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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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대법관에 제청된 것이 알려지자 많은 기자들이 저에게 "당신은 현재 대법관들의 성향으로 보아서 보수입니까, 아니면 진보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대체로 저는 아직 절차가 많이 남아 있으므로 그러한 물음이 적절한지 모르겠다고 말하여 답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기 전에, 보수이든 진보이든 그것이 온전히 서기 위해서는 <문명>의 바탕이 마련되어야 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문명이냐 야만이냐가 오히려 훨씬 더 큰 문제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문명은 예를 들면 의견이나 입장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벌레를 눌러 잡듯 상대방을 핍박하지 않는 태도, 어떠한 사람이라도 존엄 있는 하나의 인격으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태도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포스트모던과 정보화의 구호가 요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아직 <근대적 인간>의 품성이 보편화되었다고 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에서 법은 무엇보다도 바로 그러한 개명된 태도를 체현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의미에서는 가장 과격하다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 양창수 대법관 취임사 중에서.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얼마 전 학계 출신으로는 최초로 서울대 법대의 양창수 교수가 대법관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오늘 배달되어 온 법원소식지를 펼쳐보다가 양대법관의 취임사가 있어 꼼꼼히 읽어보았습니다. 역시 우리 민법학계의 최고봉으로 불려왔던 분 답게 다른 법관들의 천편일률적인 취임사와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저는 어제도 저녁식사 자리에서, "내가 원래 좌파를 싫어하는데..."라는 말을 하는 법관을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좌파'라는 단어에는 경멸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태도를 가진 법관이 존재하는 것이 이 나라 현실입니다.
사실 양대법관 역시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썩 존경받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실력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최고였지만, 스스로 최고라는 의식때문에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을 비난하고 무시하고 챙피를 주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려오는 얘기로는 양교수님도 많이 변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런 양대법관이었지만, 오늘 읽은 취임사에 적힌 글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이 사회를 우파와 좌파, 수구와 진보로 나누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습니다. 아니 나눌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논리와 이성을 가지고 서로를 설득하려는 태도 없이, 상대방을 참고 포용하려는 태도 없이, 감정과 비난을 담아 상대방을 말살하려는 태도를 갖는다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념의 옳고 그름을 넘어, 기본적인 소양의 문제이고, 양대법관의 적확한 표현대로 문명과 야만의 문제로 돌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평범한 글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글을 일국의 대법관 취임사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이라고 느껴집니다.
남들이 나를 평가한다면, 사상의 자유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도 어쩌면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준상으로는 진보의 스펙트럼쪽에 서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스스로 제가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 사회에서 보수인가 진보인가로 나뉘는 순간 서로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요.
다비아의 진보적 풍토는 개인적으로는 반갑지만, 혹시 그에 대한 자부심으로 독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이었습니다만, 과격했고 어떤 면에서는 단순했고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 끝에 결국 폭력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공산주의자들 안에서도 좌파와 우파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찬가지 측면에서 오늘날의 진보주의자들이 폭력적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나요. 스스로를 삼가고 중용의 도를 찾아가지 않는다면, 진보주의자로서의 프라이드란 아무런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중용의 길이란, 결국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는지요.
그러므로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다비안들에게도 한 번 묻고 싶어집니다. 과연, 문명입니까, 야만입니까.
- 양창수 대법관 취임사 중에서.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얼마 전 학계 출신으로는 최초로 서울대 법대의 양창수 교수가 대법관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오늘 배달되어 온 법원소식지를 펼쳐보다가 양대법관의 취임사가 있어 꼼꼼히 읽어보았습니다. 역시 우리 민법학계의 최고봉으로 불려왔던 분 답게 다른 법관들의 천편일률적인 취임사와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저는 어제도 저녁식사 자리에서, "내가 원래 좌파를 싫어하는데..."라는 말을 하는 법관을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좌파'라는 단어에는 경멸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태도를 가진 법관이 존재하는 것이 이 나라 현실입니다.
사실 양대법관 역시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썩 존경받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실력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최고였지만, 스스로 최고라는 의식때문에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을 비난하고 무시하고 챙피를 주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려오는 얘기로는 양교수님도 많이 변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런 양대법관이었지만, 오늘 읽은 취임사에 적힌 글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이 사회를 우파와 좌파, 수구와 진보로 나누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습니다. 아니 나눌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논리와 이성을 가지고 서로를 설득하려는 태도 없이, 상대방을 참고 포용하려는 태도 없이, 감정과 비난을 담아 상대방을 말살하려는 태도를 갖는다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념의 옳고 그름을 넘어, 기본적인 소양의 문제이고, 양대법관의 적확한 표현대로 문명과 야만의 문제로 돌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평범한 글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글을 일국의 대법관 취임사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이라고 느껴집니다.
남들이 나를 평가한다면, 사상의 자유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도 어쩌면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준상으로는 진보의 스펙트럼쪽에 서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스스로 제가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 사회에서 보수인가 진보인가로 나뉘는 순간 서로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요.
다비아의 진보적 풍토는 개인적으로는 반갑지만, 혹시 그에 대한 자부심으로 독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이었습니다만, 과격했고 어떤 면에서는 단순했고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 끝에 결국 폭력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공산주의자들 안에서도 좌파와 우파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찬가지 측면에서 오늘날의 진보주의자들이 폭력적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나요. 스스로를 삼가고 중용의 도를 찾아가지 않는다면, 진보주의자로서의 프라이드란 아무런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중용의 길이란, 결국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는지요.
그러므로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다비안들에게도 한 번 묻고 싶어집니다. 과연, 문명입니까, 야만입니까.
