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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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놀라운 사연이네요.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사연이라서 부실하지만 번역을 해 봤습니다.
사과를 가진 소녀
1942년 8월 피오트르코우(?) 폴란드.
그날 아침 하늘은 불안스럽게 대기하고 있는 우리처럼 음울했다.
피오드르코우에 있는 유대인 지역의 모든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은 한 광장으로 집결되어졌다.
우리가 이동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아버지는 유대인지역에 만연하게 번지던 발진티푸스로 최근에 돌아가셨다.
나의 가장 큰 공포는 우리 가족이 뿔뿔히 흩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네 나이를 말해서는 안된다"고 맏형인 아이시도르가 속삭였다.
"열일곱살이라고 말해라" 나는 열한살인 내 또래보다도 훨씬 컸기 때문에 형이 말한 대로 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일하기 적합한 노동자로 간주되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 나치친위대병이 군화로 자갈을 차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나를 위아래로 훓어보며 나이를 물었다. 내가 "열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는 내 형들과 젊은 남자들이 서있는 왼쪽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어머니는 여자와 어린애, 환자 그리고 노인들이 있는 오른쪽으로 지시되어졌다.
나는 아이시도르 형에게 물었다. " 왜 그러지?" 형은 아무 대답도 안했다. 나는 어머니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어머니와 같이 있고 싶었다. 어머니는 "안돼."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 여기서 나가거라. 귀찮게 굴지말고. 가서 형들과 같이 있어라."
어머니가 그렇게 엄격하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알았다. 어머니가 나를 보호하려 한다는 것을. 어머니는 나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안 그런척했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어머니를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나와 형들은 가축운반용 화물차에 실려 독일로 옮겨졌다. 수주일 후 어느 날 밤 Buchenwald 의 강제수용소에 도착했고 혼잡한 병영으로 인도 되어졌다. 그 다음날 우리에게는 죄수복과 신분번호가 발부되어졌다.
"나를 더 이상 허먼이라고 부르지 마. 943983이라고 불러." 형에게 말했다.
나는 시체를 핸드크랭크 엘리베이터에 집어넣는 시체소각로에서 일하게 되었다. 나 역시 죽음을 느꼈고
경직된 하나의 번호가 되어갔다. 나와 형은 곧 베를린 근처 Buchenwald의 서브캠프의 하나인 쉴레벤(?)으로 보내졌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됬다. 아들아. 그녀는 부드러우나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천사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는 깨어났다. 꿈이었다. 아름다운 꿈. 그러나 이곳엔 천사가 있을리 없었다. 오직 일과 배고픔과 두려움 뿐.
이삼일 후, 내가 수용소의 가시돋힌 철조망 울타리 주변을 걷고 있었다. 그곳은 감시병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곳이었고 나 혼자였다. 반대쪽 울타리에서 나는 어떤 사람을 발견했다. 불빛을 들고 있는 윤나는 곱슬머리의 어린 소녀였다. 그녀는 자작나무에 반쯤 몸을 숨기고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보지 못했는지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독일어로 가만히 말했다. "너 먹을 것 있니? 그녀는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울타리 가까이로 다가가 폴란드어로 다시 물었다. 그녀가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몹시 수척하고 말랐고 누더기로 발을 감싸고 있었지만 그녀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나는 그녀의 눈에서 생명을 보았다. 그녀는 모직자켓에서 사과한 알을 꺼내 울타리 너머로 던졌다. 나는 그 사과를 움켜쥐고 뛰면서 그녀가 가냘프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일 다시 보자."
나는 매일 같은 시각에 그 울타리의 같은 장소로 나갔다. 그녀는 언제나 거기에 나왔다, 빵덩어리나, 혹은 더 좋은 사과같은 것을 가지고. 우리는 감히 말을 걸거나 머뭇거리지도 못했다. 붙잡히기만 하면 둘다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친절한 농가의 소녀라는 것 정도와 폴란드어를 이해한다는것 외엔. 이름이 무엇인지, 왜 나를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지도.
그렇게 짧은 공급과 이 소녀가 희망이었다. 나에게 빵과 사과로 영양을 공급해주던 울타리 저편의 어린 소녀가.
7개월 후, 나와 형은 석탄차에 끼워 태워져서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Theresienstadt 수용소에 던져졌다. "다시 오지마." 나는 그날 그 소녀에게 말했다."우리는 떠날거야. "
그리고는 병영을 향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과를 가진 소녀에게 안녕이란 말조차 못한 채.
우리는 Theresienstadt에 3개월간 체류했다.
