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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큉(Hans Küng)의 「나는 무엇을 믿는가」(WAS ICH GLAUBE, 이종한 역, 분도출판사, 2021년)를 정용섭 목사가 강독한다. 장별 차례는 아래와 같다. 1 삶에 대한 신뢰, 2 삶의 기쁨, 3 삶의 여정, 4 삶의 의미, 5 삶의 바탕, 6 삶의 힘, 7 삶의 모델, 8 삶의 고통, 9 삶의 기술, 10 삶의 비전
강독 서른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124쪽이요. 지금 강독하고 될 단락의 소제목은 "생존을 위해 일하기"입니다. 삶의 의미와 생존을 위해 일하기 관계가 어떤지에 대한 한스 킹의 생각을 들어보겠습니다.
요컨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계속 반복되고 있죠. 삶의 의미, 삶의 의미, 현대인들은 삶의 의미 같은 거 찾을 거 없어, 그냥 맛집 다니면서 먹고 즐기고 그렇게 살면 되지. 물질적으로 궁핍해지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이 현대인들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 같습니다.
삶의 의미를 생각할 결이 없는 거죠. 생존을 위해 일하기, 이건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처럼 최초의 엄청난 증시 붕괴, 한 해 전인 1928년에 태어나, 아… 1928년에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 같아요.
2차 세계 대전, 끝나고 몇 년 지났는데, 1차 세계 대전이 세계 대전이, 그때 맞나 봐요. 1928년에 태어나 나치즘, 국가 사회주의요. 국가…
아, 예, 이데올로기에 전 국민이 호응하는 사회 제재, 국가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그 나치 히틀러의 선동에 독일에 많은 사람들이 현혹당했습니다. 시름, 전체주의적 공산주의, 그리고 이자, 세계 대전 시대에 성장한 사람들은 알고 있다, 나이든 세대 많은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그 물음에 대한 어렵지 않은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삶의 의미가 뭔가에 대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사실 어려운 시대니까 생존하기 위해 얼굴에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단기적 목적, 즉 의식주 마련이 삶의 즉각적인 의미다, 오늘날에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대다수다. 이들은 통상 의미 위기로 여기에 집중하지 않고 살게 되는 거죠. 우리나라 6.25 전쟁 이후에도 또한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88 올림픽 하기 전까지 다 어려웠죠. 군사 독재가 있었으니까, 민주화에 대한 꿈도 있었고요. 가난했으나, 먹고 살기만 하면 된다, 그 생존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니까 삶의 의미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이차 세계 대전 이후에 유럽에서 노동이 완전히 인간 삶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만큼 생존이 중요하니까, 우선은 생존을 위한 것, 그다음에 점점 더 나은 삶을 위한 일 말이다. 이런 노동 사회에서 휴가는 두 번째 순위였다.
노동은 생활을 보장하고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을 뿐 아니라, 새로운 정신, 성취와 성공의 기풍을 불러일으켰다. 과연 노동은 그야말로 새로운 삶의 의미를 보증했다. 나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 큰 일을 성취할 거야, 그게 어떤 구호가 되는 거죠.
사회적 신분 상승과 유복, 그게 삶의 목표이자 의미가 된 겁니다. 그때는 당연했던 거예요. 이와 관련하여 나 개인적으로는 오늘날까지 바뀐 것이 거의 없다. 혹시, 일과 관계 없이 삶의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무의식을 통한 삶, 삶의… 의미, 자기가 하는 교수 일, 이걸로 삶의 의미를 찾는데, 그거 말고 어떤 의미가 있지? 아무것도 안하고 쌓아 놓은 돈으로 재밌게 사는 거, 무의 도식을 통한 삶의 의미, 휴가, 여흥, 향락을 통한 혹은 아예 성취 포기를 통한 단념, 숙명론을 통한 퇴거나 위대한 거부를 통한 위대한 거부는 독일 사회의 어떤 특별한 현상을 가르치는 것 같은데, 음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는 일 없이 다른 어떤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 하면서 여러 가지를 쭉 나열했어요. 지나친 부담에 시달리는 경우, 성취 욕구에서 손떼고 싶어하는 것은 경영자와 정치가들에게, 아니 학자들에게도 좋아,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 하고 싶지 않은 거죠.