진보와 보수라는 문명스러운 논의를 하면서도
행동양태는 야만스럽게 나오는 거에 대한
시기적절한 취임사군요,
김동현님의 글 중반부터의 내용에서는
일전의 정목사님 큐티에서 언급된
'패거리 의식'의 내용과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전 그 당시의 진보인 제자들이
야만이라서 패거리 의식이 생겼고,
지금의 우리들이 자칭 문명이라서
그렇지말라는 법은 없는거지요.
진보와 보수..양쪽 다 온전하지않으니
모두를 아우르는 문명이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비아가 진보라면
저는 그동안 보수의 물을 계속 마시고 살았는데
좀 다른 물을 마시고 있는 중입니다.
결론은 Super가 되었으면 하죠.
모두를 아우르는..
좋은 글 감사~
행동양태는 야만스럽게 나오는 거에 대한
시기적절한 취임사군요,
김동현님의 글 중반부터의 내용에서는
일전의 정목사님 큐티에서 언급된
'패거리 의식'의 내용과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전 그 당시의 진보인 제자들이
야만이라서 패거리 의식이 생겼고,
지금의 우리들이 자칭 문명이라서
그렇지말라는 법은 없는거지요.
진보와 보수..양쪽 다 온전하지않으니
모두를 아우르는 문명이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비아가 진보라면
저는 그동안 보수의 물을 계속 마시고 살았는데
좀 다른 물을 마시고 있는 중입니다.
결론은 Super가 되었으면 하죠.
모두를 아우르는..
좋은 글 감사~
어느 작은 모임 중,
진보냐 보수냐의 성향을 두고 화두가 됐을때
칼럼니스트인 구미정 박사님께서
진보냐 보수냐의 구분 보다는
열림과 닫힘의 체계로 설명하는 길을
제시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귀가 번쩍하더군요
어감만을 따진다면
진보냐 보수냐의 구분보다
문명인가 야만인가의 구분이
더 거칠고 경멸적이군요
물론,
진보나 보수 이전의 태도를 말씀하신 것이지만요
낭만적인 제안을 한번 해 볼 까요?
'말을 하지 않는 겁니다'!!
자기가 보수이던 진보던,문명이던 야만이던
혹은 열렸던 닫혔던
그건 자신만의 환상 일 뿐이니까
옳다고 생각한는 행위를 하되
자신이외의 상대를 소외 시키는
구분법은 아예 쓰지 않는 겁니다
기왕에 정목사님 큐티에서도
'눈없이 사는 연습'을 해보자고 했는데
'입없이 사는 연습'도 함 시도해 볼 까요
진보냐 보수냐의 성향을 두고 화두가 됐을때
칼럼니스트인 구미정 박사님께서
진보냐 보수냐의 구분 보다는
열림과 닫힘의 체계로 설명하는 길을
제시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귀가 번쩍하더군요
어감만을 따진다면
진보냐 보수냐의 구분보다
문명인가 야만인가의 구분이
더 거칠고 경멸적이군요
물론,
진보나 보수 이전의 태도를 말씀하신 것이지만요
낭만적인 제안을 한번 해 볼 까요?
'말을 하지 않는 겁니다'!!
자기가 보수이던 진보던,문명이던 야만이던
혹은 열렸던 닫혔던
그건 자신만의 환상 일 뿐이니까
옳다고 생각한는 행위를 하되
자신이외의 상대를 소외 시키는
구분법은 아예 쓰지 않는 겁니다
기왕에 정목사님 큐티에서도
'눈없이 사는 연습'을 해보자고 했는데
'입없이 사는 연습'도 함 시도해 볼 까요
김동현 님!
저도 그랬어요. 아니 벌써~~ 하고 깜짝 놀랬습니다.
놀래는 건 대체적으로 기대하지 않던 일을 만났을 때 생기는 당연한 반응이지만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에 뭐 기분 상하시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
언제부터 한국사회가 그렇게 진보와 보수로 가름을 해왔는지 궁금합니다.
신학하시는 분들이 진보와 보수 이야기 많이들 하시는 건 알고 있긴 하지만..
지난 여름 한국의 신학교에서 교수로 계시는 남편 친구 분이
골프를 함께 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너는 진보냐 보수냐 하는 질문을 했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난 뭘까 생각해 보았는데..
어떤 때는 보수적이지만 어떤 때는 진보적이거든요.
헌데 어떤 기준으로 그 가름을 하는가 하는 것이 제 의문이었어요.
미국의 경우에는 사법부의 judge(사사 *^^*)들도 모두 선출되는 제도이기 때문에
어느 당 즉 민주당인지 공화당인지 그 가름을 분명히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대법원에서 내리는 판결들이 이슈에 따라서 신문에 크게 보도 되기도 합니다.
판결문과 또 반대의견을 낸 대법관의 의견과 함께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했는지 보도하지요.
한국에서 말하는 좌파와 우파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도 rightie/ leftie 라는 표현이 있는 거 보면
어느 민족 어느 나라건 가름의 현상은 혹 공통적인 거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그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 듯 합니다.
오랫만에 긴 덧글 쓰게 하신 김동현 님! 감사드립니다.
저도 그랬어요. 아니 벌써~~ 하고 깜짝 놀랬습니다.
놀래는 건 대체적으로 기대하지 않던 일을 만났을 때 생기는 당연한 반응이지만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에 뭐 기분 상하시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
언제부터 한국사회가 그렇게 진보와 보수로 가름을 해왔는지 궁금합니다.
신학하시는 분들이 진보와 보수 이야기 많이들 하시는 건 알고 있긴 하지만..
지난 여름 한국의 신학교에서 교수로 계시는 남편 친구 분이
골프를 함께 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너는 진보냐 보수냐 하는 질문을 했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난 뭘까 생각해 보았는데..
어떤 때는 보수적이지만 어떤 때는 진보적이거든요.
헌데 어떤 기준으로 그 가름을 하는가 하는 것이 제 의문이었어요.