전쟁은 악화되고 연합군의 세력은 다가오지만 내 운명은 여전히 봉쇄된 것처럼 보였다.
1945년 5월 10일 오전 10시에 나는 가스실에서 죽게 예정 되어있었다. 조용한 새벽시간에,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많은 시간동안, 죽음의 고비를 넘으면서도 나는 어찌해서 살아 남았다.
이제 끝이다. 나는 부모님을 생각했다. 최소한 나는 부모님과 곧 재회할 것이다.
그런데, 8시에 동요가 있었다, 큰소리도 들려왔고 사람들이 수용소사이로 난 모든 길을 통과해 달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형들을 뒤쫓아 뛰었다. 러시아군대가 수용소를 해방시켰던 것이다.!
문은 열렸고 모든 사람들은 뛰쳐 나갔다. 나도 형들과 함께 달려나갔다.
놀랍게도 형들은 모두 살아 남았다. 나는 모른다.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는지.
그러나 나는 안다. 사과를 주던 어린 소녀가 그 열쇠를 쥐고 있었다는 것을.
악이 승리하던 곳에서, 한 사람의 선함이 나를 구해주었고,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나의 어머니가 천사를 보내주었고 그 천사는 왔었던 것이다.
마침내, 나는 유대인 자선단체의 후원을 받아 영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다른 소년들과 함께 한 병원에 기거하게 됬고, 거기서 전기기술을 습득했다.
그리고 나서 형 샘이 먼저 가 있는 미국으로 갔다.
거기서 한국전쟁 동안 미군으로 복무했다. 그후 뉴욕으로 돌아와 2년간 있었다.
1957년 8월에 전기수리가게를 냈고 비로소 정착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영국에서부터 알던 시드라는 친구가 말했다.
" 내가 데이트하는 내 여자친구가 폴란드친구를 데리고 온대.우리 같이 만나자."
블라인드 데이트? 말도 안돼, 그런 건 내게 맞지 않아. 그러나 시드는 계속 졸라댔다.
며칠 후 우리는 Bronx로 갔다. 시드의 여자친구와 그녀의 친구 로마를 픽업하기 위해.
나는 하는 수 없이 블라인드 데이트를 승낙했다. 그것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로마는 Bronx에 있는 한 병원의 간호사였는데 친절했고 영리했다.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했는데 굽이치는 갈색 곱슬머리와 눈꼬리가 약간 올라간
엷은 황록색의 재치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넷은 코니섬으로 갔다, 로마는 말을 트기 쉬웠고 함께 있기가 편안했다.
그녀 역시 이 블라인드 데이트를 조심스러워 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모두,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해변의 널판지로 깔린 길을 산책했다.
대서양의 짭잘한 바람을 맞으면서.
그리고 나서 우리는 해안가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시드의 차로 되돌아 왔다. 나와 로마는 뒷좌석에 앉았다. 우리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럽계 유대인이었으므로 우리 사이에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은 많은 얘기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 얘기를 끄집어냈다." 전쟁동안 어디 있었어요?"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수용소에요."
끔찍한 기억이 아직도 살아있는,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손상.
잊으려고 노력해도 결코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가족은 독일의 한 농장에 숨어 지냈어요. 베를린에서 멀지 않은."
그녀가 이어 말했다. " 우리 아버지가 아리안의 증명서류를 가지고 있는 목사를 알고 있었어요."
나는 그녀 역시 얼마나 두려움으로 고통스러웠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변함없는 동료로써
우리는 여기에 살아 남았다. 둘 다 생존자로, 이 새로운 세상에.
"농장 가까이에 수용소가 있었어요."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거기서 한 소년을 만났는데 내가 그애에게 매일 사과를 던져 주곤했죠."
아, 이런 놀라운 우연이라니! 그녀가 어떤 소년을 도왔었다니.
"어떻게 생긴 애였죠?" 내가 물었다.
"키가 크고 마르고 배고픈 아이였어요. 그래서 내가 매일, 6개월동안 도울 수 밖에 없었죠."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믿을수가 없었다. 이럴수가!
" 어느 날 그 소년이 이렇게 말하던가요? Schlieben으로 떠나니 이제 다시 오지 말라고. "
로마가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 그래요. 그 애가 바로 나예요!"
나는 기쁨과 경외감으로, 감격에 넘쳐서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의 천사.
"당신을 떠나 보내지 않겠어요."
차의 뒷좌석에서 나는 프로포즈를 했다. 지체할 수가 없었다.
