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자유!

Views 2146 Votes 51 2006.01.18 00:02:13
관련링크 :  
자유!
입술의 소리로 나오기도 전에 사유의 한 꼭지를 설레게 하는 감동의 탄식!
때로는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이념의 주춧돌로 도구화되기도 하면서,
때로는 손에 잡힐 것만 같다가도
영원히 다가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으로,
체념으로,
망각의 개념이 되기도 하는 이 자유는 박제된 꽃과 같은 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그 무엇이 아닌 상태, 흐르는 물과 같은 동적인 표상의 개념으로,
자유는 시간의 조밀함 속에 ‘있음’의 속성으로 있을 것입니다.
자유는 동화된 신념이나 이념과 같은 ‘믿음’으로 ‘자유 할 수’ 없으며,
경험의 반복과 확장을 통해서 재연 될 수 없는 그 어떤 상태며 과정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진리’나 ‘생명’은 ‘자유’의 속성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우리는 종종 진리를 어떤 한 시점에 완결된 형태나 공리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거에 정의되었던 그 무엇으로나
혹은 앞으로 어느 시점에 드러날 완성으로
사변하는 관념적 발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진리가 과거완료형이나 미래완성형과 같은 사건의 완성이라는 대상화된 시점,
즉 시간의 한계에 의해 제한 받게 됩니다.
이러한 대상으로서의 진리 인식은
진리가 사유 속에서 시점의 대상으로 자리하게 되는 까닭이 됩니다.
따라서 진리가 인간 의식의 대상이 되는 순간,
위의 경향에서 결코 자유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속성은 시간의 조밀성 속에 ‘있음’으로 있으며,
경험 혹은 체험의 반복과 확장을 통해서 재연 될 수 없는 그 어떤 상태며 과정입니다.
참으로 자유의 속성과 흡사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위의 언급을 통해서 어떤 체험에 의한 믿음의 확신이나
삶의 소중한 시간을 투여했던 행위의 정당성
혹은 치열했던 경험으로 인한 자기 확신 등으로 말미암아
진리 속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현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과거의 행위를 통한 체험 속에서 자기 확신을 할 뿐만 아니라
다수의 동화된 신념의 작용을 보편적인 것으로 확증하고
자기의 정체성과 동일화 시킵니다.
삶의 의미를 물질적이든 관념적이든 대상화된 그 무엇에 투사시켜버립니다.
삶의 깊은 곳에 있는 소외의 절망과 그 불안, 그 불확실성은
우리를 끊임없이 관념적이고 물질적인 대상을 찾아 자신을 몰입시키려 합니다.
역사를 관통하는 인간의 삶은 이러한 현상의 파노라마며,
이러한 현상의 극명한 이미지화가 ‘지금 여기’의 실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체험에 의한 믿음의 확신,
삶을 투여했던 행위의 정당성,
치열했던 경험으로 인한 자기 확신 등과 같은
관념적이며 경험적인 대상에 대한 자기 정체성의 동일화에 대해서
누군가가 부정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예를 들어 어떤 신비한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깨달았으며,
확증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의 삶과 동일화 시킨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또한 ‘사랑’은 무엇이냐고,
나아가 이러한 믿음이 개체적이고 상대적인 대상에 대한 자기 투사일 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목적이 이끄는 삶’을 텍스트로 해서
40일간 새벽기도와 주간 학습을 치열하게 경험한 당신에게,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신앙의 성숙을 확신하는 당신에게
누군가가 ‘목적이 이끄는 삶’은 기독교의 본질에서 비껴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을 대상으로서 도구화 한다고 말하면
당신 과거의 어떤 시점에 확신했던 믿음의 실체,
즉, 자기 정체성의 손상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까요?

하나님 나라(진리, 자유, 생명, 사랑)가 어떤 시점의 ‘대상’으로 자리매김 할 때,
진리가, 자유가, 생명이, 사랑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때로는 신기루처럼,
때로는 혼돈으로 절망으로 우리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주님의 평강이...