미국의 경우에는 사법부의 judge(사사 *^^*)들도 모두 선출되는 제도이기 때문에
어느 당 즉 민주당인지 공화당인지 그 가름을 분명히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대법원에서 내리는 판결들이 이슈에 따라서 신문에 크게 보도 되기도 합니다.
판결문과 또 반대의견을 낸 대법관의 의견과 함께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했는지 보도하지요.
한국에서 말하는 좌파와 우파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도 rightie/ leftie 라는 표현이 있는 거 보면
어느 민족 어느 나라건 가름의 현상은 혹 공통적인 거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그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 듯 합니다.
오랫만에 긴 덧글 쓰게 하신 김동현 님! 감사드립니다.
좌익과 우익의 기원은 프랑스혁명 당시 국민공회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급진파인 자코뱅당이 좌측에 앉고, 온건파인 지롱드당이 우측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지요.
오른쪽이냐 왼쪽이냐를 나누는 건 항상 있어왔던 것 같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좌파라고 하면 마치 범죄자를 연상시키니까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좌파는 빨갱이(줄여서 좌빨) 내지는 친북이라는 단어와 항상 같이 다니더군요. 수구는 꼴통이라는 단어와 같이 다니나요?
미국에서도 주마다 판사의 선출직 여부는 다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우리나라 법률상 대법관이 되려면 나이 40세, 법조경력 15년이상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제가 그 나이와 경력을 채우려면 몇년 더 있어야겠네요. 앞으로 몇년간 놀라실 일은 없을 겁니다. 안심하셔도 될 듯^^;
급진파인 자코뱅당이 좌측에 앉고, 온건파인 지롱드당이 우측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지요.
오른쪽이냐 왼쪽이냐를 나누는 건 항상 있어왔던 것 같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좌파라고 하면 마치 범죄자를 연상시키니까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좌파는 빨갱이(줄여서 좌빨) 내지는 친북이라는 단어와 항상 같이 다니더군요. 수구는 꼴통이라는 단어와 같이 다니나요?
미국에서도 주마다 판사의 선출직 여부는 다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우리나라 법률상 대법관이 되려면 나이 40세, 법조경력 15년이상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제가 그 나이와 경력을 채우려면 몇년 더 있어야겠네요. 앞으로 몇년간 놀라실 일은 없을 겁니다. 안심하셔도 될 듯^^;
법원의 대법관 취임사뿐 아니라,
교회의 담임목사 취임사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했으면 좋겠네요. 아래는 전문입니다.
존경하는 대법원장님, 대법관님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법관 및 직원 여러분 !
저는 오늘 대법관으로 임명을 받아, 앞으로 6년 간 상고심 법관의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법원을 떠난 것이 벌써 23년 전인 1985년 5월이므로, 이제 구체적 사건의 재판은 저에게 낯설기만 한 일입니다. 제가 비록 민법을 연구하면서 판례를 포함한 '현재 있는 법'의 정확한 인식과 그 비판적 음미를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어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일반적 법리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이론적 시각에서 이루어졌고, 당사자들의 거친 숨결이 느껴지는 개별 사건의 해결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판결쓰기나 기록읽기에 대한 기억은 아득히 멀기만 하고, 그 사이에 바뀐 것도 적지 않습니다. 저는 대법관이라는 막중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두려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또 저는 대학교수의 생활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연구실의 쓰레기통을 비우고 걸레로 바닥을 훔치는 일을 스스로 하는 것이기는 하여도, 자신의 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직하고 자신의 열성을 자신이 좋아서 선택한 작업에 쏟을 수 있는, 말하자면 '자신의 의사로써 규율된 자유'의 생활이었습니다.
대법원장님께서는 제가 대법관으로 제청된 후 처음으로 찾아 뵈었을 때 제게 그러한 자유의 생활이 끝나게 되었다는 것을 "여기 오면 다른 아무것도 못 해"라는 말씀으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재판 이외의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대법원의 과중한 재판업무로 말미암아 다른 일은 그야말로 할 수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외람된 표현입니다마는, 앞으로 저는 제 연구실에 두고 온 저 '자유'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법원장님, 대법관님,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법관 및 직원 여러분 !
그러나 저는 역시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각오로써 대법관의 일에 임하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 법원의 그 자랑스러운 전통 안에 다시 몸담게 된 것이 기쁩니다. 법원 안에 계신 분들에게는 확연하게 느껴지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 법원은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갖춘 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 사이에 제기된 무수히 많은 과제들을 커다란 잘못 없이 처리하여 왔습니다. 올해가 건국 60주년이라들 하는데, 20세기 중반에 식민지상태로부터 벗어난 여러 나라들 중에서 우리나라의 법원만큼 일반적인 객관적 법을 적용하여 적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함으로써 국민생활의 법적 기준을 제시하고 법적 분쟁의 고통을 타당하게 해결하여 온 예는 없다고 자부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저 김병로 선생 이래로 우리 법원은 정치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억제하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과 권익을 보호한다는 확고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이를 실행하여 왔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는 잘못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법원은 항상 '올바른 법'에 대한 목마름으로 사정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하여 잘못을 바로잡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법원은 '자랑스러운 전통'이라는 말을 써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통은 변화하는 현실 안에서 항상 재창조되어야 하며, 옛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서는 이를 지켜갈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 줍니다. 저는 대법관으로서 우리 법원의 전통을 지키고 재창조하는 데 부족하나마 저의 역량과 정성을 모두 기울이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사건 사건마다 그 배후에 놓인 생활관계의 속살을 생생하게 직관할 수 있도록 정신의 탄력을 잃지 말고 상상력과 감수성을 예리하게 연마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법률요건과 법률효과의 틀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제가 존경하는 독일의 법학자 사비니의 말대로, '생활관계에 대한 생생한 직관'이야말로 실무가이든 이론가이든 법률가의 최상의 덕목일 것입니다.
