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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지옥에 내려가시고
예수의 지옥*行에 대한 논의는 사도신경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추가된 요소라 할 수 있다. 2세기로 소급되는 로마 공동체의 세례고백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4세기의 신앙 고백문에는 예수의 묻히심과 부활 사이에 음부에 내려갔었다는 암시가 확실하게 언급되었다. 이 고백문은 이런 진술을 통해서 예수 죽음의 운명을 보다 자세하게 묘사해 보려고 했다. 즉 예수는 육체적인 차원에서만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죽음이 의미하고 있는 바의 것, 말하자면 하나님과 그의 구원으로부터 배척을 당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 죽음이란 인간의 실존적 운명이 죄에 의해 상실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지옥(Hölle)은 음부, 하데스, 게헨나 등과 거의 같은 개념이다. 히브리어로는 아바돈, 헬라어로는 아폴레이아, 라틴어로는 페르디찌오로 표기되는 이 지옥은 구약에서 단순히 죽은 사람이 거하는 곳으로(욥 26:6, 시88:11), 랍비문헌에서는 파멸과 징벌의 장소로 이해되었다.
예수 죽음의 이러한 의미는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 사건이 언급되었을 때 이미 논의되었다. 예수는 분명히 자기 백성의 종교적 권위에 의해 버려진 자로서 죽었다. 이것은 유대인인 그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했다. 그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고 위임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의 임박을 유달리 강하게 선포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임한 이 유기는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모든 인간의 죽음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가 확증된다. 이 분리는 현존상실과 죄와 인간의 자기폐쇄에 담겨있는 고유한 본질을 결정짓는 요소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자폐적으로 살아감으로써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된다. 죽음은 이것을 폭로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과연 죽으면서 이 사실을 경험하는가? 살아남은 자의 관점에서 볼 때 늘 그렇듯이 인간의 죽음을 그렇게 진부하게 진술하는 것이 바로 충격적인 게 아닐까? 우리 생전에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결코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기독교 중세기에는 그런 준비가 실행된 적이 있었지만.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에 죽음의 운명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병과 죽음을 삭막한 병실 안에 숨겨둔다. 그리고 죽는 자들에게도 인간 죽음의 어두운 심연이 고통과 의식의 혼미로 인해서 거의 숨겨져 있다. 인간에게 임하는 죽음의 이러한 어두운 심연은 죽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제외되는 것으로서 경험되는 바로 그곳에서 의식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만 하나님의 도래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라는 기준에 해당되는 문제다. 하나님이 도래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중에 그에 의해 제외된다는 사실을 고대 교의학은 지옥의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지옥행이 십자가에 달린 자의 양심적 불안*이라고, 그리고 영적인 고통이라고 본 루터의 해석이 실제로 정당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고통은 하나님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선포한 자가 경험해야만 했던 바로 그것이다. 즉 분명히 전권적인 하나님과의 유대적 전승에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이 전승에 의해 찔림을 당했다는 말이다.
*양심적 불안(Gewissensnot)이라고 해서 예수가 양심적으로 가책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근본적으로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 혼란스럽게, 혹은 두렵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임박에 기초해서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율법에 의해서 처형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유기 당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뒷부분에서도 양심(Gewissen)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양심은 단순히 자신의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는 인간의 의식을 뜻한다.
지옥에 대한 표상은 세계 심판에 관한 많은 像들에 그려진 각각의 경우들 중에서 분명히 환상적이다. 여기서 지옥의 고통에 대한 상들을 언급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요인, 즉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이 지옥 웅덩이라는 전통적 상들에서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옥 표상의 이러한 특징은 신학이 무엇을 고수했는가라는 점에서, 혹은 전율에 관한 무성한 환상에서 무엇을 해방시켜야했는가라는 점에서 유일무이하다. 하나님의 임박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임박에서 제외되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사실상 지옥일지 모른다. 여기서 지옥의 ‘장소’에 대한 질문은 일종의 부적절한, 그리고 우리에게 낡아빠진 사고방식이다. 오늘의 자연경험에 근거한 세계의 시-공적 좌표에서 하늘이나 지옥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론 양심의 경험에 대한 회화적 묘사만이 문제는 아니다. 루터가 십자가에 달린 자의 양심적 불안을 그의 지옥행에 대한 전승과 연결시켰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의 현재적 삶에서 이루어지는 양심 경험이 지옥표상에 상응하는 유일한 실재일지 모른다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에게 특징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임박에 대한 각기의 경험에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대한 경험도 역시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 이유는 지옥에 대한 경험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임박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단순히 무시해버림으로써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개념은 죽은 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예수가 육체적으로 죽임을 당했을 때 자신의 양심(Gewissen)에서 지옥의 현실성을 경험했다는 것은 예수의 운명이 지닌 특별한 부분에 속한다. 양심, 즉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인간의 의식과 지옥경험의 상관성은 인간경험에서 모두 같은 방식으로 등장하는 현상은 아니다. 이 상관성은 인간의 일상적 경험에서 곧바로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예수 죽음에 담긴 특별한 경험의 상황을 성격화한다.
