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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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질문과 대답 게시판에서 피스님께서 올리신 원글을 읽고는, 원글에 대한 답글을 달아야 할텐데, 댓글을 보고 느끼는 점이 있어서 댓글을 달다 보니 영 삼천포로 빠진 거 같아요...
보통 사랑을 이래 저래 나누던데... 에로스 필로스 아가페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등등등으로... 그런데 이렇게 할 경우엔 사랑의 본질을 호도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어떤 신심 깊은 분이랑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스님이 자기 일을 하면서, 그 일을 통한 소득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잘 키우는 모습이 너무 진솔하게 와 닿아서 가슴이 찡하길래, 그 스님을 통해서 참 사랑을 느꼈다고 했더니,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은 그 스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그 건 인간에 대한 연민일 수는 있지만 사랑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그 스님은 하나님께 잇닿아 있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어쩌면 그 분은 평생 사랑을 배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분에게는 사랑에 대한 관념만 가득하고, 사랑의 실제는 질식되고 사라져버리는 거죠... 어쩌면 자기도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게 사랑인지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고...
요한 1서를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른다." 등등등의 구절들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사랑" 사이에 선후를 두고 이야기하는 분들은 동의하지 않으시겠지만, 요한 1서를 보면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바로 사랑이신, 하나님과 사랑 사이에 애초에 선후와 우열이 없다는 느낌이 많이 들거든요...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사랑이니 인간의 사랑이니 나누어진다느니 어떠느니 보다는...
진짜 사랑이냐, 아니면 사랑을 흉내낸 이미테이션일 뿐이냐 두 가지로 나뉜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사랑이냐, 사랑이 아니냐...
물론 인간의 약함과 한계로 그 사랑이 완전하지 못하거나 영원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그 것이 슬플 뿐이죠...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랑의 근원인 하나님께 영원히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거겠구요...
자식 새끼 키우면서, 그냥 마냥 귀엽고 좋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느 순간 문득 이 아이의 존재 앞에서 엄숙히 '내가 이 놈을 위해서 나를 버릴 수도 있겠다' 는 생각이 들 때, 정말 이런 것이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내 자식 새끼만 끼고 설치는 것은 이도 저도 아니겠지만요...
보통 사랑을 이래 저래 나누던데... 에로스 필로스 아가페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등등등으로... 그런데 이렇게 할 경우엔 사랑의 본질을 호도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어떤 신심 깊은 분이랑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스님이 자기 일을 하면서, 그 일을 통한 소득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잘 키우는 모습이 너무 진솔하게 와 닿아서 가슴이 찡하길래, 그 스님을 통해서 참 사랑을 느꼈다고 했더니,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은 그 스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그 건 인간에 대한 연민일 수는 있지만 사랑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그 스님은 하나님께 잇닿아 있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어쩌면 그 분은 평생 사랑을 배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분에게는 사랑에 대한 관념만 가득하고, 사랑의 실제는 질식되고 사라져버리는 거죠... 어쩌면 자기도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게 사랑인지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고...
요한 1서를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른다." 등등등의 구절들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사랑" 사이에 선후를 두고 이야기하는 분들은 동의하지 않으시겠지만, 요한 1서를 보면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바로 사랑이신, 하나님과 사랑 사이에 애초에 선후와 우열이 없다는 느낌이 많이 들거든요...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사랑이니 인간의 사랑이니 나누어진다느니 어떠느니 보다는...
진짜 사랑이냐, 아니면 사랑을 흉내낸 이미테이션일 뿐이냐 두 가지로 나뉜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사랑이냐, 사랑이 아니냐...
물론 인간의 약함과 한계로 그 사랑이 완전하지 못하거나 영원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그 것이 슬플 뿐이죠...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랑의 근원인 하나님께 영원히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거겠구요...
자식 새끼 키우면서, 그냥 마냥 귀엽고 좋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느 순간 문득 이 아이의 존재 앞에서 엄숙히 '내가 이 놈을 위해서 나를 버릴 수도 있겠다' 는 생각이 들 때, 정말 이런 것이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내 자식 새끼만 끼고 설치는 것은 이도 저도 아니겠지만요...
시드니 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백번 공감하구요...
원론적으로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 맞는 말 중에 맞는 말이지만...
제가 짚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에서는 원론적인 사랑만 있지, 사랑의 실제가 많이 질식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것... 어찌보면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꼬아서 이야기할 것도 아니구요...