대법원장님, 대법관님,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법관 및 직원 여러분 !
제가 대법관에 제청된 것이 알려지자 많은 기자들이 저에게 "당신은 현재 대법관들의 성향으로 보아서 보수입니까, 아니면 진보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대체로 저는 아직 절차가 많이 남아 있으므로 그러한 물음이 적절한지 모르겠다고 말하여 답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립하기 전에, 보수이든 진보이든 그것이 온전히 서기 위하여는 '문명'의 바탕이 마련되어야 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문명이냐 야만 또는 미개명이냐가 오히려 훨씬 더 큰 문제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문명은 예를 들면 의견이나 입장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벌레를 눌러 잡듯 상대방을 핍박하지 않는 태도, 어떠한 사람이라도 존엄 있는 하나의 인격으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태도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법은 무엇보다도 바로 그러한 개명된 태도를 체현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의미에서는 가장 과격하다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대법원장님, 대법관님,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법관 및 직원 여러분 !
저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대법관의 직무를 시작하면서 기쁨과 불안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새로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매우 많습니다. 여러분께 도움을 청합니다. 여러 모로 모자란 저를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리면서, 대법관 취임의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8. 9. 8.
대법관 양 창 수
교회의 담임목사 취임사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했으면 좋겠네요. 아래는 전문입니다.
존경하는 대법원장님, 대법관님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법관 및 직원 여러분 !
저는 오늘 대법관으로 임명을 받아, 앞으로 6년 간 상고심 법관의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법원을 떠난 것이 벌써 23년 전인 1985년 5월이므로, 이제 구체적 사건의 재판은 저에게 낯설기만 한 일입니다. 제가 비록 민법을 연구하면서 판례를 포함한 '현재 있는 법'의 정확한 인식과 그 비판적 음미를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어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일반적 법리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이론적 시각에서 이루어졌고, 당사자들의 거친 숨결이 느껴지는 개별 사건의 해결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판결쓰기나 기록읽기에 대한 기억은 아득히 멀기만 하고, 그 사이에 바뀐 것도 적지 않습니다. 저는 대법관이라는 막중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두려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또 저는 대학교수의 생활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연구실의 쓰레기통을 비우고 걸레로 바닥을 훔치는 일을 스스로 하는 것이기는 하여도, 자신의 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직하고 자신의 열성을 자신이 좋아서 선택한 작업에 쏟을 수 있는, 말하자면 '자신의 의사로써 규율된 자유'의 생활이었습니다.
대법원장님께서는 제가 대법관으로 제청된 후 처음으로 찾아 뵈었을 때 제게 그러한 자유의 생활이 끝나게 되었다는 것을 "여기 오면 다른 아무것도 못 해"라는 말씀으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재판 이외의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대법원의 과중한 재판업무로 말미암아 다른 일은 그야말로 할 수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외람된 표현입니다마는, 앞으로 저는 제 연구실에 두고 온 저 '자유'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법원장님, 대법관님,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법관 및 직원 여러분 !
그러나 저는 역시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각오로써 대법관의 일에 임하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 법원의 그 자랑스러운 전통 안에 다시 몸담게 된 것이 기쁩니다. 법원 안에 계신 분들에게는 확연하게 느껴지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 법원은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갖춘 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 사이에 제기된 무수히 많은 과제들을 커다란 잘못 없이 처리하여 왔습니다. 올해가 건국 60주년이라들 하는데, 20세기 중반에 식민지상태로부터 벗어난 여러 나라들 중에서 우리나라의 법원만큼 일반적인 객관적 법을 적용하여 적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함으로써 국민생활의 법적 기준을 제시하고 법적 분쟁의 고통을 타당하게 해결하여 온 예는 없다고 자부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저 김병로 선생 이래로 우리 법원은 정치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억제하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과 권익을 보호한다는 확고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이를 실행하여 왔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는 잘못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법원은 항상 '올바른 법'에 대한 목마름으로 사정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하여 잘못을 바로잡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법원은 '자랑스러운 전통'이라는 말을 써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통은 변화하는 현실 안에서 항상 재창조되어야 하며, 옛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서는 이를 지켜갈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 줍니다. 저는 대법관으로서 우리 법원의 전통을 지키고 재창조하는 데 부족하나마 저의 역량과 정성을 모두 기울이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사건 사건마다 그 배후에 놓인 생활관계의 속살을 생생하게 직관할 수 있도록 정신의 탄력을 잃지 말고 상상력과 감수성을 예리하게 연마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법률요건과 법률효과의 틀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제가 존경하는 독일의 법학자 사비니의 말대로, '생활관계에 대한 생생한 직관'이야말로 실무가이든 이론가이든 법률가의 최상의 덕목일 것입니다.
대법원장님, 대법관님,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법관 및 직원 여러분 !
제가 대법관에 제청된 것이 알려지자 많은 기자들이 저에게 "당신은 현재 대법관들의 성향으로 보아서 보수입니까, 아니면 진보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대체로 저는 아직 절차가 많이 남아 있으므로 그러한 물음이 적절한지 모르겠다고 말하여 답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립하기 전에, 보수이든 진보이든 그것이 온전히 서기 위하여는 '문명'의 바탕이 마련되어야 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문명이냐 야만 또는 미개명이냐가 오히려 훨씬 더 큰 문제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문명은 예를 들면 의견이나 입장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벌레를 눌러 잡듯 상대방을 핍박하지 않는 태도, 어떠한 사람이라도 존엄 있는 하나의 인격으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태도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법은 무엇보다도 바로 그러한 개명된 태도를 체현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의미에서는 가장 과격하다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대법원장님, 대법관님,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법관 및 직원 여러분 !
저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대법관의 직무를 시작하면서 기쁨과 불안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새로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매우 많습니다. 여러분께 도움을 청합니다. 여러 모로 모자란 저를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리면서, 대법관 취임의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8. 9. 8.