신학사적 맥락에서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해석이 지금까지 진술된 것과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이제 그것을 설명해야겠다. 예수의 지옥행이 예수에게 고통이라기보다는 승리를 뜻한다는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지옥행(行)은 승리행(行)으로서 그려진다. 이것은 기독교 예술사에서 자주 제시되었다. 즉 지옥에서 악마를 제압하고,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를 지옥의 웅덩이에서 건져내신 부활의 그리스도로 말이다. 이와 비슷한 견해가 이미 신약성서에도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가 죽은 자의 나라에 내려갔었다는 언급이 유일하게, 명백하게, 그리고 보다 밀접하게 언급되고 있다. 베드로전서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벧전 3:19 이하)라고 한다. 다른 유대 문헌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언급된 ‘영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같은 편지의 후반부 구절에서 암시된다. 베드로전서 4장6절에서 이르기를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예수를 통한 지하세계의 복음 선포는 개종설교를 의미할 뿐이다. 이것은 이미 죽은 자들도 역시 기독교 복음을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로 살았을 때 예수나 기독교 복음을 만나지 못하고 죽어 지하세계에 가 있는 이들에게도 임박한 심판 앞에서 예수를 통한 구원이 열린다. 기독교 주석학자들은 이미 고대 교회시대에서 주장되었던 이러한 대담무쌍한 사상을 약화시켰다. 그들은 거듭해서 이르기를 하데스에서의 예수 설교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의로운 자들만을 향했거나, 아니면 일단 육체적으로 살 때 이미 의로운 자들로 판명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전서는 예수가 회심설교를 행했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들을 뛰어넘는다 하겠다. 일종의 우주적 구원이해에 대한 이러한 경향은 그리스도가 아담을, 즉 인간을 지하세계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사상을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오리겐에서도 발견되며, 기독교 예술품에서 보는대로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표현에서도 거의 전제되어있다.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이것을 예수 수난의 진술로 이해한 첫번째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양측의 표상*은 서로 배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들은 일종의 상호적 관계를 갖는다. 양자는 예수 죽음에 대한 해석이다. 이 안에 양자가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된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는 그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음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유기를 견뎌냈기 때문이다. 예수 죽음의 대리적 의미는 죽음을 극복했다는 표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승리의 의미는 예수의 십자가를 부활의 빛에서만 유지하게 했으며, 또한 십자가의 의미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행을 부활한 자의 몫으로 돌린다는 것은 함축적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자, 혹은 특히 부활한 자가 지옥에 갔는지 아닌지에 대한 양자택일의 문제는 오늘날 이러한 상(像)들을 사물적인 것으로 판단하려는 극단적인 생각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 문제는 구 개혁주의 교의학과 구 루터교 교의학 사이에서 전개된 첨예한 논쟁점이기도 하다.
*이것은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두 가지 표상을 가리킨다. 하나는 예수를 승리자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난자로 그린다. 판넨베르크는 이 두 전승이 배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예수 죽음에 대한 해석 안에서 연관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지옥행은 성서에 근거한 보편적 개념이 아니라, 5세기 초의 아크빌레이아 신조에 등장하는 구절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앞서 판넨베르크는 4세기의 신앙고백에 그 암시가 들어있다고 지적했다. 어쨌든지 이 개념은 세계구원을 선포하는 기독교가 그 구원의 보편성을 확대시킬 수 있는 신학적 의미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거리낄 필요가 없다고 판넨베르크는 주장한다.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구절이 생략되어 있다.
원시 기독교가 회심설교로 행한 선교설교의 像에서 지옥에 대한 예수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는 베드로전서의 사상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발생한 대리의 우주적 영향력을, 그리고 이로써 중재된 구원의 보편성을 주장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주 제기되었다. 우선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언제 계시되었는지, 예수 안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구원이 인간에게 언제 드러났는지. 그렇다면 예수 등장 이전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기독교 복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많은 이들은 어떻게 되는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는 들었지만 복음선포를 책임진 기독교인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 진리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 모든 사람들은 멸망에 빠지는가? 그들은 예수를 통해 인류에게 열려진 하나님의 임박 앞에서 영원히 제외되고 마는가?
이 절박한 질문들에 대해서 기독교 신앙은 답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신앙고백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양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그 당시 기독교 공동체가 이 양식을 신앙고백에 포함시킴으로써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려고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이 양식은 신약성서의 근원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즉 인류를 위해 예수에게서 발생한 일은 예수와 또한 그에 관한 사신과 결코 접촉해본 적이 없는 인간들, 혹은 예수와 그의 역사의 진리성을 결코 한 번도 실제적으로 깨닫지 못한 인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사람들의 생명은, 이 생명은 그들에게도 숨겨져 있는 것인데, 역시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연결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곧 예수가 그의 팔복 말씀에서 언급한 이들에게 해당되는 게 틀림없다. 이들은 예수와의 만남과 전혀 상관없이, 오직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상태 때문에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 하나님의 임박과 그의 나라가 예수에 의해 선포되었다. 예수를 결코 알지 못하던 이들도 역시 그들이나 우리가 탐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류와 인류역사를 통해서 예수와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된다. 이 하나님은 바로 예수가 선포한 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에게 구원 아니면 심판이 임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구원받는다고 확실하게 보장할 수는 없다. 명시적으로 예수와 일치해 있는 이에게만 구원은 보증된다. 그리고 이 일치에서 예수와 더불어 죽음을 극복한다는 희망이 보증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나머지 사람들 역시, 예수 이전에 이미 죽은 이들 역시 그에게 나타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구원 신앙의 이러한 보편주의에서 죽음의 나라를 극복한다는 기독교의 신앙고백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기독교적 신앙고백의 의미를 아는 이는 오늘날 사도신경의 이 항목이 그렇게도 많은 이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또한 이로 인해 이 항목이 그렇게도 자주 거부되었다는 사실을 유감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다.
예수의 지옥*行에 대한 논의는 사도신경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추가된 요소라 할 수 있다. 2세기로 소급되는 로마 공동체의 세례고백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4세기의 신앙 고백문에는 예수의 묻히심과 부활 사이에 음부에 내려갔었다는 암시가 확실하게 언급되었다. 이 고백문은 이런 진술을 통해서 예수 죽음의 운명을 보다 자세하게 묘사해 보려고 했다. 즉 예수는 육체적인 차원에서만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죽음이 의미하고 있는 바의 것, 말하자면 하나님과 그의 구원으로부터 배척을 당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 죽음이란 인간의 실존적 운명이 죄에 의해 상실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지옥(Hölle)은 음부, 하데스, 게헨나 등과 거의 같은 개념이다. 히브리어로는 아바돈, 헬라어로는 아폴레이아, 라틴어로는 페르디찌오로 표기되는 이 지옥은 구약에서 단순히 죽은 사람이 거하는 곳으로(욥 26:6, 시88:11), 랍비문헌에서는 파멸과 징벌의 장소로 이해되었다.