해봤자 별로 효과도 없어, 일종의 패배주의에 떨어지게 되는 거죠. 교사들도 이제 뭐 연차가 높아지면 그렇게 된다고요. 50살 넘게 되면, 뭐 아이고 빨리 가능하면 은퇴하고 편안하게 살아야지,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니다, 그런 식으로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며, 필경 자신의 경박함이 발견될 텐데, 아무튼 자기 삶의 의미는 찾아 얻지 못한다. 요컨대 일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그래도 낫지 않을까? 많은 경우에 은퇴하면 삶이 더 노동으로 말, 이렇게 시달릴 때보다 더 무의미하게 된다잖아. 나는 지치지 않고 일하는 사람으로 통한다.
책 참 많이 썼습니다. 그리고 여러 군데 다니면서 뭐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하고요. 이 한스 큉, 정말 한 인간이 감당할 만한 그 청량 보스라고 말할 수 있는 운 좋은 사람 중 하나다.
자기 일을 재밌게 할 수 있으면 운이 좋은 거죠.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나에게 일은 취미가 아니고, 직업은 더욱이 나 아니며, 오히려 일종의 소명이다. 교수 일이 소명이라는 겁니다.
나는 내가 나의 모든 힘을 요구하는 중요한 과제들에 헌신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휴가 중에도 나는 일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읽고, 공부하고, 쓰며 그것으로 만족한다.
특히 내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공기 속에서 수영도 좀 하고, 고전 음악도 들으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때에는 특히 더 만족한다. 음, 부러워 할 만한 인생을 산 거예요. 한스 큉이 말이죠.
근데 그것으로 다 하겠냐, 그런 질문을 할 겁니다, 아마. 하지만 나는 자기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 중독자가 결코 아니다. 워크홀릭이라고 하세요.
워크홀릭, 일 중독자, 그것만 아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사랑한다. 자기 일을 기계적으로,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그것도 오로지 사랑하는 돈을 위해 일하는 동물이 아니다.
과연 나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지만, 또한 언제나 나 자신에 온전히 머물러 있다. 자기 자신에 치우쳐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머물러 있다. 나는 열정적으로 일하지만 지나치게 몰두하거나 악착같이 일하지 않는다.
나는 자주 나처럼 집중적으로 일하는 내 주변의 모든 사람과. 하나되어 일할 줄 알며, 독불장군이 아니라 더불어서 같이 일합니다. 그러나 물론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도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일 중독자가 아니면서, 일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즐겁게 더불어서 하는 것도 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근본적인 삶의 의미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그 모든 학문적인 업적, 성취, 이런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거죠. 그 말로는 뭐 얼마든지 할 수 있겠죠.
뭐 교회를 새롭게 했다든지, 뭐 학생들에게 삶의 방향을 잘 알려줬다는, 뭐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걸로 삶의 의미가 다 채워지는 건 아니거든요. 특히 이제 나이가 들어서 삶이 정리될 때쯤 되면, 또 다른 질문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은 그다음 항목에서, 일하기 위해서 사는가, 그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이 사람이 일을 정말 많이 한 사람인데, 그리고 또 즐겁게 하고 바람직하게 한 거예요. 이 사람처럼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도 그런 질문합니다.
일하기 위해 하는가? 그건 아니죠. 응, 사람은 누구나 나이 들고, 나도 나이 들어간다. 저도 뭐 이런 살이 남았으니까, 나이가 충분히 들었죠.
이 강연을 할 때 한스 큉은 여든 살이 넘었을 때입니다. 그 지금 제가 제 나이, 이런 느끼는 거하고는 더 달랐겠죠. 10년이나 지난 나이니까.
위대한 신학자나 철학자들, 소설가들, 예술가들도 아무리 많은 문적, 예술적,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나중이 되면 그건 별거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자기가 한 작업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는 거를 알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뭐지? 이런 것들을 역시 아무리 삶의 성취가 많았다고 하더라도 질문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면서 삶의 의미가 바뀔 수 있는데, 무슨 계절에 따라서가 아니라 연령에 따라서 그렇게 됩니다.
