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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큉(Hans Küng)의 「나는 무엇을 믿는가」(WAS ICH GLAUBE, 이종한 역, 분도출판사, 2021년)를 정용섭 목사가 강독한다. 장별 차례는 아래와 같다. 1 삶에 대한 신뢰, 2 삶의 기쁨, 3 삶의 여정, 4 삶의 의미, 5 삶의 바탕, 6 삶의 힘, 7 삶의 모델, 8 삶의 고통, 9 삶의 기술, 10 삶의 비전
해석과 이후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체험 사회라고 규정한 사람이 누구죠? 슐체의 말에 근거하여 삶의 의미가 이런 방식으로 주어진다는 의문을 한스 큉이 제시합니다. 한스 큉이 현대 사회를 가장 정확하게 분석하고 그 돌파구를 열었다고, 정확한 대안을 제시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거 뭐, 부분적으로만 아는 거겠죠.
그러나 저런 노력은 필요한 거죠. 저를 노력 조자 하지 않으니까요. 교회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요, 그게 왜 문제인지도 모르고요. 그 추정하기 바쁩니다. 한국 교회처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크게 작동하는 기구가 또 어디 있겠어요? 온갖 현대 심리 요법이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서 실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기껏해야 힐링 캠프에 종교 의식이 떨어진 것뿐이죠.
사람들이 세상에서 뭔가 연예, 오락, 먹거리 등등을 통해서, 그리고 어떤 경쟁, 컨테스트, 노래 대항, 그 긴장감이 있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쾌락을 향유하는 것, 종교를 제공하는 것에 머물러 있잖아요.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134쪽 그것에 문제 제기를 하면서, 지금 한스 큉이 계속해서 삶의 의미에 대한 여러 관점들을 설명하고 있어요. 134쪽에 나오는 소제목은 '나 자신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물론 나는 자기 실현에 반대하여 무슨 말을 한다면, 물론 나는 자기 실현에 반대하여 자기 실현 현대는 자기를 실현하라는 주문, 거의 주문에 가까운 거죠. 이게 뒤바뀌고 있잖아요, 그 주문이. 그 자기 실현에 반대하여 무슨 말을 한다면, 맨 마지막에 할 사람이다.
자기 실현을 못 마땅히 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기 실현 해야죠. 사람이 소설가는 좋은 소설을 써서 인기 있는 작가가 되면 되거든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사람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 실현, 자기 실현을 이 체험 사회는 곧 자기 실현의 사회요, 자기 실현 이게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된 겁니다. 자기 실현은 오랫동안 기독교에서 비난해 왔고, 은근히 제 설교에도 좀 가끔 그런 표현들이 있어요. 그러나 비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건 아닙니다.
예, 거기에만 목을 매는 삶의 방식은 결국 우리의 영혼을 갈증 나게 한다는 걸 말하려고 하는 거죠. 자기 포기, 금욕을 위한 금욕, 복종을 요구해 왔다. 이 풍조를 나는 줄기차게 비판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책의 맥락에서도 처음부터 삶에 대한 신뢰와 자기에 대한 신뢰를 온전한 인격의 초석으로 강조하고 있어요. 그건 전재하고 하는 이야기예요. 지금 자기의 삶을 부정하면 되겠습니까? 금욕을 위한 금욕은 그 어디에도 쓸 만한 가치가 아닌 거죠.
그래서 나는 안정된 가정 환경과 친절한 고향 사람들, 충실한 교육과 양성을 통해서... 확고한 자의식을 습득하는 것을 각별한 섭리로 여기고 있다.
자의식, 아주 분명한 자의식, 자기에 대한 의식, 셀프 컨셔스니스, 확고한 자의식은 아동 교육에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 최근에 다시금 강조되고 있다. 2009년 4월 6일 슈피겔 머릿기사에 난 머릿기사 제목이 "확고한 자의식, 어떻게 어린이들은 삶을 성취하는가"입니다. 여기 참조하라는 겁니다.
슈피겔은 독일 치사 주간지에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확고함, 정신의 안정, 저항력이 없었다면, 나는 논란 분분한 진리를 위한 그 모든 싸움을 상처 많고 상처를 이으면서도 마침내 큰 손상 없이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 얘기하는 거예요.
나를 반대하는 사람, 시기하는 사람, 그리고 이른바 토니의 사람들은 내가 자각의 터에 개진한 논증을 오만으로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비판, 이런 것을 가르키는 거예요. 이제 그걸 한스 큉이 제시하니까 교만해서 자리지, 네가 정말 겸손하면 교황의 뮤류성을 비판할 수 있겠느냐, 이런 겁니다. 나의 비판적 관점을 에고의 폭등으로 그건 자기 사랑 때문에 그렇고, 자아에 머물러 있어서 그런 거죠.