예수 죽음의 이러한 의미는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 사건이 언급되었을 때 이미 논의되었다. 예수는 분명히 자기 백성의 종교적 권위에 의해 버려진 자로서 죽었다. 이것은 유대인인 그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했다. 그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고 위임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의 임박을 유달리 강하게 선포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임한 이 유기는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모든 인간의 죽음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가 확증된다. 이 분리는 현존상실과 죄와 인간의 자기폐쇄에 담겨있는 고유한 본질을 결정짓는 요소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자폐적으로 살아감으로써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된다. 죽음은 이것을 폭로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과연 죽으면서 이 사실을 경험하는가? 살아남은 자의 관점에서 볼 때 늘 그렇듯이 인간의 죽음을 그렇게 진부하게 진술하는 것이 바로 충격적인 게 아닐까? 우리 생전에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결코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기독교 중세기에는 그런 준비가 실행된 적이 있었지만.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에 죽음의 운명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병과 죽음을 삭막한 병실 안에 숨겨둔다. 그리고 죽는 자들에게도 인간 죽음의 어두운 심연이 고통과 의식의 혼미로 인해서 거의 숨겨져 있다. 인간에게 임하는 죽음의 이러한 어두운 심연은 죽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제외되는 것으로서 경험되는 바로 그곳에서 의식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만 하나님의 도래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라는 기준에 해당되는 문제다. 하나님이 도래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중에 그에 의해 제외된다는 사실을 고대 교의학은 지옥의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지옥행이 십자가에 달린 자의 양심적 불안*이라고, 그리고 영적인 고통이라고 본 루터의 해석이 실제로 정당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고통은 하나님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선포한 자가 경험해야만 했던 바로 그것이다. 즉 분명히 전권적인 하나님과의 유대적 전승에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이 전승에 의해 찔림을 당했다는 말이다.
*양심적 불안(Gewissensnot)이라고 해서 예수가 양심적으로 가책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근본적으로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 혼란스럽게, 혹은 두렵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임박에 기초해서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율법에 의해서 처형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유기 당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뒷부분에서도 양심(Gewissen)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양심은 단순히 자신의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는 인간의 의식을 뜻한다.
지옥에 대한 표상은 세계 심판에 관한 많은 像들에 그려진 각각의 경우들 중에서 분명히 환상적이다. 여기서 지옥의 고통에 대한 상들을 언급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요인, 즉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이 지옥 웅덩이라는 전통적 상들에서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옥 표상의 이러한 특징은 신학이 무엇을 고수했는가라는 점에서, 혹은 전율에 관한 무성한 환상에서 무엇을 해방시켜야했는가라는 점에서 유일무이하다. 하나님의 임박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임박에서 제외되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사실상 지옥일지 모른다. 여기서 지옥의 ‘장소’에 대한 질문은 일종의 부적절한, 그리고 우리에게 낡아빠진 사고방식이다. 오늘의 자연경험에 근거한 세계의 시-공적 좌표에서 하늘이나 지옥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론 양심의 경험에 대한 회화적 묘사만이 문제는 아니다. 루터가 십자가에 달린 자의 양심적 불안을 그의 지옥행에 대한 전승과 연결시켰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의 현재적 삶에서 이루어지는 양심 경험이 지옥표상에 상응하는 유일한 실재일지 모른다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에게 특징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임박에 대한 각기의 경험에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대한 경험도 역시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 이유는 지옥에 대한 경험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임박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단순히 무시해버림으로써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개념은 죽은 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예수가 육체적으로 죽임을 당했을 때 자신의 양심(Gewissen)에서 지옥의 현실성을 경험했다는 것은 예수의 운명이 지닌 특별한 부분에 속한다. 양심, 즉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인간의 의식과 지옥경험의 상관성은 인간경험에서 모두 같은 방식으로 등장하는 현상은 아니다. 이 상관성은 인간의 일상적 경험에서 곧바로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예수 죽음에 담긴 특별한 경험의 상황을 성격화한다.
신학사적 맥락에서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해석이 지금까지 진술된 것과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이제 그것을 설명해야겠다. 예수의 지옥행이 예수에게 고통이라기보다는 승리를 뜻한다는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지옥행(行)은 승리행(行)으로서 그려진다. 이것은 기독교 예술사에서 자주 제시되었다. 즉 지옥에서 악마를 제압하고,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를 지옥의 웅덩이에서 건져내신 부활의 그리스도로 말이다. 이와 비슷한 견해가 이미 신약성서에도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가 죽은 자의 나라에 내려갔었다는 언급이 유일하게, 명백하게, 그리고 보다 밀접하게 언급되고 있다. 베드로전서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벧전 3:19 이하)라고 한다. 다른 유대 문헌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언급된 ‘영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같은 편지의 후반부 구절에서 암시된다. 베드로전서 4장6절에서 이르기를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예수를 통한 지하세계의 복음 선포는 개종설교를 의미할 뿐이다. 이것은 이미 죽은 자들도 역시 기독교 복음을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로 살았을 때 예수나 기독교 복음을 만나지 못하고 죽어 지하세계에 가 있는 이들에게도 임박한 심판 앞에서 예수를 통한 구원이 열린다. 기독교 주석학자들은 이미 고대 교회시대에서 주장되었던 이러한 대담무쌍한 사상을 약화시켰다. 그들은 거듭해서 이르기를 하데스에서의 예수 설교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의로운 자들만을 향했거나, 아니면 일단 육체적으로 살 때 이미 의로운 자들로 판명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전서는 예수가 회심설교를 행했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들을 뛰어넘는다 하겠다. 일종의 우주적 구원이해에 대한 이러한 경향은 그리스도가 아담을, 즉 인간을 지하세계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사상을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오리겐에서도 발견되며, 기독교 예술품에서 보는대로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표현에서도 거의 전제되어있다.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이것을 예수 수난의 진술로 이해한 첫번째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양측의 표상*은 서로 배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들은 일종의 상호적 관계를 갖는다. 양자는 예수 죽음에 대한 해석이다. 이 안에 양자가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된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는 그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음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유기를 견뎌냈기 때문이다. 예수 죽음의 대리적 의미는 죽음을 극복했다는 표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승리의 의미는 예수의 십자가를 부활의 빛에서만 유지하게 했으며, 또한 십자가의 의미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행을 부활한 자의 몫으로 돌린다는 것은 함축적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자, 혹은 특히 부활한 자가 지옥에 갔는지 아닌지에 대한 양자택일의 문제는 오늘날 이러한 상(像)들을 사물적인 것으로 판단하려는 극단적인 생각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 문제는 구 개혁주의 교의학과 구 루터교 교의학 사이에서 전개된 첨예한 논쟁점이기도 하다.
