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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공부, 2015년 10월14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17장 욥의 자조
욥은 16장에서 엘리바스의 비난을 맞받아쳤고, 이어 17장에서 자신이 처한 형편을 자조적으로 진술한다. 이런 진술들이 일목요연하게 진행되는 건 아니다. 욥기가 근본적으로 유대인들의 구전과 문서의 편집과정, 그리고 고대 언어와 문자와 사본의 긴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그런 빈틈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 독자들에게 문서비평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1절- 욥은 1절부터 자기의 신세가 딱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짚는다. 삶의 의지가 완전히 꺾인 상태다. 그는 무덤 앞에 선 심정이다. 우리가 실제로 욥과 똑같은 처지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영적으로는 그런 태도로 살아야 한다. 유영모 선생은 나이가 들어서는 아내와의 성관계도 포기하고, 사시사철 널빤지 위에서 잤다고 한다. 그 널빤지로 자기 관을 만들어달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침대를 관 모양으로 만들어 지내면 죽음과 조금 더 친밀해질까?
2절- 욥의 자조는 직접 당한 불행도 불행이지만 친구들의 조롱으로 인해서 더 깊어졌다. 친구들은 욥이 당한 불행의 이유가 뭐냐를 놓고 말이 많았다. 선천적 시각장애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는 아무에게도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3절- 욥은 자신의 상황을 버텨내기 힘들었다. 자기가 옳다는 사실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하나님에게 자기가 옳다는 ‘담보물’(보증)을 달라고 했다. 그의 영혼이 불안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결단이기도 하다. 하나님에게만 운명을 거는 사람은 고독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7절- 욥은 6절과 7절에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한다. 사람들의 속담거리로 떨어지고, 침 뱉음을 당했으며, 근심으로 눈이 어두워졌다고 한다. 발등의 불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자기가 ‘그림자’ 같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그를 보기 싫어한다는 뜻이다. 그림자 같다는 말은 단순히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우리 삶의 실체를 가리킨다. 1) 모든 사람들은 인격적인 깊이에서 관계를 맺는 일이 드물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외면 받는다는 뜻이다. 2) 우리는 언젠가 때가 되면 결국 무(無)가 된다. 무는 그림자다. 욥의 운명은 바로 우리의 미래다.
13, 16절- 욥은 14:13절에 언급했던 스올을 13절과 16절에서 다시 거론한다. 스올은 죽은 자가 거해야 할 지하의 어두운 세계, 즉 음부(陰府)다. 무덤의 세계이고, 구더기가 지배하는 세계다. 현재의 욥에게는 죽음이 차라리 낫다는 말이다. 고대인들은 인간의 죽음을 현상적으로 보고 스올 개념을 생각했다. 스올이 근본적으로는 부정적인 의미지만 역설적으로 안식의 세계라는 관점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스올에서는 더 이상 친구의 조롱을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6절에서 ‘우리가 흙 속에서 쉰다.’고 말했다.
고난의 대표자 격인 욥은 기독교인들에게서도 기피 인물로 받아들여진다. 욥의 이야기는 바로 나, 그리고 인류 전체의 실존을 가리킨다. 욥이 떨어진 나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삶을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없다. 깊은 곳으로 떨어진 경험을 한 사람만이 절정의 높이를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요즘 저도 죽음은 곧 '무'가 되는 것이라면... 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죽어서 부활생명을 얻어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두려운 일인데,
'무'가 된다고 생각하면 정말 두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얼마전엔 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두려움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나는 '무' 였던 존재인데 이 피조 세상을 살아보는 것은 나에게 잠시 지나가는 큰 선물이지 않겠나.
태어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하고 있으니 말이죠.
목사님이 특강으로 하셨다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강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여튼 제가 이렇게 긴 댓글을 쓴 이유는, 그렇다면 기성교회의 신자들에게 자신있게 죽음은 '무'가 되는 것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가 없는 일인데...
그리고 목사님도 부활생명에 대해 설교를 하시기도 하고요...
어제 추석 가정예배로 로마서 말씀을 가지고 복음에 대해 말씀을 전했는데 '영원한 생명을 얻음'에 대한 내용에서 많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무'가 되는 것과 '부활생명' 이 둘을 어떻게 연관지어야 할까요?
작년 10월에 대구샘터에서 하신 특강 <죽음에 대해서> 입니다.
http://dabia.net/xe/index.php?mid=onclass&document_srl=843837&category=90010
이 특강을 하기전의 매일묵상을 참조하시는 것도 좋을것 같군요.
모두 죽는다(1)~(10)
http://dabia.net/xe/index.php?mid=mark&page=16&document_srl=842163
쌀알님 덕분에 저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현재 중점적으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로 이어지는 중요한 징검다리 였거든요 제게는.
쌀알님의 이런 댓글이 좀 더 일찍 있었다면
목사님이 두바이를 경유하는 비행편을 예약했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아쉽네요.
목사님께나 쌀알님께 의미있는 시간임에 틀림없었을텐데.. 아쉬워라..
여행은 장소와 사람(사람에겐 삶이 포함되어 있다보니)이 결합될때 훨씬 기억에 남던데요 이것도 제 경우엔^^
쌀알 님의 고민과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무'는 단순히 없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봐야지요.
여기 꽃병이 있다고 합시다.
꽃병 이외의 것은 꽃병이 '없는' 겁니다.
없지만 실제로 없는 거는 아니고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도 충분하지는 않겠지요.
'무'는 철학에서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Sein)는
무로서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이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했다면
무까지 통치하는 분이겠지요.
이런 방식의 설명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겠군요.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과의 일치라고 한다면
무까지도 영원한 생명의 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방식의 생명이
결국 끝장난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그런 끝장나는 생명까지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우리가 무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직 무가 뭔지를 다 말한 게 아니니
저의 짧은 설명으로 답을 얻으려고 하지 마세요.
두바이, 이름이 멋지군요.
네 답변 감사합니다.
평생 고민하며 가지고 가야할 질문이겠죠?
그래도 목사님의 댓글을 읽으니 강의 중에 궁금증을 가졌던 무에 대한 개념이 어떤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답이 확실히 정해져 있지 않은 문제를 죽을때까지 안고 살아가야하는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인생이 답답하기도 하네요.ㅎㅎ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경험하셨던 하나님과의 일치를 우리도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신비주의 신앙에 물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말씀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신학공부보다 열광주의적인 체험신앙이 쉽고 빠르게 하나님의 신비에 다가갈 수 있을거 처럼 느껴지니까요.
저도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습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에 들어가려면 어쩌면 "고통"은 필요 조건인 것도 같은데
선택권이 온전히 제게 주어진다면 글쎄요... 고통 버튼을 누르고 싶진 않습니다.ㅎㅎ
그런 것은 있을 리가 없겠지만 극단적 이분법으로 가정해 볼게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1도 생각지 않으나 행복한 삶(그게 가능한지의 여부는 논외)과
하나님과 참된 관계에 들어갔으나 고통스러운 삶,
이 두 가지 카드가 있다면 목사님께서는 어느 카드를 선택하시겠어요?
저는 망설이지 않고 전자를 택해보겠습니다.ㅎㅎㅎㅎㅎㅎ
강의 잘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