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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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 함민복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세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자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자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자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 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
어젯밤에 읽은 시 한편입니다. 함민복의 시집 '우울씨의 일일'이란 수록된 작품이고요.
이 시를 읽으면서 다비아에서 말하는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무슨 뜻인지 좀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아서 나누고자 합니다.
분명 고등학교 때 이 시를 읽었다면
자장면 : 시적화자와 젊은 부부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
슬픔 : 시인의 현재 상황이지만 안고 갈 수 밖에 없는 감정 상태
등으로 분석해 가며 읽었을 겁니다. 언어영역을 대비하여서 말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시를 읽는 것은 시를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에요.
저는 어제밤 이 시를 읽으면서 공감이 되었습니다.
왜 공감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무엇보다도 제가 함민복 시인이 살아온 역사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발전소에서 근무하다가 정신병을 가지게 되어 계속 치료를 받았고,
이후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가 시인이 되었고, 상계동에서 살다가 철거민
신세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다가 지금은 저 멀리 강화도에서 혼자 살고
있는 사람.
이렇게 그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이 시가 공감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비슷한 삶의 경험을 겪었던 사람은
시인의 마음이 전달되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을까요? 이 두가지가
같이 있으면 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더 좋았을 거고요.
-------------------------------------------------------------------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성서읽기도 마찬가지 인것 같아요.
성서는 그당시 상황속에서 그당시 언어로 쓰여진 것이기에
* 이스라엘의 역사
* 히브리어, 헬라어(언어에는 문화와 사상이 녹아 들어있을테니까)
등을 잘안다면 바르게 성서를 이해할 수 있는 기초가 될테고
* 그당시와 지금의 상황이 다르다는 현실인식
* 2000년 신학사
등을 또 안다면 성서와 지금의 저자신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되겠지요.
이것이 함민복이 살아온 인생을 아는 것이 그의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말에 해당할 것 같고요.
그리고
* 인문학 공부
를 한다는 것이 시인과 비슷한 삶의 경험을 한것이 그의 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라는 말에 해당할 것 같아요.
그래서 '인문학적 성서읽기'라는 말은 특별한 성서읽기 방식이라기 보다
평상시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통해 삶의 경험을 넓히는 작업을 계속해서
진행시켜 옴으로써 성서가 자신을 계시할 때 적절히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도록 삶의 이해 지평을 최대한 확대하여 놓는 것을 중요시하고 이런
방식이 성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라고 믿는 성서읽기방식.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시인의 살아온 인생을 아는 사람과 시인과 비슷한 삶의 경험을 겪은 사람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나 신학사등 배경 지식을 알고 또 평상시 삶의
경험(인문학 서적을 통한 간접적 경험)을 넓히는 것이 성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것 같아요.
즉. '인문학적 성서읽기'에서 '인문학'은 문자적의미로서 특정 학문을 가르키기 보다
'인문학'으로 대표되는 삶의 경험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제가 제대로 이해를 한건지 모르겠네요.
사실 '인문학적 성서읽기' 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무슨 뜻인지 잘 다가오지 않았거든요
좋은 밤!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세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자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자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자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 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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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읽은 시 한편입니다. 함민복의 시집 '우울씨의 일일'이란 수록된 작품이고요.
이 시를 읽으면서 다비아에서 말하는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무슨 뜻인지 좀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아서 나누고자 합니다.
분명 고등학교 때 이 시를 읽었다면
자장면 : 시적화자와 젊은 부부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
슬픔 : 시인의 현재 상황이지만 안고 갈 수 밖에 없는 감정 상태
등으로 분석해 가며 읽었을 겁니다. 언어영역을 대비하여서 말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시를 읽는 것은 시를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에요.
저는 어제밤 이 시를 읽으면서 공감이 되었습니다.
왜 공감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무엇보다도 제가 함민복 시인이 살아온 역사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발전소에서 근무하다가 정신병을 가지게 되어 계속 치료를 받았고,
이후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가 시인이 되었고, 상계동에서 살다가 철거민
신세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다가 지금은 저 멀리 강화도에서 혼자 살고
있는 사람.
이렇게 그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이 시가 공감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비슷한 삶의 경험을 겪었던 사람은
시인의 마음이 전달되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을까요? 이 두가지가
같이 있으면 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더 좋았을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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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생각해 보니 성서읽기도 마찬가지 인것 같아요.
성서는 그당시 상황속에서 그당시 언어로 쓰여진 것이기에
* 이스라엘의 역사
* 히브리어, 헬라어(언어에는 문화와 사상이 녹아 들어있을테니까)
등을 잘안다면 바르게 성서를 이해할 수 있는 기초가 될테고
* 그당시와 지금의 상황이 다르다는 현실인식
* 2000년 신학사
등을 또 안다면 성서와 지금의 저자신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되겠지요.
이것이 함민복이 살아온 인생을 아는 것이 그의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말에 해당할 것 같고요.
그리고
* 인문학 공부
를 한다는 것이 시인과 비슷한 삶의 경험을 한것이 그의 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라는 말에 해당할 것 같아요.