*이것은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두 가지 표상을 가리킨다. 하나는 예수를 승리자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난자로 그린다. 판넨베르크는 이 두 전승이 배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예수 죽음에 대한 해석 안에서 연관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지옥행은 성서에 근거한 보편적 개념이 아니라, 5세기 초의 아크빌레이아 신조에 등장하는 구절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앞서 판넨베르크는 4세기의 신앙고백에 그 암시가 들어있다고 지적했다. 어쨌든지 이 개념은 세계구원을 선포하는 기독교가 그 구원의 보편성을 확대시킬 수 있는 신학적 의미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거리낄 필요가 없다고 판넨베르크는 주장한다.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구절이 생략되어 있다.
원시 기독교가 회심설교로 행한 선교설교의 像에서 지옥에 대한 예수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는 베드로전서의 사상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발생한 대리의 우주적 영향력을, 그리고 이로써 중재된 구원의 보편성을 주장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주 제기되었다. 우선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언제 계시되었는지, 예수 안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구원이 인간에게 언제 드러났는지. 그렇다면 예수 등장 이전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기독교 복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많은 이들은 어떻게 되는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는 들었지만 복음선포를 책임진 기독교인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 진리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 모든 사람들은 멸망에 빠지는가? 그들은 예수를 통해 인류에게 열려진 하나님의 임박 앞에서 영원히 제외되고 마는가?
이 절박한 질문들에 대해서 기독교 신앙은 답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신앙고백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양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그 당시 기독교 공동체가 이 양식을 신앙고백에 포함시킴으로써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려고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이 양식은 신약성서의 근원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즉 인류를 위해 예수에게서 발생한 일은 예수와 또한 그에 관한 사신과 결코 접촉해본 적이 없는 인간들, 혹은 예수와 그의 역사의 진리성을 결코 한 번도 실제적으로 깨닫지 못한 인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사람들의 생명은, 이 생명은 그들에게도 숨겨져 있는 것인데, 역시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연결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곧 예수가 그의 팔복 말씀에서 언급한 이들에게 해당되는 게 틀림없다. 이들은 예수와의 만남과 전혀 상관없이, 오직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상태 때문에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 하나님의 임박과 그의 나라가 예수에 의해 선포되었다. 예수를 결코 알지 못하던 이들도 역시 그들이나 우리가 탐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류와 인류역사를 통해서 예수와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된다. 이 하나님은 바로 예수가 선포한 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에게 구원 아니면 심판이 임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구원받는다고 확실하게 보장할 수는 없다. 명시적으로 예수와 일치해 있는 이에게만 구원은 보증된다. 그리고 이 일치에서 예수와 더불어 죽음을 극복한다는 희망이 보증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나머지 사람들 역시, 예수 이전에 이미 죽은 이들 역시 그에게 나타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구원 신앙의 이러한 보편주의에서 죽음의 나라를 극복한다는 기독교의 신앙고백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기독교적 신앙고백의 의미를 아는 이는 오늘날 사도신경의 이 항목이 그렇게도 많은 이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또한 이로 인해 이 항목이 그렇게도 자주 거부되었다는 사실을 유감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다.
2008.06.05 04:17:58
사도 신경에 이런 내용이 있었군요.. 보편구원론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보편구원론과 다원주의의 차이점을 알지 못했는데, 보편구원의 근거가 확실히 다른 데 있었군요..감사합니다.
2008.06.05 10:27:03
와우, 이방인 님이 이런 데까지 찾아오셨군요.
다비안들이 판넨베르크 글을 읽어야 하는데,
별로 관심들이 없는 거 같애요.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우주론적이었답니다.
그게 혼합주의나 다원주의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이지요.
오히려 세계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랍니다.
좋은 하루.
다비안들이 판넨베르크 글을 읽어야 하는데,
별로 관심들이 없는 거 같애요.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우주론적이었답니다.
그게 혼합주의나 다원주의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이지요.
오히려 세계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랍니다.
좋은 하루.
2008.06.05 10:44:36
지난번 동영상 강의에서 언급하셔서-사티아 님 녹취록에--어디 있나 헤맸는데
오늘 이방인 님을 통해서 찾았네요.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관심들 있음을 알아 주셨으면..
그리고 요즘은 다 와우.. 그러나요?
저는 아직도 와~~ 그러는데요. ㅎㅎㅎ
좋은 날 되십시요.
오늘 이방인 님을 통해서 찾았네요.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관심들 있음을 알아 주셨으면..