나의 건강한 자의식을 겸손의 결의로 곡해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아무튼 겸손하라는 실로 불순한 훈계를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했는지. 음, 아 그렇군요.
그래도 그걸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은 확고한 자의식이 있었기 때문인 거죠. 그러나 겸손은 위선 노예 근성과 나의 감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겸손은 윗사람이 반대하면 즉시 무릎 꿇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겸손은 안분지족이지,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거지, 만족할 줄 아는 거지, 자책과 자기 포기가 아니다. 겸손은 용기를 전제하며, 용기에는 공공연한 충돌도 꺼리지 않고 불가피한 경우에는 자신과 남이 다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나는 확신한다, 국가뿐만 아니라 교회도 자존감을 지닌 사람들의 필요하고 건강한 논쟁 문화가 필요하다.
알다시피, 사도 바오로와 교회사에 많은 성인은 폐해를 공개적으로 지도했고, 유대교에 대한 비판이 얼마나 강했는지 바울의 편지를 보면 알잖아요. 또 위를 향해 베드로에게 맞설 때도 결코 주눅들거나 점잔 빼지 않았다. 위를 향해 베드로에게, 이 베드로는 교황을 가르키고 했습니다.
당시 그들은 물론 아직 성인의 후광을 두르고 있지 않았으나, 아니군요, 아니군요. 베드로가 바오로와 교회 성인들이 인들 교회의 폐를 공개적으로 지켜냈고, 위를 향해 베드로에게 말살 때를 만나면, 아 교황이라고 봐도 좋긴 한데, 이제 바울도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그걸 얘기하나. 어쨌든, 뭐 넘어가도 되겠습니다.
후대에 쉬어진이 후광이 그들의 당찬 처신을 올바로 평가하고 있다. 그들 역시 시기와 몰이해를 감수해야 했으나, 그 때문에 자의식과 자부심을 잃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게 자기 확신, 자의식은 한스 큉이 자기 경험을 놓고 보더라도, 그리고 교회사와 신학, 성경을 보더라도 이게 뭐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교회와 신학의 현재 상태와 폐해 앞에서 온유한 마음을 지니는 것은, 나에게 매우 어려운 일임을 고백해야겠다. 사실 속된 분노 외에 거룩한 분노도 있는 법이다. 이런저런 날선 말이 첨예한 대립을 야기했던 것 같다.
그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아직까지 나로서는 따끔하게, 아, 조금 반대 입장에서요. 나로서는 따끔하게 전곡을 찔렀는데, 필경 악의로 받아들여진 경우도 많았다.
아직 자기가 가톨릭 교회와의 사이에서 겪었던 일을 설명하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개인적 비방은 언제나 삼갔다. 사람들이 나의 가톨릭 정신을 부인하고, 나의 그리스도 신앙을 의심하고, 아예 나의 착실한 믿음에 시비를 걸었을 때조차, 자세한 내용을 모르겠어요.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벌어졌던 것이니까요. 거의 이단 취급을 받은 것 같아요. 오죽 있으면 튜빙겐 카톨릭 학부 교수직을 박탈 당하겠습니까? 나는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쌈빡한 작은 욕설 사전 하나쯤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속에서 막 그 욕설이 튀어 나오니까. 아니면 자기가 들은 욕설도 기억나니까요. 사실 많은 사람이 오늘까지 입으로 문서로, 또는 공공연히 온갖 조악하고 야비하고 모욕적인 이름과 수식어를 나에게 붙였다.
아, 그 자기 안에서 나온 욕이라, 그보다 더한 욕이 그 사전을 만들 만하다는 거죠. 어떤 것이 있을까요? 나는 뭐 마르틴 루터에게 붙여진 욕설하고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한스 큉이 출교가 하지 않았죠, 가톨릭 교회가요. 아마 그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어서 가톨릭 교회가 조심했는지, 한스 큉이 루터처럼 과격하지 않았는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것들의 목록, 욕목록을 모두 해 두고 싶었다. 그들 중에는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던 아주 경건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즉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교회의 고위직 인사들을 대할 때, 좀 더 많은 친절과 고운 감정을 내게 요구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물론 자의식과 자부심을 지니고 처신해야 하지만, 이기적인 인간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자신의 결함을 고려하여 비판적으로 자문하고, 정당한 비판을 경청하는 내적으로 겸손한 사람으로 머물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건 놓치시면 안 된다는 거죠.