자전거 타는 법 백날 책으로 공부하고, 이론적으로 빠삭하게 알아도 자전거 안타보면 못타는 건데, 어떤 사람은 자전가 타는 법 공부한 적 없어도 몇 번 페달 밟다 보면 자전거가 나가거든요...
영어공부 토익에, 토플에, 그라마에 아무리 열심히해서 이론 무장해도 외국인 앞에 서면 한 마디 못하고, 글 하나 제대로 못 읽어내는데, 제가 아는 한 사람은 그런 거 제대로 해 본 적도 없는데 외국인이랑 말도 그런대로 하고, 리더스 다이제스트도 애독하고 그런다는 거 아닙니까...
사랑의 실제도 그런 거 아닌가 하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원론적으로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 맞는 말 중에 맞는 말이지만...
제가 짚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에서는 원론적인 사랑만 있지, 사랑의 실제가 많이 질식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것... 어찌보면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꼬아서 이야기할 것도 아니구요...
자전거 타는 법 백날 책으로 공부하고, 이론적으로 빠삭하게 알아도 자전거 안타보면 못타는 건데, 어떤 사람은 자전가 타는 법 공부한 적 없어도 몇 번 페달 밟다 보면 자전거가 나가거든요...
영어공부 토익에, 토플에, 그라마에 아무리 열심히해서 이론 무장해도 외국인 앞에 서면 한 마디 못하고, 글 하나 제대로 못 읽어내는데, 제가 아는 한 사람은 그런 거 제대로 해 본 적도 없는데 외국인이랑 말도 그런대로 하고, 리더스 다이제스트도 애독하고 그런다는 거 아닙니까...
사랑의 실제도 그런 거 아닌가 하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질답방 고수님들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예수의 '사랑 윤리'는 기독인에게 블랙홀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전이해 없이
단지 '실천윤리'일 경우 에 해당하겠지요
또한, 사랑은 '값싼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만이 그것을 실천한 유일한 한 분이니
온전히 예수의 것으로 국한시켜
'의'가 전가 되듯 사랑의 전가를 쉽게 기대 할때 그렇습니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우리에게 불가능하고
사랑은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아이러니 앞에
'예수의 사랑 요청'이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예수의 윤리적 훈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라는 지평앞에 해석 되어야 한다" 는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말이
"예수의 사랑 윤리는 신적인 현실성"(mr.판)이라는 표현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참으로 부담스러워 피하고 싶은 '사랑'...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지평앞에선
'부담스러움'이 녹아지겠지요!
예수의 '사랑 윤리'는 기독인에게 블랙홀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전이해 없이
단지 '실천윤리'일 경우 에 해당하겠지요
또한, 사랑은 '값싼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만이 그것을 실천한 유일한 한 분이니
온전히 예수의 것으로 국한시켜
'의'가 전가 되듯 사랑의 전가를 쉽게 기대 할때 그렇습니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우리에게 불가능하고
사랑은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아이러니 앞에
'예수의 사랑 요청'이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예수의 윤리적 훈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라는 지평앞에 해석 되어야 한다" 는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말이
"예수의 사랑 윤리는 신적인 현실성"(mr.판)이라는 표현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참으로 부담스러워 피하고 싶은 '사랑'...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지평앞에선
'부담스러움'이 녹아지겠지요!
저는 이 이슈가 기독교의 본질, 즉 복음의 능력과 관계된다고 봅니다.
자세한 것은 정목사님의 8월31일자 설교 '율법과 사랑'에 너무나 잘 나와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솔직하고, 심각하게 보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걸렸던게.
율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신다는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 "마음만 먹어도 간음이다"라고
오히려 더 지키기 어려운, 사실 실현 불가능한 계명을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짐을 맡아주시고, 멍에를
벗겨 주신다는 분이, 오히려 100배도 더 무거운 짐을 얹어 주시는게, 도통 이해되지 않았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하고
싶고, 율법대로 살고 싶은 '진심'은 있을 지언정, 그 진심을 지켜낼 '능력'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것은
바울도 베드로도 모두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으면 복음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가능케 하여줍니다. 저는 이것이
신약 곳곳에 증거되어 있고, 이것이 복음의 진수라고 생각합니다.(로마서 6장)
더 자세히 얘기하고 싶지만, 그러다보면 고구마가 줄줄이 따라 나오게되므로, 여기서 그치겠습니다.