그리고 요즘은 다 와우.. 그러나요?
저는 아직도 와~~ 그러는데요. ㅎㅎㅎ
좋은 날 되십시요.
2008.07.08 16:36:59
정목사님 이미 한달전에 쓰신 글이라 이 댓글을 읽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다니는 장로교에서 칼빈의 Limited Atonement에 대해 배울때 예수님께서 모두를 위해서 죽으신게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은 unconditional election에 의해 선택된 자 뿐이며 -- 인간은 전적타락에 의해 스스로 구할 수 없으므로 --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common grace에 의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기 전에는 -- 제가 보기는 절때 불가능해 보이는 -- 구원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죽은자 -- 예수님을 모르는 -- 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건가요? 꼭 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8.07.09 11:12:37
바울 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 아닌지
제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군요.
이런 건 단답 식의 대답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구원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배타적 권한이기에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어요.
다만 성서와 기독교 역사가 말하는 범주 안에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에요.
칼빈과 루터 등등의 언급이 바로 그런 범주라 할 수 있지요.
칼빈 이야기를 정확하게 하려면 나도 책을 봐야하기에 조금 곤란하겠군요.
누가 구원받느냐 하는 질문보다는
구원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더 우선적이에요.
구원이 무엇인지 질문하려면 '하나님 나라', '칭의', '종말' 같은
세계를 이해해야지요.
이런 세계에 눈이 열리는 사람은
누가 구원받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너무 두렵고 떨리는, 궁극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이 어찌 토기장이의 뜻을 결정할 수 있겠어요.
더운 여름에 건강하세요.
감사.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 아닌지
제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군요.
이런 건 단답 식의 대답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구원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배타적 권한이기에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어요.
다만 성서와 기독교 역사가 말하는 범주 안에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에요.
칼빈과 루터 등등의 언급이 바로 그런 범주라 할 수 있지요.
칼빈 이야기를 정확하게 하려면 나도 책을 봐야하기에 조금 곤란하겠군요.
누가 구원받느냐 하는 질문보다는
구원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더 우선적이에요.
구원이 무엇인지 질문하려면 '하나님 나라', '칭의', '종말' 같은
세계를 이해해야지요.
이런 세계에 눈이 열리는 사람은
누가 구원받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너무 두렵고 떨리는, 궁극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이 어찌 토기장이의 뜻을 결정할 수 있겠어요.
더운 여름에 건강하세요.
감사.
2008.07.12 15:25:46
정목사님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읍니다. 음 구원을 먼저 이해 해야만 한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잘 이해는 안가네요. 좀 더 답변 부탁드려도 될까요?
목사님도 더운 날씨에 건강하시고 목사님 피씨도 건강하길 (?) ^^ 바랍나다.
목사님도 더운 날씨에 건강하시고 목사님 피씨도 건강하길 (?) ^^ 바랍나다.
2013.03.09 16:23:20
질답게시판에 글을 올렸으나 답이 없어 원문에 다시 올립니다.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이나 다른 글들을 보면 베드로전서 3,4장을 사후구원론의 논거로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사후구원론의 근거로는 활용되기 어렵다는 입장이라서 제대로 된 사후구원론의 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아직까지 제가 읽어본 내용들중에는 (제가 싫어하는) 구절주의적 해석론 방법밖에 없었거든요.
물론 구원은 하나님의 몫이고 우리는 그 구원에 대해서 잘 모른다가 맞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근거로 위의 구절이 쓰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아니라면 그 이유가 알고 싶습니다.
참고로 제 생각은
베드로전서 3장 8절 ~ 4장 6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위의 구절은 마틴 루터가 가장 해석하기 어려워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표현한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를 포함한 구절입니다. 역시 해석하기가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위의 구절은 카톨릭과 일부 개신교에서 제 2의 구원의 기회를 이야기하기 위해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에 우리가 그 전부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우리는 성경을 통해 계시된 정도까지만 이해할 뿐입니다.
1. 베드로전서의 시대적 배경 및 저술목적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에 의해 쓰여졌다고 합니다. (벧전1:1) 성경비평쪽에서는 사도 베드로의 이름을 빌어 베드로의 사상을 대변하는 베드로 공동체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시대에 예수를 믿음으로 박해받는 공동체에게 고난을 견디는 힘을 주기위해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는 성도들이여, 비록 너희가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지만 결국 영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그러니 그 고난을 견디고, 삶으로 승화시키라는 것이 베드로전서의 저술 목적입니다.
2. 벧전 4:6의 해석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이 앞의 구절을 이해하기 편하므로 순서를 바꾸어보겠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표현이 사후 제2의 기회가 있다고 오해를 하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죽은 자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자들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가 쓰여질 당시에 헬라 사상에는 죽어버리면 구원을 못 받는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도 죽어버리면 구원이 없다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나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죽을지라도 구원자이신 예수를 통해 영으로 살아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비슷한 내용의 권면을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죽으면 구원이 없다는 그런 헬라사상이 퍼져 있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영과 관련된 문제에서 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경향이 강했죠. 그래서 육체적 죽음은 곧 끝을 의미하기에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해서 구원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고 슬퍼했고, 이에대해 그렇게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권면한 내용입니다.
다시 베드로전서의 내용으로 돌아가서 보면 4장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너희가 당하는 것처럼) 육체적 고난을 당하셨으니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용은 그리스도를 따라 죄를 멀리하는 것에 대해서 방탕한 세상 사람들이 자신과 다름으로 인해 비방을 하고 박해를 할 것이지만 결국 심판의 시기에 그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이 심판을 피하기 위하여) (주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이미)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구원) 하려 함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구절을 죽은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본다면 본문의 흐름을 완전히 무시하는 해석이 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고난 받는 형제들아 너희를 비방하는 무리들은 심판의 때에 그에 합당하게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런 심판을 위해 믿지 않고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될테니 고난을 받은 자든, 박해를 한 자든 다 구원을 받을거야라고 말 한다면 위로가 될까요?
