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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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결말’
이제
내 나이 일흔, 즉 칠순, 곧 종심(從心)이 다 되었다.
하늘의 부름인 죽을 때가 되어가니
나에게 삶의 본이 되었던 인도자, 즉 지도자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내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준 분들이다.
그들의 ‘삶’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면서
그들의 삶을 본받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한다.
우리의 삶의 인도자, 즉 지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는 똑같은 방식으로 말씀을 선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인도자, 즉 지도자를 보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삶’의 헬라어 ‘anastrophe’는
행동(behavior)과 대화(conversation)라는 뜻이 있다.
그들의 삶, 즉 행동은
우리에게 그들의 삶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결말’의 헬라어 ‘ekbasis’는
출구(way out), 즉 피할 길(way of escape)이다.
그들의 삶의 결말(end)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 즉 출구이다.
‘삶’의 ‘결말’은
임종이나 행동의 결과이다.
삶의 인도자, 즉 지도자는
그리스도교적 생활 방식과 그리스도교적 죽음을 보여줄 책무가 있다.
인간은 죽음이 임할 때 믿음의 조상들처럼
주님의 가르침과 그분이 제시한 길을 인식한다.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들이 그렇게 한 예를 보자.
이삭은 죽을 때에 믿음으로
장래의 일들에 관하여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였다.
야곱은 믿음으로 죽을 때에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요셉의 아들들을 각각 축복해주었다.
믿음으로 요셉은 죽을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나갈 길을 언급하고 자기 뼈를 가지고 나가라고 하였다.
인간은 죽어가면서
자기 자신이 최후로 도달할 인식을 전한다.
우리는
이것을 유언이라고 한다.
임종이나 행동의 결과인 ‘삶’의 ‘결말’은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본’이 된다.
‘본’이라는 헬라어 ‘hupogrammos’는
습자첩(習字帖)이란 뜻이다.
학생들이 글씨를 배울 때
밑에 놓고 글자를 따라 쓰는 글씨본이다.
습자첩을 따라 쓰다 보면
자연히 글씨를 배울 수 있게 된다.
그와 같이
따르는 사람의 본은 당연히 인도자, 즉 지도자의 ‘삶’의 ‘결말’이다.
따르는 사람은
인도자, 즉 지도자의 ‘삶’의 ‘결말’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따르는 사람의 삶은
인도자, 즉 지도자의 ‘삶’의 ‘결말’의 재생산이다.
인도자, 즉 지도자
당신은 카피되고 있습니다.
따르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도자, 즉 지도자를 닮는다.
얼굴뿐만 아니라
‘삶’의 ‘결말’을 통하여 내면의 본성까지 닮는다.
따르는 사람은
내적 외적으로 인도자, 즉 지도자의 판박이이다.
나는 죽을 때
육적, 영적 자녀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인식될까?
나의 ‘삶’의 ‘결말’이
육적, 영적 자녀들에게 은혜가 될까?
나의 유언이
믿음의 선포가 될까?
나의 ‘삶’의 ‘결말’이
육적, 영적 자식들에게 말을 할까?
일흔, 즉 칠순, 곧 종심(從心)이 다 되어가니
남은 인생 오직 그것이 문제로 여겨질 뿐이다.
브니엘남님이 종심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 것을
선배로서 환영하고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