또한 사람은 마땅히 싸워야 하지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싸워서는 안 된다. 나의 고투는 다른 사람들, 특히 목소리 없는 이들 또는 들어주는 사람 없는 이들을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중대한 과업에 헌신해 오고 있으니, 가톨릭 교회의 쇄신 갈라진 그리스도교회들의 재결합, 그리고 끝으로 인류 공동의 윤리에 바탕한 종 문화간 대화다, 근데 이런 의미에서 나 또한 실로 자기 실현에 애쓰고 있다고 했다. 그 강을 현장에서 들었던 학생들과 시민들은 실감이 났겠어요.
그래서 이 소제목을 그렇게 잡았군요. 나 자신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욕을 먹어서 그 욕지거리, 작은 소 사전을 쓸만할 정도인데, 여전히 겸손하게 자기를 반성하면서 대의를 위해서 살아야 된다고 나에게,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거 아닌가,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방향이 옳다는 거죠, 기본적으로 이런 대의를 위해서 자기 실현에 애쓰고 있다 하는 거죠.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하는 거죠. 그러나 최근 심리학자와 정신요법 의사들도 자기 실현이라는 덫에 관해 경고하고 있는데, 마땅한 일이다. 요건 이제 한스 큉이 말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 실현이라는 덫, 기 실현이 필요한 겁니다.
근데 이게 몰입됨으로써 한에 덫이 되고 마는 거예요, 가두는 거예요. 그까 자기 실현이 아닌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겁니다. 이거 귀 기울여야 될 요즘 젊은이들 많을 것 같은데요.
또 젊은이들, 제가 얘기합니다. 그런 말 있지 않습니까? 지금 20대가 30대까지 포함해서 노인 세대보다 더 보수적이라고 하잖아요. 그들은 북한 문제, 남북 문제에 관심이 없어요, 자기 실현에만 관심이 있어요.
자기 실현을 하는 거, 한스 큉이 자기 경험에 놓고 볼 때도 그 어려운 그 시련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으나 그래도 그것이 자기 실현에 묶이게 되면 결국 자기를, 자기가 덫이 된다, 함정이 된다,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한반도 미래가 밝지가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남북 문제, 뭐 민주화, 공동의 삶 이런 데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실현에만 묶여 있으니까요.
뭐 영끌족이라고 하잖아요, 거기 실현입니다. 이거 저것 다 끌어다가 아파트에 투자 혹은 투기하는 거죠. 그래야만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입니다.
사실 이 덫은 많은 결혼을 깨지게 만들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만나면 깨지죠. 이런저런 인간 관계를 끝장나게 했다. 그런데 언제 이 덫에 걸리게 되는가, 자기 실현이 자기 책임에서 연대 책임, 그리고 이 책임에서 불량할 때 훈련할 때, 그니까 자기 공동체를 위한 게 아니라 자기만을 위해서 실현하려고 할 때 그렇게 된다.
여기서 나는 전쟁을 갈망하는 특정 정치가들, 돈벌이에 혈안이 되는 경영자들, 권력을 탐하는 노동 조합 간부들, 아 그렇게까지 얘기하는군요. 명예욕에 불타는 학자들, 몰염치한 의사들, 위선적인 성직자들,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독일에도 많다는 거죠.
나나 우리 아주 평범한 일상과 이기주의적 잘못 이해된 자기 실현이라는 일종의 시대 정신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것은 우리 가운데. 누구에게나 다양한 방식과 모습으로 뚜렷이 드러날 수 있다.
자기 결정, 자기 체험, 자기 발견, 자기 성취는 나를 실질적인 자기 애와 증적, 자기 규착과 방약 무인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전적으로 긍정해야 된다. 그렇잖아요, 자기 성취하는 게 왜 그런 거죠? 근데 방향이 잘못되는 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사실 오늘날 사소한 일들이 수시로 우리의 신경을 거슬린다.
공공생활에서 버스, 기차, 비행기, 길거리, 광장에서 휴대전화로 수다를 떨고, 버릇없는 태도가 흔히 자기 과시의 표현이며, 이런 태도로 민폐를 끼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남들을 불편하게 하는 전혀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인간들에게 화가 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 보고에 따르면, 자녀들의 못된 행동이 평균 이상의 지능의 표출로 유별나게 해석되는 눈만 부모들이 들고 있다. 아, 우리 아이 똑똑했어요, 저래, 아 우리애는 뭔지 달라, 뭐 천재야, 이래 갖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부모들이 있잖아요? 어, 재밌네요.