연령에 따라서 삶의 의미가 바뀐다고 하네요. 그건 당연하죠. 20대라고, 30대라고, 지금 60대, 70대, 80대, 90대, 달라지죠.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은 뭐 달라질 것도 없지만요. 칼 라노와 요제프 라칭거, 함께 그 사람 이름이 나왔습니다. 이 가톨릭 신학교의 거장들이요.
예, 라노와 요제프 라칭거, 라이 스펠링을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라칭거 이렇게 쓸까요? 나중에 베네딕트 16세 교황이 된 사람이에요. 독일 사람으로서, 교황은 주로 이탈리아 주교들이 많이 나옵니다.
뭐 그럴 수밖에요. 로마가 이탈리에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한데, 독일 교황은 이천 년 역사에서 몇 명 없을 거예요. 라노와 라칭거 사람들은 가톨릭 세계,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함께 나는 이차 바티칸 공유회의 자문 신학자로 참여했다. 여기서 라노가 제일 나이가 들었을 거예요. 라칭거 한스는 비슷한 연배 거고요.
68문화 혁명과 해방, 계몽, 개혁, 투명성. 관용에 관한 그 혁명의 요구에 대한 판단의 차이가 세 사람이 다른 거예요, 방향이 다른 거예요. 가장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굉장히 보수적인, 우리 식으로 보수라기보다는 정통주의자라는 겁니다.
중간점 있는 사람이 라노라고 할 수 있고, 왼쪽으로 치우친 사람이 한스 큉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개인적으로는 존경하지만, 라징은 나를 오늘의 이르기까지 근본적으로 갈라놓고 있다면, 육팔 문화 혁명과 뭐 등등, 관용 뭐 등등 혁명적인 요구를 한 스킹을 받아들이자는 거고, 라징은 아, 그거는 섣부른 짓이다 생각하는 거죠. 캘리포니아 버클리와 미시간 앤 아버터스,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베를린과 튜빙겐에 이르기까지 번져나간 1968년에 대학생 봉기는 되살아난 노동 사회와 성취 사회를 아니, 종교적, 세속적인 평범한 사람들의 건전한 세계를 끈질기게 뒤흔들어 놓았다네요.
혁명의 시기였죠, 그때가. 칼 마르크스와 앵글스의 공산주의 혁명이 그 이전에 있었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한다면 68 혁명은 모든 가치 체계의 전복을 요구하는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틀즈는 그 혁명, 젊은이들의 혁명적인 흐름에 부흥한 영국 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래하는 그룹, 과연 일, 성취, 수입, 경력, 사회적 위신 따위는 당시에 저항하던 젊은 세대와 대학생들, 그리고 그들에게 공감하던 대중 매체와 정당, 사람들의 관심의 중심에 더 이상 자리잡고 있지 않았습니다. 피씨 문화도 그 당시에 나왔을 거고요. 오히려 유토피아 사회 비판과 행동, 인습, 적대, 무광제 자율, 자기 시련이 새로운 표들이 거기서 나는 비판을 하면서도 요제 라징 하는 달리, 대가 선한 것을 많이 발견했다는 저런 혁명적 젊은이들의 요구들은 위험하다고 이렇게 본 거예요.
한스 큉은 비판도 하지만 좋은 점도 많이 있다, 이 본 거고, 거기서는 분명히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움트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온전한 생존이나 온전한 생존, 그냥 원만하게 잘 먹고 잘 사는 정도의 생존이 아니었고, 새로운 체험이 갈수록 중요해졌다, 새로운 체험. 새로운 체험은 그 유럽 음에서 시작해서 미국까지 다 뒤흔든 학생 운동을 얘기합니다.
여러분, 체험, 적어도 다음의 물음은 나에게 정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일하라, 일하라. 이것이 참으로 삶의 의미인가? 대척 관점이 필요했다는 이거하고, 이제 대립되는 관점이 필요하다. 오로지 일을 통한 삶의 의미란 결코 없다.
