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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붕(大鵬)과 뱁새 뱁새가 어찌 대붕(大鵬)의 뜻을 알랴?


장자 소요유(逍遙遊)’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은 ()’이다. ()의 둘레의 치수는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은 ()’이다. ()의 등은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의 양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 ()은 바다가 움직일 때 남쪽 바다로 여행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뱁새가 이 나는 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저 놈은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나는 뛰어서 위로 날며, 수십 길에 이르기 전에 숲 풀 사이에서 자유롭게 날개를 퍼덕거린다. 그것이 우리가 날 수 있는 가장 높은 것인데, 그는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을 비상하는 대붕(大鵬)을 예찬한다. 그것은 마치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갈매기의 꿈과도 같다. 그러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대붕(大鵬)의 비유를 이해한다. 그런데 장자가 그 다음 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뱁새의 비유는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기 힘들다. 뱁새가 숲속에서 둥지를 틀고 사는 데는 가지 하나(一枝)면 족하고, 두더지나 쥐들도 목이 말라 물을 마실 때는 한 모금의 물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부르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비유는 대붕(大鵬) 예찬에 그 참뜻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뱁새나 콩새 같은 작은 새들이나 두더지나 쥐와 같은 작은 동물들의 소욕지족(少欲知足)을 칭송함에 그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자발적 청빈과도 같은 거 아닐까?

지금 내게, 대붕(大鵬)의 비상과 뱁새의 소욕지족(少欲知足), 둘 가운데 만약 하나의 인생길을 다시 한 번 선택하도록 종용한다면, 진실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대붕(大鵬)의 비상에 또 다시 방점을 찍고 말 것이다. 에전에도 나의 길이 그랬을 것이고 지금 여기에서도 역시 같은 방식의 사고와 실천을 감행할 것이다.

 

그런데 고려 시대의 스님 무의자(無衣子) 혜심(慧諶)은 소요곡(逍遙谷), 골짜기를 소요하며라는 시에서 대붕(大鵬)과 뱁새에 대해 이렇게 노래한다.

대붕풍익기만리(大鵬風翼幾萬里) : 대붕의 바람 탄 날개 몇 만리를 가도
척안림소족일지(斥鷃林巢足一枝) : 볍새 숲속 둥지는 한 가지면 충분하다
장단수수구자적(長短雖殊俱自適) : 비록 크고 작음 다르나 모두가 만족하니
수공잔납야상의(瘦筇殘衲也相宜) : 말라빠진 지팡이와 떨어진 장삼도 상관없다


무의자(無衣子)의 시의 구절이 재밌지 않을 수 없다. 길고 짧음은 비록 다를지라도 자적(自適)함을 빠트리지 않나니(長短雖殊俱自適). 시인은 여기에서 대붕(大鵬)의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으로의 비상()’뱁새의 일지(一枝), 즉 가지 하나에의 만족()’길고 짧음(長短)’에는 차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유유자적(悠悠自適)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나는 여기 소요유(逍遙遊)의 대목을 그렇게 풀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던 까닭에, 그 의미 또한 무의자(無衣子) 시인의 바람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없다. 단지 크기의 문제나 장단(長短)의 문제가 장자가 말하고자 한 바의 본의(本意)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의 주제와 관심은 욕망의 크고 작음이나, 생활 방식의 대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자기 변용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소요유(逍遙遊)’ 편의 본 구절에 대한 나의 해석을 한번 해보자. 소요유(逍遙遊)가 독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내 안에 우주적 크기의 참나가 감추어져 있음을 발견하라는 말이다. ‘소아(小我)’에 만족하지 말고, 진실로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온 우주를 깨닫고 회복하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소아(小我)’ 혹은 개아(個我)’가 사라진 무아(無我)’의 체험 속에서만 발견되어지는 대아(大我)’, 우주아(宇宙我)’로 돌아가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처지에 적당히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물고기는 알에서 깨어나야 하고, 깨어난 작은 물고기는 등 길이만 해도 몇 천 리나 되는지 모르는 큰 물고기로의 자기 변신, 자기 변용(transformation)을 꾀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물속에서 적당히 즐기며 자족하는 등의 현실적 자기 만족에 그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다. 아무리 큰 물고기일지언정 다시 한 번 자기 변용을 시도한다. 그리하여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붕(大鵬)으로의 변신에 성공한다. 이제 물고기가 대붕(大鵬)이 되는 것이니, 바라보고 생각하는 차원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물고기는 접촉되는 삼차원의 세계만을 지각하는 데 그칠 것이나, 대붕(大鵬)은 사차원의 시공 속으로 비상할 수가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나서도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붕(大鵬)이 가야할 길은 험하고 또 험하다. 바닷바람(태풍)이 일면 그것을 타고 날갯짓을 하여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으로 치솟아 올라야 한다. 익숙한 현실, 자족적인 생활 방식, 안정된 생활 리듬을 깨부수고, 형이상학적 하늘, 그 미지의 공간으로 참된 비상, 참된 초월을 도발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한 대붕(大鵬)의 비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가 의도하고 있는 대붕(大鵬)의 비상은 욕망의 크기의 확대 재생산과 같은 그러한 물량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자기 비움’, 에고의 무화(無化)’가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주제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대붕(大鵬)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아무것도 없는 본원의 고향에 도달하게 될 수 있다.

