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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 첫 경험(?)...

Views 2218 Votes 0 2009.04.22 17: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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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곳 저곳에서 귀동냥으로만 듣고 알고 있던 바르트를 "현대 신학의 흐름" 이라는 명저를 통해서 처음으로 접해보았습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바르트가 어떠니 저떠니 했던 것이 많이 부끄럽더군요...

바르트는 하르낙을 필두로한 자유주의의 거장들에게서 신학을 배웠지만,  오히려 그 거장들이 그의 신학으로 하여금  완전히 자유주의에서 유턴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네요... 성서에서 모든 군더더기들을 다 벗겨내고,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설명해내고나서, 학문적 결과물로서 추출해낸 "기독교 윤리"(자유주의자들에게는 '신' 의 대체어가 되겠습니다.) 를 바탕으로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졌던 자유주의자들이 독일 제국이 일으킨 세계 제 1차 대전에 대해 지지 선언을 하는 아이러니를 목격한 바르트는 깊은 환멸과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유주의 신학 자체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됩니다...

바르트는 사회주의자였어요... 교회에서도 붉은 목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고, 당회와도 마찰이 심했으며, 직접 노조 운동에 관여하기도 했구요... 반공이 국시인 우리 나라의 기독교 주류세력들에게는  바르트가 불온하게 느껴질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바르트는 운동을 위해서 기독교를 끌어다 쓴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군요... 그의 신앙과 신학이 그의 사회적 정치적 참여를 가능하게 한 거였지요...

그는 로마서 강해를 1판을 냈지만, 별로 호응을 얻지 못했고, 2판을 다시 만든 후에는 일약 신학적 스타가 되었습니다... 바르트의 말인 즉슨, 1판과 2판은 완전이 다른 내용으로 보일만큼 달라졌다고 하는데, 1판에는 아직까지도 자유주의 신학의 때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르트 초창기 저작에는 "변증법적" 이라는 용어가 수시로 등장하지만, 그의 후기 저작으로 갈수록 그 용어의 사용이 극히 줄어들었고, 그럼에도 그의 신학은 "변증법적 신학" 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닙니다. )

그 이후에 그 당시 신학의 거장이었던 하르낙과 바르트의 희대의 대결이 벌어지는데, 말하자면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라고 할 정도로 초특급과 신출내기의 대결이었다고 합니다. 바르트는 이성을 넘어서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옴으로써 말씀이 인식되어 진다고 주장했고, 하르낙은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규명이 되어야하고, 기독교와 성서는 학문적인 엄정성에 의한 필터링을 통해 군더더기를 없앤 다음에 "윤리" 라는 형태로 인간에게 책임지워져야 하고 교육되어져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바르트를 "시대를 역주행하여 학문적 엄정성을 영지주의와 주술과 바꾸어버린 신학자" 로 악평을 했다고 합니다... 

나치 독일 시대에 교회는 제국 교회라는 이름으로 예수를 혁명적 행동가로서 묘사하며, 신학적으로 히틀러의 통치 명분을 마련해주는데 주력했는데요... 또한 한편으로는 루터의 신학적 반유대주의를 통해서 나치의 정치적 반유대주의의 근거를 마련해주기도 합니다.  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뜻은 히틀러 안에서 이루어진다" 라는 교묘한 표현으로 예수와 히틀러를 오버랩 시키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개혁교회의 바르트를 비롯한 몇 명의 신학자들이 "바르멘 선언" 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모든 권위와 권력은 하나님께 속해 있고, 또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다른 어떤 그 무엇이 앉게 된다면 그 것은 우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 일 이후로 바르트는 독일에서 추방당합니다...

바르트의 신학적 특징으로 한 번 들어가보겠습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인간과는 질적으로 전혀 유사성이 없는 "절대적 타자"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입장에서 시도하는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유비도 "우상" 이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오심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을 보게되면 죽는다"는 성경적 경구에서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실 때, 인간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그 위기 속에서 인간은 자신(거짓된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을 깊이 느끼게 되는데, 그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 긍정이 오게 된다고 합니다...
 
자연신학 논쟁으로 이름지어진 브루너와 바르트의 그 유명한 논쟁에 대해서 말해보면...