대법관 양 창 수
제가 이 글을 인용한 이유는, 이런 글이 양대법관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의외이면서도 신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양대법관은 스스로 진보냐, 보수냐에 관한 질문을 회피하였지만, 그분이 살아온 저간의 행적은 현재 이 나라의 잣대로는 지극히 보수적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전두환정권 시절에 현직 판사 신분으로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파견근무를 한 적이 있고(개인의 성향이 반영되지 않았을 리 만무합니다), 12.12.사태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항의로 서울대학생들이 동맹휴업을 결의하였을 때 많은 교수님들이 이에 동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만은 수업을 강행하였지요.
오늘날 열림과 닫힘에 관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 중에 보수적 인사가 있었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이 취임사를 읽는 순간, 보수의 한 축에 얘기가 통할 만한 인사가 들어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 사회가 어떤 균형추를 잡아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양대법관은 민법의 이론으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철옹성을 구축한 분입니다. 민법이란 공평과 형평을 다루는 학문이고 가장 탈정치적인 학문영역이기 때문에 그분의 정치적 성향이 드러난 이론은 없는 편이지요. 그러나 그분이 이론을 펼치면 국내 학계에서는 감히 반박할 논리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되지 않습니다. 가히 천재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까요.
기대라는 것은 꺾이라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진보진영은 이제야 대화가 통하는 보수의 축을 만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보와 보수가 생산적 담론을 만들어 내고 서로의 결점을 보완해 나갈 때 이 사회도 건전한 성장을 이루어내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양대법관은 스스로 진보냐, 보수냐에 관한 질문을 회피하였지만, 그분이 살아온 저간의 행적은 현재 이 나라의 잣대로는 지극히 보수적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전두환정권 시절에 현직 판사 신분으로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파견근무를 한 적이 있고(개인의 성향이 반영되지 않았을 리 만무합니다), 12.12.사태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항의로 서울대학생들이 동맹휴업을 결의하였을 때 많은 교수님들이 이에 동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만은 수업을 강행하였지요.
오늘날 열림과 닫힘에 관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 중에 보수적 인사가 있었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이 취임사를 읽는 순간, 보수의 한 축에 얘기가 통할 만한 인사가 들어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 사회가 어떤 균형추를 잡아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양대법관은 민법의 이론으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철옹성을 구축한 분입니다. 민법이란 공평과 형평을 다루는 학문이고 가장 탈정치적인 학문영역이기 때문에 그분의 정치적 성향이 드러난 이론은 없는 편이지요. 그러나 그분이 이론을 펼치면 국내 학계에서는 감히 반박할 논리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되지 않습니다. 가히 천재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까요.
기대라는 것은 꺾이라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진보진영은 이제야 대화가 통하는 보수의 축을 만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보와 보수가 생산적 담론을 만들어 내고 서로의 결점을 보완해 나갈 때 이 사회도 건전한 성장을 이루어내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근데요.. 솔직히 문명이니 야만이니 하는 것도 사람들의 의도적 구분일 따름이죠.
게다가 문명엔 긍정적 방점이, 야만에는 수치의 방점을 찍는 것 역시 사람들만의 작업이기도 하구요.
좀더 솔직히 보자면, 사람 사회의 문제는 야만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에서 더 많이 생겨나지 않나요?
제가 보기에 문제는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려는, 마땅한 근거와 기준도 없이
이 양자를 우열적 차원에서 자리매김하려는 사람들의 의도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히려 야만은 솔직하지요. 그것을 부정적이라 만든 것은 야만을 이해하지 못하는
몇 몇 사람들의 좁은 식견때문이겠죠.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벌레잡듯이 눌러 버리는 일은 대부분 문명사회에서 벌어지지요.
야만의 사회에서는 필요한 이상의 폭력행사는 자연적으로 제약합니다.
그런데 왜 욕은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 먹어야 하는지..
그런 것을 보면 사람들은 참 이기적이에요. 아니면 참으로 위장술의 천재이든지..
하여 양대법관은 취임사에서 '문명'이라는 거대 담론을 꺼내들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약속체계와 그것을 유지하는 법집행의 공정성에 대한 구체적인 입안과
견해, 그리고 실행 의지를 밝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솔직히 인문학자의 입장에서 보수, 진보, 문명 운운하는 것은
많이 어색한 개념들의 동거처럼 보입니다.
게다가 문명엔 긍정적 방점이, 야만에는 수치의 방점을 찍는 것 역시 사람들만의 작업이기도 하구요.
좀더 솔직히 보자면, 사람 사회의 문제는 야만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에서 더 많이 생겨나지 않나요?
제가 보기에 문제는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려는, 마땅한 근거와 기준도 없이
이 양자를 우열적 차원에서 자리매김하려는 사람들의 의도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히려 야만은 솔직하지요. 그것을 부정적이라 만든 것은 야만을 이해하지 못하는
몇 몇 사람들의 좁은 식견때문이겠죠.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벌레잡듯이 눌러 버리는 일은 대부분 문명사회에서 벌어지지요.
야만의 사회에서는 필요한 이상의 폭력행사는 자연적으로 제약합니다.
그런데 왜 욕은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 먹어야 하는지..
그런 것을 보면 사람들은 참 이기적이에요. 아니면 참으로 위장술의 천재이든지..
하여 양대법관은 취임사에서 '문명'이라는 거대 담론을 꺼내들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약속체계와 그것을 유지하는 법집행의 공정성에 대한 구체적인 입안과
견해, 그리고 실행 의지를 밝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솔직히 인문학자의 입장에서 보수, 진보, 문명 운운하는 것은
많이 어색한 개념들의 동거처럼 보입니다.