또한 죽은자들에 대해서 이어지는 내용에서 죽은자란 사람으로 심판을 받은 자라고 한정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 표현에 의해서도 죽은 자들은 모든 사람으로 범위를 확장시킬 수 없습니다.
3. 벧전 3장 19절의 해석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참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본문내용입니다. 그렇지만 구절만이 아닌 전체를 읽으면 어느정도 해결이 가능한 본문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은 크게 세가지 해석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사후 제 2의 기회가 있다는 해석이 있고, 하나는 예수님께서 노아의 방주 시대에도 노아를 통해서 심판을 선포하셨다는 해석이 있고, 하나는 예수님께서 부활 전에 영적 상태에서 주님의 주님 되심을 선포하셨다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저도 잘 모를때에 마지막의 선포하심으로 생각했으나 이제는 노아를 통해서 심판을 선포하셨다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라는 본문을 해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 된 시점이 그들이 죽기 전의 상태였고 그들이 고난을 받다가 죽은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현재시점의) 죽은 자들에게도 (과거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라는 문법구조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면 의외로 난제가 쉽게 풀립니다. (현재 시점의) 옥에 있는 영들에게 (과거에-그들이 물로 심판을 받기전 살아있을 때에) 영으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한동안 왜 이 구절에 뜬금없이 ‘또한’이라는 표현이 등장할까에 대해서 궁금해 했었습니다. 앞의 구절과 시간적으로 이어진다면 영으로 살리심을 받은 시점에서 그냥 이어져야지 또한이라는 표현이 붙는 것은 어색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위의 해석처럼 시간의 흐름이 아닌 다른 사건의 소개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또한’이라는 표현이 붙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 소개한 내용은 3장 8절에서부터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선을 행하여 고난을 받으나 너희가 영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참고 견디라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전서의 모든 내용이 고난을 받더라도 참고 견디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육체적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영적구원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내용입니다.
17절 이하에서 보면 예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육체적으로 죽음을 당하나 영적으로 살리심을 당하니라고 표현되어 있고,
18절에서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고 하십니다.
19절에서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고 이어집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육체적 죽음까지 당하신 예수님이, 또한 이전의 사건에서도 (노아의 방주라는 복음 선포 사건에 대해서 무시하고 그 결과로 심판받은 사람들에게도) 영으로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겁니다. 굳이 이런 이야기까지 쓴 이유는 육체적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끝이 아닌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이 구절이 사후 제2의 구원설의 근거가 되려면 몇 가지를 넘어야 합니다.
첫째로 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의 편지에 사후에도 구원이 있다고 썼을까요? 이것을 돌려 말하면 너희 지금 고난을 받는 거 잘 안다. 이후 심판의 날에 너희를 박해한 사람들도 다 같이 구원을 받을테니 그 고난을 잘 견뎌라라는 소리입니다. 고난을 견디라고 권면하는 편지에 너의 친형제를 때려 죽인 사람도 구원받을거야. 그러면 그 고난은 과연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고난일까요?
둘째로 선포의 대상이 단순히 옥에 있는 영들이라면 노아의 방주 때 죽은 영들만 선포의 대상이 되고, 나머지는 선포의 대상이 아닐텐데 어떻게 전체에 대한 선포로 확신 할 수 있느냐의 문제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노아의 시대에 죽은 사람들의 영이라고 범위를 한정시켜 놓았는데 우리가 그 범위를 인위적으로 확장시키면 안되는 거죠.
셋째로 벧전4장 4~6만 봐도 살아서 비방한 자들의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육체적 삶의 댓가로 인한 심판) 영적 상태에서의 제2의 기회라는 것은 따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넷째로 사후 제2의 기회가 있다면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리이므로 성경 전체에 걸쳐서 여러번 나와야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도 공관복음서에서 반밖에(2권) 안 나왔다는 이유로 주요한 교리적 사항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견해를 취하는 입장이라면 벧전에서 잠깐 나온 것이라면 정말 주요한 교리가 아니라고 봐야겠죠. 하지만 사후 구원설은 너무 중요한 교리가 아닌가요?
다섯째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등 사후 기회를 제한하는 내용을 우리는 성경에서 쉽게 찾아 볼수 있는데 이런 내용들과 배치되는 단 하나의 구절이라면 해석이 제대로 된 것인가를 검토하는게 맞을 듯 싶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이나 다른 글들을 보면 베드로전서 3,4장을 사후구원론의 논거로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사후구원론의 근거로는 활용되기 어렵다는 입장이라서 제대로 된 사후구원론의 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아직까지 제가 읽어본 내용들중에는 (제가 싫어하는) 구절주의적 해석론 방법밖에 없었거든요.
물론 구원은 하나님의 몫이고 우리는 그 구원에 대해서 잘 모른다가 맞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근거로 위의 구절이 쓰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아니라면 그 이유가 알고 싶습니다.
참고로 제 생각은
베드로전서 3장 8절 ~ 4장 6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위의 구절은 마틴 루터가 가장 해석하기 어려워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표현한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를 포함한 구절입니다. 역시 해석하기가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위의 구절은 카톨릭과 일부 개신교에서 제 2의 구원의 기회를 이야기하기 위해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에 우리가 그 전부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우리는 성경을 통해 계시된 정도까지만 이해할 뿐입니다.
1. 베드로전서의 시대적 배경 및 저술목적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에 의해 쓰여졌다고 합니다. (벧전1:1) 성경비평쪽에서는 사도 베드로의 이름을 빌어 베드로의 사상을 대변하는 베드로 공동체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시대에 예수를 믿음으로 박해받는 공동체에게 고난을 견디는 힘을 주기위해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는 성도들이여, 비록 너희가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지만 결국 영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그러니 그 고난을 견디고, 삶으로 승화시키라는 것이 베드로전서의 저술 목적입니다.
