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사도신경 강해 12강이 되겠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좀 우중충합니다. 낮에는 그런대로 가을 햇살이 빛났는데 지금 이 녹화를 하는 시간, 먼저 날짜를 말씀드리면요 11월 오늘 6일입니다. 저녁 5시 10분전입니다. 아직 해가 질 때는 안되었잖아요. 바깥을 내다보니 상당히 잔뜩 흐려 있습니다. 해가 기울 때가 가까이 오긴 했는데 조금 음산하다고 할까요. 가을의 정취를 충분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저녁즈음인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뒷부분에서 본 이 책의 내용은 철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어떤 근원적인 문제들, 그거하고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해명들 그런 것들이 그렇게 관계없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철학의 역사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상당히 오래되었잖아요. 그냥 큰 대표적인 것만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이렇습니다. 탈레스는 만물의 본질이 물이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잖아요. 모든 근원을 하나로 잡는 거란 말입니다. 다른 철학도 사실은 그렇게 나가는 거거든요. 플라톤도 이데아라고 이야기를 했고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을 이야기하는데 결국 형상이 핵심적인 거죠. 노자와 장자 이런 사람들은 도라고 이야기했겠고요. 어쨌든 근원적으로 하나로 돌아가 하나를 이야기거거든요. 그러한 철학적 성찰들은 신화적인 세계상을 넘어서는 그러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라신화의 여러신들의 작용들과 투쟁하는 과정이 헬라철학자들의 학문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한 철학자들의 노력이 결국 우리가 하나님, 한 분 하나님 창조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연결해서 그들이 우리들의 학문적인 신앙적인 동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그렇게 우리하고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현대 들어와서 철학적 흐름이 이상한 방향으로 나오게 된 거예요. 그 이전에는 기독교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간접적으로라도 기독교 하나님 설명에 도움이 되었다고 보는데요. 그러한 흐름이 서양철학에서는 계속되어 왔는데 현대철학에 와서 조금 반대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무신론적 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일종의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위기이구요. 도전이기도 합니다. 그런 것은 어떻게 보면 기독교 신학의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세계에 대한 해명을 철학이라고 합니다 다면 철학적 논의앞에서 신학이 과감하게 같이 노력을 지속했다고 한다면 철학이 신학을 나 몰라라 조금전에 이야기한데로 무신론적인 관점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을텐데요. 기독교신학이 현대로 넘어오면서 그 뭐 현대를 언제로 잡는가에 대해서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배경의 흐름들은 많이 있는데 기독교 신학이 결국은 세계의 논의, 철학적 논의에서 물러서게 된거예요. 그게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쉴라이에르마허의 감정이라든지, 기독교 신앙의 근거, 세계에 대한 해석과는 상관없이 인간의 존재적 절대의존적인 감정이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거라든지 이 책에도 이야기했듯이 변증법적 신학, 기독교 신앙은 철학이 비판하고 있는 종교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그렇게 슬쩍 질문을 피해가는 그러한 방식으로 대응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철학은 신학과 세계의 중요한 문제들을 중간에 놓고 대화하지 않는거죠.

조금더 센세이셔날한 예를 들자면 지동설과 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동설은 오래전 이야기니까 접어둔다고 하구요. 진화론 생물한적연구에 대해서 기독교가 바르게 대응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알레르기반응을 보여서 결국은 생물학적 학자들에게 신학이라고 하는 상당히 무지몽매한 교권적인 것같이 세계의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는 곤란한 그런 집단으로 좀.. 치부된 거죠. 하여튼 그러한 흐름속에서 결국은 신학이, 무신론적 그러한 비판을 끊임없이 현대철학에 들어와서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뭐 이러한 도전앞에서 한국 교회는 아예 그 사태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어요. 아예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그래서 우리는 12강시작하는데 있어서 무신론적 논의가 대두된 철학사적 흐름들을 이제 이야기하게 되겠습니다. 요 부분은 난삽하기도 해요. 판넨베르그의 글은 난삽한건 없는데 요점은 정확하게 짚고 있는 우리가 따라가기가 만만치 않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 동영상 시청하시는 분들이 판넨베르그의 책 내용을 어렵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댓글을 좀 읽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텐데 일단 판넨베르그의 접근 방식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신앙의 틀들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하는 겁니다. 해석학적 이야기인거죠. 해석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교리적이지 않다 독단적이지 않다. 기독교의 모든 진술내용들을 보편적 진리의 토대에 과감하게 내어놓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앞에서 제가 잠시 지적한대로 현대신학에서 철학과 세계학문의 도전앞에서 떳떳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것을 넘어서려고 하는거죠. 세계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당당하게 대면하지 못했던 그러한 과오를 인정하고 그러한 차원으로 뛰어 들어가겠다고 하는겁니다. 철학적인 논의를 회피하지 하지 않는거죠. 논리학, 과학, 철학 이런 것들하고  기독교 신앙을 정면도전, 도전이라기 보다도 같이 논의의 장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거죠.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지 않느냐 철학이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데 왜 신앙을 어려운 방식으로 이 세상 학문과 대면시키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지난 2천년동안 2천년이 아니죠. 현대신학에 들어와서 그런 경향을 많이 보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라고하는 19세기 초부터 교리적으로 보면 조금더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만 핵심적으로 보면 쉴라이에르마허 고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이전에는 사실 변증신학이었거든요. 기독교 교부신학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세계의 모든 현실들에 근거해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과정, 역사의 하나가 삼위일체 논쟁 다 거기에 포함되는거예요. 판넨베르그의 시도가 생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