강석훈

2006.01.18 06:49:05
*.239.101.246

깔끔한 글, 여운이 향기롭습니다.
日日是好日 日日是新日 ^^

profile

정용섭

2006.01.18 23:25:38
*.249.178.21

허 집사님,
많은 뜻을 내포한 글,
잘 읽었습니다.
평신도가 이렇게 글을 쓰면
목사들은 좀 부담되네요.
근본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해명 없이
당위만 남아 있는 설교에서
우리는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지요.
2월 기독교 사상과 (성결교회 월간지) 활천에 실린 설교비평을 쓰면서
다시 한번 더 그걸 절감합니다.
설교자는 인격적으로 진정성을 갖춘 분들인데,
그들의 주장이 왜 그렇게 허망하게 들리는지 안타깝군요.
어떤 목사는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라"고 설교하데요.
도대체 그런 처세술과 기독교 신앙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허정수

2006.01.20 17:11:33
*.115.219.253

목사님
하나님 나라는 종말의 그날까지 ‘열려’ 있는데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삶의 한계에 갇혀서,
그나마 그 짧은 삶의 시간 속에서라도 자유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렇게 댓글을 다는 저 또한 난감합니다.
그렇더라도 삶을 영위하여야 하겠죠?
낭비하지 말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낭비하지 않는 삶이 어떤 삶이냐고 물으면 이 질문조차도 만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열려있는 것이라면
우리네 상당수의 삶의 현실은 그 반대로 가는 것 같습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결정된 사실과 정보로 세상을 해석하고 수용하려고만 합니다.
나아가 암묵적인 압박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특히 복음을 신앙하는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과의 열린 관계조차 힘겨워 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이나 다원주의 신학을 ‘인본주의’라고 배척하는
복음주의 계통의 다수 신앙인들의 깊은 내면은
오히려 더 철저한 인간중심적인 도그마와 상식에 ‘닫혀’ 있으면서도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 바탕에서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라’고 당당하게 말씀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보면 인격적 진정성조차도 자기중심적인 신념에서 출발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목사님!
묶여 나올 설교비평의 제목은 결정하셨는지요?
초판은 언제 나오는지요?
세상의 반응이 기대가 됩니다.^^
그리고 고전읽기의 책은 결정하셨고,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요?

가정에 주님의 평강이...
profile

정용섭

2006.01.20 23:14:34
*.249.178.21

제가 보기에 자칭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유앙겔리온)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기쁜 소식'과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역사 변혁적인지,
어떻게 혁명적인지,
(라즈니쉬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떻게 반역적인지 생각하지 않고
현실유지( status quo)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또는 개인의 종교적 감수성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만족하는지도 모르지요.
그런 가운데서도 생명의 영인 성령과 소통하는 사람들이 나올 테니까
각자 맡은 소임 껏
진도 나가는 게 최선이 아닐른지.
영락 교회에 과격한 선전문구를 담은 현수말과 피켓이 난무한 사진이
인터넷 신문을 장식했더군요.
한국을 대표하는 영락 교회당에서
그런 데모를 할 수 있다는 그 발상이 놀랍네요.
그건 기도회가 아니라 시위지요.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설교비평 책 제목은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 사이트에 올라온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있는데,
그건 이제 출판사와 의논해야하니까 아직은 결정된 게 아니에요.
2월 말이나 3월 초에 출판 예정입니다.
고전읽기 책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에는 여러 개를 생각해 두긴 했어요.
일정은 일단 2월13(월)-15(수)으로 예정되어있습니다.
결정되는 대로 공개적으로 알릴 예정입니다.