2. 벧전 4:6의 해석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이 앞의 구절을 이해하기 편하므로 순서를 바꾸어보겠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표현이 사후 제2의 기회가 있다고 오해를 하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죽은 자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자들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가 쓰여질 당시에 헬라 사상에는 죽어버리면 구원을 못 받는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도 죽어버리면 구원이 없다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나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죽을지라도 구원자이신 예수를 통해 영으로 살아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비슷한 내용의 권면을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죽으면 구원이 없다는 그런 헬라사상이 퍼져 있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영과 관련된 문제에서 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경향이 강했죠. 그래서 육체적 죽음은 곧 끝을 의미하기에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해서 구원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고 슬퍼했고, 이에대해 그렇게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권면한 내용입니다.
다시 베드로전서의 내용으로 돌아가서 보면 4장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너희가 당하는 것처럼) 육체적 고난을 당하셨으니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용은 그리스도를 따라 죄를 멀리하는 것에 대해서 방탕한 세상 사람들이 자신과 다름으로 인해 비방을 하고 박해를 할 것이지만 결국 심판의 시기에 그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이 심판을 피하기 위하여) (주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이미)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구원) 하려 함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구절을 죽은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본다면 본문의 흐름을 완전히 무시하는 해석이 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고난 받는 형제들아 너희를 비방하는 무리들은 심판의 때에 그에 합당하게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런 심판을 위해 믿지 않고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될테니 고난을 받은 자든, 박해를 한 자든 다 구원을 받을거야라고 말 한다면 위로가 될까요?
또한 죽은자들에 대해서 이어지는 내용에서 죽은자란 사람으로 심판을 받은 자라고 한정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 표현에 의해서도 죽은 자들은 모든 사람으로 범위를 확장시킬 수 없습니다.
3. 벧전 3장 19절의 해석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참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본문내용입니다. 그렇지만 구절만이 아닌 전체를 읽으면 어느정도 해결이 가능한 본문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은 크게 세가지 해석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사후 제 2의 기회가 있다는 해석이 있고, 하나는 예수님께서 노아의 방주 시대에도 노아를 통해서 심판을 선포하셨다는 해석이 있고, 하나는 예수님께서 부활 전에 영적 상태에서 주님의 주님 되심을 선포하셨다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저도 잘 모를때에 마지막의 선포하심으로 생각했으나 이제는 노아를 통해서 심판을 선포하셨다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라는 본문을 해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 된 시점이 그들이 죽기 전의 상태였고 그들이 고난을 받다가 죽은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현재시점의) 죽은 자들에게도 (과거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라는 문법구조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면 의외로 난제가 쉽게 풀립니다. (현재 시점의) 옥에 있는 영들에게 (과거에-그들이 물로 심판을 받기전 살아있을 때에) 영으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한동안 왜 이 구절에 뜬금없이 ‘또한’이라는 표현이 등장할까에 대해서 궁금해 했었습니다. 앞의 구절과 시간적으로 이어진다면 영으로 살리심을 받은 시점에서 그냥 이어져야지 또한이라는 표현이 붙는 것은 어색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위의 해석처럼 시간의 흐름이 아닌 다른 사건의 소개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또한’이라는 표현이 붙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 소개한 내용은 3장 8절에서부터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선을 행하여 고난을 받으나 너희가 영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참고 견디라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전서의 모든 내용이 고난을 받더라도 참고 견디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육체적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영적구원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내용입니다.
17절 이하에서 보면 예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육체적으로 죽음을 당하나 영적으로 살리심을 당하니라고 표현되어 있고,
18절에서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고 하십니다.
19절에서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고 이어집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육체적 죽음까지 당하신 예수님이, 또한 이전의 사건에서도 (노아의 방주라는 복음 선포 사건에 대해서 무시하고 그 결과로 심판받은 사람들에게도) 영으로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겁니다. 굳이 이런 이야기까지 쓴 이유는 육체적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끝이 아닌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이 구절이 사후 제2의 구원설의 근거가 되려면 몇 가지를 넘어야 합니다.
첫째로 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의 편지에 사후에도 구원이 있다고 썼을까요? 이것을 돌려 말하면 너희 지금 고난을 받는 거 잘 안다. 이후 심판의 날에 너희를 박해한 사람들도 다 같이 구원을 받을테니 그 고난을 잘 견뎌라라는 소리입니다. 고난을 견디라고 권면하는 편지에 너의 친형제를 때려 죽인 사람도 구원받을거야. 그러면 그 고난은 과연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고난일까요?
둘째로 선포의 대상이 단순히 옥에 있는 영들이라면 노아의 방주 때 죽은 영들만 선포의 대상이 되고, 나머지는 선포의 대상이 아닐텐데 어떻게 전체에 대한 선포로 확신 할 수 있느냐의 문제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노아의 시대에 죽은 사람들의 영이라고 범위를 한정시켜 놓았는데 우리가 그 범위를 인위적으로 확장시키면 안되는 거죠.
셋째로 벧전4장 4~6만 봐도 살아서 비방한 자들의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육체적 삶의 댓가로 인한 심판) 영적 상태에서의 제2의 기회라는 것은 따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넷째로 사후 제2의 기회가 있다면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리이므로 성경 전체에 걸쳐서 여러번 나와야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도 공관복음서에서 반밖에(2권) 안 나왔다는 이유로 주요한 교리적 사항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견해를 취하는 입장이라면 벧전에서 잠깐 나온 것이라면 정말 주요한 교리가 아니라고 봐야겠죠. 하지만 사후 구원설은 너무 중요한 교리가 아닌가요?
