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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공부, 2016년 1월6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32,33장: 엘리후의 첫 연설
욥기의 핵심은 욥과 세 친구들 사이의 논쟁이다. 전체 42장 가운데서 이 대목이 4-31장이다. 욥에게 벌어진 재앙 이야기는 1-2장, 욥의 탄식은 3장, 그리고 욥과 세 친구들을 중재하려는 엘리후의 연설이 32-37장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38-41장이며, 마지막 42장은 결론이다. 크게 보면 엘리후의 연설도 욥과 세 친구들 논쟁에 속하지만, 인간 고난에 대한 관점이 한 단계 높아진 것은 분명하다. 전체가 여섯 장에 해당되는 엘리후의 연설은 크게 네 단락인데, 전체적으로 보면 세 친구들의 보상론을 뛰어넘어서 인간 고난을 해석하려는 시도다. 1) 고난은 하나님의 교육적인 조치다(32,33장). 2) 고난은 교육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계속되는 하나님의 시험이다(34장). 3) 그 교육 목적은 하나님에게 속하기 때문에 사람은 참고 기다려야 한다(35장). 4) 하나님에게 굴복하여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36,37장).
32장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이 자신의 의를 맹세하면서 하나님에게 판단을 받겠다고 하자 더 이상 논박하지 못한다. 그 순간에 엘리후가 등장한다. 엘리후라는 이름은 ‘그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여호와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리야와 비슷하다. 엘리후는 욥도 비판하고, 세 친구도 비판한다. 욥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주장했으며, 세 친구들은 욥을 신학적으로 굴복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32:8,9, 엘리후는 일단 자기가 연소하여 이 논쟁에 끼어들지 않았지만 참된 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지 나이 든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짚으면서 젊은 자신이 발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한다. 루아흐는 영, 숨결, 지혜라는 뜻이 있다.
32:18, 엘리후는 오히려 자기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영적 절박감을 내세운다. 그는 영적인 진정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32:21,22절, 사람을 의식하지 않겠다고 한다. 22절은 멋진 표현이다. ‘나를 지으신 이가 나를 데려가시리로다.’
33장 엘리후는 세 친구들과 달리 욥의 이름을 거명하면서(1절) 연설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자기는 하나님의 영, 전능자의 기운(4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자기가 흙으로 지음 받았음도 인정하다(6절).
8-12절, 엘리후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억울하게 대하신다는 욥의 말을 인용한다. 그 인용구는 앞에 널리 펴져 있다. 엘리후는 욥을 윽박지르지 않고 욥의 생각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들어서 설득한다. 욥이 못 본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이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시다.’(12절).
13-22절,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욥이 불평하지만(13절),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람이 관심이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두 가지로 말씀하신다. 하나는 꿈과 환상이며, 다른 하나는 질병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고다(16절).
23-28절,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인 사람의 삶은 다시 회복된다. 엘리후는 인간의 고난을 교육적인 의미로 보았다.
29-33절, 하나님이 사람에게 고난을 내리시는 이유를 29,30절에서 재확인한다.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비추려는 것이다. 엘리후의 연설은 세 친구들보다는 더 합리적이다. 보상하시는 하나님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으로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