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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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YTN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꽁지머리를 묶은 한 사람이 귀에 이어폰을 꽂은채 피켓을 들고 있었는데요.
그 피켓에는
'돌발영상 돌려놔라. 구본홍 사장 물러가라' 식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몇시부터 서있었는지 아니 언제까지 서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마치 자신이 그곳에 서 있어야 하는 사람인양 그렇게 피켓을 들고 있었고,
간간히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관심있게 지켜보는 사람은 몇몇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저는 시위 경험이 없어 이렇다 저렇다 얘기할 입장은 되지 않지만
저렇게 서 있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떤 효과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좀 더 큰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설문지라도 돌리며 활동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암튼 저라면 그렇게 아무말 없이 피켓들고 서 있는 시위를 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몇시간동안 힘들게 서있는 노력 대비 이렇다할 효과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이런 저의 생각
이면엔 효과없는 행동은 무의미하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겠지요.
무엇을 선택하는데 있어 행위 이면에 있는 저의 마음을 살펴보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행동들을 좇아 선택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 자체가 의미가 있어 선택하기도 하고,
(이것또한 그것이 의미가 있다는 저의 해석이 있었겠지만요)
또 때로는 저 자신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여 선택하기도 하고,
아무튼 선택과 의미는 항상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지요.
선택에 대한 후회도, 허무함도 결국 의미를 찾을 수 없을때 나타나는 마음 현상일테고요.
그럼 무엇이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겨나지요.
아마 저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필요한 일인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가'
'효과가 있는 행동인가'
이런 몇몇 판단 기준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산에 가서 구덩이를 파고 묻고 파고 묻고 파고 묻고 하는 행동은 의미가 없다고 여겨질
거에요. 하지만
'나의 상체 근육을 키우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묻는 행동의 반복을 통해 땅이 부드러워지면 나중에 나무가 잘 자라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제 밤 꿈속에 나타나 시키셨기 때문에'
이런 사유가 있다면 구덩이 작업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수 있겠네요.
여기서도 보면 의미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든지 실용적인 그 무엇과 연관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저는 특별히 실용적인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는 것을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첫째 이유로는 우리는 너무 제한된 시간속에서 어떤 성과를 드러내 보이며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고,
둘째 이유로는 실용적인 선택이 좀 더 거시적이고 궁극적인 그 무엇과 부딪혀 거시적이고 궁극에 가
까운 선택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그 틀에서 실용적인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눈에 보이는 즉 가시적인 성과가 있는 것만 실용적이다라고 하여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살아가는데 있지 않을까요?
어제 피켓 들고 있는 그 사람은 과연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갑자기 그 피켓을 보고 몇십명이 달려와서
'맞습니다. 당신을 지지합니다'라고 외치며 박수를 쳐주기를 바랬을까요?
글쎄요. 그런 기대는 하지 못했겠지요.
하지만, 지나가는 시선이라도 좋으니 YTN사태에 공감대를 가지는 사람이
늘었으면 좋겠다 정도는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이렇게 다비아에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더 놀랐을 테고요.
결국 그 사람도 의미있는 행동을 한 것인데 그 이유는 비록 가시적이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어쩌면 더 파급효과가 큰 실용성을 기대했을런지도 모르겠네요.
하나님 또한 보이지 않는 현실성인데.
단기적 성과만 기대하는 마음이,
육체에 귀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만 기대하는 마음이
가시적인 현상보다 더 리얼한 현실성을 몰아내고 있는 건 아닌 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꽁지머리를 묶은 한 사람이 귀에 이어폰을 꽂은채 피켓을 들고 있었는데요.
그 피켓에는
'돌발영상 돌려놔라. 구본홍 사장 물러가라' 식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몇시부터 서있었는지 아니 언제까지 서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마치 자신이 그곳에 서 있어야 하는 사람인양 그렇게 피켓을 들고 있었고,
간간히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관심있게 지켜보는 사람은 몇몇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저는 시위 경험이 없어 이렇다 저렇다 얘기할 입장은 되지 않지만
저렇게 서 있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떤 효과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좀 더 큰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설문지라도 돌리며 활동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암튼 저라면 그렇게 아무말 없이 피켓들고 서 있는 시위를 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몇시간동안 힘들게 서있는 노력 대비 이렇다할 효과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이런 저의 생각
이면엔 효과없는 행동은 무의미하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겠지요.