다섯째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등 사후 기회를 제한하는 내용을 우리는 성경에서 쉽게 찾아 볼수 있는데 이런 내용들과 배치되는 단 하나의 구절이라면 해석이 제대로 된 것인가를 검토하는게 맞을 듯 싶습니다.
2013.03.09 17:40:16
블루군 님,
안녕하세요?
연달아서 긴 대글을 두 개나 다셨군요.
그렇게 긴 글을 올리시면 제가 다 읽지를 못합니다.
또 대글의 요지가 질문을 하시는 건지,
자기 주장을 하시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평화가...
안녕하세요?
연달아서 긴 대글을 두 개나 다셨군요.
그렇게 긴 글을 올리시면 제가 다 읽지를 못합니다.
또 대글의 요지가 질문을 하시는 건지,
자기 주장을 하시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평화가...
2013.03.09 18:02:31
네. 제 글이 좀 길죠?
제가 글의 도입부에서 밝혔던 것과 같이 제대로 된 사후구원론의 근거를 알고 싶어서 질문 한 겁니다.
위의 글에서 소개된 구절(참고로 제 생각은 이하는)은
단순히 요절주의에 빠진 해석만으로는 사후구원론의 근거가 될수 없다는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적은 거구요.
만약에 위의 구절들만을 가지고 사후구원론을 주장하는 거라면
저는 신정통주의의 어느 한 부분은 논리적으로 약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거든요.
물론 신정통주의의 초월적인 신에 대한 이해와 그 피조물로서의 한계에 대한 생각은 신앙적으로 매우 도움이 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편적 구원론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만큼은 논리적 비약이 있는 거 아닌가 해서 그에 대해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나 자료가 있나 여쭙는 겁니다. 지금 현재 제 생각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내용을 원한 것이고 그래서 글이 길어질 수 밖에 없었네요.
아시다시피 위의 제 생각이 단순히 제 생각도 아닌게 위의 내용은 로이드존스나, 벌코프의 조직신학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구요. 단순히 제 이해에 맞게 정리한 것일 뿐이구요.
제가 글의 도입부에서 밝혔던 것과 같이 제대로 된 사후구원론의 근거를 알고 싶어서 질문 한 겁니다.
위의 글에서 소개된 구절(참고로 제 생각은 이하는)은
단순히 요절주의에 빠진 해석만으로는 사후구원론의 근거가 될수 없다는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적은 거구요.
만약에 위의 구절들만을 가지고 사후구원론을 주장하는 거라면
저는 신정통주의의 어느 한 부분은 논리적으로 약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거든요.
물론 신정통주의의 초월적인 신에 대한 이해와 그 피조물로서의 한계에 대한 생각은 신앙적으로 매우 도움이 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편적 구원론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만큼은 논리적 비약이 있는 거 아닌가 해서 그에 대해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나 자료가 있나 여쭙는 겁니다. 지금 현재 제 생각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내용을 원한 것이고 그래서 글이 길어질 수 밖에 없었네요.
아시다시피 위의 제 생각이 단순히 제 생각도 아닌게 위의 내용은 로이드존스나, 벌코프의 조직신학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구요. 단순히 제 이해에 맞게 정리한 것일 뿐이구요.
2013.03.09 23:26:59
블루군 님, 이제 제가 잘 알아듣겠습니다.
로이드존스, 벌코프 등의 책에서 인용하는 것보다는
좀 부족해도 본인 자신의 말로 설명하는 게
글쓰기에서는 최선입니다.
사후구원론에 대해서는 제가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배타적 권위에 속한 문제니까요.
그것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성경구절들은
결정적인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이런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가 천천히 알아갈 뿐이지
아무도 단언적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다 어떤 입장이 있긴 합니다.
저는 만인구원론에 호의적인 입장이에요.
그걸 희망하고 있구요.
타종교나 불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일주일만에 죽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예수 믿지 않고 죽었으니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야할까요?
이건 뭐 극단적인 예니까 이걸로
사후구원론을 보장하는 건 아니에요.
근데 '사후구원론'이라는 말은 누가 한 겁니까?
말 자체가 좀 복음적이지 않아서요.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의 구원을 문제 삼는 말이지요?
만인구원론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겠군요.
창조론, 신론, 기독론의 차원에서 그걸 설명할 수 있지만,
너무 길어지니까 한 말씀만 드리지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보편적인 구원의 능력이랍니다.
단순히 예수 믿는 사람들만 위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지요.
그렇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겠다고 하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복음의 깊이로 들어간 사람이라고 한다면
교회 밖의 사람들까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을 기도하고 희망할 겁니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로이드존스, 벌코프 등의 책에서 인용하는 것보다는
좀 부족해도 본인 자신의 말로 설명하는 게
글쓰기에서는 최선입니다.
사후구원론에 대해서는 제가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배타적 권위에 속한 문제니까요.
그것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성경구절들은
결정적인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이런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가 천천히 알아갈 뿐이지
아무도 단언적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다 어떤 입장이 있긴 합니다.
저는 만인구원론에 호의적인 입장이에요.
그걸 희망하고 있구요.
타종교나 불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일주일만에 죽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예수 믿지 않고 죽었으니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야할까요?
이건 뭐 극단적인 예니까 이걸로
사후구원론을 보장하는 건 아니에요.
근데 '사후구원론'이라는 말은 누가 한 겁니까?
말 자체가 좀 복음적이지 않아서요.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의 구원을 문제 삼는 말이지요?
만인구원론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겠군요.
창조론, 신론, 기독론의 차원에서 그걸 설명할 수 있지만,
너무 길어지니까 한 말씀만 드리지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보편적인 구원의 능력이랍니다.
단순히 예수 믿는 사람들만 위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지요.
그렇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겠다고 하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복음의 깊이로 들어간 사람이라고 한다면
교회 밖의 사람들까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을 기도하고 희망할 겁니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