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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1년 3월23일, 저녁 8시, 시편 126편
크신 일을 행하셨다
시편 126편은 특히 5절과 6절로 유명하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면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 구절은 여호와 신앙이 가나안 농경문화와 결합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호와 신앙은 원래 유목민의 삶에서 시작되었다. 요즘 인문학 용어로 ‘노마드’인 이 유목민의 삶은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떠남(탈주)을 통해서 생명의 깊이를 경험하는 것이다. 생명의 깊이는 곧 여호와 경험이다. 이런 탈주의 영성은 불안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다. 매너리즘의 극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고대 이스라엘의 유목적인 삶이 여호와 신앙을 형성했는데, 여기서 핵심은 여호와의 행위를 놀라운 것으로, 새로운 것으로 경험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가나안의 농경문화는 안정감을 제공한다. 가나안의 신이었던 바알은 풍년, 다산을 약속한다. 고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부분적으로 가나안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눈물을 흘리며, 또는 울면서 씨를 뿌린다는 것은 씨 뿌리는 일이 힘들다는 뜻이 아니다. 고대 여러 지역에서는 씨를 뿌릴 때 우는 의식을 행했다. 오시리스(Osiris) 신을 장례지내는 상징으로 장송곡을 불렀다고 한다. 씨가 죽는 것을 슬퍼한 것이다. 지금도 시베리아나 브라질 열대림에서 사냥으로 먹고 사는 이들은 짐승을 잡아 죽일 때 일정한 의식을 행한다고 한다.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희생당하는 짐승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번제나 여러 종류의 희생제사도 이런 의식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씨의 죽음에도 연민을 느낀 고대인들의 영성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닌지.
고대 이스라엘이 가나안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본질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차이는 가나안 종교가 자연숭배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종교는 자연을 창조하고 통치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생명의 토대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눈물로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거둔다는 가나안의 자연숭배가 여호와 하나님 신앙으로 승화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신앙의 핵심은 그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다. 그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행하는 일들이 크기 때문이다. 크다는 것은 새롭고 놀랍다는 뜻이다. 여호와의 일은 ‘꿈꾸는 것’과 같다고 한다.(1절) 포로 신세에서 벗어난 것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런 일을 본 그들의 ‘입에는 웃음’ 가득하고 ‘혀에는 찬양’이 찼다.(2절) 웃음과 찬양은 곡식을 거둘 때의 기쁨과 동일한 것이다. 실제로 웃을만한 일들이 늘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시편기자는 궁극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얼마나 강한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낭만적인 희망이 아니다. 무엇이 사람을 실제로 살리는 일인지를 하나님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말이다. 그것이 그의 큰 일이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기뻐한다.(3절)
시편기자의 희망은 포로들이 ‘남방의 시내들’ 같이 자유를 얻는 데까지 이른다. 남방은 사막이고 광야다. 그곳의 시내는 생명의 젖줄과 같다. 이런 일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가당치 않다. 오직 여호와께만 가능한 것이다. 전적인 신뢰로부터만 이런 간구가 가능하다.
고대 이스라엘의 이런 신뢰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 이뤄진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들은 참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헤치는 경우도 많다. 주기도에 나오듯이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는 것이 참된 신뢰이다. 마치 어머니 가슴에 안긴 아이가 자신을 어머니에게 완전히 맡기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