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069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도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주제로 하는 그림도 여럿 있고 복음 찬송가도 있습니다. ‘문을 열면’이라는 표현은 물론 메타포입니다. 말로만 ‘내 마음의 문을 열겠으니 주님 제 안으로 들어와 주십시오.’ 한다고 해서 여는 건 아닙니다. 문을 열려면 먼저 빗장을 풀어야 합니다. 빗장이 걸쳐있으면 아무리 문을 밀거나 당겨도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의 빗장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 시대는 마음의 빗장을 절대 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큰일 난다고 말입니다. 이런 시대정신 가운데서도 우리가 빗장을 풀고 문을 열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음성’을 듣는 경우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먹는다는 표현도 물론 메타포입니다. 예수와 함께하는 식탁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된 친교가 일어나는 거룩한 퍼포먼스입니다. 예수가 우리와 함께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생명에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이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조금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그 존재를 우리가 실감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말도 멀리 느껴진다면, 죽는 순간에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을까요? 이런 대목에서 핵심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과 그의 운명을 교리문답의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미술관에 가는 걸 가장 행복하게 여기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와 함께하는 걸 가장 행복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걸 가리켜서 위 구절은 ‘함께 먹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공동번역 [3:20 들어라,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새번역 [3:20 보아라,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오늘 구절을 보니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떠오르네요.
저의 할머니도 하루종일 먹는 것으로 고문(?)을 합니다.
놀러온 손자에게 뭘 하나라도 먹여야 겠다는 사랑으로 잠 자는 그 순간까지 계속 음식이 나옵니다.
돌아가셔서 이제는 그 사랑을 맛 볼 수 없네요.
먹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 하시는 할머니께 이제서야 감사합니다라고 말씀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