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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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안에서 하나님을 찾던 초기의 일입니다
제법 알려진 카페에 가입을 하고 절말 놀란 적이 있습니다
운영자이신 목사님께서 '저의 사모님'이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모님'이라는 호칭은 상대방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지
자기자신이 스스로 높이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전에 구리에서 처음으로 약국을 개업했을 때
어떤 까칠한 분이 '내가 목사 사몬데...'하시면서 성깔을 부리시더군요
그때는 그 분이 이상한 분인 줄알았습니다
스스로 '사모'라니... 목사가 대단한 감툰가?
직접 뵌적은 없지만,인터넷 카페의 그 목사님의 글에서는 온유하고 절제된 성품을 엿볼수가 있었는데,
그래서 내심 존경심이 생기려고 하는데 이런 천박한 막말을 다시 듣게 되다니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마치 우아하게 차려입으신 백작부인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발설된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카페에 아직까지 이런 느낌을 올리진 못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소종파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로 형제 자매로 호칭하면서
목사님의 부인도 자매로,목사님도 스스로 형제라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쇼이었을수는 있겠지만,어쨌든 그것이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류 기독교'의 제법 괜찮다는 목사님이
스스로를 높이는 해괴한 발언을 하는 것을 목도하니
그동안 제가 잘못 배웠나? 한국교회는 다 이런건가?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살펴보니
다들 '성도'나 '신자'라고 부르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형제'나 '자매'로 부르는 것은 오히려 이단쪽이더군요
간혹 정말 높여 부르고 싶은 '목사님 부인'도 계십니다
그 분을 우리가 '사모님'이라고 호칭하더라도 그분이나 목사님은 스스로 겸양하여
'자매'라 자칭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민속명절을 맞이하여 '자매님'에게 드리는 선물이 진짜 선물이지
'사모님'께 드리는 선물은 '뇌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모" 이란 말이 이미 교회내에서 하나의 직분(장로, 권사,집사 ...같은 )으로 굳어진지 오래되었지요
아마 당분간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더욱 굳어지고 높여 질 것 같습니다 공개적으로도 "사모 합창단, 사모 무슨 모임 같은 것이 공식적(?)으로 존재하니요 ....
이 다비아 내에서도 목사님과 그 부인을 만낫을 때 어쩔 수 없이 그런 호칭을 쓸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자기 부인에게 집사 직분을 부여 햇지요. 그래서 교인들도 집사로 부르곤 햇지요 상당히 합리적(?)이고 아주 편하더군요...여기 계신 목사님들도 한번 깊게 생각해 보시지요
어찌보면 목사님들 책임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당분간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더욱 굳어지고 높여 질 것 같습니다 공개적으로도 "사모 합창단, 사모 무슨 모임 같은 것이 공식적(?)으로 존재하니요 ....
이 다비아 내에서도 목사님과 그 부인을 만낫을 때 어쩔 수 없이 그런 호칭을 쓸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자기 부인에게 집사 직분을 부여 햇지요. 그래서 교인들도 집사로 부르곤 햇지요 상당히 합리적(?)이고 아주 편하더군요...여기 계신 목사님들도 한번 깊게 생각해 보시지요
어찌보면 목사님들 책임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호칭에 대해서 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상대방을 높히고 자기를 낮추는 어법을 따르다보면 서로 동문서답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자네 어디 윤씨지?"
"예, 저는 남원 윤가입니다."
"파평 윤씨가 아니야?"
"아닙니다. 남원 윤가입니다."
"오 그래 남원 윤씨로군".
"예, 맞습니다. 남원 윤가입니다."
..............
"부인은 댁에 계시나요?"
"아내가 직장에서 저녁에나 옵니다."
"그럼, 부인께서 오실 시간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아내한테 전화 드리라고 할게요."
대화가 좀 꼬이는 것 같지 않나요?
극진한 예의를 차리기보다 언어의 효율성과 편의성을 따라 일반적인 호칭을 써서
대화하는 쌍방이 동일한 호칭을 그냥 쓰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보곤하는데,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란 말 듣기 십상이고... 또 언어라는게 시대상황 따라가는거라서.....
요즘에는 정말이지 존칭, 극존칭, 극극존칭으로 흔하게 올려 말하게되고
그러는 중에 자기쪽인지 상대쪽인지 분간도 못하고 존칭을 붙이게 됩니다.
상대방을 높히고 자기를 낮추는 어법을 따르다보면 서로 동문서답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자네 어디 윤씨지?"
"예, 저는 남원 윤가입니다."
"파평 윤씨가 아니야?"
"아닙니다. 남원 윤가입니다."
"오 그래 남원 윤씨로군".
"예, 맞습니다. 남원 윤가입니다."
..............
"부인은 댁에 계시나요?"
"아내가 직장에서 저녁에나 옵니다."
"그럼, 부인께서 오실 시간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아내한테 전화 드리라고 할게요."
대화가 좀 꼬이는 것 같지 않나요?