참 좋은 글입니다. 저는 법쪽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분의 성품도 잘 모르지만 글은 참 좋고 옳은 말씀 같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 80년대이니까 벌써 30년 전 쯤인가요? --티브문학관에서 본 드라마가 생각나네요. 부정직한 원로 의사와 정직한 젊은 의사를 그린 내용이었던것 같은데 마지막 나래이션이 다음과 같았던것습니다. "법과 의술은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신의 일을 행하는 것이므로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하나님을 믿는 저희 기독교인 모두는 항상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 신중하고 그 존엄성을 존중야 겠지요.
아주 오래전에 -- 80년대이니까 벌써 30년 전 쯤인가요? --티브문학관에서 본 드라마가 생각나네요. 부정직한 원로 의사와 정직한 젊은 의사를 그린 내용이었던것 같은데 마지막 나래이션이 다음과 같았던것습니다. "법과 의술은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신의 일을 행하는 것이므로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하나님을 믿는 저희 기독교인 모두는 항상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 신중하고 그 존엄성을 존중야 겠지요.
누군가의 의견을 자로 재듯이 재본다는것은 썩 옳은 일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정도의 댓글이라면 모르지만......
양창수 교수님이야 워낙 민법의 대가셔서 그의 사회과학적 (진보,보수)담론에 대한 견해를 대법관 취임사에서 하신 말씀정도로 의미를 부여하면되지 이길용 박사님처럼 정색을 하시고 말씀 하신다거나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저 정도의 글이야 이미 학자들사이에서는 이미 주제도 되지 않을만큼 다루어진 내용이고
이 길용 박사님과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것대로 가지게 되는 의미 정도이상은 아닐테니까요
김동현 판사님같은분이 다비아에 계셔서 양교수님의 대법관 취임사를 통해 이 양반의 진보니 보수니하는 끝없는 담론을 슬쩍 비켜서는 영악함을 볼수있어서 재미있습니다
다만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정도의 댓글이라면 모르지만......
양창수 교수님이야 워낙 민법의 대가셔서 그의 사회과학적 (진보,보수)담론에 대한 견해를 대법관 취임사에서 하신 말씀정도로 의미를 부여하면되지 이길용 박사님처럼 정색을 하시고 말씀 하신다거나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저 정도의 글이야 이미 학자들사이에서는 이미 주제도 되지 않을만큼 다루어진 내용이고
이 길용 박사님과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것대로 가지게 되는 의미 정도이상은 아닐테니까요
김동현 판사님같은분이 다비아에 계셔서 양교수님의 대법관 취임사를 통해 이 양반의 진보니 보수니하는 끝없는 담론을 슬쩍 비켜서는 영악함을 볼수있어서 재미있습니다
글쎄요..
이미 엄존하는 진보, 보수의 구도를
야만과 문명이라는 엇갈린 패러다임으로 물타기하는 고도의 심리전으로 밖에 읽혀지지 않습니다.
제가 볼 때는 오히려 저런 유의 태도가 더 문제가 많다는 것이지요.
그것의 기준이 보수든, 진보든
여전히 다른 쪽을 심정적으로 쉽게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계산된 의도가
읽혀진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정치적, 경제적 입장과 관점에 따라 사회는 보수든, 진보든 나뉠 수가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근대 사회의 구성 모습이기도 하구요.
그걸 구태여 가치판단적인 단어로 포장하려는 '의도'가 저는 더 의심스럽다는 말이지요.
차라리 솔직하게 '나는 진보가 싫다', 혹은 '나는 보수가 싫다'가 좋아요.
그리고 그 입장에 기초해서 자신의 논지와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것이
사회적 소통을 원할하게 할 수 있는 길이겠지요.
물론 상호 인정치 않고 단색으로 가려는 사회적 행위는 폭력을 유발하기에
철저히 배격해야 겠지만
단어와 명칭 자체를 피하려고 하는 태도는
모종의 정치적 선택이라고 밖에 저는 읽혀지지 않습니다.
이미 엄존하는 진보, 보수의 구도를
야만과 문명이라는 엇갈린 패러다임으로 물타기하는 고도의 심리전으로 밖에 읽혀지지 않습니다.
제가 볼 때는 오히려 저런 유의 태도가 더 문제가 많다는 것이지요.
그것의 기준이 보수든, 진보든
여전히 다른 쪽을 심정적으로 쉽게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계산된 의도가
읽혀진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정치적, 경제적 입장과 관점에 따라 사회는 보수든, 진보든 나뉠 수가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근대 사회의 구성 모습이기도 하구요.
그걸 구태여 가치판단적인 단어로 포장하려는 '의도'가 저는 더 의심스럽다는 말이지요.
차라리 솔직하게 '나는 진보가 싫다', 혹은 '나는 보수가 싫다'가 좋아요.
그리고 그 입장에 기초해서 자신의 논지와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것이
사회적 소통을 원할하게 할 수 있는 길이겠지요.
물론 상호 인정치 않고 단색으로 가려는 사회적 행위는 폭력을 유발하기에
철저히 배격해야 겠지만
단어와 명칭 자체를 피하려고 하는 태도는
모종의 정치적 선택이라고 밖에 저는 읽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경멸, 분노, 비난에는 불안, 공포가 내포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자신의 안전을 뒤흔들지도 모를 존재에 대한 불안, 공포 말이죠.
거칠게나마 표현하자면
불안, 공포 자체가 아닌 언어를 통해 불러일으켜지는 불안, 공포에 관한 이미지라고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사람이 공감무능력자가 아니라면
그 사람의 살아온, 경험된 역사에서 의식적인 테두리안에서 희미하게 나마 원인을 더듬어 볼 수도 있는
그 무엇이라고 느끼곤 합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느끼곤 하죠.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불안, 그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미지)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면
아주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다고 느끼죠.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백지화시켜야 할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인식은
그것이 자유를 향할 수 있는 통로로 느껴지기 보다는
참으로 두려운 그 무엇으로 느껴질 거라고 느끼거든요.
