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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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는 하르낙을 필두로한 자유주의의 거장들에게서 신학을 배웠지만, 오히려 그 거장들이 그의 신학으로 하여금 완전히 자유주의에서 유턴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네요... 성서에서 모든 군더더기들을 다 벗겨내고,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설명해내고나서, 학문적 결과물로서 추출해낸 "기독교 윤리"(자유주의자들에게는 '신' 의 대체어가 되겠습니다.) 를 바탕으로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졌던 자유주의자들이 독일 제국이 일으킨 세계 제 1차 대전에 대해 지지 선언을 하는 아이러니를 목격한 바르트는 깊은 환멸과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유주의 신학 자체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됩니다...
바르트는 사회주의자였어요... 교회에서도 붉은 목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고, 당회와도 마찰이 심했으며, 직접 노조 운동에 관여하기도 했구요... 반공이 국시인 우리 나라의 기독교 주류세력들에게는 바르트가 불온하게 느껴질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바르트는 운동을 위해서 기독교를 끌어다 쓴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군요... 그의 신앙과 신학이 그의 사회적 정치적 참여를 가능하게 한 거였지요...
그는 로마서 강해를 1판을 냈지만, 별로 호응을 얻지 못했고, 2판을 다시 만든 후에는 일약 신학적 스타가 되었습니다... 바르트의 말인 즉슨, 1판과 2판은 완전이 다른 내용으로 보일만큼 달라졌다고 하는데, 1판에는 아직까지도 자유주의 신학의 때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르트 초창기 저작에는 "변증법적" 이라는 용어가 수시로 등장하지만, 그의 후기 저작으로 갈수록 그 용어의 사용이 극히 줄어들었고, 그럼에도 그의 신학은 "변증법적 신학" 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닙니다. )
그 이후에 그 당시 신학의 거장이었던 하르낙과 바르트의 희대의 대결이 벌어지는데, 말하자면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라고 할 정도로 초특급과 신출내기의 대결이었다고 합니다. 바르트는 이성을 넘어서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옴으로써 말씀이 인식되어 진다고 주장했고, 하르낙은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규명이 되어야하고, 기독교와 성서는 학문적인 엄정성에 의한 필터링을 통해 군더더기를 없앤 다음에 "윤리" 라는 형태로 인간에게 책임지워져야 하고 교육되어져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바르트를 "시대를 역주행하여 학문적 엄정성을 영지주의와 주술과 바꾸어버린 신학자" 로 악평을 했다고 합니다...
나치 독일 시대에 교회는 제국 교회라는 이름으로 예수를 혁명적 행동가로서 묘사하며, 신학적으로 히틀러의 통치 명분을 마련해주는데 주력했는데요... 또한 한편으로는 루터의 신학적 반유대주의를 통해서 나치의 정치적 반유대주의의 근거를 마련해주기도 합니다. 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뜻은 히틀러 안에서 이루어진다" 라는 교묘한 표현으로 예수와 히틀러를 오버랩 시키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개혁교회의 바르트를 비롯한 몇 명의 신학자들이 "바르멘 선언" 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모든 권위와 권력은 하나님께 속해 있고, 또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다른 어떤 그 무엇이 앉게 된다면 그 것은 우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 일 이후로 바르트는 독일에서 추방당합니다...
바르트의 신학적 특징으로 한 번 들어가보겠습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인간과는 질적으로 전혀 유사성이 없는 "절대적 타자"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입장에서 시도하는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유비도 "우상" 이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오심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을 보게되면 죽는다"는 성경적 경구에서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실 때, 인간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그 위기 속에서 인간은 자신(거짓된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을 깊이 느끼게 되는데, 그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 긍정이 오게 된다고 합니다...
자연신학 논쟁으로 이름지어진 브루너와 바르트의 그 유명한 논쟁에 대해서 말해보면...
브루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형식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나누었는데, 인간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형상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지만 형식적 형상은 남아 있어서 그 형식적 형상이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된다고 이야기 했고, 그런 의미에서 특별 계시와는 다르지만 불완전하나마 일반 계시를 인정했던 것이구요... 바르트는 물질적 형상, 형식적 형상 그 어느 것도 인간에게는 남아있지 않아서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하나도 없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를 주장했어요...
또한 논쟁의 더 본질적인 문제는 율법과 은혜의 문제입니다. 브루너를 비롯한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대부분 율법 이후의 은혜를 이야기 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죄성을 스스로 자각하고 난 연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인식이었죠... (이건 앞에서의 "접촉점" 논쟁과도 통하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율법을 통해서 인간 스스로가 죄에 대해서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접촉점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은혜가 율법을 앞서는 절대적 우선성을 이야기 합니다... 인간이 죄인임을 느끼게 되는 것도 율법 때문이 아니라 은혜 때문이라는 거죠... (이건 제가 볼 때에도 성서적 근거가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한 모습으로 이사야에게 나타났을 때, 이사야는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스스로 고백했고, 예수 그리스도가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났을 때, 그 존재의 빛은 시몬 베드로를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멀리하소서" 라고 이야기 하게 만들었으며,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다가간 모습 또한 어떤 윤리적 조건이나 율법적 부담감을 안겨주는 패턴이 아닌 무조건적인 만남이었다는 것...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선 밖의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면서 끊임없이 죄의식을 불러일으킬 때, 예수는 그냥 그 사람들과 그냥 어울릴 뿐이었죠...)
