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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 공항 비행기 참사 - 예수님께서 우셨다

 

작년 연말 우리는 참 황당한 두 사건을 겪었다. 하나는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이고, 다른 하나는 무안 공항 비행기 참사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로 살기 어려운 나라 형편이 소시민들에게는 더 어려워졌고, 무안 비행기 참사로 많은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마르지 않게 하였다.

 

2024년 마지막 날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무안 참사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를 전한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하는 성서 구절이 있다. 성서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다. 요한복음 1135절에 등장하는 문장 예수님께서 우셨다라는 구절이다.

 

요한복음 11장은 부활 생명에 대한 말씀이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동생이며 예수가 사랑했던 친구인 나사로가 치명적인 병에 걸린 이야기로 시작한다. 예수가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어 매장된 지 나흘이나 지났다. 나흘은 육신이 죽어 영혼이 떠나는 삼 일을 지난 후, 그러니 다시는 생명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집에서 뛰쳐나와 예수를 길에서 만났다. 그녀는 그의 발에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11:32)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리아와 그녀를 따라온 유대인들이 울기 시작한다(11:33). 이 문장엔 예수님에 대한 믿음, 예수님과 나사로 간의 우정과 사랑이, 그리고 늦게 온 예수님에 대한 원망과 안타까움이 스며있다. 이때, 신적이며 영웅적인 예수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울지마라. 내가 당장 나사로를 살리겠다. 무덤으로 가자.

예수님이 이렇게 반응했다면 마리아와 그를 따라온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은총만을 바라는 종교인으로 전락했을 것이다(고전 1:22).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라고 마음속에 나름대로 만든 허상을 좇아가는 우상 숭배자가 되길 바라지 않으신다. 그랬다면 그리스도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인간적으로 반응한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11:33).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에 해당하는 에네브리메사토(enebrimesato: he was deeply moved: he groaned; he became perturbed)는 접두사 (en)말이 콧숨을 거세게 몰아내다, 성나서 으르렁거리다 등을 뜻하는 브리마오마이(brimaomai)의 합성어로서 크게 괴로워하다 혹은 흥분하였다는 뜻을 전달하는 것으로 원형은 엠브리마오마이(embrimaomai)이다. 원어로 보면 예수님께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속으로 삭이시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말하자면 몸이 떨릴 만큼이나 그 마음이 괴로우셨음을 나타낸다.


불쌍히 여기사에 해당하는 에타락센 헤아우톤(etaraxen heauton: he deeplytroubled himself)은 직역하면 자신을 뒤흔들었다’, 자신을 뒤끓게 하였다가 된다. 에타락센(etaraxen)뒤흔들다’, 뒤끓게 하다 등을 뜻하는 타랏소(tarasso)의 부정(不定) 과거 시제로 뒤흔드는 동작의 시작을 나타낸다. 이 동사는 감정적인 흥분이나 혼란과 같은 동요를 표현하기 때문에 괴로움으로 인한 심적 동요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33절을 예수는 마리아의 말을 들은 후에, 그녀가 슬픔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통곡하는 것을 보시고,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로 큰 소리로 통곡하는 것을 보셨다. 그러자 예수는 마치 고통스러운 말이 코를 불며 거친 숨을 거칠게 내쉬는 것같이, 그의 영혼이 비통하여, 괴로운 몸을 비틀며 왔다 갔다 하셨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렇게 예수님의 감정이 심히 착잡한 상태였음을 표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신성(神性)을 지니신 동시에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셨음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때문에 이토록 괴로우셨을까? 메시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부활 생명의 실재, 즉 현실(reality)로 오신 이 엄연한 역사적 현존 앞에서 죄와 죽음의 권세가 여전히 기승을 부려, 사람들 특히 그중에서도 당신이 사랑하시는 마리아와 마르다와 같은 이들을 지극한 슬픔과 낙심으로 몰아간다는 것이 그분에게는 적개심에 가까운 분노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죽음이 이기는 모습과 마리아와 함께 온 유대인들의 불신앙이 예수님을 이처럼 괴롭게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미 마르다와의 대화를 통해 당신이 부활 생명의 실재, 즉 현실(reality)로 오셨음을 계시하셨고, 마르다를 통해 당신이 메시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까지 들으셨기에 죽음으로 말미암은 슬픔, 절망, 통곡은 그분 앞에서 물러가야 하는데도, 여전히 그분 앞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모독이며 불신앙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11:34). 그들은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 와서 보십시오.”(11:34).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직접 와서 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등장한다. 아마도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담겨 있는 성서에서 가장 짧은 문장이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5).

 

눈물을 흘리셨다에 해당하는 에다크뤼센(edakrysen: wept)울다, 눈물을 흘리다를 뜻하는 다크뤼오(dakryo)의 부정(不定) 과거 시제이다. 여기서 부정(不定) 과거 시제는 어떤 상태나 조건으로 들어가는 것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울기 시작하셨다가 정확한 번역이다. 그리고 이 다크뤼오(dakryo)라는 단어는 소리없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상태를 말한다. 누가복음 1941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크게 우신 것이나 히브리서 57절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에 해당하는 통곡하신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드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하는가? 첫째는 우리와 똑같은 인성(人性)을 지니신 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둘째는 그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이방인들이 알고 있던 신()인 우상과는 달리 인간을 이해하시는 분임을 예수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그러니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나약한 인간성과 동일한 육체를 가지신 하나님이신 주님 앞에 우리가 이해받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으며 그러기에 말씀드리지 못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가까이 계시고 우리를 이해하시는 주님은 이미 구약에 예표되어 있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4:7).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43:2).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55:6).


각설하고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라는 말은 성서에 등장하는 가장 심오하고 강력한 문장이다. 겨우 두 단어일 뿐이지만, 그리스도의 핵심을 담고 있다. 예수님은 아직 무덤에 가지도 않았다. 마리아가 나사로가 죽었으니 이제 함께 무덤으로 가서 그의 시신을 보자고 요청하였다. 그때 예수님의 반응은 함께 우는 행위였다. 예수님은 왜 우셨는가? 마리아가 우는 모습을 보고 감정이 북받쳐 전염되어 우셨는가? 예수님이 나사로를 다시 못 볼 것 같아, 아쉬워서 우신 것인가? 예수님은 그 순간에 마리아와 마르다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들 고통을 온몸이 흔들릴 정도로 함께 느꼈으므로 눈물은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예수님은 이 순간에 타인의 아픔을 진정으로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실제로 자신의 몸으로 반응하고 그 대상의 아픔을 경감하기 위해 애쓰는 공감의 혁명을 일으키셨다.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말은 은유나 빈말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아픔을 하나님이 함께 느낀다는 의미이다. 시편 3418절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여호와는 심장이 찢어진 자, 근처에 계신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자식을 잃고 심장이 찢어지는 유가족들의 슬픔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우리의 잘못을 고백한다. 지금은 무안 공항 비행기 참사 유가족의 슬픔에 동참하여 조용히 눈물을 흘릴 때다. 우리의 눈물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미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2025년 새해에는 눈물은 그만이고 미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모모

2025.01.04 13:57:31
*.134.194.227

저도 타인의 아픔을 진정으로 자신의 이픔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무안 공항 참사 희생자와 유족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비추천은 제가 잘못 누른 것입니다.ㅠㅠ
좋은 글 감사합니다.
profile

정용섭

2025.01.04 19:24:51
*.137.91.200

시의적절한 신앙 에세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참척의 슬픔에 떨어진 그들를 위로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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