"미쳤군요!" 로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부모를 만나게 하려고
그 다음주 안식일 성찬에 나를 자기집으로 초대했다.
그러나 내가 알고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확고부동함과 선함이다.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 수개월간 그녀는 울타리로 와서 내게 희망을 주었었다.
지금 나는 그녀를 다시 찾았다. 결코 떠나 보낼 수 없었다.
그날 그녀가 승낙을 했다. 나는 내 말을 지켰다. 결혼 후 50년 동안 두 아이와 세 손주들이 생겼고
나는 한번도 그녀를 떠나 보낸 적이 없다.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허먼 로슨 블라트
이것은 실화이며 구글에서 허먼 로슨 블라트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75세에 바르 미츠바( 유대인 성인식)를 치렀습니다.
이 이야기는 "The Fence"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사연이라서 부실하지만 번역을 해 봤습니다.
사과를 가진 소녀
1942년 8월 피오트르코우(?) 폴란드.
그날 아침 하늘은 불안스럽게 대기하고 있는 우리처럼 음울했다.
피오드르코우에 있는 유대인 지역의 모든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은 한 광장으로 집결되어졌다.
우리가 이동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아버지는 유대인지역에 만연하게 번지던 발진티푸스로 최근에 돌아가셨다.
나의 가장 큰 공포는 우리 가족이 뿔뿔히 흩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네 나이를 말해서는 안된다"고 맏형인 아이시도르가 속삭였다.
"열일곱살이라고 말해라" 나는 열한살인 내 또래보다도 훨씬 컸기 때문에 형이 말한 대로 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일하기 적합한 노동자로 간주되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 나치친위대병이 군화로 자갈을 차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나를 위아래로 훓어보며 나이를 물었다. 내가 "열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는 내 형들과 젊은 남자들이 서있는 왼쪽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어머니는 여자와 어린애, 환자 그리고 노인들이 있는 오른쪽으로 지시되어졌다.
나는 아이시도르 형에게 물었다. " 왜 그러지?" 형은 아무 대답도 안했다. 나는 어머니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어머니와 같이 있고 싶었다. 어머니는 "안돼."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 여기서 나가거라. 귀찮게 굴지말고. 가서 형들과 같이 있어라."
어머니가 그렇게 엄격하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알았다. 어머니가 나를 보호하려 한다는 것을. 어머니는 나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안 그런척했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어머니를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나와 형들은 가축운반용 화물차에 실려 독일로 옮겨졌다. 수주일 후 어느 날 밤 Buchenwald 의 강제수용소에 도착했고 혼잡한 병영으로 인도 되어졌다. 그 다음날 우리에게는 죄수복과 신분번호가 발부되어졌다.
"나를 더 이상 허먼이라고 부르지 마. 943983이라고 불러." 형에게 말했다.
나는 시체를 핸드크랭크 엘리베이터에 집어넣는 시체소각로에서 일하게 되었다. 나 역시 죽음을 느꼈고
경직된 하나의 번호가 되어갔다. 나와 형은 곧 베를린 근처 Buchenwald의 서브캠프의 하나인 쉴레벤(?)으로 보내졌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됬다. 아들아. 그녀는 부드러우나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천사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는 깨어났다. 꿈이었다. 아름다운 꿈. 그러나 이곳엔 천사가 있을리 없었다. 오직 일과 배고픔과 두려움 뿐.
이삼일 후, 내가 수용소의 가시돋힌 철조망 울타리 주변을 걷고 있었다. 그곳은 감시병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곳이었고 나 혼자였다. 반대쪽 울타리에서 나는 어떤 사람을 발견했다. 불빛을 들고 있는 윤나는 곱슬머리의 어린 소녀였다. 그녀는 자작나무에 반쯤 몸을 숨기고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보지 못했는지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독일어로 가만히 말했다. "너 먹을 것 있니? 그녀는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울타리 가까이로 다가가 폴란드어로 다시 물었다. 그녀가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몹시 수척하고 말랐고 누더기로 발을 감싸고 있었지만 그녀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나는 그녀의 눈에서 생명을 보았다. 그녀는 모직자켓에서 사과한 알을 꺼내 울타리 너머로 던졌다. 나는 그 사과를 움켜쥐고 뛰면서 그녀가 가냘프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일 다시 보자."
나는 매일 같은 시각에 그 울타리의 같은 장소로 나갔다. 그녀는 언제나 거기에 나왔다, 빵덩어리나, 혹은 더 좋은 사과같은 것을 가지고. 우리는 감히 말을 걸거나 머뭇거리지도 못했다. 붙잡히기만 하면 둘다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친절한 농가의 소녀라는 것 정도와 폴란드어를 이해한다는것 외엔. 이름이 무엇인지, 왜 나를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지도.