저 또한 작게 나마 그런 경험이 있고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갖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절대 고독'차원의 그 무엇을
의식 안에서 인식하려 하지 않은 채 도피하려고 애쓰곤 하는 것이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습관이 아닐까 느껴질 때가 있기에.)
이것을 저의 이야기로 풀어보자면
저는 제 안의 폭력을 느낄 때가 있는데
살면서 저는 다른 이의 분노가 실린 말에 분노로 대처할 때가 있고
그럴 때의 저를 가만히 보면
저는 저의 안전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곤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과연 삶에서 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는 할까 더듬어보면...
허무한 결론에 이르게 되지요.그러면서도 안전에 대한 욕구를 놓지 않는 저를 느낄 때가 많다는 것이...)
그리고 저의 경우에는 그 불안,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떤 언어이거나, 언어를 관통하는 사람의 뉘앙스인데
그 언어, 언어를 관통하는 사람의 뉘앙스 자체가 불안, 공포가 아니라
그 언어와 그 뉘앙스가
내 안에 있는 불안과 공포에 관한 기억과 경험들을 불러일으키곤 한다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불안과 공포 자체라기 보다는 이미지에 가까운 그 무엇이라고 느끼곤 하는데요,
더 나아가 그 불안과 공포 이미지라는 것은
나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제가 제 안에서 보고 깨닫고 있다고 해도
살면서 비슷하게 반복되곤 하는 내면적인 문제들을 보면
내 안에 쌓인, 과거의 경험, 지식이라 불리는 그 이미지들로부터 자유,
곧 과거의 습관, 과거의 이미지들에게서 죽음,
그리하여 바로 내 앞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삶, 이
참 쉽지 않는 그 무엇이라고 느끼곤 합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삶을 사는 저는
제 안의 이런 이야기가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통하는 그 무엇이라고 느끼기도 하지요.)
또한
저는 어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그 반대의 개념을 끌어온다면
여전히 같은 차원 위에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느끼곤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과 야만, 이 둘은 같은 차원 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언어 자체에 포함된 정서가 이미 폭력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
이것, 그리고 이것에 반대되는 저것이 있는 하나의 차원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닦아 놓은 관념적 틀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중심에서 폭발하는 그 무엇으로 무언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느끼곤 하는데요,
기독교 신앙으로 생활하는 저에게는 그 무엇이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과 통하는 것으로 느껴지곤 합니다.
(굳이 어떤 틀로 표현하자면 '소유'가 아닌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랑'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분법적 사고구조로 돌아가곤 하는 사회(심리적)구조에 속해있는 '나'이기도 하기에
제가 느끼는 대로 사는 것이 참 쉽지 않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참 쉽지 않다고 느낄 때마다
모두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철저히 혼자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저를 또 보곤 합니다.
제가 너무 다른 이야기를 했나요.
그리고 저의 표현들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 것 같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네요. : )
자신의 안전을 뒤흔들지도 모를 존재에 대한 불안, 공포 말이죠.
거칠게나마 표현하자면
불안, 공포 자체가 아닌 언어를 통해 불러일으켜지는 불안, 공포에 관한 이미지라고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사람이 공감무능력자가 아니라면
그 사람의 살아온, 경험된 역사에서 의식적인 테두리안에서 희미하게 나마 원인을 더듬어 볼 수도 있는
그 무엇이라고 느끼곤 합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느끼곤 하죠.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불안, 그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미지)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면
아주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다고 느끼죠.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백지화시켜야 할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인식은
그것이 자유를 향할 수 있는 통로로 느껴지기 보다는
참으로 두려운 그 무엇으로 느껴질 거라고 느끼거든요.
저 또한 작게 나마 그런 경험이 있고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갖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절대 고독'차원의 그 무엇을
의식 안에서 인식하려 하지 않은 채 도피하려고 애쓰곤 하는 것이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습관이 아닐까 느껴질 때가 있기에.)
이것을 저의 이야기로 풀어보자면
저는 제 안의 폭력을 느낄 때가 있는데
살면서 저는 다른 이의 분노가 실린 말에 분노로 대처할 때가 있고
그럴 때의 저를 가만히 보면
저는 저의 안전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곤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과연 삶에서 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는 할까 더듬어보면...
허무한 결론에 이르게 되지요.그러면서도 안전에 대한 욕구를 놓지 않는 저를 느낄 때가 많다는 것이...)
그리고 저의 경우에는 그 불안,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떤 언어이거나, 언어를 관통하는 사람의 뉘앙스인데
그 언어, 언어를 관통하는 사람의 뉘앙스 자체가 불안, 공포가 아니라
그 언어와 그 뉘앙스가
내 안에 있는 불안과 공포에 관한 기억과 경험들을 불러일으키곤 한다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불안과 공포 자체라기 보다는 이미지에 가까운 그 무엇이라고 느끼곤 하는데요,
더 나아가 그 불안과 공포 이미지라는 것은
나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제가 제 안에서 보고 깨닫고 있다고 해도
살면서 비슷하게 반복되곤 하는 내면적인 문제들을 보면
내 안에 쌓인, 과거의 경험, 지식이라 불리는 그 이미지들로부터 자유,
곧 과거의 습관, 과거의 이미지들에게서 죽음,
그리하여 바로 내 앞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삶, 이
참 쉽지 않는 그 무엇이라고 느끼곤 합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삶을 사는 저는
제 안의 이런 이야기가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통하는 그 무엇이라고 느끼기도 하지요.)
또한
저는 어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그 반대의 개념을 끌어온다면
여전히 같은 차원 위에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느끼곤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과 야만, 이 둘은 같은 차원 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언어 자체에 포함된 정서가 이미 폭력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
이것, 그리고 이것에 반대되는 저것이 있는 하나의 차원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닦아 놓은 관념적 틀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중심에서 폭발하는 그 무엇으로 무언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느끼곤 하는데요,
기독교 신앙으로 생활하는 저에게는 그 무엇이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과 통하는 것으로 느껴지곤 합니다.