이런 폐해들을 심리학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어려운 상황을 좀 더 잘 극복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 시절부터 특정한 행동 양식들을 권장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협동하기, 그리고 좀 힘이 없는 아이를 돕게 하고, 그럴 때 뭐 이렇게 칭찬해 주고, 그 좋은 일이다. 너를 망상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상태 구조 속에, 이 세상에, 또 번역자가 참 번역을 전체적으로 잘하긴 했는데, 왜 이렇게 가끔 가다가 단어를 한자로 어려운 걸 갖다가 끌어들여서 멈칫하게 만드네요.
너를 망상, 망상 구조 속에 엉뚱한 생각하는 거. 망상이라고 하잖아요? 여기 한자로 나온 거 그게 아니라, 이리저리 막 거물처럼 이렇게 묶여 있는 상태를 가르쳐요. 독에 통합시켜라 너 자신의 목표에 매진하라.
자신에 결단하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들을 자신에게 열어 주어라. 긍정적 자아상을 개발하고, 현실적인 시각에서 사물과 현상을 판단하며, 희망찬 태도를 유지하라. 너 자신을 보살피고 신중하라.
뭐 이런 교육들을 시키는 건 필요한 거죠. 교육 심리학 학에서 이런 가치들을 교육 현장에 이렇게 연결시킬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건 필요한 거죠.
그러나 아이들이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려면, 성공적인 자아 실현을 위한 심리학적 훈련 외에 윤리적 교육도 필요하지 않을까? 심리적인 방법과 더불어서 윤리적 교육도 필요하다는 거예요. 이 교육은 오늘날 인간다움이라는 원칙과 자아의 자기 치료에만 매달리게 되면 윤리가 개입이 안 되잖아요? 상대방을 배려하는 거 없이 어떻게 통합적 인간형이 형성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인간다움이라는 원칙과 상호성이라는 황금률, 생명에 대한 경외, 연대, 진실, 협력이라는 바탕 위에 구축되어야 한다. 내 생각에는 이런 윤리적 토대 위에서만 적극적 교육의 근본 규칙들도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의 명확한 규칙들을 선언하고, 한계들을 설정하며, 일관성 있게 행동할 수 있다. 그런데 학부모들이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게, 학부모들이 먼저 교육을 받아야 되잖아요, 의미에 대한 걸 알아야 되잖아요. 그거 없이 경우의 연대, 진실, 협력, 뭐 이런 윤리적 토대 예로, 자기 자네들이 교육받아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할까요? 일단, 좋은 거니까 동의하겠지만, 실제로는 현실에서는 우리 아이가 조금이라도 손해만 봐라, 내가 가만히 있나, 그런 생각이 더 강한 거죠.
하지만 다음 사실은 어른들에게도 통용된다. 자기 주장은 때때로 자기 극복을 요구한다. 내적 정신적 공허, 끈끈한 맹세를 통해 뭉친 동아리나 패거리 안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데, 이런 공허는 삶의 가치와 삶의 의미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
그러나 이로서 출발점의 물음으로 되돌아왔는데, 삶의 의미를 나는 고립된 나의 자아에서가 아니라 고립된 자가 아니라, 오직 인간 관계 한가운데서만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나의 자아, 그러니까 나라는 것은 너에게, 우리에게 열려 있을 때만, 나의 삶의 의미를 찾아 얻는다. 분명 뒤에 또 나올 거라고 예측이 되는데, 그 인간 관계 한가운데는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한다, 해야 되겠죠.
그렇지 않으면 그 인간 관계는 또 하나의 이기적인 동맹으로 떨어질 수가 있으니까요. 나와 함께 살아가고, 내가 언제까지나 거듭 의지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족에게, 동료에게, 동무에게, 동아리에게, 동료인간들에게 활짝 열려 있을 때만, 그렇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 삶의 의미를 나는 자신을 초월하고 넘어서서, 자기를 초월하고, 쉬운 게 아니죠.
더 근원적인 어떤 게 있어야 되겠죠, 초월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을 받는 경험이 있거나 해야 되겠죠. 내가 몸 바치는 인간 공동체 또는 이런저런 일을 지향할 때만 찾아 얻는다. 그러나 여기서 거창하고 고상한 일들만 생각하고, 일상과 일상의 과제들을 망각한다면, 그건 또 잘못 짚었다,하겠다.
소소한 일상 그 안에서 자를 발견하고,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자아를 발견하고 초월하면서, 어떤 인간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거죠.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안에서 인데, 이게 지금 한스 큉이 뒤에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말한 것을 바탕에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 수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