이런 식으로 바르트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역설합니다... 전적 은혜...
또한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일회적인 우주적 사건으로 "십자가의 현재" 에서 미래로만이 아닌 과거로까지 뻗어나가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영원한 은혜" 라고 이야기 합니다. 또한 이 은혜는 모든 우주 만물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절대적인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바르트의 구원론이 만유구원론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바르트는 정작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르트는 항상 하나님을 주체(주어)로 이야기 했고, 인간은 그 주체인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어서,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대상으로 허락하실 때에만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대상"으로 허락하는 것은 오로지 "신앙" 속에서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신앙 속에서 하나님이 대상이 되어 우리에게 자신을 허락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 "진정한 주체" 가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말이 있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유인이 되며,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가장 주체적인 인간이 된다는 그 역설...)
바르트가 말하는 "신앙"은 신비인 것 같습니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억지춘향표 믿쓉니다" 랑은 차원이 다른... 저는 이 신앙이란 것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의 공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르트의 인간형 구분이 참 재밌어요... 한 번 들어보세요...
동물과 별반 차이가 없는 자연주의적 인간형
인간의 이성과 지식이 만든 죽은 신(윤리)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자연주의적 인간과 별반 차이가 없는 관념론적 인간형
인간의 비참한 현실(소외)에 대한 정확한 진단은 있지만 결국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는 실존주의적 인간형
초월적 존재는 인정하나 초월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인정하지 않는, 잠재성이 현실성으로 드러나지는 않는 유신론적 인간형 (현실 기독교와 신앙이 죄다 이런 식일 겁니다.)
마지막으로 "신학적 인간형"... 참 인간 참 하나님 예수가 여실히 보여주었듯이 말씀 속에 있는 인간, 말씀의 빛에서 본 인간을 참 인간형으로 제시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파트너쉽을 부여받게 되고 역사 속에서 책임있는 존재가 됩니다...
또한 바르트는 "말씀" 이 '표면적인 의미의 성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했고, 성서 자체를 절대화 하는 것 조차도 우상숭배라고 간주할 정도로 말씀의 이해에 있어서 철저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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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지 좀 되어서 기억을 더듬어 쓰다 보니 어떻게 제대로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부모임 갔다 와서 다시 앞뒤 문장도 교정하고 더 생각나는대로 내용도 추가했습니다... 아직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겠지만, 바르트의 신학에서 연장선을 그으면 "기독교의 존재 신비적 영성가 전통" 으로 맥이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한 바르트를 알고 보니 우리 나라 주류 신학인 "근본주의" 조차도 예전 자유주의 신학처럼 생명을 상실한 문화와 윤리, 규범으로 전락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또한 바르트의 신학은 조금은 총론적인 성격이 강해서 본훼퍼 신학의 강점인 실존적인 부분은 좀 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평가도 있다고 하네요...
첫 경험이라.
직접 경험이 아니구먼요.
세컨더리 소스를 통해서 전해들은 정보구만요. ㅎㅎ
바르트를 경험하려면 일단 그의 글을 직접 읽어야 한답니다.
그의 책은 제법 많이 번역되어 있으니까
한번 시도해 보세요.
무지하게 재미 있을 거요.
근데 첫날처럼 님은 발췌, 요약의 대가요.
그 복잡한 바르트의 신학을 세컨더리만 읽고
저렇게 깔끔하게 추려낸단 말이오.
지금이라도 5년만 열심히 공부하면 신학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소. ㅎㅎ
브룬너와의 논쟁에서 불거진 질료와 형상에 관한 내용은 좀 정확하지 않은 것 같소.
하나님의 질료라니, 좀 웃기는 표현이라서요.
일단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시겠소? 음흠.
첫 경험을 간접 경험으로 바꿔야겠어요,,, ㅋㅋㅋ... 워낙에 책을 잘 쓰셔서 너무 거저 먹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제가 무슨 뜻으로 "하나님의 질료와 형상" 이라고 썼는지 저도 잘 이해가 안되네요... 그냥 기억나는대로 막 쓰다보니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도 모르고 쓴 거 같아요... ㅎㅎㅎㅎ... 지적 감사합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이 완전하다고 가정을 한다면 하나님이 낳은 아들로서의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적 내용으로서의 질료와 그 질료를 담는 형식으로서의 형상이 완비되어 있어야 하겠지만...
실제적으로는 불완전한 인간에게 있어서 그 내용 뿐 아니라 그 형식까지도 다 사라지고 없다고 보는 것이 바르트의 입장이고 브루너의 입장에서는 그 형식, 프레임은 남아 있어서 그 것이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된다고 본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 "형상", "형식" 을 좀 비약을 하면, 율법, 종교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바르트는 율법과 종교의 가능성을 모두 거부한 거구요...