그래서 '인문학적 성서읽기'라는 말은 특별한 성서읽기 방식이라기 보다
평상시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통해 삶의 경험을 넓히는 작업을 계속해서
진행시켜 옴으로써 성서가 자신을 계시할 때 적절히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도록 삶의 이해 지평을 최대한 확대하여 놓는 것을 중요시하고 이런
방식이 성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라고 믿는 성서읽기방식.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시인의 살아온 인생을 아는 사람과 시인과 비슷한 삶의 경험을 겪은 사람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나 신학사등 배경 지식을 알고 또 평상시 삶의
경험(인문학 서적을 통한 간접적 경험)을 넓히는 것이 성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것 같아요.
즉. '인문학적 성서읽기'에서 '인문학'은 문자적의미로서 특정 학문을 가르키기 보다
'인문학'으로 대표되는 삶의 경험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제가 제대로 이해를 한건지 모르겠네요.
사실 '인문학적 성서읽기' 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무슨 뜻인지 잘 다가오지 않았거든요
좋은 밤!
신학대학 다닐 때 성서배경사나, 아카드어 문법 혹은 고등비평 같은 시간에 간혹 엉뚱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수님. 구원받으셨어요?'
이런 과목은 성서와 너무 관계가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에요.
이런 학생은 소위 '불파'라 불리는 학생들이며,
졸업 후에도 학문은 뒷전이고 쉰 목소리로 걸걸한게 특징이고,
성서를 마스터했다는 자만심이 있죠.
실은 성서를 모르면서 말입니다.
지성적이 아니더라도 조금 생각이 있는 신자라고 하면 적응하기 힘들겠죠.
인문학 성서 읽기가 신앙의 좋은 길라잡이가 될꺼라 '믿쒸미다'
'교수님. 구원받으셨어요?'
이런 과목은 성서와 너무 관계가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에요.
이런 학생은 소위 '불파'라 불리는 학생들이며,
졸업 후에도 학문은 뒷전이고 쉰 목소리로 걸걸한게 특징이고,
성서를 마스터했다는 자만심이 있죠.
실은 성서를 모르면서 말입니다.
지성적이 아니더라도 조금 생각이 있는 신자라고 하면 적응하기 힘들겠죠.
인문학 성서 읽기가 신앙의 좋은 길라잡이가 될꺼라 '믿쒸미다'
함민복 시인에 대한 전이해가 없어도,
그런 삶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어도
그 시가 모래알 님에게 닿는 것은
사티아 님의 말대로 모래알 님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함 시인과의 동일한 삶의 경험이 내재해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신학공부를 하지 않아도 어떤 분들은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더군요.
그런데요,
약간 다른 차원이 있어요.
횔덜린이나 트라클 같은 시인의 시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성서 텍스트에도 함 시인의 시와 같은 것이 있고,
횔덜린 같은 시인의 시도 있을 거에요.
내가 신학 패권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좋은 하루.
그런 삶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어도
그 시가 모래알 님에게 닿는 것은
사티아 님의 말대로 모래알 님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함 시인과의 동일한 삶의 경험이 내재해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신학공부를 하지 않아도 어떤 분들은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더군요.
그런데요,
약간 다른 차원이 있어요.
횔덜린이나 트라클 같은 시인의 시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성서 텍스트에도 함 시인의 시와 같은 것이 있고,
횔덜린 같은 시인의 시도 있을 거에요.
내가 신학 패권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좋은 하루.
와, 박찬선님이 인문학적 성서 읽기에 대하여 명쾌하게 쓰주셨네요.
저도 다비아를 통해 인문학과 성서읽기와 무슨 연관이 있나 싶어했는데...
우리가 성서와 신학과 2천년 기독교를 역사를 어우러지 못하면 기독교를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해 보네요.
1년이 지난 지금, 그동안 내가 성서를 좁고 편협하게 읽고 공부했다는 생각이 많이듭니다.
지금은 성서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바로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무거운 짐을 벗어준 것 같네요~~
글을 쓰시는 솜씨를 보니 이해력과 표현력이 대단하시네요.
제가 정리하지 못한 부분을 시원하게 풀어주어서 감사해요.
앞으로 좋은 글 많이 많이 부탁해요~~
저도 다비아를 통해 인문학과 성서읽기와 무슨 연관이 있나 싶어했는데...
우리가 성서와 신학과 2천년 기독교를 역사를 어우러지 못하면 기독교를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해 보네요.
1년이 지난 지금, 그동안 내가 성서를 좁고 편협하게 읽고 공부했다는 생각이 많이듭니다.
지금은 성서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바로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무거운 짐을 벗어준 것 같네요~~
글을 쓰시는 솜씨를 보니 이해력과 표현력이 대단하시네요.
제가 정리하지 못한 부분을 시원하게 풀어주어서 감사해요.
앞으로 좋은 글 많이 많이 부탁해요~~
빈손으로 오는 벱이 없군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