앞의 세 단계의 변용을 성취한 대붕(大鵬)에게도 마지막 한 가지 단계가 더 남아 있다. 남쪽 하늘의 하늘 못(天池)’으로 날아가는 일이 그것이다. 그곳엔 민중의 바다, 중생의 삶이 편만하다. 남녘의 바다엔 비상한 대붕(大鵬)의 하강(下降)’을 기다리는 뭇 생명들이 있음이다. 공활한 창공에서 해탈의 자유를 만끽하던 붕새는 자신을 기다리는 중생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상승(上乘)은 하강(下降)을 부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불가에서 말하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뜻과 만나니, 그 의미가 심장(深藏)하지 않을 수 없다. ‘상구보리(上求菩提)’, 위로 참다운 깨달음(菩提)을 얻은 구도자는 하화중생(下化衆生)’함으로써만 진정한 의미의 불이(不二)’의 도()를 완성하게 된다.

 

이것이 성경에도 나온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시어 변화되시니 베드로가 그곳에 장막 셋을 짓고 있기를 원했지만 주님은 내려오셔서 간질병으로 고통받는 어떤 사람의 아들을 고쳐주셨다(17:1-21). 여기서의 방점도 역시 변화, 즉 자기 변용(transformation)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변화, 즉 즉 자기 변용(transformation)은 헬라어로 ‘metamorpheo’인데 ‘metamorpheo’‘meta(change)+ morphe(form)’이고 이 단어에서 변태라는 영어 단어 메타모르포시스(metamorphosis)’가 나왔다. 변태는 (허물을 벗고) 형태를 바꾸는 것, 즉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변화되면 우리는 뱁새가 아니라 대붕(大鵬)이 되어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으로 비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땅으로 내려와 하화중생(下化衆生)’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는 어떻게 하화중생(下化衆生)’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4:7-10)라고 말한다주님은 죽고 부활하시어 높은 곳, 즉 하늘로 승천하시는 이러한 여정을 통하여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실 수 있는 길을 여셨다. 그래서 그분에게 사로잡혔던 자들에게 은사를 주셨다(행 2:1-4). 주님께서 올라가셨다가 땅으로 내려오심으로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셨다. 우리가 변화받음으로 은사 있는 자들이 되면 주님이 간질병을 고치신 것과 같이 하화중생(下化衆生)’할 수 있게 된다.

 

변화받지 못한 뱁새는 은사를 가지지 못하였으니 어찌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즉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대붕(大鵬)의 뜻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뱁새가 변화받아 은사를 받은 대붕(大鵬)이 되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즉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건축에 쓰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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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2024.12.11 21: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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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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