그렇게 짧은 공급과 이 소녀가 희망이었다. 나에게 빵과 사과로 영양을 공급해주던 울타리 저편의 어린 소녀가.
7개월 후, 나와 형은 석탄차에 끼워 태워져서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Theresienstadt 수용소에 던져졌다. "다시 오지마." 나는 그날 그 소녀에게 말했다."우리는 떠날거야. "
그리고는 병영을 향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과를 가진 소녀에게 안녕이란 말조차 못한 채.
우리는 Theresienstadt에 3개월간 체류했다.
전쟁은 악화되고 연합군의 세력은 다가오지만 내 운명은 여전히 봉쇄된 것처럼 보였다.
1945년 5월 10일 오전 10시에 나는 가스실에서 죽게 예정 되어있었다. 조용한 새벽시간에,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많은 시간동안, 죽음의 고비를 넘으면서도 나는 어찌해서 살아 남았다.
이제 끝이다. 나는 부모님을 생각했다. 최소한 나는 부모님과 곧 재회할 것이다.
그런데, 8시에 동요가 있었다, 큰소리도 들려왔고 사람들이 수용소사이로 난 모든 길을 통과해 달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형들을 뒤쫓아 뛰었다. 러시아군대가 수용소를 해방시켰던 것이다.!
문은 열렸고 모든 사람들은 뛰쳐 나갔다. 나도 형들과 함께 달려나갔다.
놀랍게도 형들은 모두 살아 남았다. 나는 모른다.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는지.
그러나 나는 안다. 사과를 주던 어린 소녀가 그 열쇠를 쥐고 있었다는 것을.
악이 승리하던 곳에서, 한 사람의 선함이 나를 구해주었고,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나의 어머니가 천사를 보내주었고 그 천사는 왔었던 것이다.
마침내, 나는 유대인 자선단체의 후원을 받아 영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다른 소년들과 함께 한 병원에 기거하게 됬고, 거기서 전기기술을 습득했다.
그리고 나서 형 샘이 먼저 가 있는 미국으로 갔다.
거기서 한국전쟁 동안 미군으로 복무했다. 그후 뉴욕으로 돌아와 2년간 있었다.
1957년 8월에 전기수리가게를 냈고 비로소 정착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영국에서부터 알던 시드라는 친구가 말했다.
" 내가 데이트하는 내 여자친구가 폴란드친구를 데리고 온대.우리 같이 만나자."
블라인드 데이트? 말도 안돼, 그런 건 내게 맞지 않아. 그러나 시드는 계속 졸라댔다.
며칠 후 우리는 Bronx로 갔다. 시드의 여자친구와 그녀의 친구 로마를 픽업하기 위해.
나는 하는 수 없이 블라인드 데이트를 승낙했다. 그것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로마는 Bronx에 있는 한 병원의 간호사였는데 친절했고 영리했다.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했는데 굽이치는 갈색 곱슬머리와 눈꼬리가 약간 올라간
엷은 황록색의 재치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넷은 코니섬으로 갔다, 로마는 말을 트기 쉬웠고 함께 있기가 편안했다.
그녀 역시 이 블라인드 데이트를 조심스러워 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모두,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해변의 널판지로 깔린 길을 산책했다.
대서양의 짭잘한 바람을 맞으면서.
그리고 나서 우리는 해안가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시드의 차로 되돌아 왔다. 나와 로마는 뒷좌석에 앉았다. 우리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럽계 유대인이었으므로 우리 사이에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은 많은 얘기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 얘기를 끄집어냈다." 전쟁동안 어디 있었어요?"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수용소에요."
끔찍한 기억이 아직도 살아있는,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손상.
잊으려고 노력해도 결코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가족은 독일의 한 농장에 숨어 지냈어요. 베를린에서 멀지 않은."
그녀가 이어 말했다. " 우리 아버지가 아리안의 증명서류를 가지고 있는 목사를 알고 있었어요."
나는 그녀 역시 얼마나 두려움으로 고통스러웠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변함없는 동료로써
우리는 여기에 살아 남았다. 둘 다 생존자로, 이 새로운 세상에.
"농장 가까이에 수용소가 있었어요."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거기서 한 소년을 만났는데 내가 그애에게 매일 사과를 던져 주곤했죠."
아, 이런 놀라운 우연이라니! 그녀가 어떤 소년을 도왔었다니.
