스 킹도 도대체 어떻게 구체적인 형태로 이게 나타나야 하지? 방향은 알겠는데,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돼야 하지?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만나다 되고, 다음 소제목은 '더 풍요로운 인간', 다음 '풍요로운', '풍요로운 인간'을 위한 이정표, 이정표라는 소제목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속도를 좀 내겠어요. 이 물음을 나는
이 선언문을 위해 어떤 근본 관점들에 따라 나머지 수많은 윤리적 자료들을 정돈해야 하는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고전적인 덕목 예를 들어서 신학적들의 믿음, 희망, 사랑을 이르는 대체하는 사추덕인 아, 이거 어려운 다가, 네 가지 중심되는 덕이라는 뜻인데, 적당한. 용어는 아닌 거 같아요. 믿음, 희망, 사랑을 대체하는 지혜, 용기, 정의에 따라서 하면 되나? 그러나 이들이 너무나 개인주의적인 거 같다.
따라 하나의 가능성으로 성윤리, 생명윤리, 의리 윤리, 국가 윤리 같은 특정 분야들에 따라서 하면 되나? 그러나 이 것들은 전 세계적 차원을 고려할 때 아무래도 너무 복잡하다. 힌두교, 불교, 중국 종교, 이슬람, 그리스도교 전통 출신의 학자들과 함께한 세미나에 이어진 저녁 식사 자리에서 활기찬 대화 덕분에, 나는 이미 오랫동안 검토해 왔던 셋째 가능성이 좀 더 바람직하다는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이게 뭘까요? 식탁에서의 나의 간략한 설문 조사는 경험에서 비롯한 근본적인 의견 일치를 얻어냈다.
그것은 네 가지 윤리적 명령, 명령티브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는데, 그것들은 히브리 성경의 십계명 안에 담겨 있고, 신성에서 뿐 아니라 요가의 창시자인 파탄 잘리와 불교 경전, 중국 전에서도 확인된다. 살인하지 말라,
이 지구 행성 어디에나 일찍부터, 앞에서 강조했듯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과
정치에도 필요하겠죠, 경제, 기업에도 필요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이정표가 없다면, 무조건 돈벌이 많이 되는 것만 최선의 가치로 여기게 되거든요. 그 방향이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거죠.
그러나 철학자들이 단지 정언 명령에 관해, 그리고 신학자들의 오로지, 양심에 관해 추상적으로 말하고, 정치인, 경제인, 과학자, 스포츠인들이 아주 일반적으로 신뢰, 책임의식, 양심에 관해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내용적으로 확정된
오히려 옛날부터 내려온 인간 다음의 규범들을 새삼 유념해야 된다. 이 규범들은 우리 시대, 패시즘, 나치즘, 초고속 자본주의, 신 제국주의에 의해 터무니없이 무시되었다. 그렇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 거예요.
전통적으로 계명 안에 있는 그런 요소들도 그렇고요. 우리는 윤리적 토대가 절실히 필요하며, 이것 없이는 사회가 크든 작든 지탱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윤리적 총괄 질서가 필요한 상황이죠. 좀 어려운 윤리적 단어가 자꾸만 나오죠.
그래도 그런 개념들을 따라가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총괄 질서, 윤리적 총괄 질서, 전체를 묶어내는 질서가 필요하며, 이것 없이는 새로운 세계 질서와 새로운 세계 금융 구조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요컨대, 아래의 네 가지 측면에서 인간 다움의 문화를 진행시켜야 한다.
나는
독일로 리인 생명, 삶에 대한 이게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생명이라 하지 말고 삶이라고 번역을 해야 되는데, 생명에 대한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렇게 하고 있나요? 둘째, 오늘 여기까지만 하고 오늘 강독 녹화를 그만해야 되겠네요. 교회 갔다 와서 강독을 또 하다 보니까, 그렇지 않아도 목소리가 찌들려 있는 사람인데, 성대가 약한데, 오늘 하루 종일 말을 하다 보니까 더 지금 갈라지는 것 같습니다. 연대 문화와
연대의 문화, 문화와 경제 질서, 정의롭고 공정하게 행동하라.