무엇을 선택하는데 있어 행위 이면에 있는 저의 마음을 살펴보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행동들을 좇아 선택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 자체가 의미가 있어 선택하기도 하고,
(이것또한 그것이 의미가 있다는 저의 해석이 있었겠지만요)
또 때로는 저 자신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여 선택하기도 하고,
아무튼 선택과 의미는 항상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지요.
선택에 대한 후회도, 허무함도 결국 의미를 찾을 수 없을때 나타나는 마음 현상일테고요.
그럼 무엇이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겨나지요.
아마 저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필요한 일인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가'
'효과가 있는 행동인가'
이런 몇몇 판단 기준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산에 가서 구덩이를 파고 묻고 파고 묻고 파고 묻고 하는 행동은 의미가 없다고 여겨질
거에요. 하지만
'나의 상체 근육을 키우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묻는 행동의 반복을 통해 땅이 부드러워지면 나중에 나무가 잘 자라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제 밤 꿈속에 나타나 시키셨기 때문에'
이런 사유가 있다면 구덩이 작업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수 있겠네요.
여기서도 보면 의미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든지 실용적인 그 무엇과 연관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저는 특별히 실용적인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는 것을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첫째 이유로는 우리는 너무 제한된 시간속에서 어떤 성과를 드러내 보이며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고,
둘째 이유로는 실용적인 선택이 좀 더 거시적이고 궁극적인 그 무엇과 부딪혀 거시적이고 궁극에 가
까운 선택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그 틀에서 실용적인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눈에 보이는 즉 가시적인 성과가 있는 것만 실용적이다라고 하여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살아가는데 있지 않을까요?
어제 피켓 들고 있는 그 사람은 과연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갑자기 그 피켓을 보고 몇십명이 달려와서
'맞습니다. 당신을 지지합니다'라고 외치며 박수를 쳐주기를 바랬을까요?
글쎄요. 그런 기대는 하지 못했겠지요.
하지만, 지나가는 시선이라도 좋으니 YTN사태에 공감대를 가지는 사람이
늘었으면 좋겠다 정도는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이렇게 다비아에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더 놀랐을 테고요.
결국 그 사람도 의미있는 행동을 한 것인데 그 이유는 비록 가시적이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어쩌면 더 파급효과가 큰 실용성을 기대했을런지도 모르겠네요.
하나님 또한 보이지 않는 현실성인데.
단기적 성과만 기대하는 마음이,
육체에 귀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만 기대하는 마음이
가시적인 현상보다 더 리얼한 현실성을 몰아내고 있는 건 아닌 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역사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실존적인 신앙에 빠지는 것,
자기집중, 자기인식에 대한 관심이 지나친 것,
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인 신앙보다는 개인적인 신앙에,
개인의 성화에만 유독 관심을 보이는 이유들이,
결국 신앙적 행위가 '나'에게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
나에게 도움이 되는 신앙만이 의미가 있다라는 생각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성경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보다 내가 얼마나 잘 믿고 있는지가 나에게 더
보탬이 되고 나중에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잘 해결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는 생각.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 고정되어 계신 분같고,
그렇기에 이제 해야 할 일은 확정된 그 분을 어떻게든지 좀 더 많이 인식해서 내것으로
삼자는 생각.
사회 문제에 대해 깊이 관여하여 노력하면 실질적으로 나에게 남는 것이 없어 보이지만
개인의 성화에 골몰하면 나중에 유혹이 있어도 더 잘 이겨낼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좀 더 가시적인 그 무엇으로 나타내 보일 수 있다는 생각.
그러고보면 실용적인 것, 나에게 보탬이 되는 것에만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부정적인 경우도 많을 것 같네요.
어려운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