조기호

2006.01.21 00:36:37
*.100.193.236

" 제가 보기에 자칭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유앙겔리온)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기쁜 소식'과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역사 변혁적인지,
어떻게 혁명적인지,
(라즈니쉬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떻게 반역적인지 생각하지 않고
현실유지( status quo)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

이 말씀에 조금은 움찔거리면서도 약간의 반동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전반적인 복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자들의 경계도 그렇지만, 자칭 여러명의 자칭 복음주의자들이 사이트를 보는 것으로 짐작되는데(?), 싸잡아서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아쉬운 것은 몇몇 사람들의 설교비평만으로 -물론 그들이 매우 큰 영향을 주고 있지만-자칭 보수주의자들을 확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찝어서 말씀을 드리지 못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을 언급할 때 그들의 현상만 보지 치열한 삶의 인식과 열림은 잘 못보시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시작하는 전제가 달라서 그럴까요?
저도 그들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하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데..

이글에 맞는 것은 아니지만 로이드 존스를 (제가 알기로는 이분은 칼비니스틱 메소디스트로 알고 있는데요, 웨일즈 지방에 이런 교회들이 꽤 있습니다. 신목사님이 말씀해 주십시오)언급하실때도 이제서야 아신다는 것으로 말씀하셔서 조금은 놀랐습니다. 그분에 관한 역서와 관련된 책들이 나온지가 언젠데요!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부류와 목사님이 몸담고 있는 섹트가 다른데요. 지금 큰 틀-기독교라는-은 같지만 브렌치가 틀리는데 말입니다.

설교비평과 건전한 비평과 치열한 공부에 몰두하라는 정언에는 동의하지만 보수 진영을 잘 모르시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저도 목회하느라고 코가 석자라 자세히, 상세히 말씀은 드리지 못하지만, 본질적인 문제제기에는 동감하며 공부와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변혁적이고 반혁적이고 혁명적인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상유지에도 버겁거든요?

목사님의 그말씀이 ...같습니다로. 끝나서 저도 같습니다로 글을 두서없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각자 소임껏 진도 나가는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고민하는 것과 같이 여기서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는 영국 사우스햄튼에서 한인교회만 3년 반 사역하다 지금은 미국 버지니아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허락되면 미국의 한인교회 소식도 전해 드리겠습니다.
profile

정용섭

2006.01.21 23:42:10
*.249.178.21

조기호 목사님,
이번에도 내가 경솔하게 말했군요.
복음주의자들을 싸잡아 매도하는 버릇은 고쳐야지요.
그러나 본심은 그게 아니랍니다.
나도 원래 복음주의자에요.
아니 모든 기독교인들은 복음주의자들이지요.
다만 복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약간씩 구분되는 것뿐이에요.
나는 민중신학자가 아닙니다.
원래 판넨베르크를 전공한 사람이니까 아마 근본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요.
통칭의 '근본주의'라기보다는
기독교 정통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fundamentalist'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진보주의자, 자유주의자, 정통주의자, 근본주의자로 행세합니다.
이 모든 게 사실 복음주의 안에 들어있겠지요.
내가 왜 싸잡듯이 자칭복음주의자들을 거론한 것은
영락교회에서 개최된 사학법 반대 기도회(실제는 반대시위)를 보았기 때문이에요.
미국 한인교회 소식도 알려주시면
우리가 많이 배울 것 같군요.
주의 은총이.

조기호

2006.01.22 00:46:26
*.100.193.236

아이구 아닙니다. 경솔하게 말씀하신 것 없습니다.
목사님의 정신을 이해합니다만 가끔 언뜻 비추시는 것을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이곳을 통해서 아직도 부족함과 무엇에 더 천착해야 하는지 배웁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중에 감신을 나온 친구가 있는데 가끔 냉천동 기숙사에 가서 읽는 책들을 보면 제가 보았던 책들과는사뭇 다름을 느꼈지요.
그런 간격이 세월이 흐르면 많이 더 벌어진다는 사실이지요.

반대시위자들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고민하고 공부하고 실천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늘양식비같이 받으세요.

김민철

2006.01.23 13:54:56
*.116.36.79

목사님 이런 질문을드린다는 것이 저의 무지를 탄로 내는 것 같아 쑥스럽습니다..무엇보다 이런 수준 낮은 질문이 이 싸이트의 질을 낮추는 것은 아닐런지..조심스래 질문 드려 봅니다.