(굳이 어떤 틀로 표현하자면 '소유'가 아닌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랑'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분법적 사고구조로 돌아가곤 하는 사회(심리적)구조에 속해있는 '나'이기도 하기에
제가 느끼는 대로 사는 것이 참 쉽지 않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참 쉽지 않다고 느낄 때마다
모두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철저히 혼자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저를 또 보곤 합니다.
제가 너무 다른 이야기를 했나요.
그리고 저의 표현들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 것 같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네요. : )
자기 권력을 벗어나는 솔직함을 양교수님한테 원한다면 이미 양창수 교수님이 아니겠지요
양교수님이야 민법학자로서의 자부심,시류에 편승했던 정치적여력,나름의 사물을 보는 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게 대법관 취임사의 야만과 문명이라는 박사님 말씀대로 엇갈린 패러다임이 나왔지 꼭 어떤의도가 되었든지간에 의도성만으로 대법관 취임사에 저런말을 했겠냐는것입니다
설령 의도적으로 야만이니 문명이니 하는 단어에 집착 했다하더라도 보수가 갖는 자부심보다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진보에 대한 피해의식(한겨레등의 평)에서 나오는 자기방어 수단이었겠지요
다만 양교수님에 대한 평을 제외하고 박사님의 말씀을 들어본다면 늘 그렇듯이 칼로 그은듯이 예리한 글 같습니다
양교수님이야 민법학자로서의 자부심,시류에 편승했던 정치적여력,나름의 사물을 보는 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게 대법관 취임사의 야만과 문명이라는 박사님 말씀대로 엇갈린 패러다임이 나왔지 꼭 어떤의도가 되었든지간에 의도성만으로 대법관 취임사에 저런말을 했겠냐는것입니다
설령 의도적으로 야만이니 문명이니 하는 단어에 집착 했다하더라도 보수가 갖는 자부심보다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진보에 대한 피해의식(한겨레등의 평)에서 나오는 자기방어 수단이었겠지요
다만 양교수님에 대한 평을 제외하고 박사님의 말씀을 들어본다면 늘 그렇듯이 칼로 그은듯이 예리한 글 같습니다
오랜만에 올리신 글로 동현님께서 다비안들의 대화의 장을 넓혀 주신 듯 합니다.
다비아에서 서로의 글들을 나누는 것의 가장 큰 유익이 있다면 때론 이를 통해 서로의
생각의 차이들을 발견하고 신앙을 비롯한 우리의 사유와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점일 듯 싶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길용박사님께서 올리신 생각은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 비난의 글이라기
보다 서로의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는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유익함의 댓글로 보여 집니다. 오히려 다비안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과 다른 관점을 드러내는 글을 마주 했을때 우선 그것을 자신에 대한 경계와 적대의 시선으로 해석하려 드는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화 인문적 전공을 가진 분들께는 이번 양대법관님의 취임사에서 진보와 보수 대신 선택된 ‘문명과 야만’이라는 단어는 분명 거슬리는 마음을 주었을 듯 싶습니다. 선택된 이 단어들이 표면적인 거칠음을 넘어서서 서구중심의 근대성에 기초한 엘리트적 사고방식 속에서 생성된 문화적 맥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또한 이 단어들에 기대어 자행된 서구 중심의 역사적 폭력들도 기억해 보게 되는 군요.
양 대법관이 이를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한편으론 신선해 보일 수도 있는 이분의 취임사가 다른 한편으론 그분의 사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저도 해보게 되더군요. 과연 서구의 엘리트적 사고 체계를 보여주는 듯 한 취임사를 밝히신 양대법관이 법의 공정성이 모든 국민에게 미칠 수 있도록 대법관으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선 좀 더 지켜보고 싶은 조심스런 맘도 듭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법에 대한 무지한 저의 생각을 너머 법조의 전문가이자 그곳의 사정을 잘 아시는 동현님이 양대법관에게 걸어보고 싶은 기대에 저도 기대를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네요.
다비아에서 서로의 글들을 나누는 것의 가장 큰 유익이 있다면 때론 이를 통해 서로의
생각의 차이들을 발견하고 신앙을 비롯한 우리의 사유와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점일 듯 싶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길용박사님께서 올리신 생각은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 비난의 글이라기
보다 서로의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는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유익함의 댓글로 보여 집니다. 오히려 다비안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과 다른 관점을 드러내는 글을 마주 했을때 우선 그것을 자신에 대한 경계와 적대의 시선으로 해석하려 드는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화 인문적 전공을 가진 분들께는 이번 양대법관님의 취임사에서 진보와 보수 대신 선택된 ‘문명과 야만’이라는 단어는 분명 거슬리는 마음을 주었을 듯 싶습니다. 선택된 이 단어들이 표면적인 거칠음을 넘어서서 서구중심의 근대성에 기초한 엘리트적 사고방식 속에서 생성된 문화적 맥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또한 이 단어들에 기대어 자행된 서구 중심의 역사적 폭력들도 기억해 보게 되는 군요.
양 대법관이 이를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한편으론 신선해 보일 수도 있는 이분의 취임사가 다른 한편으론 그분의 사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저도 해보게 되더군요. 과연 서구의 엘리트적 사고 체계를 보여주는 듯 한 취임사를 밝히신 양대법관이 법의 공정성이 모든 국민에게 미칠 수 있도록 대법관으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선 좀 더 지켜보고 싶은 조심스런 맘도 듭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법에 대한 무지한 저의 생각을 너머 법조의 전문가이자 그곳의 사정을 잘 아시는 동현님이 양대법관에게 걸어보고 싶은 기대에 저도 기대를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