인간의 삶은 일, 노동 이상의 것이다. 일은 하나의 중요한 요소지만, 어쨌든 내 삶에 바탕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의 인간적 활동은 일만이 아니라 개인, 가장, 사회, 정치, 문화의 여러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행위를 포괄하며, 우리의 업무와 거래만이 아니라 한가로움과 여가도 포함한다는 거예요. 노동을 통한 생산성 제고, 즉 높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거와 대척점에 있는 상황도 포괄한다는 것입니다. 그걸 한가로움, 여가 이렇게 표현했네요.
무의 도식에서 나태와 게으름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되는 이것에는 긴장 완화, 휴가, 놀이, 스포츠, 예능, 휴식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노동자들의 주관, 노동 시간은 얼마로 하느냐 하는 것들이 정치, 사회 차원에서 깊이 있고 진지하게 논의가 됩니다. 그게 아젠다로 있죠.
지금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1주일 45시간 정도 일합니다.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에요. 우리나라의 괜찮은 기업체 노동자들이 6개월 노동하는 그 기업체의 경우 보니까 52시간 하더라고요.
법적으로 그 이상은 못 하게 되어 있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노동 문제에 관해서는 발전한 셈이에요. 옛날과 같으면 뭐 52시간이 뭡니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에 10시간씩 근무해서 60시간을 하죠.
그러면 60시간 이상도 하고요. 아니 그렇잖아요. 나 자신에게 늘 경고해야 했던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신학, 교회, 사회에서의 대결 때문에 여기서는, 저는 슬프게도 외톨이였어요. 전사였던 거죠. 교황청으로부터 교수직을 박탈당했으니, 누가 이 한스 큉에 가까이 하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처음 강의를 시작하면서 제가 한번 짚었던 독일 튜빙겐 대학교에서 교수 자리를 따로 마련해 준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한스 큉은 튀빙겐 대학교 가톨릭 신학부에 속해 있는 교수가 아니라 다른 부서입니다. 그 연구소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가톨릭 신학부의 정식 기초 신학 교수였다가 잘린 거죠.
그러니까 가톨릭 신학계 전반에서 좀 어려운 처지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때로는 몹시 힘겨웠습니다. 아무튼 제가 온갖 일을 하느라 어떻게 보면 그렇게 힘에 겨웠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강의하고, 열심히 책을 쓰지 않았을까요? 그럴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무튼 제가 온갖 일을 하느라 전혀 쉴 수 없게 된다면, 특히 먹거리를 위한 일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면, 만성적인 긴장 상태에 빠진다면, 노상 기 안에 쫓겨서 서두르는데도 제자리 걸음이라면, 과도한 활동 때문에 의욕 상실, 의기 소침, 피폐감에 마침내 다 타버린 상태, 번아웃 상태에 이른다면, 유리한 상황이 아니겠죠.
그렇다면 나는 바오로와 루터가 율법의 저주라고 지칭했던 것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바울과 루터가 그걸 정확하게 주었잖아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얘기했어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느라고 애를 쓰다가 결국 영적으로 번아웃 상태에 이르는 것이 율법의 마지막입니다. 율법이 결국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네요.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한 그 아쉬움, 그런 불안감, 그런 것들이 계속 그의 영혼을 지배하니, 여기 표현대로 "율법의 저주"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사실, 무수한 사람이 일이라는 율법 아래에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성취, 성공, 일, 활동에 대한 강박 아래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묻는 것은 당연하다.
"이 강박으로부터 해방은 없을까?" "이 강박으로부터의 해방은 없을까?" 조금 바꿔 놓고 생각하면, 한국교회 목사들은 상당한 경우에 이 목회의 번아웃에 떨어져 있습니다. 계속해서 불안한 거죠. 매번마다 "아, 교회에 헌금이 줄어들진 않는지?" "예배 참석하는 사람 숫자가 줄어든 건 아닌지?" 그런 것들을 회 당회원들이 또 예민하게 생각한다면, 담임 목사는 더더욱 그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는 거죠.
근데 그게 아니라, 완전히 자기가 어떤 특별한 리더십 카리스마를 확보해서 그런 것이 전혀 없이 해방감을 느끼면서 목회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을 거예요. 자, 예 다음 시간에 기대가 됩니다. 우리는 정말 아, 이런 강박으로 어떻게 해방되는가,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거기에 번아웃 당하지 않고 해방되는 것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