판넨베르크에대해서도 근본주의에 대해서도 뭐라 언급할수 있을만큼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판넨베르크를 전공하신 목사님의 입장이 근본주의에 가깝다고 하셨는데..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정통을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의 근본주의가 판넨베르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요..

아직 공부가 한참이나 더 필요하다는 자책과 함께 질문 드립니다...간단하게 몇줄이라도 답변 가능하세요??

평안하세요..야웨샬롬.,.
profile

정용섭

2006.01.23 23:27:41
*.249.178.21

김민철 님,
질문 잘했어요.
판넨베르크는 기독교의 정통신학에 집중하고 있는 조직신학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통이라는 건 일종의 교부신학을 가리킵니다.
특히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그의 신학적 경향은
어떤 이들로부터 근본주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독교의 근본에 뿌리하고 있지요.
물론 그를 근본주의라고 말한 사람은 없어요.
내가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있는 거죠.
따라서 근본주의를 두 가지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뿌리에 신학의 뿌리를 두지만 열려있는 신학적 태도와
축자영감설에 근거를 둔 폐쇄적인 태도 말이지요.
판넨베르크는 기독교의 근본을 보편사적 관점에서
해석학적으로 풀어낸다는 점에서 근본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학문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관심이 있으면 내가 쓴 <말씀신학과 역사신학>과
번역한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을 보세요.

김민철

2006.01.24 00:59:33
*.116.36.79

그렇군요..
언젠가 강원돈 교수님의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의 개혁 과제'라는 글에서 한국교회가 극복해야할 가장 우선적인 부분을 근본주의라고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가졌던 근본주의의 부정적인 개념이 제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었나 보네요. 한국교회의 현실이 신학적 의미들 마저 격하시키나 봅니다.
근본주의라는 말이 지니는 좀더 포괄적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판넨베르크의 기독론이 얼핏 삼신론적인 양상을 띠고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몇몇 학자들의 언급은 목사님께서 위에 언급하신 기독교 근본에(삼위일체론 마저 뛰어넘는) 뿌리하고 있는 그의 성향 때문인가요?
판넨베르크는 쉽지 않은 학자 이네요..

추천해주신 글들을 읽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평안한 밤 되셔요 야웨샬롬..


아..지나가는 말로 들은 적이 있는데 극단적 인종차별 주의자라는 판넨베르크의 소문의 진상이 사실일까요??
profile

정용섭

2006.01.24 23:17:01
*.249.178.21

판넨베르크를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처음 듣는군요.
한국학생들이 판넨베르크 밑에서 한 사람도 박사 학위를 하지 못해서인가요?
뜬소문, 악성루머에 불과합니다.
List of Articles
No. Subject Author Date Views
368 회개 [1] 유민송 Jan 18, 2006 1807
» 자유! [11] 허정수 Jan 18, 2006 2146
366 "목적이 이끄는 삶" [8] 균형 Jan 16, 2006 3262
365 감사의 말씀과 2006년 병술년 하나님 나라 운동! [1] 미선이 Jan 16, 2006 1215
364 혹 남는 컴 있으시나요? 이길용 Jan 15, 2006 2054
363 에쿠스 부흥회를 아십니까? [2] 최종운 Jan 13, 2006 2568
362 체험과 지식 [15] 조현아 Jan 12, 2006 2060
361 집사자격에 대한 질문 [1] 똑소리 Jan 12, 2006 1508
360 세계적인 천재들이 만약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1] 이길용 Jan 10, 2006 1571
359 죽비게시판 회원용으로 전환합니다~ [3] 이길용 Jan 10, 2006 1619
358 딸에게 보내는 편지 [3] 조기성 Jan 10, 2006 1404
357 정신나간 한기총 [6] 균형 Jan 09, 2006 1770
356 출석부 달아봤습니다~ [4] 이길용 Jan 09, 2006 1617
355 새해를 맞아 떠오르는 생각들 [1] 최종운 Jan 07, 2006 1263
354 우리의 자녀와 형제가... 하나님의 뜻은? [1] 이맹영 Jan 06, 2006 1659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