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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텍스트의 세계
한 장의 꽃잎도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과 전자 현미경으로 보는 것에 따라서 전혀 다르듯이 성서 텍스트도 어떤 눈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기독교 근본주의 모습이, 어떤 사람의 눈에는 가부장적 질서가, 또 어떤 사람의 눈에는 종교적 열정이 보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전쟁하는 신의 모습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의 신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소외된 이들을 돕는 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성서는 이런 차이만이 아니라 훨씬 근본적인 차원에서도 읽는 이들에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을 나는 성서의 세계 안에 들어갔는가, 아닌가로 나누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성서의 세계’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걸까?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 조차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어떤 사실을 정보의 차원에서 따라갈 뿐이지 그 정보 너머에, 또는 그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세계를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큐티’를 하는 분들은 성서 텍스트에서 자기 삶의 방향을 찾는다고 여기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런 자세가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이 차이를 내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시 바둑 이야기를 해야겠다. 프로 기사들이 둔 바둑의 기보를 보라. 겉으로 볼 때 거기에는 단순하게 흑백의 숫자만 나열되어 있지만 그 내면에는 무한에 가까운 돌의 세계를 감추어있다. 실제로 기사들이 미미 예측한 수 백 가지의 수만이 아니라 그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수도 여전히 숨어 있다. 그 바둑을 둔 기사의 내공보다 더 깊은 내공의 있는 사람이 그 기보를 해석한다면 그 숨어 있던 수들이 나타날 수 있다.
성서도 역시 영적인 고수들이 놓은 바둑과 같다. 성서 텍스트 안에는 성서 기자들의 놀라운 영적 체험이 경우에 따라서 명시적으로, 그러나 대부분은 은폐의 방식으로 담겨 있다. 여기에 바로 성서의 세계에 들어가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성서의 영적인 세계는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그 숨어 있는 영적인 세계라는 건 땅에 숨겨진 보물과 같은 게 아니다. 그 보물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성서의 세계는 변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보물은 보물이지만 고정된 게 아니라 변한다. 진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라는 뜻이다.
내 말이 공허하게 들리시는 분이 있다면 조금 더 진지하게 성서를 들여다보시라. 대개 사람들은 성서를 일단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읽는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에 흡족한 구절이 나오면 은혜 받았다고 생각한다. 은혜 받았다는 사람을 향해서 그게 은혜인지 아닌지 좀 성찰해보라고 내가 아무리 말해도 별 소용이 없겠지만, 철저하게 개인의 주관적 만족감을 은혜로 여긴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은혜는 자기만족이나 자기 확신이 아니라 생명의 충만감이다.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는 건 아니다. 매일 즐겁게 논다고 해서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교회가 부흥한다고 해서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는가? 그런 것만으로는 자기만족은 되겠지만 생명으로 충만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좋은 것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결코 생명 충만과는 거리가 있다. 생명은 기본적으로 살아있음이다. 살아있음은 곧 변화이고 심화이며 성숙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 텍스트가 늘 새롭게, 심층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서의 세계 안에 들어간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 이 성서 텍스트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길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다. 즉 성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어떻게 확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열려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 길은 길이 아니다. 고정된 길은 없다. 길이 없다는 걸 아는 게 바로 길이다. 성령이 바람처럼 자기 의지대로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처럼 성서의 길은 바람과 같아서 우리의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 성령의 바람이 소통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여건이라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의 깊이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세계라는 게 무엇일까? 이런 문제까지 오늘 내가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한 마디만 언질을 한다면 인문학이 곧 세계 이해의 가장 바람직한 도구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 텍스트를 먹고사는 사람들은 인문학 공부에 투철해야만 한다. 그게 왜 성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데 쓸모가 있는지는 경험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한 장의 꽃잎도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과 전자 현미경으로 보는 것에 따라서 전혀 다르듯이 성서 텍스트도 어떤 눈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기독교 근본주의 모습이, 어떤 사람의 눈에는 가부장적 질서가, 또 어떤 사람의 눈에는 종교적 열정이 보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전쟁하는 신의 모습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의 신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소외된 이들을 돕는 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성서는 이런 차이만이 아니라 훨씬 근본적인 차원에서도 읽는 이들에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을 나는 성서의 세계 안에 들어갔는가, 아닌가로 나누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성서의 세계’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걸까?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 조차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어떤 사실을 정보의 차원에서 따라갈 뿐이지 그 정보 너머에, 또는 그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세계를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큐티’를 하는 분들은 성서 텍스트에서 자기 삶의 방향을 찾는다고 여기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런 자세가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이 차이를 내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시 바둑 이야기를 해야겠다. 프로 기사들이 둔 바둑의 기보를 보라. 겉으로 볼 때 거기에는 단순하게 흑백의 숫자만 나열되어 있지만 그 내면에는 무한에 가까운 돌의 세계를 감추어있다. 실제로 기사들이 미미 예측한 수 백 가지의 수만이 아니라 그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수도 여전히 숨어 있다. 그 바둑을 둔 기사의 내공보다 더 깊은 내공의 있는 사람이 그 기보를 해석한다면 그 숨어 있던 수들이 나타날 수 있다.
성서도 역시 영적인 고수들이 놓은 바둑과 같다. 성서 텍스트 안에는 성서 기자들의 놀라운 영적 체험이 경우에 따라서 명시적으로, 그러나 대부분은 은폐의 방식으로 담겨 있다. 여기에 바로 성서의 세계에 들어가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성서의 영적인 세계는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그 숨어 있는 영적인 세계라는 건 땅에 숨겨진 보물과 같은 게 아니다. 그 보물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성서의 세계는 변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보물은 보물이지만 고정된 게 아니라 변한다. 진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라는 뜻이다.
내 말이 공허하게 들리시는 분이 있다면 조금 더 진지하게 성서를 들여다보시라. 대개 사람들은 성서를 일단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읽는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에 흡족한 구절이 나오면 은혜 받았다고 생각한다. 은혜 받았다는 사람을 향해서 그게 은혜인지 아닌지 좀 성찰해보라고 내가 아무리 말해도 별 소용이 없겠지만, 철저하게 개인의 주관적 만족감을 은혜로 여긴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은혜는 자기만족이나 자기 확신이 아니라 생명의 충만감이다.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는 건 아니다. 매일 즐겁게 논다고 해서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교회가 부흥한다고 해서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는가? 그런 것만으로는 자기만족은 되겠지만 생명으로 충만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좋은 것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결코 생명 충만과는 거리가 있다. 생명은 기본적으로 살아있음이다. 살아있음은 곧 변화이고 심화이며 성숙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 텍스트가 늘 새롭게, 심층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서의 세계 안에 들어간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 이 성서 텍스트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길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다. 즉 성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어떻게 확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열려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 길은 길이 아니다. 고정된 길은 없다. 길이 없다는 걸 아는 게 바로 길이다. 성령이 바람처럼 자기 의지대로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처럼 성서의 길은 바람과 같아서 우리의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 성령의 바람이 소통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여건이라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의 깊이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세계라는 게 무엇일까? 이런 문제까지 오늘 내가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한 마디만 언질을 한다면 인문학이 곧 세계 이해의 가장 바람직한 도구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 텍스트를 먹고사는 사람들은 인문학 공부에 투철해야만 한다. 그게 왜 성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데 쓸모가 있는지는 경험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