이러한 것만으로 이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니까 문제인 거예요. 근데 그렇게 행동하는 나라와 개인들이 점점 눈에 많이 띄게 되면 사람들이 그 방향으로 가게 되겠죠. 네, 쉽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 환영의 문화와 진실한 삶에 대한 책임. 환영의 문화, 삶에 대한 삶에 대한 책임. 거짓말하지 마라, 포이하지 말고 기만하지 말고 조직하지 마라.
네 번째, 동등의 문화와 남자, 여자의 동반자 관계에 대한 책임. 동권 문화와 남녀 동반자 관계,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라. 십계명에 따르면 가하지 마라, 성적 용하지 마라, 가로채지 말고 무시하지 말고 모욕하지 말라.
혐오하지 마라, 그런 뜻이겠죠. 인간이 죄인이라서 혐오하고, 모욕함으로써 쾌감을 느낀다니까요. 세계 종교들의 윤리,
그러나 오해. 어, 오해를 오해하지 말자. 이 윤리적 명령들은 이런저런 위원회가 우선 의견을 해야 하는 어떤 법률이 아니다.
이 법률을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이것들은 원래부터 주어져 있거나, 다만 겨냥하는 바는 아, 다시요. 이것들은 원래부터 주어져 있군요.
주어져 있다는 것은 옛날부터 내려왔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자면, 앞에서 열거한 다른 종교에도 있고, 중국의 가르침에도 있고, 여러 정신 문화로 내려온 정신운동들이 다 들어 있는 것들입니다. 네 가지, 생명에 대한 폭력 경외 문화에 대해 한 김에 정확하게 되겠네요.
이 모모와 모모, 이렇게 돼 있잖아요. 2번, 3번, 4번, 다 그렇습니다. 생명에 대한
경, 첫 번째는 생명, 삶에 대한
진실한 자세한 건 여러분들이 책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 동등 문화 서로가 동등하다는 사실, 그런 문화를 서로 공유해야 하고, 또 남녀 동반적 관계, 이런 겁니다. 이런 것들이 옛날부터 다 내려왔다는 겁니다.
어떤 위원회가 의결해 되는 문제가 아닌 거죠. 원래부터 주어져 있거니와, 다만 겨냥하는 바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 책임지고 실행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잘 못 하거든요.
그럼 존재가 변하잖아요. 그러면 뭐가 생명의 근본인지 알게 되잖아요. 그러면 그 생명을 파손하는 것을 거절하게 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완벽하게 살지는 못하겠으나, 일단 자기 내면 세계의 평화와 기쁨과 정의와 그의 의로는, 그리고 행복하다는 어떤 것들이 충만하지 않은데 어떻게 하고 관용을 베풀고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저렇게 노력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닌데, 그렇게 해서 되나, 그 지난 저런 노력들이 있는데 지금 어떻습니까? 우크라이나 전쟁 계속되고 있죠. 러시아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에서의 행패에 대해서 어떻게, 큰 나라들도 뭐 어떻게 중재도 잘 못하죠. 그러나 이 윤리적 명령들이 실제로 세계 공동체, 이런저런 위원회에 의해 확정되고, 모든 사람의 의식 속에 각인되는 일도 가능하며 또 그래야 된다, 아, 그게 가능하다.
여기에 대해서 저의 생각과 스킬의 생각이 좀 다르네요. 저는 이게 가능하지 않다, 이 생각입니다. 트럼프 같은 사람이 계속 나오잖아요.
그걸 누가 제거하겠다, 개인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나 이제 삶의 여정에 관한 이 장을. 마무리하며 자문하게 된다.
나의 여정을 계속하는 데 있어서 이것들로 충분한가? 물론 아니다. 이런 명제들을 만들고, 이런 위원회들을 만들고, 그래서 모두가 책임을 지고 이렇게 사는 그 운동을 일으키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게 아니라고 하네요. 그럼 뭘 얘기하려고 하는 걸까요? 뭐, 3장의 마지막 단락만 남았습니다.
그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나의 길, 그리스도의 길, 이렇게 되어 있네요. 음,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