"어떻게 생긴 애였죠?" 내가 물었다.
"키가 크고 마르고 배고픈 아이였어요. 그래서 내가 매일, 6개월동안 도울 수 밖에 없었죠."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믿을수가 없었다. 이럴수가!
" 어느 날 그 소년이 이렇게 말하던가요? Schlieben으로 떠나니 이제 다시 오지 말라고. "
로마가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 그래요. 그 애가 바로 나예요!"
나는 기쁨과 경외감으로, 감격에 넘쳐서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의 천사.
"당신을 떠나 보내지 않겠어요."
차의 뒷좌석에서 나는 프로포즈를 했다. 지체할 수가 없었다.
"미쳤군요!" 로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부모를 만나게 하려고
그 다음주 안식일 성찬에 나를 자기집으로 초대했다.
그러나 내가 알고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확고부동함과 선함이다.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 수개월간 그녀는 울타리로 와서 내게 희망을 주었었다.
지금 나는 그녀를 다시 찾았다. 결코 떠나 보낼 수 없었다.
그날 그녀가 승낙을 했다. 나는 내 말을 지켰다. 결혼 후 50년 동안 두 아이와 세 손주들이 생겼고
나는 한번도 그녀를 떠나 보낸 적이 없다.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허먼 로슨 블라트
이것은 실화이며 구글에서 허먼 로슨 블라트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75세에 바르 미츠바( 유대인 성인식)를 치렀습니다.
이 이야기는 "The Fence"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웃겨 님,
수고하신 덕분으로 나도 잘 읽었어요.
첫날처럼 님의 것과 비교하면서요.
이 이야기가 픽션인지 넌픽션인지 아직 감이 오지 않네요.
어쨌든지 내용도 내용이지만
번역자의 마음이 전달되는 것 같아서
더 재미 있었습니다.
모래알 님의 영향을 받아 '옥의 티'를 짚는다면
이중 수동태로 된 문장이 종종 눈에 뜨인다는 겁니다.
<피오드르코우에 있는 유대인 지역의 모든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은 한 광장으로 집결되어졌다.>
집결 '되어' '졌다'를
집결되었다,
또는 모였다로 하는 게 어떨는지요.
유럽 언어들은 수동태가 자주 사용되지만
우리 말을 그렇게 하면 조금 어색하더군요.
가능한 능동태 문장으로 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는지요.
기독교 영성은 수동적이어야 하지만
글은 능동적이어야 한다,
이게 여러 신학책을 번역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아마추어 번역가의 소견이랍니다.
수고.
수고하신 덕분으로 나도 잘 읽었어요.
첫날처럼 님의 것과 비교하면서요.
이 이야기가 픽션인지 넌픽션인지 아직 감이 오지 않네요.
어쨌든지 내용도 내용이지만
번역자의 마음이 전달되는 것 같아서
더 재미 있었습니다.
모래알 님의 영향을 받아 '옥의 티'를 짚는다면
이중 수동태로 된 문장이 종종 눈에 뜨인다는 겁니다.
<피오드르코우에 있는 유대인 지역의 모든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은 한 광장으로 집결되어졌다.>
집결 '되어' '졌다'를
집결되었다,
또는 모였다로 하는 게 어떨는지요.
유럽 언어들은 수동태가 자주 사용되지만
우리 말을 그렇게 하면 조금 어색하더군요.
가능한 능동태 문장으로 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는지요.
기독교 영성은 수동적이어야 하지만
글은 능동적이어야 한다,
이게 여러 신학책을 번역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아마추어 번역가의 소견이랍니다.
수고.
어설픈 번역자(?)의 변명이겠지만, 영어 원 글 자체가 문필가의 글이 아닌 일반인의 생활글이라 엄밀히 말해서는 문법적으로는 깔끔하지 않은 면도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특히 끝 문장도 그랬구요... 중간 중간에 좀 보이구요... 국어 문법을 깔끔하고 정연하게 배운 외국인이 우리가 쓴 글을 볼 때도 그런 느낌이 들겠죠... 문법 장난 아니게 틀려 있을 것 같습니다...
근데 언어 사대주의랄까... 우리는 영어 문장은 완벽할 거라는 선입견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위키피디아를 보아도 오자도 많고, 문맥이 안통하는 문장도 더러 있거든요...
근데 언어 사대주의랄까... 우리는 영어 문장은 완벽할 거라는 선입견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위키피디아를 보아도 오자도 많고, 문맥이 안통하는 문장도 더러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