브루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형식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나누었는데, 인간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형상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지만 형식적 형상은 남아 있어서 그 형식적 형상이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된다고 이야기 했고, 그런 의미에서 특별 계시와는 다르지만 불완전하나마 일반 계시를  인정했던 것이구요... 바르트는 물질적 형상, 형식적 형상 그 어느 것도 인간에게는 남아있지 않아서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하나도 없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를 주장했어요...  

또한 논쟁의 더 본질적인 문제는 율법과 은혜의 문제입니다. 브루너를 비롯한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대부분 율법 이후의 은혜를 이야기  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죄성을 스스로 자각하고 난 연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인식이었죠... (이건 앞에서의 "접촉점" 논쟁과도 통하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율법을 통해서 인간 스스로가 죄에 대해서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접촉점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은혜가 율법을 앞서는 절대적 우선성을 이야기 합니다... 인간이 죄인임을 느끼게 되는 것도 율법 때문이 아니라 은혜 때문이라는 거죠... (이건 제가 볼 때에도 성서적 근거가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한 모습으로 이사야에게 나타났을 때,  이사야는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스스로 고백했고, 예수 그리스도가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났을 때, 그 존재의 빛은 시몬 베드로를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멀리하소서" 라고 이야기  하게 만들었으며,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다가간 모습 또한 어떤 윤리적 조건이나 율법적 부담감을 안겨주는 패턴이 아닌 무조건적인 만남이었다는 것...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선 밖의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면서 끊임없이 죄의식을 불러일으킬 때, 예수는 그냥 그 사람들과 그냥 어울릴 뿐이었죠...)
 
이런 식으로 바르트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역설합니다... 전적 은혜...

또한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일회적인 우주적 사건으로 "십자가의 현재" 에서 미래로만이 아닌 과거로까지 뻗어나가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영원한 은혜" 라고 이야기 합니다. 또한 이 은혜는 모든 우주 만물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절대적인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바르트의 구원론이 만유구원론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바르트는 정작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르트는 항상 하나님을 주체(주어)로 이야기 했고, 인간은 그 주체인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어서,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대상으로 허락하실 때에만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대상"으로 허락하는 것은 오로지 "신앙" 속에서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신앙 속에서 하나님이 대상이 되어 우리에게 자신을 허락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 "진정한 주체" 가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말이 있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유인이 되며,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가장 주체적인 인간이 된다는 그 역설...)

바르트가 말하는 "신앙"은 신비인 것 같습니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억지춘향표 믿쓉니다" 랑은 차원이 다른... 저는 이 신앙이란 것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의 공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르트의 인간형 구분이 참 재밌어요... 한 번 들어보세요...

동물과 별반 차이가 없는 자연주의적 인간형

인간의 이성과 지식이 만든 죽은 신(윤리)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자연주의적 인간과 별반 차이가 없는 관념론적 인간형

인간의 비참한 현실(소외)에 대한 정확한 진단은 있지만 결국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는 실존주의적 인간형

초월적 존재는 인정하나 초월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인정하지 않는, 잠재성이 현실성으로 드러나지는 않는 유신론적 인간형 (현실 기독교와 신앙이 죄다 이런 식일 겁니다.)

마지막으로 "신학적 인간형"... 참 인간 참 하나님 예수가  여실히 보여주었듯이 말씀 속에 있는 인간, 말씀의 빛에서 본 인간을 참 인간형으로 제시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파트너쉽을 부여받게 되고 역사 속에서 책임있는 존재가 됩니다...       

또한 바르트는 "말씀" 이 '표면적인 의미의 성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했고, 성서 자체를 절대화 하는 것 조차도 우상숭배라고 간주할 정도로 말씀의 이해에 있어서 철저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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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지 좀 되어서 기억을 더듬어 쓰다 보니 어떻게 제대로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부모임 갔다 와서 다시 앞뒤 문장도 교정하고 더 생각나는대로 내용도 추가했습니다... 아직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겠지만, 바르트의 신학에서 연장선을 그으면 "기독교의 존재 신비적 영성가 전통" 으로 맥이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한 바르트를 알고 보니 우리 나라 주류 신학인 "근본주의" 조차도 예전 자유주의 신학처럼 생명을 상실한 문화와 윤리, 규범으로 전락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또한 바르트의 신학은 조금은 총론적인 성격이 강해서 본훼퍼 신학의 강점인 실존적인 부분은 좀 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평가도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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