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주석이 없는 설교

Views 4189 Votes 1 2008.10.04 22:52:29
성서 주석이 없는 설교

다음 주 말까지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하는 글을 마쳐야하기 때문에 지난 주간에 시간이 나는 대로 그분의 설교와 저서를 읽어보았다. 특히 오늘 예배 후 저녁 시간에 댓 시간 동안 그분이 최근에 행한 설교 내용을 인터넷으로 뽑아서 읽어보았다. 다른 부분은 나중에 설교비평에서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우선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게 그분의 설교에 도대체 성서 주석이 없었다는 거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면서 그것을 왜 주석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말하는 성서주석은 단지 문자의 차원에서 ‘성서주석'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클레이 성서주석이나 국제성서주석 같은 책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그런 주석의 정보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물론 이런 작업은 모든 설교자들이 기본적으로 거치는 부분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일단 성서 텍스트의 객관적인 사실과 의미를 파악하는 그런 주석은 아무도 건너 뛸 수 없는 기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설교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처하는 설교자들은 이런 기초 작업에도 매우 불성실하다. 그들은 단순히 청중을 종교적으로 요리할 수 있는 요령에만 치중하는 설교를 한다. 그리고 그런 요령이 어느 정도 단계에 도달되는 그 순간부터 주석 책도 손에서 떠난다.
내가 말하는 주석은 이런 기초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런 기초에 근거해서 자기 나름으로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는 단계를 뜻한다. 이런 건 단지 성서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꿰뚫고 있는 것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 성서 텍스트의 지평과 만나는 해석학적 경험이 더 중요하다. 그 텍스트의 지평을 만나면 그는 자기의 영적인 깊이만큼 다양하게 그 텍스트를 풀어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별 희안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생명의 신비가 늘 우리에게 다채로운 것처럼 그 생명이 담긴 텍스트가 새롭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해석자가 자기 주관에 치우칠 경우에 성서 텍스트는 극단적인 알레고리에 빠질 수도 있고, 또는 견강부회에 빠질 수도 있다. 어떻게 설교자가 텍스트의 심층으로 들어가면서도 주관성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게 여기서 관건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다른 길은 없다. 신학 훈련이 가장 바람직한 길이다. 인문학적 소양에 토대를 둔 신학훈련이 우리로 하여금 성서 텍스트의 지평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바른 길이다.
나는 오늘 좀 당혹스럽다. 전혀 성서 텍스트를 주석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분의 설교에 수만, 수십만 명이 따라가고 있다는 이 사실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청중을 흥분시킬 수 있는 카리스마가 확보된 것 같다. 그렇게 흥분한 청중은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든지 은혜로운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게 잘못이라는 사실을 그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일종의 확신범인 셈이다. 좋게 본다면 순수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이 옳은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름으로 청중에게 먹히는 방식을 터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태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조금 어려운 문제이다. 궁극적인 진리를 누가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 같다. 그의 설교가 청중들의 영을 살리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만 판단해야한다. 그렇다면 결국 영이 무엇인지, 성령의 활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작업들이 모두 신학적인 문제이다. 성령, 생명, 종말, 창조, 성서 등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설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흥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차분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에크하르트, 토마스 아 켐피스 같은 신비주의자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영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사람들은 세계 선교를 해야 한다거나,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거나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모두 뒤로 물러나고 영의 활동에 민감하게 반응할 뿐이다. 꿈을 가져라, 야망을 가져라, 축복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부추기는 설교는 내가 보기에 모두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선동에 가깝다. 그것이 아무리 성경구절로 치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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