후후, 바르트와 브룬너 사이에서 일어난
자연신학 논쟁을 형상과 질료의 관점에서 풀어내기에는
내가 역부족이에요.
그냥 상식적으로만 말하면 이렇답니다.
‘하나님의 질료’라는 말은 잘못된 거고,
‘하나님의 질료적 형상’이라고 해야 옳아요.
이 논쟁에서 핵심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이것은 아래 콰미 군이 짚은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matter, form) 개념과 닿아 있어요.
‘형상’이라는 단어를 구분해야 사용해야돼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의 형상은 Image이구요,
질료와 형상이라고 할 때의 형상은 form이에요.
브룬너와 바르트가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으나 모두 파괴되었으냐 하는 문제로 다툴 때
이 문제가 개입되는 거에요.
브룬너에 따르면 ‘질료적 형상’은 파괴되었으나
'형상적 형상’은 남아 있다는 거에요.
‘형상적 형상’에서 앞의 형상은 form(形象)이고
뒤의 형상은 Image(形相)에요.
(한자를 맞게 썼나요?)
이런 논리를 따라가려면 form과 Image를 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데,
나도 잘 모르니, 그리고 여전히 열린 질문이니 여기서는 더 이상 나가기 힘들겠어요.
form이 단순히 내용을 담는 형식은 아니라 더 본질적인 거라오.
그것은 오히려 플라톤이 말하는 Idea나 eidos에 가까운 개념이에요.
우리 식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운 개념이구요.
matter를 가능태, form을 현실태라고 부르는 이유도
form(idea)이 있어야만 이 세계가 현실이 되기 때문이랍니다.
브룬너가 인간에게 파괴되었다고 본 ‘하나님의 질료적 형상’과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본 “하나님의 형상적 형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더 생각해봐야겠소이다.
혹시 그 책을 읽고 보충할 게 있으면 하시구료.
안그래도 오늘 시간이 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hylomorphism) 에 대해서 공부해보려고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헬라어의 "에이코노스" 와 ":모르포스" 의 차이가 확 느껴지네요.
어제 밤이 너무 늦어서 보다가 말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은 과학의 원소와 물체와의 관계와는 다른, 철학적인 개념이라고 하는군요... 하기야 고대 그리스는 아직 과학과 철학이 분리된 시기가 아니니까요... 고대 천동설의 삼층천 개념만해도 이게 과학인지 철학인지 구별이 안되는 것처럼요...
그리고 질료형상론으로 기독교를 해석한 대표적인 부분이 성만찬에서 빵, 포도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는군요...
아직 잘 몰라서 좀 있다가 한 번 올려볼께요...
우선 form은 形象이 맞는 것 같아요 목사님
그런데 여기서 파생되는 형상(image)은 形 像 (人+象)
여기의 image는 질료적 형상(본질)으로 보고 만지는등.. 인간의 감각적 기관이 인지 했던
形象 에 대한 기억과 상상 이되는 거구요
form (形象)이 인간의 감각적 경로가 아닌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인지(image)라면
形 想 그러니까 상상(像 想) 할때의 이想을 써야 맞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글을 읽고 생겨난 image의 경우 형想과 형像으로 나눠지는데
이부분에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할 것 같네요
토의해보면 잼있을 것 같아요....^^
(제가 이해한 질료는 재료이고 형상은 그 재료로 만든 실체 그러니까 완성품 정도...)
목사님께서 웃긴다고까지 말씀하셨던 이유는 하나님의 질료 ( 하나님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라는
어구의 미스매치 때문이겠지요? 저는 부룬너와 바르트 논쟁에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질료는 파괴되고 형상은 남아있다는 부룬너의 주장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듭니다.
부룬너의 진술이 모순처럼 들린다는 이야깁니다..질료가 파괴되었는데 어떻게 형상이 남아 있을 수 있지요?
남아 있더라도 그건 껍데기에 불과한게 아닐까요?
질료가 파괴되기 이전과 파괴된 이후의 형상은 어떤 연속성이 있을 수 있지요?
-연속성 자체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겠지만-
(부룬너는 인식의 가능성을 완파되지 않은 형상으로 규명했지만 어차피 궁극적 소통은 불가능해진 마당에
그의 주장은 좀 궁색해보이는 것 같아서요 )
첫날처럼님의 글을 읽고 보니 바르트가 쪼매 멋져보이네요 ㅋㅋ
그런데 바르트의 이런 변화는 시대적 상황의 영향이 큰 것 같네요
신학적인간의 인간분류 유형은 좀 독일적 사고의 발상 같다 느껴지기도 하구요
성경의 어디를 봐도 모세나 예수님이 신학적 인간이였다는 점은 찾아보기가 힘들거든요...^^
결론은 좀 허무했지만 당신의 바르트의 통회되는 심정은 절절히 느껴지네요
늘 유익한 글들을 올려주셔서 넘넘 감사드립니다
쟌느 귀용 아줌마 넘 멋진 것 같아요.....
ps. 이신건 교수님'들'이 번역하시는 바르트 신학묵상이 거반 다 되어 간다고 하시던데, 재미있을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