극진한 예의를 차리기보다 언어의 효율성과 편의성을 따라 일반적인 호칭을 써서
대화하는 쌍방이 동일한 호칭을 그냥 쓰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보곤하는데,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란 말 듣기 십상이고... 또 언어라는게 시대상황 따라가는거라서.....
요즘에는 정말이지 존칭, 극존칭, 극극존칭으로 흔하게 올려 말하게되고
그러는 중에 자기쪽인지 상대쪽인지 분간도 못하고 존칭을 붙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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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자신이 자기를 소개하고 칭하는데 자기 존칭 자기 경칭을 일삼는다. 자기가 이름 다음에 스스로 직함, 학위 자격 등을 쓰면 스스로를 높이는 존대 경칭이 되는 어법 예의를 파괴하는 쌍스러움을 범하는 천민 언어가 편만하다. 그러면서도 바울 사도 라 존대어를 써야 할 경우에는 사도 바울 하고 비하한다. 성모 마리아 하고 비하 하면서, 사모도 안되고 사모님 한다.사모 란 중국 명나라 때에 탕 현조 라는 시인이 그의 시 에서 극 존대의 표현으로, 신적 권위의 여인에게 칭했던 표현으로 썼을 뿐, 중국 이건 우리나라이건 문헌에 사용 근거가 없단다. 정경부인, 정부인, 귀부인, 영부인, 합부인 등 부인이라 했다. 그런데 을사 왜국 강점후 왜국어인 사모 가 들어와 퍼지기 시작한 폐기되어야 할 왜국어란다. 그런데 사모님 이라 칭하지 않으면 인사를 외면하는가 하면, 목사가 지네 여편네를 "우리 사모님" 하는 얼빠진 쌍것도 있다.
성경말씀을 열심히 주석하는 교회가 갑자기 사모님 할때는 "공경하는 스승이시요 어머님으로 모셔 마땅한 숭앙 하는 어르신" 이란 어의를 가진 칭어를 배려없이 단지 부인의 뜻을 가진 존칭, 하고 시치미 땐다. 그 정도가 아니다. 사모 라는 말은 교회에서 가장 권위있는 최 상위 직분이다. 교회에서 사모 란 직분은 당회에서 수렴되지 못하는 일이, 사모직을 가진 존엄직에게는 쉽게 수렴되는것을 듣노라면 사모님 직분은 여자를 남자로 바꿀수 있는 위대한 직분 같다. 그러니 새파란 나이의 젊은 여인에게 백발이 성성한 팔 구십대 노인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사모님! 한다. 하느님 이신 주님께오서 이 분의 겸비가, 말 구유 에 까지를 넘어 십자가 저주의 나무에 달리셔서 피를 쏟으시기 까지 극한의 낮은 자리로 겸비를 행하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나와 너가, 겸비를 배우기는 커녕 하필이면 왜놈의 말을 빌려와서까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권위와 숭앙을 받기를 원한다.
불교 쪽을 한번 보자. 승려 란 말을 기억조차 못할 지경으로 스님 이란 말 밖에 없는것 같다. 자연 보호를 위해 단식투쟁한 어느 여승(비구니)에 대한 기사에서 아무개 스님 이란 지칭으로 일관했고, 실수로 라도 아무개 여승 하고 객관적 일반 호칭을 쓰는것을 본적 없다. 그 기사의 독자가 압존의 대상으로 표현되어야 할 어법을 아랑곧 하지 않는다. 신문 기사를 보면 "아무개 기자", "아무개 부장" 하고 자기 표현 하는가 하면 "아무개 목사", "아무개 총장" 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자기표현이 편만하다.
언어가 부패 타락하는것이 교회가 타락하는데 앞서지 않는단다. 교회가 타락해서, 사회가 타락해서, 언어가 타락하게 된단다. 결론으로, 지금 성경사본 본문 비평학과 번역학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아랑곧 하지않고 원시 번역의 개역성경을 언제까지 고집하려는지, 이런 모순의 원인이 우리 말을 천대하고 경시하는 국민적 병폐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나는 이곳 미국에 와서 본격적으로 영어를 공부하면서, 과학적 음소로 된 한글 표음 문자와 장중 품위 응집 함축 포괄 선명 조어 등의 언어 표현성에 있어서 탁월한 한자의 표의문자가 잘 조화된 우리 말의 우수성을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고 이러한 내자신의 반응의 한 예가 나의 "하느님" 주장이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힘껏 일궈놓은 개역성경에 이르는 노고와 공적을 부정하려는것이 아니고 여사적 시대적 산물로서의 과업을 직시하고 종말론적 신앙의 자세로 오늘 우리의 종말론적 사명을 바로 인식하고 하느님께오서 당신의 언어로 계시의 말씀을 담으시는것을 사양하시고, 겸손히 우리의 천박한 언어를 그릇으로 쓰셔서 당신의 생명의 계시말씀을 담아주셨으니 우리가 우리 말을 소중히 고상하게 발전시켜나가지 않고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